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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4

“싫어.”

뚜웅.

“그렇게 싫냐?”

끄덕끄덕.

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분홍색 머리의 소녀.

남자는 소녀를 내려다보며 난감하게 볼을 긁적였다.

“난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한다만. 귀엽고 목소리도 예쁘니 딱 어울리는 이름 아니냐?”

“…그래도 싫어.”

“흠… 그러면 이건 어떠냐. 지금은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나중에 네가 괜찮아지면 원래 이름으로 부르는 거지.”

“…응.”

“뭐가 좋을까…. 오, 그래!”

남자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카나. 네 이름은 이제부터 카나다!”

“…단순해.”

“켁.”

“그래도, 고마워.”

그렇게 말하며 소녀는 흔치 않은 미소를 보였더랬다.

* * *

바보 같은 여자.

다른 말로 말하면 얼빠진 여자.

살인귀가 산다고 소문난 산에 겁 없이 들어온 주제에 고작 코카트리스 따위를 못 죽여서 겁먹질 않나.

살려준 게 고맙다고 일주일이 넘게 먹을 걸 챙겨 여기까지 오지를 않나.

검을 잡는 법조차 알지 못하면서 꾸역꾸역 산에 오르는 저니를 보면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또 몬스터를 만날 수도 있다는 건 아예 생각하지도 않는 건지.

내가 지금까지 본 사람 중 가장 바보 같은 사람이었다.

“….”

생각해 보니 가리드가 있었구나.

정정.

지금까지 본 사람 중 두 번째로 바보 같은 사람이다.

내가 아는 최고의 바보는 가리드니까.

아무튼, 세상 어느 사람이 목숨 구해줘서 고맙다고 죽을 뻔했던 산에 매일 같이 오르겠어.

사도가 아니라 해도 이해가 안 가고, 사도라고 해도 이해가 안 돼.

사도가 아니라면 기껏 살아난 목숨을 버리는 꼴이니 이해가 되지 않고, 사도라면 어차피 살아날 목숨인데 이렇게 수고할 정도로 고마움을 느낄 필요가 있나 싶어서 이해가 되지 않고.

물론 순수한 선의가 아니라 다른 꿍꿍이속이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그녀를 의심하지 않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워낙 많이 구른 탓인지 나는 나에게 향하는 적의를 굉장히 민감하게 느낄 수 있는데, 저니의 행동에서 아무런 적의를 느낄 수 없었다.

설령 적의가 있다고 해도 이길 자신이 있었고.

제국의 노망난 뱀도 나를 쉽게 해하지 못할 텐데 그렇게 얼빠지고 약해빠진 여자한테 내가 당할 리가 있나.

만약 내 기감을 속인 거라면 나보다 강한 사람이라는 뜻이니 경계해 봤자 소용없을 테고.

나보다 강한 사람이라면 속든 속지 않든 어차피 죽을 텐데 별수 있나.

애초에 그런 사람이었으면 약한 척 연기할 필요도 없었겠지만.

음, 저니에 대한 생각은 여기까지만 하고 잠깐 화제를 바꿔볼까.

주관적으로 봤을 때 나는 인내심이 썩 좋지 않은 편이다.

‘으응, 아니야. 좋지 않다는 것보다 부족하다는 말이 맞겠네.’

인내심이 좋지 않다는 건 나쁘지 않다는 말로 들을 수도 있지만, 부족하다고 말하면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없으니까.

누가 나에게 마시멜로를 주며 ‘이 마시멜로를 내일까지 먹지 않으면 두 개를 더 줄게.’라고 한다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냉큼 먹어버릴 인간, 그게 나였다.

아마 전생 직후 어렸을 때의 경험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원인이 중요한가?

딱히 인내가 부족한 걸 후회하지도 않는데 무슨 상관이람.

흔히, 정도를 걷는 이가 불의를 참지 못하면 영웅, 악한 이가 욕망을 참지 못하면 악당이라고 하지만.

