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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35

회색 마나가 세차게 휘몰아쳤다.

“…휘유~”

활시위 너머로 몰아치는 회색 폭풍을 보며 레딘이 휘파람을 불었다.

제국의 검 중 로버트의 서열은 4위.

다섯 번째 활인 레딘보다 강한 건 사실이나, 지금 로버트가 내뿜는 기세는 고작 4위라고 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비록 레딘에게도 숨겨진 한 수가 있고, 다른 이들에게도 숨겨진 한 수가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단언할 수 있었다.

“이거, 정말로 네 번째 활이 되겠는데?”

저건 숨겨진 한 수 같은 게 아니다.

혼신의 힘을 담은 일격.

말 그대로 목숨을 대가로 걸어 얻어낸 힘이다.

살고 싶다는 본능의 외침을 억누르는 강한 의지의 발현.

그것을 본 레딘이 감탄하며 박수를 보냈다.

“캬. 우리 선배님, 충성심이 정말 대단하셔.”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손을 놓을 수 없으니 마음속으로만.

하지만 감명을 받은 건 받은 거고.

로버트처럼 목숨을 걸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충성심? 좋다 이거야.’

어쨌거나 레딘이 호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건 제국이 그를 좋게 보고 있기 때문이니까.

그래서, ‘충성심이 밥을 먹여주냐?’라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먹여주던데?’라고 답할 수는 있지만.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이 목숨을 위협한다면 충성심 따위는 아무렇지 않게 버릴 수 있었다.

“그래도 경의는 보여야겠지?”

저 고고하신 현자님께 추궁받기 싫으면 말이야.

스으으으으-

후….

서서히 느려지던 레딘의 호흡이 완전히 멈췄다.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잊은 듯 고요하게 한 곳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사람이 아니라 잘 만든 인형, 혹은 한 폭의 그림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생동감이 없었다.

레딘은 회색 마나가 만들어낸 거센 기류에 머리칼이 나부끼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목표를 주시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로버트의 검이 번뜩였고.

그의 검은 소녀의 어깨를 겨누고 있었다.

활을 쏘며 단련된 레딘의 안력으로도 어떤 과정을 거쳐 결과에 도달했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빛살 같은 쾌검조차 소녀에게 닿지 못했지만.

‘-열렸다.’

레딘의 눈은 소녀를 감싸고 있던 마기가 일순간 걷히는 걸 놓치지 않았다.

머리가 명령을 내리기 전에, 수많은 단련으로 익숙해진 손가락이 먼저 움직였다.

혹자는 말한다.

활시위에 화살을 메기고 쏘아 보내는 것에 무슨 묘리가 필요하냐고.

하지만 그런 이들조차 지금 레딘이 쏜 화살을 보며 말을 잃고 입을 다물 것이다.

활시위에 맺혀 있던 빛이 내달렸다.

파아아아앗-!!

동료라고 하기엔 먼, 아군이라고 하기엔 가까운.

로버트가 목숨을 바쳐 만든 틈으로 내달린 빛.

두 마스터의 전력을 담은 일격은 두터운 성벽을 뚫고 왕에게 닿았다.

“…!”

푸슛!

다소 가벼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결과까지 가볍진 않았으니.

빛에 적중당한 소녀의 몸이 부웅 날아올라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 카나야!”

어디선가 들려온 비명소리 같은 외침이 신호라도 된듯, 레딘이 참았던 숨을 내쉬며 활을 내렸다.

필살의 일발을 쏜 대가는 작지 않았다.

오늘은 더 이상 활을 쏘지 못하겠지만, 상관 없었다.

주변을 잠식했던 마기는 서서히 걷히고 있고, 화살에 맞아 쓰러진 사냥감은 미동조차 없이 쓰러져 있으니.

“제국의 검을 셋이나 모집한 것도 모자라 현자님까지 동행한다고 했을 땐 솔직히 과잉 전력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지간한 소국은 가뿐히 짓밟을 수 있는 전력을 고작 한 명에게 쏟아붓는다니.

