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이 말이 아니네.”
오랜만에 본 에델은 내 기억 속 모습과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순간 다른 사람…. 아니, 다른 신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찬란한 신성력을 머금어 밝게 빛나던 머리카락은 그 빛을 잃었고, 반짝이던 눈동자엔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아하하.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아? 피차 같은 처지끼리 그러는 거 아니야.”
“음….”
…그렇긴 하지.
에델의 말마따나, 그녀의 꼴을 지적하기엔 내 형편도 마냥 좋지 않긴 했다.
이런 꼴로 지적해 봤자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 나무라는 꼴밖에 더 될까.
그래서 나는 다른 화젯거리를 찾았다.
“…여긴 어디야?”
승천 의식을 치르던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눈을 감았다 떠보니 이상한 곳에 와 있다.
푸른빛을 띤 하늘에는 별을 닮은 무언가가 무수히 빛나고 있었고, 강에는 하늘의 일부분을 잘라 붙인 듯 별바다가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내 말을 들은 에델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묻는 것도 아니고. 이제 와서 그걸 묻는 거야?”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고 했어.”
“그건 그냥 늦은 거야.”
“하지만 눈 뜨자마자 보인 게 에델이었는걸.”
그게 싫었으면 내 눈앞에 있지도 말았어야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어도 나와 같은 반응을 보였을걸.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눈 뜨자마자 다른 사람한테 시비를 걸진 않았을 거야.”
한숨을 쉰 에델이 몸을 돌렸다.
그녀의 뒷모습 위로 한 줄기 유성이 꼬리를 길게 끌며 떨어졌다.
“네 심상 속 세계…. 같은 말을 기대한 건 아니지?”
“그럴 리가.”
내 심상 세계가 이렇게 평화로울 리 없고, 이렇게 아름다울 리도 없다.
물론 심상 세계라는 게 정말로 있다면 말이지만.
“글쎄, 뭐라고 해야 할까? 영혼이 순환하는 곳? 세계의 근원? 내 집? 뭐가 됐든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곳은 아니야.”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고?”
“맞아. 원래는 이렇게 너와 내가 대화를 나누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야.”
“이해가 안 되는데.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면 내가 여기 있을 수도 없잖아. 하지만 나는 이 자리에 있는데?”
“그래서 원래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잖아.”
에델이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네가 육신을 갖고 있었더라면 이곳에 오지도 못했을 테니까.”
“뭐?”
“설마, 지금 그게 네 몸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그럼 이게 내 몸이 아니면 뭔데.”
근육이라곤 보이지 않는 팔을 살짝 꼬집자, 꼬집히는 감각과 더불어 보들보들한 감촉이 그대로 느껴졌다.
…인정하기 싫지만 짤막한 눈높이도, 작달막한 팔다리도 내가 아는 그대로다.
허리께에서 찰랑찰랑 흔들리는 분홍색 머리카락까지 확인을 마친 나는 다시 에델에게 시선을 옮겼다.
부들거리며 웃음을 참던 에델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끝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푸흡! 판단 기준이 그거야?”
“웃지 마.”
“미안, 미안.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네.”
에델이 눈꼬리에 맺힌 눈물방울을 닦아냈다.
“착각하는 것 같으니 말해줄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건 네 영혼뿐이야. 네 육체는 하계에서 신나게 놀고 있지. 처음부터 그런 계획이었잖아?”
“…아.”
그래, 그랬었지.
에델의 말을 듣는 순간 흐릿했던 기억이 맑아졌다.
“승천 의식의 부담을 오롯이 영혼에 넘긴다….”
“네 육체는 락시아의 모든 마기를 견딜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지 않으니까.”
마스터 경지에 오른 몸이니 다른 사람보다 튼튼한 건 맞지만, 막대한 양의 마기를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튼튼하지는 않다.
반면 내 영혼은 차원을 건너오며 담금질 되어 내구성 하나는 무식하게 높았고.
그러니 몸에 끼칠 부담까지 영혼에 넘겨 격의 상승을 꾀하고, 미처 처리하지 못한 마기는 에델이 처리한다….
라는 계획이었지.
이렇게 영혼이 육신 밖으로 튕겨 나올 것도 상정 범위 내였다.
그리고 이제야 에델이 왜 저런 모습이 됐는지도 알 수 있었다.
“솔직히 조금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잘 해줬어.”
“…성공한 거야?”
계획대로 됐다면 그 격인지 뭔지가 상승했을 텐데 딱히 느껴지는 것은 없었다.
