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의 공대는 공략을 보고 레이드 하기보다 공략을 만드는 쪽에 속한 공대였다.
사실 당연한 말이었다.
파인이 레이드에 뛰어드는 시점은 대개 레이드가 나온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고, 때문에 제대로 된 공략은커녕 클리어에 성공한 공대도 없는 게 정상이었으니까.
패턴을 하나하나 분석하여 공략을 직접 만들어 트라이하는 건, 이미 나온 공략대로 트라이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지만.
직접 길을 개척했을 때의 짜릿함은 앞사람의 꽁무니를 따라 걸을 때와 감히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다르게 할 겁니다.”
파인이 준비한 자료를 나눠주며 말했다.
“솔직하게 말할게요. 승산은 별로 높지 않아요.”
일주일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 중 벌써 하루가 지났다.
레이드에 익숙한 기존의 공대원 대신 경험이 없는 두 사람을 영입했다.
한 번에 한 파티만 입장할 수 있다는 괴상하다 못해 불쾌한 제한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 절대적인 도전 횟수도 부족하다.
“그래서 우리는 앞서 트라이 한 공대들의 전략을 베낄 겁니다.”
말을 거창하게 했지만 사실 그다지 특별한 일은 아니다.
어디 공대가 어디까지 갔더라, 라는 말이 돌면 어떻게 파훼했나 참고하는 경우는 많았으니까.
그럼에도 파인이 그런 말을 한 덴 이유가 있었다.
“네가 말한 대로 무식하게 머리 박는 짓은 안 할 거라고. 알겠어?”
빨리 교과서 펴라.
단호한 말에 유키가 입술을 삐죽였다.
* * *
“…리 하죠.”
전멸.
“으악! 나 죽는다! 힐 좀 줘요!”
“힐러 죽었어요!”
“뭐?! 언제?!”
“낙인 인계 안 돼서 터졌어요!”
전멸.
“아니, 어글 좀 제대로 잡아봐요!”
“광힐을 계속 뿌리는데 어글을 어떻게 잡아요.”
“도트뎀에 죽을 순 없잖아요! …아.”
또 전멸.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천장도, 전장으로 향하는 길도 이제는 익숙했다.
파인은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며 생각을 정리했다.
‘뭐가 문제지?’
그에 대한 답은 바로 나왔다.
‘모든 게.’
굳이 하나를 꼽을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제일 짜증 나는 걸 꼽으라면 파인은 주저 없이 고를 수 있었다.
결계에 입장하자마자 체력을 갉아먹는 마기.
카나에게 다가갈수록 더 강한 데미지를 주는 마기 때문에 다른 패턴을 파훼할 때도 문제가 생겼다.
원래라면 죽지 않을 데미지도 순간 들어온 도트뎀 때문에 죽을 데미지로 변하고.
그걸 커버하겠다고 무식하게 광역 힐 스킬을 때려 붓자니 힐 어글과 마나가 감당이 안 된다.
결국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힐을 하는 줄타기를 해야 한다는 건데.
“으아아아….”
파인 공대의 힐러 중 한 명, 레모니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파인은 해쓱한 얼굴을 한 레모니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네가 선택한 힐러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
“…저 힐러 그만둘래요오….”
“안 돼요.”
“히잉.”
그래도 마냥 안 좋은 소식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큰 난관이라고 생각했던 다은과 유키가 의외로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유키는 다른 사람과 합이 잘 맞진 않지만, 개인 기량으로 단점을 메꿔서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다은은 개인 기량은 살짝 떨어져도 합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게 눈에 보였다.
게다가 파인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그녀만의 장점이 있었으니, 바로 드래곤 오브 덕분에 마기의 영향을 덜 받는다는 것이었다.
“저니 님. 그거 얼마라고 했죠?”
“네? 뭐가 얼마예요?”
“그… 발토라에서 카나 님한테 받은 마도구요.”
“아, 이거요? 카나 덕분에 좀 싸게 샀는데 원래 가격은-”
나도 하나 장만할까.
그렇게 생각하며 가격을 물어본 파인은 다은의 대답을 듣고 곧바로 마음을 접었다.
“이번 파티는 얼마나 버틸까요?”
파인은 화제를 돌렸다.
“전 3분이요.”
“오… 1컵라면. 그럼 전 1분에 걸게요.”
