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Chapter 128

“…정말로 괜찮으십니까?”

남자가 에릭에게 물었다.

“저 괴물… 아니, 저 소녀는 가뒀지만, 주변의 위험 요소까지 모두 사라진 건 아닙니다. 혹시 몬스터가 찾아오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지금 상태로는 고블린 한 마리도 상대하지 못하실 거 아닙니까.”

“야! 아무리 그래도 고블린은….”

발끈해서 말하던 에릭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더니 끝내 바람이 되어 흩어졌다.

힘이 조금 돌아왔지만 여전히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상태는 아니다.

때문에 에릭은 한심하게 내려다보는 부하의 시선에 굴욕감을 느끼면서도, 부들부들 떠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좋게 생각하자.

말을 얄밉게 하긴 했지만 내용만 보면 결국 그를 걱정하는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던 에릭의 눈꼬리가 조금 누그러들었다.

“오르도의 경비대장이 고작 고블린한테 죽는다니. 얼마나 쪽팔린 일입니까? 대장이 그런 식으로 죽으면 어디 가서 경비대라고 말하지도 못할 거 아닙니까.”

“야 이 새끼야!”

그래. 걱정은 걱정이네.

다만 걱정의 방향성이 조금 다를 뿐.

에릭의 신변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경비대의 위신을 걱정하는 남자의 말에 결국 에릭은 참지 못하고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너, 다 나으면 보자.”

“두고 보자는 사람 치고 정말 무서운 사람 없답디다.”

“오냐. 그럼 정말 무서운 사람이 뭔지 직접 보여주마.”

“그럼 그럴 일 없게 후환을 없애야겠군요.”

“어어어? 이 자식 봐라? 그러다 진짜 치겠다?”

말은 저렇게 해도 하극상을 일으킬 생각이었으면 진작에 했을 것이다.

에릭도 남자가 진심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기에 대수롭지 않게 농담을 받았다.

그래도, 언제까지고 농담 따먹기나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됐고, 웬만한 몬스터는 아까 전 소동 때문에 다 도망갔을 거라 네가 걱정하는 그런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거다. 그러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빨리 가.”

“그런 말 하고 멀쩡하게 돌아온 사람은 한 명도 못 본 것 같지 말입니다.”

남자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죽지 마십쇼.”

“어엉.”

손을 흐느적흐느적 흔들어 남자를 대충 배웅한 에릭은 남자의 뒷모습이 나무 사이로 사라지는 걸 보고 손을 내렸다.

“새끼, 끝까지 불길한 소리하고 가기는. 죽긴 누가 죽어? 아직 결혼도 못 했구만.”

에릭은 이런 곳에서 죽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상냥하게 보듬어 주는 여자와 결혼해 오순도순 살다가 장성한 자식들 앞에서 조용히 눈을 감는 것.

그것이 에릭의 꿈이었다.

비록, 지금은 상냥하게 보듬어 주는 여자는커녕 알고 지내는 여자는 자주 들리는 술집의 여주인밖에 없지만.

만남이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사이에 갑자기 찾아올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에릭은 언젠가 자신에게 꿈 같은 만남이 찾아오리란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런. 이럴 게 아니라 참한 아가씨라도 소개해 줄걸 그랬나?”

중얼거리는 에릭의 뒤에서 가벼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어디 있다가 이제 옵니까?”

“자네 윗사람들이랑 담판을 짓고 왔지. 그래서, 필요해?”

“…뭐가 말입니까?”

“참한 아가씨 말이야. 자네가 원한다면 몇 명 소개해 주지.”

“정말입니까?”

“물론. 유망한 인재에게 그 정도 못 해주겠어? 물론 그 아가씨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자네의 역할이지만. 마법사라고 해도 남의 마음을 멋대로 주무를 수는 없거든.”

“마법사라면 그런 것도 할 수 있는 거 아니었습니까?”