이런 걸 과투자라고 하지 않으면 도대체 무엇이 과투자일까.

“그래서? 실제로 보니까 어때?”

“오히려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아 있군요. 기왕 셋이나 데려올 거였으면 더 데려오는 게 어땠습니까?”

“하하. 지엄한 규율을 어길 수는 없잖아. 유능한 인재를 둘이나 잃다니. 나도 정말 아쉬워.”

“하하….”

지엄한 규율은 무슨.

원한다면 그깟 규율은 묵과할 수 있으면서.

레딘은 속내를 숨긴 채로 현자를 따라 선한 미소를 지었다.

“망국의 망령이 이런 힘을 낼 수 있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려. 그래도, 망령은 망령이 있을 곳으로 돌아가는 게 세상의 이치지요.”

“뭐, 그건 나도 동의하는 바지만.”

현자가 스태프 끝을 바닥에 부딪쳤다.

“안심하기에는 좀 이른 것 아닌가?”

“…예? 그게 무슨-”

스윽-

“…어?”

현자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소녀가 쓰러진 곳을 바라봤던 레딘의 입에서 얼빠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화살이 심장을 관통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마스터가 아니라 초월에 이른 강자일지라도 심장이 꿰뚫리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분명 그럴진대.

“…어떻게?”

심장이 꿰뚫렸던 소녀가 비척비척 일어나고 있었다.

소녀의 가슴팍에는 화살이 관통하고 간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레딘이 경악하고 있는 사이, 완전히 몸을 일으킨 소녀가 쿨럭 피를 토했다.

“…아프잖아.”

“…말을 했어?”

“말하는 사람 처음 봐?”

뚱하게 말하던 소녀, 카나가 문득 손에 들린 검을 내려다봤다.

“흥.”

손을 훌훌 털자 칠흑의 검이 먼지처럼 흩어져 날아갔다.

하나뿐인 무기가 사라져 빈손이 되었을 카나의 손에 어느샌가 연한 적색의 검이 들려 있었다.

“정말 답답해 죽을 뻔했어.”

마기가 위협적인 무기인 건 맞지만, 무식하게 휘두르기만 하면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강한 무기를 그렇게밖에 못 다루다니.

관리자인지 뭔지가 만든 시스템이라는 것도 형편없구나.

“남의 가슴에 구멍을 뻥 뚫어대기나 하고 말이야. …뭐, 덕분에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으니 고맙다고 해야 하나.”

척.

날카로운 검 끝이 레딘을 가리켰다.

검신을 타고 세 가지 빛깔의 마나가 흘러내렸다.

보는 것만 해도 불길한 느낌이 드는 검은 마나.

모든 것을 잡아 찢을 듯한 흉포한 붉은 마나.

다른 둘만큼 특색이 있는 건 아니지만, 존재감만은 다른 둘에 뒤지지 않는 분홍색 마나.

“미친.”

세 가지 빛깔의 마나가 섞이지도, 그렇다고 반발하지도 않은 채 자연스레 어우러진 걸 본 레딘이 헛웃음을 흘렸다.

세 가지 색이라니.

너무 현실성이 없어서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자. 이제부터 2페이즈야.”

“2페이즈?”

“아, 이렇게 말하면 못 알아듣겠구나.”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카나가 팔을 뒤로 당겼다.

검을 들고 있던 바로 그 팔을.

“…!”

위험…!

생각할 겨를도 없이 레딘의 몸이 바닥을 굴렀다.

“크윽!”

둔탁한 충격이 레딘을 찌르르하게 휘감았다.

정말 운신이 가능할 정도의 힘만 남겼기에, 레딘의 몸은 갑작스러운 명령에 따르면서도 고통을 호소했다.

그러나 그깟 고통은 중요하지 않았다.

만약 몸을 날리지 않았더라면 고통을 느끼지도 못하는 신세가 됐을 테니.

