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
살짝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자, 손에 들려 있던 적색의 검이 작은 마나 알갱이로 흩어져 사라졌다.
마나로 이루어진 검이 이래서 좋다.
힘을 좀 과하게 담아도 부서지지 않으니까.
물론, 내구성 이상으로 코스트를 많이 잡아먹는 데다가 난도가 무식하게 높아서 즐겨 쓸 만한 기술은 아니지만.
괜히 검사들이 명검을 찾기 위해 목을 매는 게 아니지.
고밀도의 마나를 정밀하게 짜올리고, 흔들리지 않게 유지하며 싸울 바엔 튼튼하고 잘 드는 검 하나 구해서 휘두르는 게 훨씬 편하거든.
손에 진득하게 남은 그라시드의 마나를 훌훌 털어버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세상을 물들이던 광채가 사그라진 자리.
한 명의 노인이 서 있었다.
“역시 마스터 메이지… 라고 해야 할까. 그걸 버틸 줄은 몰랐어.”
그런 말도 있잖아.
‘설령 부모의 원수라도 그건 좀….’이라는 말.
대충 그렇게 악독한 짓은 도저히 할 수 없다고 할 때나, 타인의 선택을 필사적으로 만류할 때 쓰는 말이지만.
반대로 말하면, 부모의 원수라는 것은 그 정도로 원한이 깊다는 뜻이다.
나에게 있어 저 노인은 그런 존재였다.
아빠의 목숨을 앗아간, 불구대천의 원수.
하지만, 같은 하늘을 이고 살아갈 수 없는 원수일지라도 그의 능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감탄을 숨기지 않고 담아낸 내 목소리에 노인이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밝은 빛 아래 드러난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고요했다.
“버텼다니. 자네 눈에는 이게 버틴 걸로 보여?”
“응.”
그야, 반으로 잘라 버릴 생각으로 한 공격이었는걸.
“두 쪽 나서 죽지 않은 것만 해도 잘 버텼다고 생각해.”
“하하…. 이걸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그보다, 말투 좀 고치지 그래. 다 늙은 얼굴로 그런 말투 쓰니까 어색해 죽을 것 같은데.”
“이미 입에 붙어서 무리야. 이제 와서 고치려고 해도 늦었잖아.”
“쯧.”
중후한 목소리로 해맑게 말하는 게 엄청난 괴리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지만 뭐 어쩌겠어.
그의 말마따나 이미 늦은 게 사실인걸.
붉은 선이 노인의 가슴 한복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끝에 닿지는 않았지만, 치명상이란 건 변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당한 게 평범한 공격이었고, 실력 있는 사제가 근처에 있었다면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상처를 타고 스며든 마나는 노인의 몸을 끊임없이 갉아 먹고, 불태우고, 썩히고 있었다.
예전에 아빠가 당했던 것처럼.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붉은 선을 더듬던 노인이 툭 내던지듯 말했다.
“자네는 얼마나 남았어?”
“글쎄. 적어도 너보단 많이 남았을걸.”
“나이가 나이인데 당연히 그래야지.”
“가는 데 순서 없어.”
“그래도 백 살 넘은 노인보다는 오래 살아야 하지 않겠어?”
“…나이가 좀 많네.”
“하하. 사실 나도 내 나이가 정확히 몇 살인지 몰라. 백 살 이후로는 세는 걸 포기했거든.”
“….”
저렇게 말하니까 꼭 내가 노인 공격을 일삼는 후레자식 같잖아.
목숨을 건 싸움에 나이 같은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상처를 타고 스며든 마기가 노인의 목을 타고 얼굴까지 올라갔다.
노인이 검게 물든 얼굴로 말했다.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지 않겠어?”
“우리가 그렇게 살가운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러지 말고. 곧 죽을 놈 소원 들어주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잖아. 내가 자네 아버지 묘를 지키려고 얼마나 노력한 줄 알아? 잡놈들이 왜 이렇게 많이 꼬이는지….”
“…일단 들어나 볼게.”
“오, 고마워.”
노인이 스태프를 내보였다.
모가지만 간신히 덜렁거리는 쪼개지기 직전인 스태프.