마스터에 오를 때 세상을 손에 거머쥔 듯한 느낌을 받은 것과 달리.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가늠하고 있으니 에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최상의 결과까지는 아니어도 만족할 만한 결과야. 락시아로 모이는 마나의 흐름을 비틀어 내게 향하게 했고, 마족들의 체질도 개선했지. 이제 예전처럼 마기 때문에 박해받는 일은 없을 거야.”
“진작에 그랬으면 얼마나 좋아.”
“차원수가 쳐들어오지 않았으면 이럴 필요도 없었어. 이게 더 위험한 방법이기도 하고. 자칫하면 신의 자격을 잃고 전락할 수도 있다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 아니야?”
“다르지. 지금은 내가 전락하더라도 대신 관리해 줄 상위 존재가 있잖아. 그건 됐고, 이리 와볼래?”
에델이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내가 곁에 다가가자 에델은 신성력을 끌어내 둥근 원을 그렸다.
환하게 빛나던 빛무리가 사라진 자리에 둥근 거울이 생겨났다.
그것이 비추는 건 내 모습이었지만 내가 아니었다.
소녀가 수십, 어쩌면 수백의 사람과 맞서는 걸 본 나는 에델이 무얼 보여주려고 했는지 단박에 이해하고 불퉁하게 말했다.
“굳이 이런 연극을 할 필요 있어?”
“연극이라니.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거란다. 네 몸이 다른 사람을 해치지 못하게 말이야. 마음대로 날뛰게 두었다가 네 소중한 사람들을 해치기라도 하면 슬프지 않겠니?”
“….”
“최상의 결말은 네가 승천 의식의 부담을 완벽하게 버티는 것이었지만, 그렇게 하지는 못했잖아? 그러면 차선책을 쓰는 수밖에 없지.”
“쯧.”
이해는 하고 있지만, 거울 안에서 춤추는 내 모습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어서.
나는 괜스레 혀를 찼다.
왜 저렇게 비효율적인 공격을 하는 거야.
우스꽝스러운 검술은 또 뭐고.
보다 못한 나는 에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남의 몸을 조종할 거라면 제대로 좀 해봐.”
“…내가 조종하는 게 아니거든? 할 수 있어도 하지도 않았을 테고. 명색이 신인데 학살 같은 짓을 하면 되겠니?”
“제국 놈들은 그래도 돼.”
“안 돼. 정 하고 싶으면 네가 직접 하든가.”
“…흥.”
할 수 있었으면 진작 했겠지.
그러지 못하는 걸 아니까 저런 말을 하는 것이리라.
재미없어.
“네 재미는 상관없고.”
쪼그려 앉아 거울을 들여다보던 에델이 몸을 일으켰다.
나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동자엔 방금까지 있던 장난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이제 슬슬 마음을 정해야 하지 않겠니?”
“….”
“시간은 충분히 줬…다고는 못하지만, 이제는 선택해야 할 때야. 어느 쪽을 선택하든 장단점은 있어. 선택의 아쉬움도 분명 존재하겠지.”
갑작스러운 말…은 아니지.
계획대로 흘러간다면 이런 결말이 기다릴 것이라고 에델이 이미 말했었으니까.
“자. 어떻게 할 거니?”
이 세계에 남아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할 것인지.
아니면 저쪽 세계로 넘어갈 것인지.
“선택하렴.”
나는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거울 속의 ‘나’는 여전히 제국군과 검을 맞대고 있었다.
이따금씩 익숙한 얼굴들과, 몸 곳곳에 붉은 상처가 보이는 걸 보면 저쪽도 어지간히 각오를 하고 온 모양이다.
‘…돌이켜보면.’
처음 정신이 든 순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는 순탄함이라는 말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거울 속의 소녀가 춤춘다.
검은색 검이 주욱 늘어나며 소녀에게 달려들던 기사의 어깻죽지를 갈랐다.
소리가 들리진 않지만, 크게 벌어진 입이 비명을 지르고 있으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수도 없이 본 광경이니까..
공포와 피비린내가 적절하게 버무려진 죽음의 냄새도, 증오에 물든 표정도 익숙했다.
그나마 행복했던 시절에도 내 손에는 항상 검이 들려 있었으니, 절대 순탄하다고 할 수 없겠지.
‘다만-’
그런 삶이라도 기억에 남는 것들은 있었다.
그 기억들이 있기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지만.
나를 지탱해 주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은 내 곁을 떠나갔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망설이는 건 왜일까.
“….”
망설이는 사이, 소녀의 몸에 두어 개의 상처가 더 생겼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불덩이가 마기에 부딪혀 사방에 불씨를 흩뿌렸다.
문득, 소녀의 눈과 마주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잔뜩 일그러진 눈에 담긴 감정을 읽는 순간, 나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입을 열었다.