“하하. 사실 못 할 것도 없긴 하다만, 그렇게 해서 마음을 얻으면 만족할 수 있겠어? 편법으로 얻어낸 마음은 금방 빛이 바래는 법이야.”

“아유,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평생 마음에 새겨두고 살겠습니다.”

“별말씀을. 나야말로, 유망한 젊은이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서 좋았어.”

사용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예술품이 아닐까.

그런 의문이 절로 드는, 고풍스러운 스태프를 든 남자가 어느샌가 에릭의 뒤에 서 있었다.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눈 것에서 추측할 수 있듯, 그 남자는 에릭이 아는 인물이었지만.

‘…부담스럽군.’

솔직히, 에릭은 남자와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목숨을 두고 다투던 사이였는데 이제 와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살갑게 대화를 나누려니 어색하지 않은 게 더 이상한 일이리라.

그런 에릭의 기색을 눈치챈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너무 그러지 마. 자네도 원해서 싸우던 건 아니잖아? 나도 마찬가지야. 피차 같은 처지인데 굳이 날을 세울 필요 없잖아.”

“같은 처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뭐, 저희 쪽이 먼저 잘못한 거니까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네요.”

“그럼 그럼. 문제의 원흉도 사라졌으니 이제라도 사이좋게 지내자고. 같은 인간끼리 싸워봤자 좋을 것도 없잖아?”

“….”

에릭은 문득 실소가 새어 나오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 말을 한 사람이 저 남자만 아니었다면 에릭도 동의했을 것이다.

제국의 현자라고 불리는 남자가 어린애 입에서 나올 법한 꿈과 희망에 젖은 말을 하다니.

에릭은 듣자마자 폭소를 터뜨리지 않은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왜 계속 저한테 유망한 인재라고 하시는 겁니까? 제국의 현자님에게 그런 말을 듣고 있으려니 낯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습니다만.”

“성과를 낸 부하에겐 그만한 대우를 해줘야지. 그럴 만한 위업을 이뤘으니 경의를 표하는 것뿐이야. 솔직히 자네가 해낼 거라고 크게 기대하지 않고 있었거든. 저 친구에게 한 방 먹이다니. 깜짝 놀랐어.”

“…그것까지 봤습니까?”

보고 있다는 걸 느끼지도 못했는데.

하기야 자신의 기감에 걸릴 정도의 실력이었다면 제국의 현자라고 불리지도 않았겠지.

‘마스터 메이지’라는 이름은 에릭의 의문을 불식시키기에 충분했다.

“그건 그냥 운이 좋았던 겁니다.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고요. 애초에 단장님이 정상이었다면 통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 해도 위업을 이뤘다는 건 변함없지. 겸손은 좋지만 과한 겸손은 실례가 되는 법이야. 저 친구가 자네의 일격을 봤더라도 칭찬했을 거야.”

“칭찬은 모르겠고 죽일 기세로 쫓아오던데요.”

“자네도 알다시피 저 친구가 원래 감정 표현이 좀 서툴잖아. 부끄러워서 그런 것이니 자네가 이해해.”

“두 번 부끄러우면 사람 여럿 죽어 나가겠군요. 그보다 저건 안전한 겁니까?”

“한 번 실패했는데 두 번 실패할 순 없지. 저번에는 다른 목적으로 세운 것이라 쉽게 뚫렸지만, 이번엔 아예 막을 목적으로 만든 결계니 안심해도 돼.”

“…한 번 실패했는데?”

알 수 없는 말에 에릭이 중얼거렸지만, 남자는 그의 의문을 풀어줄 생각이 없었다.

“뭐, 영원히 막을 수는 없으니 가능한 한 빨리 해결해야겠지만.”

남자가 손으로 결계를 가리켰다.

찬란한 은색으로 빛나는 결계 밑, 지면에 닿은 부분부터 검은 기운이 서서히 올라오고 있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습니까?”

“길면 일주일. 짧으면 내일.”