“다들 너무 야박한 거 아니에요? 오래 버틸 수도 있죠.”
“그러면 파인 님은 5분 이상에 거는 거로-”
“2분. 2분으로 할게요.”
“에이 노잼.”
다른 파티가 결계에 들어갈 때마다 얼마나 오래 버틸지 내기하는 건 시간을 때우기에 좋은 방법이었다.
참고로, 지금까지 5분을 넘긴 파티는 단 한 파티도 없어서, 5분 이상에 거는 행위는 그들 사이에서 역배이자 용기의 상징이 되었다.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으니 기실 용기가 아니라 무모함이라고 불러야 마땅하겠지만.
타이머가 2분을 막 넘어섰을 때 결계의 입구가 열렸다.
“아… 조금만 더 버텨주지. 면이 익지도 않았겠네.”
“생라면도 나쁘지 않죠.”
일행이 땅바닥에 붙였던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아무리 트라이 시간이 짧다고는 해도 기다리는 게 지루한 건 어쩔 수 없네요.”
“실리아 온라인 전문 초대기업 스트리머 저니 님이 나선다면 기다리지 않고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요?”
“…농담하시는 거죠?”
다은이 질린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머리를 흔들었다.
“저는 실리아 전문 스트리머도 아니고, 그럴 힘도 없어요. 안 그래도 저번 일 때문에 논란 항목이 새로 생겼다구요.”
“논란이요? 아, 갑질 논란.”
“…알고 계시면서 일부러 그러신 거죠?”
“어후, 제가 어떻게 초대기업 스트리머 저니 님께 그런 짓을 하겠어요. 그나저나 갑질 논란이라니. 조금 재밌긴 하네요.”
“뭐… 무리한 부탁은 맞았으니까요.”
“입장 안 할 거야?”
진작에 입구에 서 있던 유키가 대검을 툭툭 두드리며 불만을 토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주변에서도 뒤에서도 따가운 눈총이 날아들고 있었다.
이번에 입장할 차례인 파인의 공대가 꾸물거리면 순번을 기다리는 이들도 입장이 지체된다.
기다리는 게 너무 좋다거나, 시간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게 취미인 사람이 아니라면 달가울 수 없었다.
보스룸에 입장하는 것과 동시에 마기가 그들의 몸을 휘감으며 HP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다른 레이드 같았으면 탱커가 보스를 풀링 하며 전투가 시작된다.
다르게 말하면 인지 범위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전투가 시작되지 않기에, 전투에 돌입하기 전 주의할 점을 다시 상기시키거나 했다.
“말 안 해도 알죠? 힐러들은 도트 힐 지속 시간이랑 낙인 관리 특히 신경 쓰고.”
그러나 카나 레이드는 입장 즉시 목을 조여오는 마기 때문에 느긋하게 대화를 나눌 시간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서.
파인은 정말 중요한 내용만 속사포로 퍼부었다.
“자. 이번에는 5분 이상 버텨보죠.”
짧은 카운트 다운이 끝나고.
파인의 공대는 멍하니 앉아 있는 분홍색 소녀에게 일제히 달려들었다.
파인은 얼핏, 그런 생각을 했다.
만약 누가 이 광경을 본다면 어른 여덟 명이 연약한 소녀 하나를 괴롭히는 무참한 광경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파인은 검을 휘두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원래 세상일은 멀리서 볼 땐 희극이요,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하지 않던가.
마냥 가녀리게 보이는 저 소녀는 수많은 공대를 갈아버린 괴물이다.
불쌍하다고 망설이면 그를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
파인은 마음을 다잡았고.
[You Died]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 이번에는 5분 이상 버텨보죠
-역배충들 정신이 들어? ㅋㅋㅋㅋ
-내 추억이 사라졌어…
-여긴 어디?? 난 누구??
익숙한 문구를 받아들었다.
전투 시작 후 4분이 넘은 때였다.
* * *
“이걸로 엿새째구나.”
로브를 눌러쓴 남자가 조용히 내려앉았다.
아무리 조용히 내려앉았다고 해도 모습까지 보이지 않을 리 없거늘, 결계 앞에 진을 치고 있는 인파 중 갑자기 나타난 남자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게 당연하다는 태도로 걸음을 옮긴 남자가 결계에 손을 올렸다.
우웅!
“아이쿠.”
“…뭐야?”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어?”
