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을 오롯이 담은 일격.
에릭의 일격은 카나가 두르고 있던 두터운 마기를 뚫고 카나에게 닿았다.
‘…다시 할 수 있을까.’
아니, 불가능하다.
에릭은 고개를 저었다.
닿아야 한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달려들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닿아 있었다.
어떤 식으로 검술을 펼쳤고, 어떻게 카나에게 닿을 수 있었는지.
그것은 일격을 펼친 에릭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하핫!”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우연에 우연이 거듭된 기적이라고 해도, 한 번 닿은 이상 두 번 닿지 못할 것도 없다.
자신의 한계가 이걸로 끝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것이야말로 가장 큰 수확이었다.
물론 그 대가는 만만치 않았지만.
“헉… 허억… 웃을, 힘 있으면…! 내려와서, 뛰시면, 헉… 안 됩니까?!”
“미안. 힘이 없네.”
“아오…!”
첫 번째 대가는, 무아지경에 빠져 모든 힘을 쏟아부은 바람에 하나 까딱할 힘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에릭도 이렇게 될 건 예상하지 못해서 이제 끝이구나 생각하고 있었지만, 에릭의 상태를 눈치챈 부하가 그를 업고 도망친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촤악!
“으와아악! 단장이 미쳤다!”
“…악! 귀에 대고 소리 지르지 마십쇼! 허억….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긴 개뿔, 아주 힘이, 헉, 넘치시는구만!”
“어어? 이 자식이 속고만 살았나! 여기, 이 팔을 보고도 힘이 넘친다는 말이 나와?”
“아오, 오크 다리 치우십쇼. 앞이 안 보이지 않습니까!”
“뭐? 오크 다리? 오크 다리이이?!”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빨리 저거나 어떻게 좀 해보라고요! 우왁!”
섬찟함을 느낀 남자가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다.
달리는 도중에 급하게 방향을 바꾼 탓에 넘어질 뻔했지만, 남자는 용케 균형을 잡는 데 성공했다.
결과만 말하면 남자의 선택은 옳은 선택이었다.
카가가가각!
검은 마기가 방금까지 남자가 있던 자리를 휩쓸었다.
들쭉날쭉 새카맣게 자국이 남은 땅에서 마기의 잔흔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남자는 죽음을 피했다는 것에 안심할 새도 없이 뒤에서부터 날아오는 공격을 피하기 위해 펄쩍펄쩍 뛰었다.
먼저 공격하지 않고, 공격을 받아도 소극적으로 대응하던 카나는 에릭의 검에 상처를 입은 순간 태도가 급변했다.
죽은 눈으로 마기를 쏟아내는 카나를 피해 도망가는 것.
이것이 에릭이 치르게 된 두 번째 대가였다.
사실 대가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 유인하겠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지만.
나무 수십 개를 두 동강 내고도 기세가 죽지 않는 마기를 보면 원하는 바를 이뤘다는 성취감 따위는 전혀 들지 않았다.
힐끔.
“흠.”
부하의 등에 업힌 에릭이 뒤를 돌아보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카나가 걷는 속도는 이전과 별반 차이가 없어서 그들이 전속력으로 도망치는 속도를 따라잡진 못했다.
남자가 공격을 피할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었다.
“뭐, 단장님이 제정신이었다면 이 정도 거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겠지만. 다행이지?”
“애초에 제정신이었으면 이런 일을 할 필요도 없었겠죠!”
“…오. 좀 똑똑한데?”
카나가 들었다면 잘도 지 같은 놈을 부하로 삼았다고 말하며 박수를 보냈을 것이다.
“오른쪽으로.”
하지만 지금 그들에게 쏟아지는 것은 박수가 아니라 마기였다.
에릭의 말에 남자는 아무런 의문을 품지 않고 그대로 몸을 틀었다.
남자는 그렇게 본능과 에릭의 인도를 받아 성공적으로 숲을 빠져나왔다.
저 멀리,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넓게 펼쳐진 공터에 도착해 숨을 가다듬은 남자가 에릭에게 물었다.