“하, 하하….”

레딘의 뒤로 펼쳐진 풍경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푸르른 산 한복판이 둥근 원기둥으로 도려낸 듯 말끔하게 뚫려 있었다.

“똑같이 만들어 주려고 했는데.”

피했네.

“똑같이?”

카나의 혼잣말을 들은 레딘이 반사적으로 따라 했다.

똑같기는 개뿔이.

저런 걸 맞았다간 몸에 구멍이 뚫리는 선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언제 ‘레딘’이라는 사람이 있었냐는 것처럼.

레딘의 목소리에 담긴 감정을 읽은 카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안 죽을 수도 있잖아.”

“아니. 저런 걸 맞으면 드래곤도 죽을걸?”

“과장이 심하네. 날 봐. 가슴에 구멍이 났는데도 살아있잖아.”

콜록.

카나가 기침하자 검붉은 피가 입에서 울컥 쏟아졌다.

그와 동시에 가슴팍을 가린 옷도 짙게 물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딘이 툭 내뱉었다.

“괴물 새끼.”

“제국 놈들은 항상 그렇게 말하더라.”

“괴물을 보고 괴물이라고 하는 건 당연한 말 아닌가?”

“음….”

카나는 반박하지 않았다.

여기서 반박해 봤자 듣지도 않을뿐더러.

애초에 살갑게 대화를 나눌 사이도 아니지 않은가.

카나는 가슴에 구멍을 뚫은 상대와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는 성인군자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오, 제정신을 차렸네.”

“….”

“그렇게 얼굴을 구기면 나라도 상처를 받는데.”

“미안. 뱀 혐오증이 있어서.”

“아하하. 이해할게. 원래 자네 나이대 여자아이들은 까탈스러운 법이니까. 자네 정도면 오히려 원만한 편이지.”

“그래? 그렇다면 안타깝게 됐네.”

“….”

예상과 다른 반응.

당장이라도 이를 드러내고 달려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덤덤한 반응에 현자가 얼굴을 굳혔다.

“그 까탈. 한 번 부려볼 생각이거든.”

“이런….”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검기가 날아들었다.

아니, 그것은 이미 검기가 아니라 하나의 현상이었다.

현자가 다급하게 스태프를 휘둘렀다.

한때는 누군가를 가두기 위해 펼쳤던 결계가 이번에는 그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펼쳐졌다.

급하게 만든 결계이나, 마법의 정점에 이른 이가 펼친 결계인 만큼 어지간한 공격으로는 흠집조차 남기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닥치고 있는 공격은 그런 ‘어지간한 공격’이 아니었다.

세 가지 마나의 특성을 고스란히 담은 검기가 결계에 닿았다.

까드드득!


콰지직!


촤아아악!

결계와 충돌한 검기가 결계를 물어뜯고, 찢어발기고, 절삭했다.

고절한 현자가 펼친 결계도 그 앞에서는 한낱 하급 몬스터의 가죽과 다를 바 없었으니.

시간을 들였다면- 이라는 가정을 하는 건 무의미했다.

현자의 손에 들린 스태프가 밝게 빛났다.

스태프에 박힌 마석들도 함께 빛났다.

은빛 실이 허공을 수놓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완성된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약.

마법진이 빛난 순간, 현자의 시야에는 카나의 뒷모습이 담겨 있었다.

아무런 방어 없이 텅 비어 있는 등.

쩌적-

가녀린 등에 산산이 부서진 허공이 내리꽂혔다.

콰릉!

번쩍-!

우렛소리가 일더니, 눈부신 섬광이 내리꽂혔다.

멀쩡한 산에 구멍을 뚫은 것에 대한 분노일까.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번개의 창은 신의 분노를 연상케 하기 충분했다.

평범한 마법사들은 원리조차 알 수 없을 고도의 마법이 한순간에 쏟아졌다.

왜 그가 제국의 현자라고 불리는지.