그것을 보인 노인의 시선이 몇 군데를 더 훑었고, 내 눈도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가루가 된 롱소드.
파편만 간신히 남은 활.
앞서 본 셋보다는 멀쩡해 보여도 날이 완전히 나가서 수리가 필요해 보이는 대검.
“자네의 분이 상당한 건 알고 있어. 그래도, 제국의 검 셋과 현자 하나의 목숨이면 어느 정도 분풀이가 되지 않았어?”
“이건 또….”
나는 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챘다.
“…굉장히 새롭네.”
그토록 당당하던 제국의 현자가 동정을 구걸할 줄이야.
내 감상에 그가 턱수염을 쓸었다.
“패배한 개가 승자의 자비를 구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잖아?”
“뭐, 맞는 말이긴 한데… 너라면 끝까지 버틸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눈을 감기 전에는 제국에 손가락 하나 댈 수 없다!’ 같은 느낌으로.”
“하하. 재밌네.”
웃음을 흘리면서도 노인은 내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하기야, 죽음이 목전에 이르렀는데 비장한 말을 해봤자 아무 소용없긴 하지.
‘자비, 라….’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기실, 굳이 부탁할 필요도 없었다.
복수하라고 부추겨도 할 수 없는 몸이니까.
게다가 증오심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현자를 내 손으로 잡아 죽인 덕분에, 이젠 제국에 남은 감정이 그리 크지도 않았다.
애초에 현자의 손에 아빠가 죽은 게 아니었다면 제국에 별다른 유감도 없었을 거야.
“…고마워.”
대답을 들은 노인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빛이 사라진 눈동자가 눈꺼풀 아래로 사라졌다.
그것이, 현자라 불리던 노인의 마지막이었다.
“…마지막까지도 정말 안 어울리네.”
복수는 허망하다고 하던데.
글쎄.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을 콕 집어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구태여 말해 보자면 허망함보다 상쾌함이나 해방감에 가까웠다.
아마도, 마족들도 이런 기분 아니었을까.
“후우.”
눈꺼풀이 조금 무겁게 느껴졌다.
이대로 드러누워서 한숨 자고 싶다는 마음이 무럭무럭 자라났지만, 아쉽게도 나에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몸에 있던 마기를 모조리 끄집어내서 허공에 흩어놓았다.
일부는 주변에 머물렀고, 일부는 공기 중으로 녹아들듯 멀리 날아갔으며, 또 일부는 저 드높은 하늘 어딘가로 사라졌다.
실리아 세계의 마기를 모두 없애는 건 불가능했다.
이 세계를 이루고 유지하는 게 마나인 이상, 마나의 오염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니까.
막을 수 없다면 차라리 적응하게 한다.
락시아에 마기를 몰아넣는 기존의 시스템을 실리아 세계 전역으로 흩어 놓는 시스템으로 바꾼 것은 그런 이유였다.
그러다가 마기가 일정 이상 모이면 에델에게 보내져 정화하는 식으로.
‘…그게 맞아?’
‘꾹꾹 눌러 담다가 빵 터져서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것보단 낫지. 그리고 내 아이들이라면 이 정도는 극복할 수 있을 거야.’
시스템은 그렇게 바꿨고, 남은 것은 내가 품고 있던 마기뿐이었으나.
이제 그것도 끝.
죽어가는 몸을 지탱하던 두 가지 힘이 모두 빠져나가자 극심한 탈력감이 찾아왔다.
‘그래서 아쉬워?’
…조금 그럴지도 모르겠네.
목표를 이루고 나서야 뒤에 남겨진 것들이 떠올랐다.
소소하게는 언젠가 먹었던 음식부터, 추억이 깃든 장소… 내가 맺은 인연들까지.
음, 아시에는 별로 그립진 않네.
“…그러고 보니. 꽃, 가져가고 싶었는데.”
성국에 가는 것까지가 계획이었지, 그 후에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나도 몰랐거든.
한 번 물꼬를 틀자 다른 아쉬움들도 새록새록 떠올랐다.
하지만 어쩌겠어.
“이제, 조금…. 쉬어도 되겠지.”
이 정도면 나름 숨 가쁘게 달린 인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엉망이 된 전장에 주저앉아 푸르른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런 날은 좀 어두컴컴해야 분위기가 사는데.
