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니는 고개 숙여 부탁했다.
알려지지 않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카나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게 해달라.
게임에서라도 모른 척을 해달라는 저니의 부탁은 묘지기의 이름과 함께 여러 커뮤니티로 퍼져 나갔다.
그렇게 퍼진 저니의 방송은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어차피 난 갈 생각도 없는데 뭐
-카나 쨩은 아가야… 지켜줘야 해…
-유일하게 공략할 수 있는 사람인데 우리가 뭐 별수 있나?
-헤으응 저니 눈나..
서로 헐뜯고 싸우기 바쁜 이들이라 해도 본성은 착하다는 걸까.
절절한 마음이 여실히 느껴지는 부탁에 감화된 이들은 저마다 드는 이유는 달라도 저니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반면, 불만을 가진 이들도 당연히 있었다.
-지가 뭔데 우리한테 이래라저래라 함?
-이미 일주일 기다려 줬으면 됐지 또 기다려 달라고??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면 온라인이 아니라 싱글 게임이나 하러 가지
-스트리머가 벼슬인 줄 아나 ㅋㅋㅋ
저니의 부탁에 불만을 품고 일어난 이들.
그 근거가 합당하든 합당하지 않든 커뮤니티가 전쟁터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래라저래라 하는 게 아니라 모른 척만 해달라는 거잖아
┗그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지
┗이 새낀 부탁이랑 명령의 차이를 모르나?
-누가 기다려 달라고 함? 그냥 아는 척만 하지 말란 건데 난독 ㅆ오지네;
-응 꼬우면 너도 스트리머 해~
┗스트리머 하면 ㅈ대로 해도 육수들이 쉴드 쳐주는데 왜 안 함???
┗분탕 ㄲㅈ
찬성과 반대, 분탕과 방관, 그리고 양비론자까지.
온갖 인간군상이 모여든 전쟁터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좀처럼 꺼질 생각을 하지 않고 타오르는 불에 불나방이 몸을 던지고, 불나방이 타오르며 내뿜는 밝은 빛에 다른 불나방이 꼬이고.
어디가 머리고 어디가 꼬리인지조차 알 수 없는 연쇄가 이어졌다.
그리고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다시 생명을 얻고 일어나는 이들도 있었으니, 바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사라졌던 방화광들이었다.
주인을 잃고 나동그라져 있던 쇠스랑이 다시 주인의 손에 들리고, 불이 붙어 있던 각목이 횃불을 대신했다.
재가 되어 사라졌던 이들이 불길 속에서 새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나 전쟁터에 뛰어들었다.
-그러게 처음부터 여지를 주지 말았어야지ㅉㅉ
-하와이안 피자 회담인지 뭔지가 일주일 동안 트라이하지 말자는 것도 솔직히 마음에 안 들었음. 퍼클런 공대면 다인가;
-겜알못들 난리 칠 때부터 이럴 줄 알았다ㅋㅋㅋ에휴
총체적 난국인 상황에 보이지 않는 손들도 결국 손을 놓고 물러나 방관자로 전환했다.
유일하게 이 상황을 억제할 수 있는 관리자까지 사라진 전장.
이대로 세계 멸망이 찾아오는가 싶을 때, 생각을 바꾼 이가 있었으니.
“근데 우리 이렇게 싸울 필요 있음?”
“뭐?! 포기하는 거냐!”
“아니, 여기서 싸우지 말고 실리아에서 직접 찾아가면 되잖음. 산길을 막고 스트리머를 죽이든, 찾아가서 깽판을 치든.”
“…!”
화력의 발전이 실제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꿨다고 한다면, 커뮤니티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꾼 것은 누군가의 한마디였다.
* * *
“…뭐?”
평소처럼 실리아에 접속하려던 저니가 멍하니 되물었다.
“전쟁이라고?”
-ㅇㅇㅇㅇㅇㅇ
-초비사아아아앙!
-공습경보! 공습경보!
