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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31

만화나 애니메이션 등을 즐겨보는 사람이면 한 번쯤 이런 전개를 본 적 있을 것이다.

세뇌되거나 정신이 망가진 사람이 소중한 이의 절절한 외침에 정신을 차리는, 그런 전개.

상당히 진부한 전개지만, 그럼에도 찾는 사람이 많은 이유는 그것이 그만큼 인상적인 전개이기 때문이다.

다은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카나에게 제일 소중한 사람일까?

‘…모르겠어. 하지만-’

소중하지 않냐는 질문에는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라고.

자의식 과잉이라고 하기엔 다른 사람을 대할 때와 그녀를 대할 때의 태도 차이가 너무나도 명확하게 보였다.

다은이 입을 열면 귀를 기울인다.

아무 용건이 없을 때도 스스럼없이 다가와서 말을 건다.

천연덕스럽게 농담을 건네기도 하고, 신체 접촉을 곁들인 장난도 곧잘 걸어온다.

카나의 그런 언행은 카나가 다은을 친근하게 생각한다는 방증이었다.

몇 주간의 동행으로 많이 친근해진 셀린을 대할 때도 그런 식으로 대하지는 않았으니까.

그래서 다은은 생각했다.

‘…어쩌면, 날 보면 카나가 정신을 차릴지도 몰라.’

지금은 이성을 잃은 채 떠돌고 있지만, 그녀를 보면 거짓말처럼 원래대로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다은은 드라마틱한 결말을 상상하며 카나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카나야?”

그러나 결계에 들어가 카나를 마주한 순간 다은의 기대는 와장창 무너졌다.

다은이 이름을 불렀지만, 카나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허공만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자신의 이름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다은이 술렁이는 불안감을 안고 몇 걸음 더 다가간 순간.

멍한 빛을 띤 분홍색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어?”

그리고 다음 순간, 다은을 맞이한 건 낯설면서도 익숙한 천장이었다.

한참 동안 멍하니 있던 다은은 떨리는 손으로 더듬더듬 가슴을 매만졌다.

날카로운 마기에 꿰뚫린 바로 그 자리였다.

다은을 혼란스럽게 한 건 죽음이 아니었다.

‘카나가, 공격했어.’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다은은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바람은 그저 바람일 뿐이라는 것을.

낙관적인 생각만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뒤늦게 자각했다.

만나서 이야기하면 모든 게 잘 풀릴 거라고 생각하다니.

순진하다 못해 얼빠진 생각 아닌가.

“어떻게 하지…?”

구체적인 계획 없이 그저 카나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찾아왔으니, 실패했을 때의 일도 상정했을 리 없다.

발만 동동 구르던 다은은 시청자들이 와글와글 떠들어대는 채팅창에서 답을 찾았다.

힘을 빼놓으면 대화든 뭐든 할 수 있지 않겠냐는 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다은은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고,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의 상황이었다.

“대체 가슴이 뛰지 않는 싸움이라는 게 뭐예요…?”

싸움이 싸움이지, 가슴이 뛰는 싸움과 뛰지 않는 싸움이 따로 있기라도 한가?

검을 들고 적과 맞설 생각만 해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다은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상대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다은 뿐만이 아니었다.

‘이걸 왜 이해 못 하지?’

유키 역시 다은을 이해할 수 없었다.

굳이 자신을 찾아와서 도와달라고 청하는 걸 보면 결은 달라도 같은 것을 느낀 걸 텐데.

‘귀찮아.’

이러고 있을 시간에 검을 휘둘렀으면 수십 번은 더 휘두를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유키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스승님의 검술은 아름다워요.”

유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그녀는 말주변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누군가 유키에게 카나의 검술에 대해 예찬하라고 하면 하루 종일도 할 자신이 있었다.

곧게 뻗는 직선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검 끝이 그리는 곡선은 또 얼마나 유려한지.

검을 들기도 힘들어 보이는 작은 몸으로 어떻게 그런 아름다운 검술을 펼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유키는 그런 사소한 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걸 신경 쓸 시간에 하나라도 더 보고 배우지.’

그래서 유키는 채팅창에서 고증이니 뭐니 떠드는 걸 볼 때마다 우습기 짝이 없었다.

진리이자 정답을 앞에 두고 한눈팔 정신이 있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래서 스승님이 나오는 영상은 싹 다 찾아봤어요. 저니 님 방송도 꼬박꼬박 챙겨 봤고요.”

“…으으, 카나가 대단한 건 저도 알아요. 알고 있으니까 이제 그만 본론으로 들어가면 안 될까요?”

내버려두면 정말 하루 종일 떠들고도 남을 기세라서.

유키의 예찬을 듣다못한 다은이 질린 얼굴로 말을 끊었다.

“카나의 검술이 아름다운 것과 유키 님의 가슴이 뛰지 않는 게 무슨 상관인데요?”

“…지금 스승님이 펼치는 검술은 아름답지 않아요.”

검에 담긴 힘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카나가 휘두르는 검에는 아무런 아름다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단순히 강하게 베고, 찌르고, 가르면 다인 줄 알던 과거의 자신을 보는 듯한 느낌.

그걸 확인하자 유키의 의욕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아무 묘리도, 깨달음도 없이 휘두르는 검과 싸우고 싶지 않아요.”

“…혹시 이세계에 갔다 오신 건 아니죠? 아니면 전생의 기억이 있다거나.”

“소설을 너무 많이 읽으신 것 같아요.”

