눈을 뜬 장소에서 멀어져야 한다.
본능이 속삭이는 대로 산에서 내려가는 소녀의 발걸음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지만, 소녀가 산에서 내려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뿐사뿐.
소녀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울창한 나뭇가지는 생기를 잃고 툭툭 나가 떨어졌고, 동물과 몬스터는 숨을 죽이고 도망치기 바빴다.
그러니 소녀의 앞을 막을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험난한 지형밖에 없었는데, 그마저도 소녀의 걸음을 멈출 순 없었다.
타박.
소녀가 커다란 바위 끝에 섰다.
그저 발걸음이 닿는 대로 걷다 보니 만들어진 결과일 뿐, 소녀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그건 그거고-
소녀가 올라가 있는 바위의 크기는 상당히 커서, 과장을 조금 보태서 암벽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다 큰 성인이라 해도 그 정도 높이의 암벽에서 뛰어내린다면 부상을 피하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성인보다 훨씬 작은 몸집의 소녀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기에 보통 사람이라면 우회할 길을 찾거나, 정 찾지 못한다면 암벽 중간중간에 있는 틈을 디디며 조심스럽게 내려갔을 테지만.
스윽-
소녀는 여기까지 왔을 때와 같이 평범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마치 제 앞에 평탄한 평지라도 펼쳐져 있다는 듯이.
만약 누군가가 옆에서 그 모습을 봤다면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벌어질 끔찍한 참상을 피해 눈을 가리거나, 소녀를 구하기 위해 달려갔을 것이다.
그리고 곧, 자신이 한 행동이 아무 의미도 없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여상스레 내디딘 소녀의 발 아래로 검은 안개가 뭉쳤다.
탁.
아까는 소녀의 팔을 아무렇지 않게 통과시키던 안개가, 지금은 소녀를 단단하게 떠받치고 있었다.
그런 결과를 예상이라도 한 듯 소녀는 놀란 기색 하나 없이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뎌, 손쉽게 암벽에서 내려왔다.
그 후로도 몇 그루의 나무를 더 지나친 소녀는 이윽고 탁 트인 평야를 마주쳤다.
“…?”
평야에는 거대한 빗금이 새겨져 있었다.
도화지에 붓으로 그은 것처럼 반듯하고 선명하게 새겨진 빗금에 호기심을 느낀 소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소녀는 빗금이 더 자세하게 보였다.
멀리서 볼 때는 선처럼 보였던 그것의 정체는 실은 땅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생긴 틈이 그렇게 보인 것이었다.
자칫 발을 헛디뎌 빠진다면 빠져나오기 쉽지 않아 보이는 깊은 틈 안은 까맣게 탄 잿더미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
벽에서 빠져나온 이후 한 번도 멈추지 않았던 소녀의 발걸음이 처음으로 멈췄다.
‘──────! ───…!’
‘─? ───.’
“….”
머릿속을 간지럽히는 듯한 느낌에 소녀가 얼굴을 찌푸렸다.
…답답해.
귓가에 들리는 어렴풋한 목소리의 정체는 무엇인지.
그 목소리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건지.
소녀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지만, 한참 동안 틈 앞에서 떠나지 못한 채로 주위를 서성였다.
그런 소녀가 다시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머릿속에서 울리던 목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도 몇 분의 시간이 더 흐른 후였다.
목소리가 완전히 멈추자 소녀를 괴롭히던 간지러움도 멈췄다.
“…아쉬워.”
흠칫!
처음으로 소녀의 입에서 여린 미성이 흘러나왔다.
저도 모르게 나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소녀가 입을 가렸다.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소녀의 행동은 아이다운 순수한 면모가 엿보여서-
소녀에게서 뻗어 나오는 검은 안개만 아니었다면 그 모습을 본 사람은 누구든 훈훈한 미소를 짓는 걸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 아?”
마침내 자신을 놀라게 한 목소리가 자기가 낸 소리라는 걸 깨달은 소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 입에서 목소리가 나오는 게 신기한 건지, 말을 처음 배운 아기가 그러하듯 소녀는 연신 언어의 형태를 이루지 못한 단순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렇게 소녀가 자신의 목소리로 장난치고 있을 때였다.
아무도 없던 평야에 두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틈을 향해 다가온 두 명의 남자는 아까 소녀가 그랬던 것처럼 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소녀가 했던 행동과는 명백한 차이가 있었으니.