나는 정의도, 악심도 품지 못했기에 영웅도 악당도 될 수 없는 어중간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인내심이 부족하다는 건 충동적이라는 것과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나를 붙잡고 있던 한 가닥의 줄기마저 사라진 후, 어중간한 인간인 나는 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잎사귀처럼 나풀나풀 떨어지며 다짐했다.

다시는 누군가와 엮이지 않겠다고.

‘잠깐만!’

그렇게 다짐한 주제에 그깟 그라닉이 뭐라고 살려줬는지.

역시 난 충동적이고 인내심이 부족한 인간이라는 게 새삼 느껴졌다.

저니를 살려주고, 살려준 저니가 매일 와서 귀찮게 굴어도 내버려두고, 검과 그라닉을 가르쳐 주고, 이름을 알려준 것까지.

무엇 하나 충동적이지 않은 게 없잖아.

스읍, 하.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혀끝에 끈적하게 눌어붙은 매운맛의 잔향이 느껴졌다.

이딴 음식의 왜 존재하는지, 그 전에 이걸 음식이라고 불러도 되는 건지.

저니가 오늘 가져온 것은 볶음밥이라고 쓰고 인간의 악의라고 읽는 무언가였다.

과연 네가 이걸 먹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렇게 물어보듯 강하게 머리를 때리는 얼얼함.

“푸흐….”

내가 생각하기에도 어이가 없어서 실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실리아에서 느껴본 적 없는, 자극적인 것들을 가득 때려 넣은 인공적인 향이 가득한 매운맛.

그런 걸 먹고 아스라이 흩어지는 기억 저편의 향수를 느낀 건 어째서인지.

“저니, 사도, 에델….”

톡.

톡.

허리에 찬 검집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대장장이가 말했다.

에델이 동쪽 바다 너머에 있는 대륙에서 사람들을 데려와 가호를 내렸다고.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사도들과 권능을 가득 불어넣은 가호.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맛의 음식. 어렴풋한 향수를 느끼게 만드는 자극적인 맛.

톡톡.

“대체 무슨 속셈이야.”

에델.

나는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하늘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하늘은 여전히 맑았고 신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세데스 성국.”

에델 교의 메카이자, 에델이 강림했던 곳. 아르디나 대륙 내 그 어디보다 에델의 신성력이 강하게 남아있는 곳.

그곳에 가면 진상을 알 수 있을까.

그렇다 해도 지금 당장 산을 벗어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아직 가리드를 놓아주지 못했고, 노망난 뱀은 눈을 번뜩이고 있을 테니까.

시간이 조금 더 흘러서 그라시스라는 나라가 빛바랜 기억이 될 때쯤이면 괜찮겠지.

에델이 무슨 짓을 하고 있다고 해도 지금 당장 나랑 무슨 상관있겠어?

정보를 얻을 수단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니까 조바심 갖지 말자.

매일 음식을 들고 오는 훌륭한 셔틀… 아니, 정보원이 있잖아.

비록 얼빠지고 바보 같은 여자라고 해도 사도는 사도니까 뭐라도 알 수 있겠지.

내 존재가 퍼져서 달갑지 않은 손님들이 찾아온 걸 보면 사도들 간 정보망도 있는 것 같고.

한 가지 걱정되는 건, 전생의 향수 때문에 충동적으로 이름을 알려줬다는 점인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언제 어겨도 이상하지 않은, 손가락 걸고 하는 약속보다 못한 말이지만.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구해진 보답이라며 매일같이 먹을 걸 싸 들고 오던 여자니까 괜찮지 않을까?

이것저것 물어오는 걸 보면 나와 친해지고 싶은 눈치였으니까 이름 하나 알려줬다고 친해졌다고 좋아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휴우….”

조용히 살고 싶어서 산에 박혀 살기 시작한 건데 어째 쉽지 않네.

왜 계속 무슨 일이 생기는 건지.

조용히 사는 건 내 팔자가 아닌 건가….

* * *

“카나.”

묘지기.

카나와 묘지기. 묘지기와 카나.

어쩜 이렇게 두 단어의 분위기가 다를 수 있을까.