-지금 그래서 길드들 동원령 떨어지고 난리도 아님
“…대체 왜?”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저니가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이렇게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간다면 보통 커뮤니티가 원인이란 걸 경험을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역시나, 그녀의 예상대로 커뮤니티는 완전히 개판이 되어 있었다.
참혹한 전쟁의 흔적을 찬찬히 살펴보던 저니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거… 내 잘못인가?”
-ㄴㄴㄴㄴ아님 그냥 분탕들이 분탕 짓한 거
-이제 알았냐ㅋㅋㅋ 스트리머라고 무슨 권력이라도 잡은 줄 알았음?
-여기도 분탕 하나 들어왔네ㅅㅂ;
-저니 님은 잘못 없어요 ㅠ
“흐으….”
이런 결과를 원하고 말한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발언은 전쟁의 씨앗이 되었다.
그래서, 대체 왜 이 지경이 되었나.
저니는 어질어질한 정신을 애써 추스르며 다시금 글을 정독했다.
커뮤니티에서 싸우던 중, 누군가의 한마디로 인해 생각을 바꾼 사람들이 카나가 사는 산으로 대거 몰려들었다.
진을 치고 기다리면서 저니를 못 들어가게 막든, 유치하게 카나에게 달려가 일러바치든 할 생각이었겠지.
말하기도 전에 카나의 검에 썰려버릴 텐데 어떻게 말을 전할 건지를 차치한다면 제법 괜찮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어둠이 있으면 빛이 있듯, 그들이 그렇게 나오자 이번엔 옹호자 쪽이 나섰다.
스스로를 카나단이라고 칭한 이들은 진을 치고 있던 플레이어들을 몰아낸 후 그 자리를 차지하고 눈을 부라리며 지켰다.
그러자 반대파, ‘아웃로’가 다시 달려들고.
먼저 싸우던 이들이 자기가 속한 집단에 지원을 요청하여 수가 늘어나면 반대쪽도 지원을 부르고.
여기에 단순히 PVP가 좋아서 끼어든 이들, 심심한데 잘 됐다며 달려드는 이들 등, 상관없던 사람들까지 합세하니 전쟁의 규모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는 것이 전쟁의 서막이었다.
“어떻게 하지…?”
불과 하루도 되지 않았는데 사건은 저니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지 오래였다.
여기서 그녀가 ‘모두들, 나 때문에 싸우지 말아줘!’라고 외친다 한들 전쟁이 멈출까.
“카나가 이상하게 생각할 텐데….”
기껏 마음을 열어줬는데 지금까지 꼬박꼬박 오던 상대가 오지 않는다면 당연히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어찌할 바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누군가가 보낸 귓속말이 저니에게 도착했다.
[<발신자> 파인 : 저니 님, 지금 접속하실 건가요?]
발신자는 저니와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동료 스트리머이며, 동시에 피자는역시하와이안 공대의 공대장인 ‘파인’이었다.
저니는 시청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시 화면을 가렸다.
[<발신> 저니 : 이제 접속하려고 했는데…]
[<발신자> 파인 : 상황은 아시나 보네요]
[<발신> 저니 : 솔직히 완전히 이해는 안 돼요]
[<발신> 저니 : 이렇게까지 커질 일이었는지…]
[<발신자> 파인 :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발신자> 파인 : 이런 것도 RPG의 매력 아니겠어요?]
[<발신자> 파인 : 마음에 안 들면 싸울 수도 있는 거지]
[<발신자> 파인 : 그러라고 있는 PVP인데요 뭘]
위로를 해주려는 걸까.
파인의 말에 담긴 저의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덕분에 저니의 마음은 조금 편해졌다.
[<발신> 저니 : 혹시 파인 님도 싸우고 계세요…?]
[<발신자> 파인 : 네]
[<발신자> 파인 : 아]
[<발신자> 파인 :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카나단이니까]
[<발신자> 파인 : 퍼클런 공대 대부분은 이쪽 진영이에요]
[<발신> 저니 : 정말요?]
