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깨어보니 푹신푹신한 바닥이 몸을 감싸 안고 있었다.
비몽사몽한 상태에서 조금씩 정신을 차리자, 서서히 달콤한 향기가 사방에서 풍겨오기 시작했다.
맛있는 설탕 냄새부터, 부드러운 초콜릿 냄새까지.
눈을 떠보니, 마치 동화 속 같은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와!”
눈처럼 새하얀 마시멜로가 깔린 바닥에 찰랑이는 핫초코의 바다가 펼쳐진 광경이 금발 소녀의 눈에 비쳤다.
분명히 자신은 신비로운 구름 고기 마을에서 잠이 들었을 텐데, 이런 장소에서 눈을 뜨다니!
거기에 시야는 잠에 잠긴 것처럼 여전히 흐릿하고 꿈속을 유영하는 것처럼 몽롱하기까지 하니, 누가 봐도 꿈인 게 분명한 상황이었다.
금발 소녀는 즐거운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이 꿈속 세상을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조금 걷다 보니, 붉은색으로 조그마한 생명체가 둥글둥글한 마시멜로를 트램펄린처럼 써서 폴짝폴짝 뛰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정말 즐거운 것처럼 해맑은 표정이었다.
그 귀여운 생명체를 자세히 확인하기 위해서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자 그 붉은 아이도 금발 소녀의 존재를 눈치챘는지, 옆을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돌아선 붉은 아이의 얼굴은 소녀도 익숙한 것이었다.
<회색 사신>
양 갈래로 묶은 머리모양과 붉은 색깔인 점을 제외하면 정말 회색 사신과 판박이라고 할 정도로 꼭 닮은 아이였다.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꿈이니만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붉은 사신은 금발 소녀와 시선을 마주치자, 정말 반가운 것처럼 환하게 웃으면서 소녀의 새끼손가락을 꼭 쥐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붉은 사신이 정말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말을 건네는 것만 같았다.
붉은 사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렇게 반가워하던 붉은 사신은 뭔가 불만족스러운지 갑자기 새끼손가락에서 손을 떼고, 팔짱을 낀 다음 고개를 팩 돌렸다.
그러면서도 붉은 사신은 실눈을 뜨고 금발 소녀의 눈치를 살피듯이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귀여워!’
왠지 속이 뻔히 보이는 듯한 행동이 너무 귀여워서, 금발 소녀는 붉은 사신을 들어 올려서 뺨에 대고 마구 문질렀다.
붉은색이라서 그런가?
붉은 사신은 굉장히 보들보들하고 따뜻했다.
핫팩처럼 기분 좋은 온기를 품은 붉은 사신은 귀찮은 것처럼 소녀의 뺨을 마구 밀어대면서 거부하고 있었지만, 입가에는 즐거운 것 같은 미소가 담겨있었다.
붉은 사신과 접촉을 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붉은 사신은 금발 소녀의 손아귀에서 탈출해서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따라오라는 거야?”
붉은 소녀는 고개를 살짝 돌려 살짝 끄덕이더니, 앞으로 거침없이 걸어 나갔다.
뚜방뚜방.
씩씩한 걸음걸이로 붉은 사신이 도착한 곳은 거대한 마시멜로 콜로세움이었다.
소녀의 키를 한참 넘어서는 거대한 입구로 들어서자, 다양한 색깔의 미니 사신들이 보였다.
미니 사신들은 금발 소녀를 보더니, 환하게 웃으면서 폴짝폴짝 뛰었다.
말하지 않지만, 굉장히 반겨주고 있다는 마음만은 확실하게 느껴졌다.
이 미니 사신 오브젝트들의 능력인 걸까?
아니면 꿈속이라서 그런 걸까?
자꾸 미니 사신들이 마치 말을 걸어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붉은 사신의 뒤를 따라서 기나긴 복도를 계속 걸어 나갔다.
복도는 콜로세움의 중앙 광장으로 향하는 길 같았다.
복도를 걸어 나가자, 검은 사신과 황금 사신이 마시멜로 꼬치를 흔들면서 응원하고 있었다.
응원 때문인지, 붉은 사신과 걸어가는 복도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콜로세움 중앙과 복도를 가르는 쿠키로 만들어진 철창 앞에서 붉은 사신은 멈춰 섰다.
붉은 사신은 진지한 얼굴로 두 주먹을 꾹, 움켜쥐고 화이팅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마치 무언가를 응원하는 듯한 모습에 소녀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붉은 사신의 인도를 따라서 콜로세움 중앙으로 들어서자, 어두운 복도와 달리 환한 빛이 내리쬐는 광장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열렸던 쿠키 철창이 내려와 닫히고, 반대편에서 물 덩어리로 만들어진 회색 사신이 무거운 발걸음 소리를 내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쿵. 쿵.
어?
어어?
격투기? 싸워야 하는 거야?
소녀는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복싱하듯이 자세를 취한 물 덩어리 사신이 현란한 스텝을 밟으면서 다가오더니, 엄청난 속도의 펀치가 날아왔다.
펑!
얼굴 중앙에서 커다란 물풍선이 터지는 것 같은 충격을 느끼며 금발 소녀는 정신을 잃었다.
***
“언니! 언니! 빨리 밖으로 나와봐!”
TV를 보고 있던 여동생의 목소리에 약초를 빻고 있던 여자는 서둘러서 밖으로 향했다.
밖으로 나오자, 여동생이 손가락으로 저 멀리 가리키며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시선을 그쪽으로 향하자, 거대한 구름 덩어리가 불쑥 지평선을 뚫고 튀어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지면으로 내려선 구름 고래였다.