“그건 유키 님도 마찬가지 같은데요…. 장담하건대 유키 님이 수백 년 전에 태어나셨다면 역사에 이름을 남겼을 거예요.”

아무튼….

다은은 이제서야 겨우 유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가 느끼기에도 지금 카나의 행동은 자연스럽지 않았으니까.

아르디나 대륙에 나타난 이후에도 잘만 돌아다니던 아이가 결계에 갇힌 걸 기점으로 완전히 수동적으로 변하다니.

이성이 없어지고 본능만 남아서 그런 거라고 생각해도 좀 이상하지 않은가.

꼭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것처럼.

“정해진 대로 행동하는 건 재미없어요.”

카나를 만나 깨달음을 얻기 전이었다면 유키도 흔쾌히 승낙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깨달음을 얻어 역치가 높아진 유키는 다은의 부탁에 그다지 흥미가 동하지 않았다.

“정말 도와주실 생각 없어요?”

“싫어요.”

미련을 버리지 못한 다은이 재차 물었으나 돌아오는 건 단호한 거절이었다.

만약 다은이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플레이어끼리 편을 갈라 싸우는 일도 없었을 테고, 어쩌면 제국 기사들이 쳐들어가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외에도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겠지.

‘나도 그렇고.’

당장 유키만 해도 지금처럼 깨달음을 얻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보스가 있다고?’ 하면서 호기심에 한 번쯤 찾아갈 수는 있었겠지만, 지난 번처럼 친절하게 검을 맞대주지는 않았겠지.

다 다은이 카나를 만나고, 세상으로 이끌었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때문에, 유키는 다은에게 부채감 아닌 부채감을 느끼고 있었으나.

“역시 무리예요.”

스승님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스승님이 아닌 것과 싸울 생각을 하니 도저히 흥이 나지 않는 유키였다.

다은은 몇 차례나 설득을 시도했지만 유키의 의지는 확고했다.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마음.

설득에 지친 다은이 포기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을 때.

문득 좋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유키 님의 뜻이 그렇게 확고하면 제가 뭐라 해도 소용없겠죠. 귀찮게 해서 죄송했어요.“

“귀찮지는 않았어요.”

“에이, 거짓말. 아무튼 저는 다른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하러 가볼게요.”

등을 돌리며 떠나려는 시늉을 하던 다은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몸을 앞으로 둔 채 고개를 살짝 돌린 다은이 팔랑팔랑 손을 흔드는 유키에게 물었다.

“근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네?”

“이번 레이드는 일주일 동안만 진행돼요. 그 이상은 결계가 카나가 지닌 마기를 감당할 수 없다나 뭐라나…. 그런 이유 때문에요. 아, 하루가 지났으니 이제 6일 남았네요.”

“저도 알아요.”

유키도 벽보를 보았다.

워낙 방방곡곡에 붙어 있어서 못 보는 게 더 힘들었다.

“만약 일주일 내로 토벌에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어떻게 되는데요?”

“제국이 몸소 토벌에 나선대요.”

아직은 별로 흥미가 없나 보네.

유키의 눈치를 살핀 다은이 말을 이었다.

“유키 님도 아시다시피, 카나와 제국은 예전부터 이어진 악연이 있잖아요. 서로가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사이죠.”

“그래서요? 불쌍하니까 도와달라는 말씀이라면-”

“그런 거 아니니까 일단 들어봐요. 그런 마당에 마기까지 줄줄 흘리고 있으면 제국이 어떻게 생각할까요. 반드시 죽여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분명 그럴 것이다.

회유도 말이 통해야 하는 거지, 숨만 쉬어도 펑펑 터지는 폭탄에 대고 설득을 시도하는 멍청이는 없을 테니까.

토벌령에 적혀있지는 않았지만 쉬이 유추할 수 있는 미래였다.

“카나가 강한 건 맞지만…. 글쎄요, 전심전력으로 달려드는 제국을 혼자 막을 수 있을까요?”

“힘들겠죠. 아뇨, 불가능하겠죠.”

“맞아요. 작지 않은 피해를 입힐 순 있겠지만 결국엔 꺾일 거예요. 그리고 방금 말했듯이 꺾이는 건 곧 죽는다는 뜻이고요.”

“….”

소중한 아이의 죽음을 입에 담는 게 영 꺼림칙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해서 구할 수 있다면.’

다은은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그런 노력이 빛을 본 걸까.

“…본론이 뭔가요?”

물고기가 미끼를 물었다.

조금 전과 입장이 완전히 뒤바뀐 상황에 다은이 유키 몰래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제국이 움직일 정도로 큰 사건이니 분명 역사에 반영될 테고, 그렇게 되면 유키 님이 아름답다고 하신 카나의 검술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겠죠. 그래도 괜찮으신가요?”

“…!”

“뭐, 예전 영상들을 수십, 수백 번이고 계속 돌려보실 생각이라면 상관없지만요.”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면 동할 이유를 만들어 주면 된다.

유키가 연민이나 동정심으로 움직일 사람이 아니라는 걸 꿰뚫어 본 다은은 그녀가 그토록 좋아하는 검술을 들먹였다.

다은은 유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럼, 이만-”

“…도와드릴게요.”

계획대로.


           


I Became a Raid Boss

I Became a Raid Boss

레이드 보스가 되었다
Score 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One day, when I came to my senses, I found myself reincarnated in another world. After enduring a rough life post-reincarnation, I thought I could finally settle down, quietly tending to a flower garden in the mountains… …But something feels o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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