“…나는.”
* * *
“…더럽게 강하군.”
퉷.
제국의 네 번째 검.
로버트가 침을 뱉자 검게 죽은 핏덩이가 철퍽 바닥에 떨어졌다.
로버트는 그것에 얼굴을 찡그릴 새도 없이 몸을 날렸다.
카가가각!
어느새 다가온 소녀가 칠흑색 검을 그의 목에 겨누고 있었다.
소녀를 향해 커다란 불덩이가 기습적으로 날아들었다.
분홍색 눈동자가 흘깃 그것을 향하는가 싶더니, 로버트를 짓누르던 무게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쾅!
요란한 폭음이 울리고, 일순 일었던 흙먼지가 가라앉았을 땐 소녀는 이미 뒤로 훌쩍 물러난 후였다.
숨을 돌린 로버트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무얼. 동료라면 당연한 일인걸. 언제 덮쳐올지 모르니까 한눈팔지 마.”
“예.”
현자의 말에 답한 로버트가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소녀를 주시했다.
분홍색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소녀는 그도 익히 아는 인물이었다.
제국의 적, 붉은 사신, 죽음의 새, 재앙….
마냥 순해 보이는 외견과 다르게 흉흉하기 짝이 없는 호칭이 덕지덕지 붙은 소녀였다.
제국에 비하면 작은 나라에 불과한 그라시스를 쉽게 무너뜨리지 못한 건 저 소녀의 공이 컸다.
전력을 투자해서 제압하자니 그라시스에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게 아니고, 내버려두자니 전장에 나타날 때마다 병력을 말 그대로 분쇄해 버린다.
이래저래 껄끄러운 상대.
소녀에 대한 로버트의 생각은 그러했다.
“이성이 없어서 다행입니다. 저런 힘을 제정신으로 휘두른다고 생각하면 끔찍하군요.”
현묘한 기술 없이 힘으로 찍어 누르는데도 이 정도인데, 기술이 깃든다면 어떨까.
“이성이 있었으면 이러고 있지도 않았겠지.”
“하기야 그것도 그렇군요.”
소녀가 물러나면서 생긴 아주 잠깐 생긴 여유를 틈타 로버트가 빠르게 전황을 파악했다.
아르디나 대륙을 위협하는 소녀.
그 소녀를 토벌하기 위해 데려온 기사의 절반 이상이 죽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기사들도 부상을 입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와, 미친… 이게 말이 되냐?”
“말 안 되면 어쩔 건데? 떠들 시간 있으면 빨리 싸워!”
로버트가 전황을 파악하는 사이에도 사도들이 소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모습이 꽤나 기특했지만, 그들의 공격은 전황에 그다지 도움이 되진 않았다.
“아아악!”
한 합을 버티기는커녕 다가가지도 못하고 죽는 경우가 대다수였으니.
저들은 쓸모가 없다.
냉정하게 평가를 내린 로버트가 나지막이 말했다.
“레딘 경.”
“왜 부르심까?”
껄렁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앞으로 몇 발이나 쏠 수 있습니까?”
“화살이야 원 없이 쏠 수 있죠. 저 빌어먹을 마기 때문에 맞질 않으니 문제지.”
로버트의 곁에 다가온 제국의 다섯 번째 활, 레딘이 투덜거렸다.
활시위에 마나가 깃든 화살을 건 채로.
“제가 틈을 만들 테니 제일 강한 한 방 날릴 수 있겠습니까?”
“…허! 평소엔 활질이나 하는 나부랭이라며 무시하던 양반이 웬일입니까? 마음이 바뀌기라도 했습니까?”
“됩니까, 안 됩니까?”
“그럼 그렇지. 바뀌기는 개뿔.”
끼기기긱.
레딘이 줄을 팽팽하게 당겼다.
활의 뼈대가 둥글게 휘며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걸 질문이라고 합니까? 당연히 됩니다. 아니, 오히려 제가 부탁하고 싶군요. 제에발 틈 좀 만들어 주십쇼.”
로버트가 슬며시 웃었다.
껄렁하긴 하지만 자신의 실력에 자존심은 높은 놈이다.
소녀의 몸에 새겨진 상처 중 레딘의 화살이 만든 것은 하나도 없었다.
지금까지 이렇다 할 공격 하나 성공하지 못했으니 꽤나 기분이 상한 모양.
“일곱 번째 검은?”
“그놈 말입니까? 나대다가 한 대 맞고 뻗었는데 못 보셨슴까?”
“허어.”
그놈이 실력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나, 쉽게 상대할 만한 놈도 아닌데.