“정말 이게 통할까요?”
“그럼! 당연히 통하지.”
“아, 역시 대장님은 다 계획이 있군요.”
“뭐, 안 통하면 다 죽는 거지. 별거 있겠냐?”
남자의 눈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었다.
그럼 그렇지.
한순간이라도 이런 인간을 믿은 내가 병신이다.
‘그냥 이대로 던져버리고 혼자 도망갈까.’
남자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에릭이 말했다.
“농담이고. 분명 통할 거다.”
“네, 네. 당연히 그렇겠죠.”
“…이 자식이?”
에릭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남자를 노려봤다.
하늘 같은 상관한테 저런 불량한 태도를 보이다니!
‘나 때는 저런 짓은 상상도 못 했는데. 감히 하늘 같은 상관에게 도전을 해?’
말세야, 말세.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고, 에릭은 자신을 업은 남자를 내려다보며 혀를 끌끌 찼다.
당장에라도 일어나서 불호령을 내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에릭은 남자의 도움 없이는 움직일 수도 없는 신세였다.
‘…크흑! 몸만 멀쩡했어도.’
눈물을 찔끔 흘린 에릭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흠흠. 혹시 내가 그동안 서운하게 대한 것 있으면 사과하마.”
“…갑자기 또 뭡니까?”
“아니, 그냥. 위기일수록 끈끈히 뭉쳐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몇 번이나 말한 것 같은데, 쓸데없는 소리 할 힘 있으면 제 등에서 내려오십쇼. 시커먼 남정네를 업고 있으니 기분이 영 좋지 않습니다.”
“…야! 나는 뭐 좋은 줄 아냐?! 나도 싫어 인마!”
“그럼 내려오면 되겠네요!”
“내려갈 힘도 없다고!”
딱히 부조리를 일삼은 기억은 없지만 부하 입장에선 느끼는 게 또 다르지 않은가.
혹시나 버려지진 않을지, 두려움에 물었던 에릭은 남자의 반응에서 그가 자신을 버리고 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얻었다.
…질색하는 걸 보니 기분이 안 좋아지긴 했지만.
조금.
…정말로 아주 쪼오오금.
“저는 솔직히 못 믿겠습니다.”
“뭐가.”
“그놈 말입니다, 그놈. 이 공터에 가둬두는 게 가능했으면 진작 막으면 됐을 텐데, 이제 와서 여기까지 끌고 오라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언제는 마법사 놈들이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을 했냐? 새삼스럽게 왜 그래?”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마법사니까.
남자를 설득하는 데는 고작 그 한마디로 충분했다.
카나로부터 시작된 마법사 혐오는 에릭에게, 그리고 에릭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이어졌다.
“그리고 그놈은 믿어도 돼.”
“…대장님, 뭐 잘못 드셨습니까? 아니면 마기에 스쳤다거나…. 큭, 제가 부족한 탓에 대장님이…!”
“아주 쇼를 해라.”
에릭은 조금 힘이 돌아온 다리로 남자를 툭 건드렸다.
“그놈은 내가 본 마법사 중 가장 실력 있는 마법사다.”
“…대장님 홍염 기사단 출신 아니십니까?”
“맞는데 왜?”
“그러면 혹시…. …그분도 왕실 마법사 출신이거나 그런 겁니까?”
“너, 말이 조금 공손해지지 않았냐?”
“예? 어허, 음해하지 마세요. 제가 언제 그랬다고 그러십니까? 저는 모르는 사람한테 이놈 저놈 할 정도로 예의 없는 사람 아닙니다.”
“얼씨구.”
혓바닥에 기름이라도 발랐나.
말이 매끈매끈하니 거창한 게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궁정 마법사는 아니야.”
“에이, 뭐야. 괜히 긴장했잖습니까. 다음에 만나기만 해 봐라. 아주 그냥….”
“그보다 더 높으면 높았지.”
“-오르도 특산물을 배 터지게 대접해 드릴 테니 말이야.”