그 이유를 여지없이 보여주었지만, 정작 현자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파지지지…

땅을 타고 흐르던 전류가 사그라들고, 부서졌던 허공이 메꿔졌다.

번개의 충격으로 푹 들어간 구덩이 속에서 분홍색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승부로 하지 않을래?”

“그런 말을 할 거였으면 공격을 하지도 말았어야지. 그랬으면 조금은 생각해 봤을 텐데.”

“자네가 먼저 공격했잖아. 이건 정당방위지.”

“정당방위가 아니라 과잉 대응이야. 난 한 번. 넌 두 번.”

“이 사람아, 그렇게 따지면 어떡해? 자네가 한 공격의 위력을 생각해야지.”

“…난 그런 거 몰라.”

카나가 대꾸했다.

“그리고 가만히 있던 날 먼저 공격한 건 그쪽이잖아. 그러니까 이쪽이야말로 정당방위야.”

“말은 바로 해야지. 그런 식으로 따지면 난 자네의 옛 부하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인걸?”

“…그건 고맙게 생각해.”

그 녀석도 내 미련 중 하나니까.

내 손으로 미련을 없애는 걸 막은 건 고마워.

“그건 그거고. 우리에겐 남은 앙금이 있잖아.”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뿌리박힌 앙금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둘 사이에 평화로운 해결이라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그렇구나.”

카나의 의지를 확인한 현자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설득이 불가능할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카나가 그의 목숨을 노리고 달려들 것이라는 것 또한.

그럼에도 그는 덤덤했다.

“유감이야. 자네의 분을 풀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내 목에 걸려 있는 게 좀 많거든.”

애초에 이 자리에 있는 것은 그이되, 그가 아니었으니까.

이 자리에서 심장이 찔려 죽어도 그는 죽지 않는다.

“자네도 알잖아?”

“그런 것 치고는 꽁무니가 빠지게 도망가던데.”

“이 몸은 아직 할 일이 남아서 죽게 내버려둘 수 없거든.”

“아하, 그래?”

카나가 검을 재차 들어 올렸다.

‘…쓸모없는 짓을.’

분신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게, 멀쩡해 보여도 완전히 눈이 돌아갔나 보군.

현자의 눈이 시시각각 줄어드는 카나의 생명력을 읽었다.

저렇게 흥분해서 날뛰면 머지않은 시기에 죽음을 맞이할 터.

현자는 곧 다가올 미래를 예언하며 곧 닥쳐올 공격을 대비해 마법진을 그렸다.

콱!

그러나

현자의 생각과 달리 카나의 검은 그가 있는 곳이 아닌 다른 곳을 찔렀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

적색의 검이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꿰뚫은 것처럼 우뚝 멈춰 섰다.

“뭐 하는-”

영문을 알 수 없는 기행에 현자가 의문을 표하려던 때.

희고 여린 손이, 검이 꿰뚫은 허공 너머를 움켜쥐었다.

“…?!”

현자의 몸이 누군가에 의해 이끌리듯 허공을 날았다.

‘…아니!’

거친 부유감에 내내 덤덤하던 현자의 눈이 크게 뜨이고.

그런 그의 눈앞에서, 분홍색 소녀가 방긋 웃었다.

“아핫! 드디어 잡았다.”

“무슨-”

그가 뭐라고 반응할 시간도 없이 카나가 팔을 휘둘렀고.

또다시 거친 부유감이 현자를 감싸안는가 싶더니.

“커헉!”

딱딱한 땅바닥이 그를 맞이했다.

“둥지에서 끌려 나온 기분이 어때?”

고통에 움찔거리는 ‘현자’를 내려다보며 카나가 밝게 웃었다.


           


I Became a Raid Boss

I Became a Raid Boss

레이드 보스가 되었다
Score 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One day, when I came to my senses, I found myself reincarnated in another world. After enduring a rough life post-reincarnation, I thought I could finally settle down, quietly tending to a flower garden in the mountains… …But something feels o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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