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키 님이 합류하셔서 두 명이 됐으니….”
다은이 양손을 활짝 폈다.
“앞으로 여섯 명만 더 모으면 돼요.
“…여섯 명‘만’?”
“에이. 가장 큰 전력인 유키 님이 들어오셨는데 당연히 여섯 명만이라고 하는 게 맞죠.”
“아하. 납득했어요.”
“….”
“왜요?”
“아니에요.”
이렇게 뻔뻔한 사람이었나?
하기야, 뻔뻔하지 않았다면 카나한테 매번 까이면서도 싸우자고 달려들지도 않았겠지.
원성을 토로하는 시청자들을 무시하고 24시간 무수면 무소통 사냥 방송 같은 짓도 하지 않았을 테고.
그리고 또-
퍽!
“꺅! 갑자기 왜 때려요?!”
“눈빛이 불손해요.”
“…심증만으로 죄를 묻는 건 무죄 추정 원칙에 어긋나는 행위예요.”
다은은 몰랐다.
그녀의 그런 반응이 유키의 심증에 확신을 더해주고 있다는 걸.
유키는 다은을 응징한 손날을 거둬들였다.
“굳이 풀 파티를 모아야 할 필요가 있나요. 입장에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둘이면 충분하지 않나요?”
“유키 님이 강한 건 맞지만 그건 무리예요.”
“…?”
유키가 고개를 갸웃했다.
척 보기에도 이해를 못 했다는 모양새라 다은이 한숨을 쉬었다.
“유키 님은 레이드를 안 해보셨죠?”
“파티는 안 했지만 보스는 많이 잡아봤어요.”
“그런 거 말고, ‘레이드’라고 분류된 콘텐츠를 해보셨냐고 물은 거예요.”
“…아뇨.”
“그럴 줄 알았어요.”
레이드라는 용어는 한 MMORPG에서 처음 나왔다고 한다.
처음에는 수십 명이나 되는 인원이 특별한 보스나 던전을 공략하는 것을 레이드라고 했다고 하는데, 시간이 흘러 다양한 게임이 나온 지금은 다양한 형태의 레이드가 생겨났다.
개중에는 사람들이 ‘이런 걸 레이드라고 해도 되나?!’라고 말하는 것과, ‘이건 레이드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들도 있었지만.
사람들이 인정하든 하지 않든, 레이드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굉장히 많았다.
“실리아 온라인의 레이드 시스템은 ‘여러 명이 함께 공략해야 한다’라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어요. 단순히 실력이 좋다고, 레벨이 높다고 깰 수 있는 게 아니라요.”
물론 레벨이 높고 실력이 높으면 더 수월하게 클리어할 수는 있을 것이다.
‘언젠가, 카나 정도의 무력을 가진 플레이어가 생겨난다면 저레벨 레이드는 혼자서도 클리어할 수 있겠지.’
몇몇 게임은 그런 것들을 방지하기 위해 플레이어의 레벨과 스텟을 제한하는 시스템을 넣어두곤 하는데, 실리아 온라인에는 없는 시스템이었다.
“여섯 명이 발판을 밟아야 하고, 나머지 둘은 높은 데미지를 주는 범위 공격을 맞아야 하는 패턴인데, 만약 파훼하지 못하면 맵 전체에 전멸에 가까운 데미지를 줘요. 이런 패턴을 두 명이 파훼할 수 있을까요?”
조금 전 말했다시피 압도적인 무력으로 패턴이 나오기 전에 보스를 물리치거나, 데미지를 받아넘길 수 있는 방어력이나 체력이 있다면 상관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수준으로는 어느 쪽이든 불가능했다.
“저니 님은 전투 콘텐츠를 별로 안 좋아하시지 않나요?”
“열심히 공부했죠.”
원래 몸이 나쁘면 머리로 때워야 하는 법이다.
…반대였던가?
다은은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튼 예전부터 어느 정도 알고 있던 내용이기도 해서, 다은은 어렵지 않게 새로운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한 명을 제외하면 모든 레이드 보스는 그런 식이었어요. 그리고….”
…그 한 명도 결국 그렇게 됐네요.
다은이 뒷말을 삼키며 씁쓸하게 웃었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다은을 바라보던 유키가 흠, 하고 가벼운 숨을 토해냈다.
“나머지 여섯 명은 어떻게 모을 생각인가요.”
“모으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아요.”
당장 다은과 유키의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에게 ‘같이 레이드 하실 분?’이라고 물으면 벌떼처럼 달려들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모은 사람들의 실력이 어떠한지, 분쟁을 일으킬 만한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막공… 혹은 공팟이라고 부르는 방식의 문제점이었다.
그때그때 필요한 사람을 모아야 하니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는 것.
‘하지만 어쩌겠어. 나나 유키 님이나 소속된 공대가 없는데.’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씹어야지.
“…응?”
다은에게 귓속말이 날아든 건 그때였다.
* * *
“분위기가 좋지 않네요.”
“시기가 시기니까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툭 내뱉은 유키의 말에 다은이 공감했다.
‘분위기를 읽긴 하는구나…’라는 생각은 덤이었다.
“토벌령 때문일 거예요. 집 앞에 쓰레기장을 만든다고 해도 쌍수를 들고 반대하는데, 근처에 폭탄이 있는 걸 달갑게 여기겠어요? 심지어 터지는 게 반쯤 확실한 폭탄이요.”
“터지기 전에 베면 되는 거 아닌가요.”