어렵게 알아낸 이름 두 글자를 입안에서 조심스럽게 굴리며 저니는 생각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기껏 쌓은 호감도가 떨어지지 않길 바랄 뿐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수확을 얻으니 기쁘기보단 얼떨떨했다.

계속되는 무반응에 오기가 생겨서 준비한, 죽을 각오까지 하고 준 매운 볶음밥이 정답이었다고?

…대체 왜?

그야말로 소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격이었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는가.

얼떨떨함 뒤에 찾아온 짧은 기쁨을 시청자들과 누리고 나니 뒤이어 걱정이 찾아왔다.

“비밀이라고 했는데….”

당시에는 공략의 키포인트가 ‘피닉스 볶음밥’이었다는 충격과 갑작스러운 호감도 상승 이벤트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묘지기… 카나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저니가 아는 단어가 아니기도 했고.

산에서 내려오며 카나가 했던 말을 떠올려서 알아보니, 비밀이라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는 말이더라.

저니의 짧지 않은 인생 경험으로 미루어 본 바, 누군가에게 비밀을 말했을 때 비밀이 비밀이 아니게 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이거 비밀인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라고 A가 B에게 말하면 B는 C에게 가서,

‘야, 이거 A가 말한 건데, 너한테만 알려줄게. 아, 글쎄 A가 말이야….’

라고 말하고 C는 또 D에게 달려가서 말한다.

‘A가….’

이런 식으로.

믿고 있었던 이에게 배신당하는 심정을 잘 알고 있는 저니는 함부로 비밀을 털어놓지 않았다.

자신의 비밀이든 남의 비밀이든.

이번에도 그럴 생각이었지만, 그녀의 직업이 문제였다.

-사실 묘지기는 한국인이었다?!

-어허, 묘지기가 아니라 카나 쨩입니다

-카나! 카나! 카나!

‘…망했을지도?’

미리 알았더라면 음소거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너무 갑작스러웠던 탓에 카나라는 이름을 그대로 송출해 버렸다.

비밀이라고 하는 것까지 전부.

직접 목격한 시청자만 해도 십만 명은 가뿐히 넘었다.

클립으로 온갖 방송과 커뮤니티로 퍼질 걸 생각하면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알게 될지 가늠도 안 된다.

그 많은 사람이 비밀을 지켜주길 바란다?

‘하하. 가능할 리가.’

어느 외계 종족처럼 신경삭을 통해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어서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게 아닌 이상 절대 불가능이다.

지금 채팅창만 봐도 카나의 이름을 연호하며 날뛰고 있지 않은가.

하다못해 나쁜 마음을 먹는 사람이라도 없으면 좋으련만.

“자, 얘들아. 우리 조금만 진정할까?”

고작 게임 속 NPC한테 왜 이렇게 과몰입하냐. 그래봤자 다른 게임보다 수준이 조금 높을 뿐인 AI인데.

저니가 카나의 호감을 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며칠 동안 지겹도록 들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 실리아 세계의 주민들이 고작 NPC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과 똑같이 생각하고, 사람과 똑같이 행동하고, 사람과 똑같이 말하는데 어떻게 고작 NPC라고 생각할 수 있겠어.

그리고 고작 NPC라고 해도 뭐 어때?

몰입하는 게 나쁜 건가?

애초에 RPG의 뜻이 ‘Role-Playing Game’, 직역하면 역할 연기 게임인데.

‘연기에 몰입해서 이 세계 주민처럼 생각하는 걸 과몰입이라고 비난하면 그건 RPG라는 장르 자체를 부정하는 거 아니야?’

과몰입이라는 말 자체가 잘못된 거다.

그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난 카나의 말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야.

‘이미 많이 늦은 것 같긴 하지만….’

믿고 말해준 카나를 배신하고 싶지 않으니까.


           


I Became a Raid Boss

I Became a Raid Boss

레이드 보스가 되었다
Score 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One day, when I came to my senses, I found myself reincarnated in another world. After enduring a rough life post-reincarnation, I thought I could finally settle down, quietly tending to a flower garden in the mountains… …But something feels o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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