역시 에델은 센스가 없어.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나는 한숨과 같은 중얼거림을 흘렸다.
“다음은 좀 더….”
“카나야!”
“…!”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가 부러질 듯 빠르게 돌아갔다.
몸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내 몸을 휘감은 탈력감은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익숙한 얼굴 뒤로 여러 얼굴이 보였다.
한걸음에 내 앞까지 다가온 다은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아직 힘이 남아 있는 손을 들어 팔랑팔랑 흔들었다.
“안녕.
“카나, 몸이….”
“이거?”
가슴에 손을 올리자 끈적한 피가 그대로 묻어나왔다.
“…히에에엑! 아, 안 아파?”
“음, 별로.”
아까까진 아팠는데, 이젠 별로 아프지 않다.
허전한 느낌은 들지만.
“…그게 더 위험한 거잖아! 아참, 이럴 때가 아니지! 의사, 아니, 사제! 빨리 사제한테 가자! 아아, 셀린이 있었다면…!”
탁.
“…어?”
손을 잡고 호들갑 떠는 다은의 손을 가볍게 내쳤다.
동시에 들리는 어벙한 목소리.
“소용없어.”
설령 교황이 왔어도 마찬가지다.
심장이 완전히 꿰뚫려서 바스러졌는데 어떻게 살리겠어.
마기를 통해 억지로 올린 격이 아니었으면 지금까지 살아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깜박.
“아.”
몰려오는 수마에 잠시 눈을 감았다 뜨자, 내 시선은 어느샌가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뭔가, 얼마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콜록….”
작게 기침하자 완전히 죽은 피가 입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어서 눈에 보인 건, 슬픔으로 가득 찬 얼굴이었다.
끝이 다가왔다는 걸 눈치챈 모양.
“카나야….”
싸늘하게 식은 손을 따뜻한 온기가 감싸안았다.
다은은 이전에 내게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은 적이 있다.
어떤 부모님 아래에서 태어나,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고, 어떻게 살았는지.
서로의 마음속 깊이 묻어놨던 이야기를 나누며, 다은이 품은 감정이 얕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끝내 풀리지 않는 궁금증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다은. 하나만 물어봐도 돼?”
“…응. 뭐든지.”
다은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로….
아니, 실제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답했다.
엉망이 된 다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나는 잘 움직여지지 않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뭐야 그게. 사람을 화나게 하는 방법이잖아.”
요 맹랑한 꼬맹이.
다은이 중얼거렸다.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는 일그러진 얼굴.
흉하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다은이 잊고 있던 게 생각났다는 듯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익숙한 형태의 그것은 제법 고풍스러운 면이 있는 롱소드였다.
“유스티나가 고맙다고, 전해달라고 한 물건이야.”
“그렇게 말했을 것 같진 않은데….”
그것보다, 죽어가는 사람한테 선물을 줘서 무슨 의미가 있어.
받고 싶어도 받을 수도 없고.
그러니까-
“그거.”
“어?”
“다은이 갖고 있어 줘. 보다시피, 이런 상태라서.”
그렇게 말하자 다은이 또 울상을 지었다.
한마디 할 때마다 울려고 하니까 무슨 말을 못 하겠네.
“탐난다고 멋대로 쓰진 말고.”
“…완전 마음대로 써버릴 거야. 손질도 안 할 거고, 바위에도 마구 부딪치고, 어, 또… 그래! 카나가 싫어하는 야채도 왕창 썰어버릴 거야.”
“…하?”
“그러니까-”
꾸욱.
마주 쥔 다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는 감각마저 사라져 느껴지지는 않지만 필시 그랬을 거야.
“…떠나지 마. 버리지 말라고 했으면서 왜 먼저 떠나려고 하는 거야…?”
“그렇게 말해도….”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게 아닌걸.
죽기 싫다고 죽지 않을 수 있었다면, 아빠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겠지.
저기 나자빠져 있는 노인도 마찬가지였을 거고.
그래서, 나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괜찮아-”
분명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
뒷말을 잇기 전에, 몸에서 힘이 완전히 빠져나가고.
익숙한 어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