제국의 검 셋과 현자까지 왔는데 대등하게 싸우는 것도 모자라 조금씩 밀리고 있다니.
새삼 느껴지는 소녀의 무력에 로버트가 전율했다.
“어쩌면 여기가 제 무덤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오, 그러면 이제 제가 네 번째 활이 되는 겁니까?”
“….”
로버트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답할 가치가 없었거니와, 달려드는 사도들을 순식간에 해치운 소녀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뭐가 그리 원망스럽다고 저런 눈으로 보는 건지.
소녀의 눈 안에 가득 찬 증오를 바라보던 로버트가 회색 마나를 끌어올렸다.
이윽고, 그의 신형이 길게 늘어졌다.
촤아악!
소녀 앞에 나타난 로버트의 검이 평소보다 낮은 궤적을 그렸다.
성인 남성이었다면 복부 근처에 닿았을 검은 정확히 소녀의 머리를 향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이 칠흑의 검이 그의 검을 막아섰다.
콰각!
검끼리 맞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 대신 무언가를 갉아내는 블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격이 막히리란 것은 이미 알고 있던 로버트는 곧바로 다음 동작을 이행했다.
스르륵-
칠흑의 검과 맞물린 상태 그대로, 로버트의 검이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검 끝이 도착한 곳은 소녀의 새하얀 목덜미였다.
이대로 검을 찔러넣는다면 붉은 피를 내뿜으며 절명하리라.
“쳇.”
그러나 로버트는 검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맞물려 있던 자리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마기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제 몸 하나 희생하여 제국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러하겠으나, 로버트의 검을 콱 문 마기는 주인의 몸에 상처 입히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파아앗!
그가 검을 거두는 것과 동시에 송곳 형태를 한 마기가 쏘아졌다.
번뜩이는 마기는 정확히 그의 목덜미를 노리고 있었다.
의도한 걸까, 우연일까.
어느 쪽이든 위험하다는 것엔 변함이 없어서 로버트는 마나를 두른 왼손으로 그것을 쳐냈다.
“…얼얼하군.”
무거운 쇳덩이를 쳐낸 것처럼 왼손이 징징 울렸다.
틈을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했으나 좀처럼 틈이 보이질 않았다.
그러나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쉬었다가는 곧바로 심장에 마기가 틀어박힐 게 분명해서.
로버트는 한숨 대신 땅을 거세게 짓밟았다.
구웅-!
마나를 실은 육중한 충격파가 지면을 타고 퍼졌다.
로버트의 발밑에서 넘실거리던 마기가 기세에 눌려 주춤했다.
하지만 소녀는 주춤하지 않았다.
고개를 틀어 짓쳐 드는 칠흑의 검을 피하던 로버트의 머릿속에 문득 과거의 기억이 스쳤다.
‘누군가의 목숨을 노리려면 자신도 목숨을 걸어야 한다.’
막 검사의 길에 발을 들였을 무렵, 그에게 검을 가르치던 스승이 했던 말.
당연한 말이었지만, 어느 순간 잊고 있었던 말이기도 했다.
일정 경지에 오른 순간부터 그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는 이는 현저히 줄어들었으니.
굳이 목숨을 걸지 않아도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었다.
잊고 있었던 말이 이제 와서 다시금 떠오른 것은 어째서일까.
“…목숨을 걸라고 말하시는 겁니까.”
희생하여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면 그리하겠다고 말한 주제에 왜 몸을 사리고 있냐고 질책하시는 겁니까?
실제로 로버트에게 그렇게 말한 이는 아무도 없건만, 그는 헛웃음을 흘렸다.
“좋습니다. 목숨을 걸어드리죠.”
유능제강이란 말처럼, 때로는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길 때도 있는 법이지만-
압도적인 힘 차이 앞에서는 유명무실한 말이다.
그러니, 저 거대한 힘에 기술으로 대항할 생각이라면 이쪽도 어느 정도 힘을 맞춰야 한다.
적어도 검을 겨룰 수 있을 정도로는.
“흐읍…!”
로버트가 마나를 끌어올렸다.
‘이대로 계속 마나를 모으면 죽는다.’
본능이 그에게 끊임없이 외쳤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막대한 양의 마나가 그의 검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침내, 생명을 유지하는 최소한의 마나까지 끌어모은 로버트가 씨익 웃었다.
어째서인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한 시야 너머로 소녀가 긴장 어린 얼굴을 한 게 보였다.
“네 번째 검이 휘두르는 마지막 검입니다. 부디 받아주시죠.”
그 말과 함께 로버트가 검을 휘둘렀고-
─────!
하늘이 회색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빛바랜 세계로 한 줄기 섬광이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