단순히 위치만 놓고 비교해도, 에릭을 찾아온 마법사는 그라시스의 궁정 마법사와 비교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아르디나 대륙을 호령하는 아르카 제국.
그 아르카 제국의 현자라고 불리는 이를 어찌 작은 나라의 궁정 마법사와 비교할 수 있을까.
전쟁터에서 그가 펼치는 마법을 몸소 보고 느꼈던 에릭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슨 꿍꿍이지.’
하지만 의심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만한 능력과 지위가 있는 이가 불쑥 찾아와 돕겠다고 말하다니.
어떻게 알았는지는 둘째치고, 진의를 알 수가 없다.
‘어쩌면 방패막이일지도 모르겠군.’
오르도를 지나 더 동쪽으로 간다면 제국의 영토가 나온다.
‘이대로 단장님이 제국의 영토에 들어간다면 아주 난리가 나겠지.’
제국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에릭이었지만, 그 광경은 별로 유쾌할 것 같지 않았다.
우지끈!
에릭이 복잡하게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숲 끝자락에 있던 나무의 허리가 부러졌다.
쿠웅-하는 큰 소리와 함께 일었던 흙먼지가 가라앉고 그 사이로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당히 먼 거리였지만 에릭은 분홍색 눈동자가 자신을 직시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집착 있는 여자는 내 취향이 아닌데.”
“그렇다는 말은 집착이 없다면 취향이라는 말 아닙니까?”
“…아니 이놈이?”
날 나락으로 보내려 해?
에릭은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가 아무도 그들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잘 들어. 내 취향은 나올 데는 나오고 들어갈 데는 들어간 환상적인 몸매의 여성이지, 저런 밋밋한 꼬맹이가 아니야.”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에릭을 노려보는 카나의 눈빛이 매서워진 건 아마 기분 탓일 것이다.
에릭의 변명을 듣는 둥 마는 둥 흘린 남자가 애꿎은 입술을 짓씹었다.
“괜찮겠습니까?”
“또 뭐가.”
“저 사람, 대장님이 아는 사람인 것 같던데.”
“….”
에릭은 침묵했다.
대놓고 단장님이라고 불러댔으니 눈치채지 못하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에릭이 입을 열었다.
“괜찮아야지.”
괜찮지 않다고 해서 가만히 놔둘 수도 없지 않은가.
“지옥 끝까지 쫓아올 기세인데 어쩌겠어. 집요한 성격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으시네.”
그들은 대화를 나누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카나는 그런 그들을 쫓아 조금씩 앞으로 다가왔다.
검은 마기를 흩뿌리던 카나가 공터의 정중앙에 도달했을 때.
“…!”
번쩍!
공터에 숨겨져 있던 마법진이 눈 부신 빛을 냈다.
발밑에 깔린 마법진에서 기분 나쁜 마나를 느낀 카나가 눈을 사납게 치뜨자, 카나의 몸에서 새어 나오던 마기의 몸집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카나가 무언가 행동하는 것보다 마법진이 완성되는 속도가 빨랐으니.
온갖 기하학적 문양이 수놓아진 마법진이 완성되며 거대한 은색 장벽이 공터에 솟아올랐다.
입을 떡 벌린 채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남자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해치웠-”
콰아아앙!
“우와악?!”
“으악!”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벽이 흔들리며 강렬한 소음을 내뱉었다.
땅이 흔들릴 정도로 강한 진동에 균형을 잃은 남자가 넘어졌다.
그의 등에 업혀 있던 에릭도 덩달아 땅에 추락했다.
“아이고 허리야….”
허리를 붙잡고 끙끙대던 에릭이 벌렁 몸을 뉘었다.
태평한 에릭과 달리 긴장감 어린 눈으로 장벽을 보던 남자가 말했다.
“…끝난 겁니까?”
“아마도.”
그 후로도 몇 차례, 장벽이 무너질 듯한 폭음과 무언가를 잡아 찢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장벽은 고고히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그제야 안심한 남자가 주저앉듯 땅에 궁둥이를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