소녀의 행동에서는 순수한 호기심만이 묻어 나왔지만, 부리부리한 눈으로 잿더미를 살피는 남자들의 행동은 그들에게 모종의 목적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소녀와 남자들 중 가장 먼저 상대를 발견한 것은 남자들이었다.
사람이 근처에 온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녀는 계속 장난을 치고 있었고, 바람에 실린 여린 목소리가 검을 든 남자에게 닿았다.
남자는 문득 허리를 폈다가, 꽤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소녀를 발견했다.
“뭐야. 저기 누가 있는데?”
“사람 처음 보냐? 쓸데없는 소리 할 시간 있으면 쓸만한 거 있나 찾아보기나 해. 갑옷 조각 하나라도 건지면 떼돈 벌 수 있다니까?”
“다 불탔는데 그게 남아있겠냐? 그리고 그냥 사람이었으면 내가 이런 말 안 했지.”
“철 녹는점이 얼마나 높은데 남아 있을 수도 있지. 지도 떼돈 벌 수 있다는 말 듣자마자 바로 뛰어왔으면서.”
“내가 이런 일인 줄 알았냐? 아, 빨리 보기나 하라고!”
“하 씨…. 호들갑 오지게 떠네. 봤는데 별거 없기만 해 봐. 단톡에 네 흑역사를 뿌려버릴 테니…까…?”
친구의 재촉에 마지못해 고개를 돌린 다른 남자의 얼굴이 찌푸려졌다가, 이내 놀란 빛을 머금었다.
자신이 제대로 보고 있는 게 맞는 건지.
눈을 몇 번이나 감았다 뜨고, 손으로 비비기도 해본 남자는 환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카나리아 아니야? 락시아에 있는 거 아니었어?”
“코스프레인가?”
“코스프레?”
친구의 말에 남자는 ‘그럴 수도 있나…?’라고 중얼거리며 소녀를 봤다가, 고개를 저으며 그 말을 부정했다.
남자도 코스프레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잘 아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남자라고 해도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머리카락과 눈 색까진 어찌어찌 비슷하게 맞출 수 있다고 쳐도, 얼굴과 체구까지 완벽하게 흉내 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 아닌가.
심지어 그가 아는 ‘카나리아’라는 NPC의 외모는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외모도 아니었다.
그렇게 흔한 외모였으면 플레이어 사이에서 유명 인사가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저게 코스프레면, 코스프레가 아니라 변신이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니냐?”
“원래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고 하잖아.”
“갑자기 뭔 개소리야.”
헛소리하는 친구의 머리를 후려친 남자가 소녀에게 걸어갔다.
“아오…. 새끼, 칠 거면 좀 살살 칠 것이지. 체력 뭉텅이로 까였네.”
머리를 부여잡고 투덜거리는 친구도 그의 뒤를 따랐다.
거리가 가까워지고, 소녀의 모습이 선명해지자 앞서 걷던 남자는 확신했다.
저 앞에 있는 소녀는 틀림없이 그가 아는 NPC가 분명하다.
…비록 뭔가 묘한 느낌이 드는 데다가, 어제까지 락시아에 있었던 이가 어떻게… 무슨 이유로 이곳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남자의 뒤를 따라오던 친구도 그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놀란 눈치를 보였다.
“뭐야. 진짜네?”
“…? 넌 놀라면 안 되는 거 아니냐?”
먼저 보라고 한 게 누군데.
그러자 친구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야, 너는 카나리아 본 적 있냐?”
“지금 보고 있잖아.”
“아니, 내가 지금을 말하는 거겠냐? 알면서 그러는 거 진짜 개 때리고 싶네.”
“꼬우면 함 뜨든가. 골드빵 뜨쉴?”
“….”
친구의 입이 다물어졌다.
자존심에 금이 갔다…!
그러나 금이 간 자존심은 다시 붙이면 그만이지만, 잃어버린 금화는 돌아오지 않는다.
실력 차이를 잘 알고 있는 친구는 속으로 욕을 삼켰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흠, 하고 숨을 돌렸다.
“뭐… 직접 본 적은 없긴 하지.”
방송이나 사진으로는 많이 봤지만.
그렇기 때문에, 남자도 그의 앞에 유명한 NPC가 있다는 게 신기했다.
“야, 야. 근데 뭔가 좀 이상하지 않냐? 인터넷에서 보던 거랑 다른데.”
“연예인들 실제로 본 사람들이 그런 말 많이 하던데.”
“아니, 정말로 다르지 않아? 정신을 빼놓고 있는 느낌인데.”
“흠… 그런가?”
남자는 다시 한번 소녀를 찬찬히 살폈다.