퍼클런 공대라고 하면 누구보다 카나를 쓰러트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 아니었나?
저니는 그들이 자신을 돕는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아서 고개를 갸웃했다.
[<발신자> 파인 : 아웃로에서 우리한테 먼저 시비를 걸었거든요]
[<발신자> 파인 : 걸려오는 싸움을 피하면 남자가 아니죠]
[<발신자> 파인 : 그리고 저쪽에 붙어봤자 퍼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요컨대 이득도 없는데 반목하는 곳에 굽히고 들어갈 필요 없다는 말이었다.
‘하긴 맞는 말이지. 아웃로의 목적은 나를 방해하는 거니까.’
처음부터 그들의 목적과 이유는 명확했다.
저니가 마음에 들지 않으니 훼방을 놓겠다.
길막, 전쟁, 고자질 등등은 그 수단일 뿐이고.
[<발신자> 파인 : 일단 접속해 보실래요?]
[<발신자> 파인 : 저희 쪽으로 오시면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발신> 저니 : 네 바로 접속할게요]
파인과의 대화를 일단락 지은 저니가 곧바로 실리아에 접속했다.
챙, 챙!
“죽여! 이 새끼 죽이라고”
“법사 뭐 해! 빨리 마법 쓰라고!”
원래 같았으면 상쾌한 공기와 평화로운 새소리가 반겨줬겠지만, 지금 저니를 반긴 것은 철끼리 부딪치며 나는 날카로운 소리와 험악한 분위기였다.
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접속을 종료했던 터라 그녀는 접속하자마자 플레이어들이 싸우는 걸 목격할 수 있었다.
플레이어가 바글바글 모여든 걸 본 저니가 목소리를 최대한 낮췄다.
“…생각보다 더 심각한데?”
-근처에 있던 플레이어들 다 몰려온 듯
-아침인데 이렇게 사람이 많다고?
-내가 누구? ‘시간 빌 게이츠’
눈에 띄지 않게 조심조심 나아간 덕에 저니는 무사히 조력자를 만나는 데 성공했다.
“저니 님! 이쪽이에요!”
팔을 흔들며 그녀를 부르는 파인을 발견한 저니가 잰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조금 전까지 싸우고 있었는지 파인의 갑옷엔 피나 먼지 따위가 잔뜩 묻어 있었다.
“오라 하셔서 오긴 했는데… 다른 분들은…?”
“다 싸우고 있죠. 저는 저니 님 맞이한다고 잠시 빠져 있었어요.”
파인은 임시로 설치한 막사로 저니를 안내했다.
“솔직히 말해서 상황은 좋지 않아요.”
파인이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전황이 안 좋아요?”
“전황보다는… 승리 조건이 문제죠. 우리는 승리 조건이 없지만, 저쪽의 승리 조건은 있잖아요.”
“아….”
“우리는 계속 막아야 하지만 저쪽은 한 번이라도 뚫으면 승리니까요.”
“승리 조건….”
저니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지만 딱히 좋은 생각이 떠오르진 않았다.
카나를 찾아가서 말한다고 해도 뭐라고 말할까.
‘지금 너와 나 사이를 훼방하는 놈들이 있는데, 절대 걔네 말 듣지 말고 그냥 무시해!’
…참 설득력 있겠네.
애초에 그렇게 긴 문장을 말할 수도 없을뿐더러 말해봤자 믿을 리 없다.
카나와 소통을 한 건 오직 저니 뿐인데 불한당들이 떼로 몰려왔다면 과연 누구 잘못이라고 생각할까.
‘그렇다고 사실을 밝힐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 스트리머 저니인데, 방송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미안하다!
일단 그렇게 말해봤자 NPC들에게 걸려 있는 필터 때문에 못 들을 테고, 만약 필터가 없었다고 해도 미친년 소리 듣기 십상일 것이다.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저니의 고민은 점점 깊어져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