남자의 손에 반발하듯 결계가 거세게 요동쳤다.
“그런 꼴이 되어서도 자네는 여전히 지랄맞구나.”
제국의 현자인 남자가 펼친 결계는 어느새 저 높은 윗부분까지 검게 물들어 있었다.
이만큼 잡아먹힌 이상 제어권을 되찾는 건 무리다.
괜히 건드렸다간 남자의 마나를 느낀 괴물이 결계를 부수고 뛰쳐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남자가 다시 손을 거둬들였다.
“자네가 그토록 아끼는 사도를 보면 정신을 차릴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남자의 눈길이 한 여자에게 가서 닿았다.
살짝 올라간 눈매가 인상적인 여자가 우울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풍기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판이었나 봐. 내 생각만큼 인연이 깊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자네가 갇힌 감옥이 그만큼 견고했던 걸까.”
게다가 다른 목적도 이루지 못했다.
“실에 매달려 춤추는 꼭두각시도 상대하지 못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하지만 괜찮다.
이런 흐름도 신 에델이 생각하고 있던 흐름 중 하나였으니.
언뜻, 로브 사이로 슬쩍 드러난 남자의 얼굴에 안타까운 빛이 스쳤다.
“내가 여기까지 온 건 자네에게 작별 인사를 나누기 위해서야. 비록 적이었지만, 자네는 경의를 표할 만한 사람이었거든.”
그라시스가 아니라 제국에서 태어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남자는 그것이 못내 아쉬워서 카나를 끌어들이기 위해 수도 없이 노력했지만, 노력으로는 아버지를 잃은 아이의 분노를 무너뜨릴 수 없었다.
“날이 밝으면 이 결계는 완전히 무너지겠지.”
설령 무너지지 않다고 해도 제어권을 완전히 빼앗긴 결계는 더 이상 괴물을 잡아둘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제국에서 가장 날카로운 검이 괴물을 맞이하리라.
이미 그를 위한 준비는 모두 끝났다.
남은 것은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는 것뿐.
“자네와 싸우는 건 제법 즐거웠어.”
작별 인사치고 다소 가벼운 한마디를 남긴 남자가 돌아섰다.
한 걸음, 두 걸음.
발걸음을 옮기던 남자의 모습이 어느 순간 홀연히 사라졌다.
“…?”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저기… 누가 있지 않았나요?”
“네? 아무도 없는데요?”
“그런가…?”
“피곤하신가 봐요. 잠시 쉬고 계세요.”
분명 누군가 있었던 것 같은데.
다은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순순히 나무에 등을 기댔다.
그 말대로, 너무 피곤해서 환각을 본 걸지도 몰라.
‘…피곤해.’
다은이 아른거리는 흰 잔상을 무시하며 살포시 눈을 감았다.
* * *
파인의 공대는 끝끝내 토벌에 실패했고.
일곱 번째 태양이 밝았다.
하늘 끝에 닿을 것처럼 우뚝 서 있던 결계가 완전히 검게 물들었다.
우우우우-
이제는 은빛이 아니라 칠흑빛을 띤 결계가 불길한 울음소리를 냈다.
그와 동시에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거세게 흔들리는 결계.
우뚝.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흔들리던 결계가 거짓말처럼 멈춰섰다.
버텨낸 걸까.
“…휴우.”
지켜보던 이 중 하나가 무심코 안도의 한숨을 흘렸을 때.
사아아-
설탕이 물에 녹아 사라지듯.
모래성이 바람에 날려 무너지듯.
거대한 장벽이 서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비현실적인 광경에 모든 이가 넋을 놓고 바라보는 와중에도 장벽은 빠른 속도로 녹아내려 어느새 조금 높은 담벼락 수준으로 작아졌다.
그리고 마침내, 흔적도 없이 녹아내리고.
결계에 갇혀있던 짙은 마기가 폭풍처럼 몰아쳤다.
“…커흡!”
“수, 숨이…!”
결계에 가까이 있던 이들이 목을 틀어쥐며 고통스러워했다.
위기를 깨닫고 재빨리 물러난 사람은 살았으나, 그러지 못한 이들은 여지없이 싸늘하게 식은 채 땅바닥에 몸을 뉘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전장.
타박.
작은 발걸음 소리가 내려앉았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본 누군가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마왕.”
짙은 마기 사이로 분홍색 눈동자 한 쌍이 요요히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