“일주일과 하루는 차이가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최악의 상황엔 그렇다는 거지, 내가 저 친구에게 괜한 자극을 주지 않는 이상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일주일.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에릭의 얼굴이 굳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에게 자네의 윗사람들과 어떤 상의를 했는지 아직 설명해 주지 않았지.”

지금부터 설명해 줄게.

스태프로 바닥을 짚은 남자가 입을 열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마기는 생명체에게 극독보다 더한 것이지. 그러니 저 친구를 상대하려고 하면 죽음을 각오해야 할 것이야. 운 좋게 살아나와도 멀쩡하리란 보장이 없지. 자네의 몸 상태가 엉망인 것처럼 말이야.”

“…후, 역시 알고 계셨군요.”

남자의 말에 에릭은 쓴웃음을 지었다.

남자가 말한 대로, 에릭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모든 힘을 끌어다 쓴 것도 그렇지만, 몇 번이나 맞부딪치며 누적된 마기가 몸을 조금씩 좀먹고 있는 탓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겐 유용한 패가 있잖아? 마기 중독이나 사망을 두려워하지 않는 유용한 패가.”

“…설마, 마족을 끌어들일 생각입니까?”

“에이, 마족이라니. 빈대 잡자고 집을 다 불태울 생각이야?”

“그럼 대체 누굴 말하는 겁니까?”

남자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에델 님이 몸소 데려오신 이들 말이야. 죽어도 죽지 않는 그들이라면 저 친구에게 용감하게 맞서 싸우지 않겠어?”

“사도….”

에릭은 마침내 남자의 말이 누굴 가리키는지 알 수 있었다.

확실히, 그들이라면 카나가 뿜는 마기에 구애받지 않고 싸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에릭은 남자의 말에 부정적인 의견을 표했다.

“그들이 해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만.”

가진 힘은 강하지만 과연 단장님을 이길 수 있을까 묻는다면 답은 당연히 ‘아니오’였다.

“걱정하지 마. 에델 님이 그들을 굽어살피실 테니.”

“…정말 그럴까요.”

“그렇고말고. 이 또한 에델 님이 바라시는 바인걸. 그리고….”

“…?”

누가 현자 아니라고 할까 봐 이해하기 힘든 말을 줄줄 내뱉는 것에 에릭이 의문을 표하기 전.

그보다 한발 앞서 남자가 말을 이었다.

“무력만이 능사는 아니야. 혹시 모르잖아? 사도들과의 접촉으로 인해 저 친구가 정신을 차릴지.”

‘뱀 새끼’.

에릭은 그가 모시던 단장, 카나가 왜 남자를 그렇게 불렀는지 완전히 이해했다.

모든 걸 다 안다는 태도를 하면서도, 속내를 제대로 말하지 않고 능글능글하게 구는 게 교활한 뱀과 전혀 다를 바 없었다.

“만약 아무 성과 없이 일주일이 지나면 어떡합니까?”

“그때는 뭐….”

남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제국이 나서는 수밖에.”

적지 않은 피해를 보겠지만, 내버려두면 그보다 훨씬 큰 피해를 보게 될 것이다.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카나가 강하다 한들 제국의 힘을 단신으로 감당할 순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카나에게 기다리는 결말은 단 하나뿐이었다.

“….”

잠시 침묵을 지키던 에릭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사도들은 언제부터 동원할 생각입니까?”

“그건-”

남자가 답했다.

* * *

멈칫.

“…토벌령?”

급하게 도시를 지나던 다은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벽보에 다가갔다.

썩 질이 좋지 않은 종이 위에 적힌 인상착의.

그것은 그녀가 익히 아는 아이의 것이었다.


           


I Became a Raid Boss

I Became a Raid Boss

레이드 보스가 되었다
Score 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One day, when I came to my senses, I found myself reincarnated in another world. After enduring a rough life post-reincarnation, I thought I could finally settle down, quietly tending to a flower garden in the mountains… …But something feels off.”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