그리고, 그는 왜 친구가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카나리아 특유의 날카롭게 날이 선 분위기와 딱딱하게 굳은 얼굴 대신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어린아이의 모습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어디 그것뿐인가?
그들이 아는 소녀라면 한참 전에 접근을 눈치채고 공격하거나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을 테지만,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그들에겐 시선 한 터럭 주지 않고 있었다.
쿡쿡.
열심히 차이점을 떠올리던 남자는 자신을 건드리는 손길을 느끼고 상념에서 깨어났다.
“야… 우리가 한 번 잡아볼까?”
“…뭐? 뭘 잡아?”
“카나리아 말이야.”
“너 미쳤냐? 뭐 잘못 먹었어?”
말도 안 되는 소리.
남자와 친구의 레벨은 이제 겨우 30을 넘겼다.
그들보다 훨씬 높은 레벨에,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이 떼로 달려들었는데도 토벌에 실패했는데, 겨우 두 명으로 토벌하는 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친구는 얼굴을 와락 구기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남자를 살살 꼬드겼다.
“봐봐. 그 승천 의식인가 뭔가 하는 것에 이상이 생겨서 저렇게 된 거 같은데,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지금이라면 우리 둘이서 잡을 수 있지 않을까?”
“개소….”
개소리, 라고 말하려고 했던 남자가 소녀를 보고 멈칫했다.
…일리가 있다.
지켜줄 일행도 없고, 정신도 멀쩡한 것 같지 않으며, 최소한의 무장도 없다.
기습하기엔 정말 최적인 상황.
적어도, 지금만큼 좋은 기회가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이란 점은 확실했다.
“퍼킬 따겠다고 달려든 파티가 수십 갠데 한 파티도 성공 못 했잖아. 우리가 성공하면 완전 대형 사고 치는 거 아니냐? 인터뷰 요청도 엄청 들어오고, 렉카들도 막 퍼 나르고….”
친구의 말이 맞았다.
비록 멀쩡한 상태에서 잡은 게 아니라 영광은 덜하겠지만, 그들이 지금껏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던 관심을 받게 될 것이다.
남자는 게이머다.
대회에 나가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프로게이머나, 처음으로 보스 몬스터의 공략에 성공하여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람들을 동경하며 자기도 그들과 같은 자리에 서는 것을 꿈꿨다.
비록 일찍이 재능의 벽을 깨닫고 즐겜을 추구하게 되었지만, 끝내 지우지 못한 꿈의 한 조각이 그의 마음속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 해보자.”
어차피 게임.
죽어봤자 다시 태어나면 그만 아니야?
남자가 검을 빼 들었다.
…무방비하게 장난을 치고 있는 소녀를 공격한다는 것에 순간적으로 죄책감이 들었으나, 비대하게 부풀어 오른 명예욕에 짓눌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훗, 그래야 내 친구지.”
“친구비나 내고 말해라. 벌써 세 달이나 연체된 거 아냐?”
그들은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녹화 기능을 켰다.
그냥 말하면 당연히 믿어주지 않을 테니 녹화한 영상을 토벌의 증거로 제출할 셈이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그들은 호기롭게 소녀에게 달려들었다.
타다다닥!
“?”
달음박질하는 소리를 들은 소녀가 고개를 돌려 그들을 직시했다.
그러나, 이미 그들과 소녀의 거리는 좁혀졌다.
이대로 세 발짝만 더 접근해서 검을 휘두르면 분홍색 소녀는 피를 흘리며 쓰러지리라.
어린 소녀를 죽인다는 건 조금 마음에 걸리지만, 어차피 게임 아닌가.
설령 소녀를 좋아하던 이들에게 욕을 먹는다 해도, 남자가 얻게 될 명예와 관심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하리라.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으며, 남자는 힘차게 땅을 박찼다….
후두두두둑-
“…어?”
근데, 왜 앞으로 안 가지지?
의아함을 느낀 남자가 고개를 숙이려 했지만, 그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멍청한 얼굴로 눈을 굴리던 그는 뒤늦게 자신이 땅에 엎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털썩.
남자의 눈에 검은 액체를 쏟아내며 쓰러지는 친구의 모습이 비치고.
암전되는 시야 속, 익숙한 죽음의 메시지가 그를 반겼다.
“…?”
멋대로 달려들었다가 검은 안개에 먹혀 사라진 남자들.
소녀는 남자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게 신기한 듯 그들이 있던 자리를 빤히 바라보다가, 금세 흥미를 잃고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