“…진심으로 한 말이에요?”
“방금 건 농담이었어요.”
“전혀 농담 같지 않았는-”
“-농담이었어요.”
“…그런 거로 해요.”
만약 농담이 아니었다고 했으면 다은은 진심으로 유키가 원시인이 아닌지 고민했을 것이다.
별로 믿음은 안 가지만 농담이라고 하니까 일단은 믿어보자.
“그래서 지금 어디 가고 있는 건가요.”
유키의 물음에 다은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을 했다.
“…도와준다는 사람이 있어서 얘기하러 간다고 아까 말했잖아요.”
“그랬어요?”
“왠지 그럴 것 같았어요.”
금시초문이라는 듯한 반응.
다은은 이제 유키라는 사람에 대해 알 것 같았다.
머리 위에 물음표를 동동 띄우고 있는 유키를 무시한 다은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 이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저니 님!”
자신의 닉네임을 부르는 목소리에 다은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카페테라스에 앉아 손을 흔들고 있었다.
다은은 그새 또 멍하니 서 있는 유키를 끌고 남자에게 향했다.
“잘 지내셨어요? 와, 이게 대체 얼마 만이에요?”
“직접 만난 건 전쟁 이후로 처음이죠.”
“아… 그때는 정말 감사했어요. 파인 님이 아니었다면 상황이 그렇게 잘 풀리진 않았을 거예요.”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제가 나서지 않았어도 다를 건 없었을걸요?”
파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당시에는 저쪽에서 시비 거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나섰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굳이 그가 나설 필요도 없었다.
잔챙이들이 뭐라 떠들어 대든, 칼질 한 방에 공평하게 두 동강이 났을 테니까.
하지만 다은은 고개를 저으며 파인의 생각을 부정했다.
“병아리들이 모여서 제국 기사와 맞서 싸우는 게 마음에 들었다고 카나가 그랬어요. 파인 님이 나서지 않았으면 제국 기사가 찾아올 일도 없었겠죠.”
“어, 그게 그렇게 되나요?”
“그럼요.“
이렇게 들으니 틀린 말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카나 님 눈에는 우리가 싸우는 게 병아리들이 삐약거리는 거로 보였다는 거네요.”
그 정도 무력이라면 그렇게 보이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지만.
뭔가 기분이 묘한 것도 사실이라, 파인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옛날이야기는 됐어.”
지루한 티를 숨기지 않던 유키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바쁘니까 도와주겠다는 게 무슨 뜻인지나 말해.”
“안부도 못 묻냐?”
“어차피 맨날 방송으로 보고 있으면서 안부는 무슨.”
“감성 없기는.”
혀를 쯧, 차면서도 파인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토벌령이 내려지고, 레이드에 도전할지, 도전하지 않을지에 대해서 저희끼리 투표를 했어요. 결과는 정확히 반반이었고요.”
“파인 님은 어느 쪽이었어요?”
“저야 당연히 반대죠.”
만약 파인이 스트리머가 아니라 레이드를 좋아하는 일반인 플레이어였다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일반인이 아니었고, 유키처럼 민심을 신경 쓰지 않는 두꺼운 신경줄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엥. 반대했는데 저를 도와주신다고요?”
“안 될 건 없죠.”
눈을 가늘게 뜬 파인이 다은에게 손짓했다.
그의 뜻을 알아챈 다은이 방송에 송출되는 소리를 끈 채로 파인에게 바짝 다가갔다.
“…저니 님을 돕는다는 명목이 있으면 민심도 챙길 수 있으니까요. 원하는 대로 하면서 생색도 낼 수 있으니 일석이조인 셈이죠.”
“…와.”
다은이 감탄했다.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네요.”
“어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해주세요.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기꺼이 저니 님을 도왔을 거예요.”
“왜요?”
“그게 방송적으로 이득이 되니까요. 잘하면 낙수 효과도 기대해 볼 수 있고요.”
“뭐야. 결국 똑같은 말이잖아요.”
역시 순수한 선의로 돕겠다고 한 건 아니구나.
하지만 다은은 실망하지 않았다.
‘순수하지 않다고 해서 선의가 아닌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마당인데 순수하고 속물적이고 따질 정신이 어딨어.
오히려 속내를 투명하게 드러내니 더 믿음이 갔다.
‘방송적으로 도움이 된다’라는 확실한 이유가 있으니 뒤통수 맞을 걱정도 하지 않아도 된다.
‘거짓말일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짓을 하는 순간 파인의 방송은 폭죽처럼 터져나갈 것이다.
“파인 님이 이끄는 공대는 어떻게 하고요?”
“그걸 설명하려고 저니 님을 부른 거예요. 아까, 의견이 반으로 나뉘었다고 했잖아요? 원래였다면 제가 할지 안 할지 결정해서 공대를 끌고 갔을 테지만 이번만 방침을 조금 바꾸기로 했어요.”
넷, 그리고 넷.
참 애매한 숫자다.
파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한쪽 손의 손가락을 접었다.
“참여하기 싫은 사람은 쉬고, 참여를 원하는 사람만 참여하기로요.”
반대했던 파인이 찬성으로 돌아섰으니 남은 자리는 셋.
파인이 치켜든 손가락의 개수도 정확히 그와 같았다.
“어때요. 저희 공대의 임시 멤버로 참여하실래요? 여섯 명을 구하는 것보다는 그게 편하실 텐데.”
이래 봬도 꽤 이름 있는 공대라고요.
파인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