“지금 세희 연구소가 오브젝트에게 공격받고 있는 것 같대.”
여동생이 내민 휴대전화의 화면에서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화면에는 거대한 구름 고래가 지상에 몸을 뉘고 있는 것이 찍히고 있었다.
마치 병든 고래처럼 바닥에 내려앉은 채, 두 눈을 감고 힘없이 누워있는 구름 고래였다.
헬기에서 내려다보는 화면에는 구름 고래로부터 도망치는 사람들의 차량 행렬도 보이고 있었다.
반대로 구름 고래 주변으로 모여드는 기자들과 구경꾼들도 상당히 많아 보였다.
그런 장면들을 촬영하면서 화면에서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현재 송파구 상공을 배회하고 있던 구름 고기들의 떼가 세희 연구소로 내려앉은 것으로 보입니다.]
[공격성이 없고, 지극히 안전하다고 여겨졌던 구름 고기의 이상 행동입니다.]
[한국 오브젝트 협회에서는 아직 현 상태를 파악하는 중이며, 함부로 접근하지 않는 것을 권고한다고 발표를 내놨습니다.]
문신투성이 여자는 뉴스를 바라보며, 턱을 천천히 문지르면서 생각에 잠겼다.
“언니, 세희 연구소 가볼까? 구름 고기 가까이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가봐도 괜찮을 것 같아?”
여동생은 마치 여자가 반대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여동생의 예상과 조금 달랐다.
“구름 고기는 상당히 무해하니까, 괜찮을 것 같기는 하네.”
“정말?!”
문신투성이 여자는 ‘간단히 준비하고 가자.’라고 덧붙이며 집안으로 다시 돌아갔다.
회색 사신의 복귀 사실이 세간에 알려진 지 며칠, 여자는 조만간에 세희 연구소를 방문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물론 이렇게 급작스럽게 찾아가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품에 수호자를 안고, 몇몇 연금술 물품들을 가방에 챙겨 넣은 여자는 벌써 준비를 마치고 집 앞에서 기다리는 여동생을 향해서 걸음을 옮겼다.
“언니! 빨리 가자!”
여동생만큼은 아니겠지만, 고향 사람을 만날 생각에 여자도 조금 기대감이 들었다.
***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미니 사신들도 긴장한 것 같았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새하얀 세상이 세희 연구소에 내려앉았을 뿐이었다.
새하얀 안개 속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불안한 감정을 느낀 황금 사신들은 사방으로 퍼져나가더니 점점 자기 몸에서 뿜어내는 광량을 늘려나갔다.
태양처럼 환하게 빛나는 황금 사신!
안개 속에서 사람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장작을 태워 가면서 밝게 빛을 내고 있었다.
검은 사신은 저런 짓은 하지 못하는지, 부러운 표정으로 황금 사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뚜방뚜방.
전구처럼 빛나는 황금 사신들을 뒤로하고 나는 계속 앞으로 걸어 나갔다.
누군가가 나를 부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점점 깊숙이 나아갈수록 주변의 소음은 점점 멀어져갔고 어느새 주위를 메운 구름은 물리적인 질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폭신폭신한 구름을 헤쳐 나가자, 그 끝에는 검게 물든 구름이 곳곳에 떠올라 있었고, 하늘 위에는 희미한 주황색 달의 환영이 떠올라 있었다.
평온하고, 적대적이지 않은 느낌의 달.
어떤 달이든 나에게 적대적인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에는 안 그러네?
조금 신기해서 주황색 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더니, 희미한 의지가 전달되어 왔다.
마치 미니 사신들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처럼 만들어진, 의지를 전달하는 편지였다.
‘도와주세요.’
주황색 달은 자신을 도와달라고 간절히 외치고 있었다.
‘도와주세요.’
주황색 달의 간절한 외침 속에는 참을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의 편린도 함께 전달되어 왔다.
‘도와주세요.’
저 멀리 떨어진, 동쪽에서부터 전해지는 고통에 찬 외침이었다.
주황색 달은 지금 당장에라도 온몸이 썩어들어갈 것 같은 고통을 참고 있었다.
참지 않으면 순식간에 편해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차라리 자기 죽음을 바라고 있었다.
도와주는 건,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검은 점액 관련 일이었으니까,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검은 점액이 퍼지는 것을 가만히 두면 큰일이 날 것 같은 직감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왠지 바로 수락하기는 싫었다.
‘내가 왜 도와줘야 하는데?’라는 고양이 같은 마음이 자꾸 돋아났다.
마음속에 비밀스럽게 숨겨져 있는 청개구리 심보가 울부짖고 있었다.
하지만 마치 내 반응을 예측한 것처럼 편지 속에서 기억의 한 조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아주 오래된 필름 같은 낡은 흑백의 기억이었다.
불길한 빛으로 물든 하늘 위를 지배하는 것처럼 떠 있는 보라색 달의 표면에서 검은색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검은 점액질의 끈적끈적한 물줄기가 폭포처럼 아래로 흘러내리는 모습은 마치 하늘과 달이 울고 있는 모습처럼 보였다.
검은 점액은 느리지만 착실하게 대지를 메웠고, 바다를 검게 덧칠해 나갔다.
끝없이, 끊임없이.
하늘에서는 검게 물든 빗물이 내렸고, 지하까지 파고든 검은 점액은 먹을 물마저 없애버렸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땅은 없었다.
장작들의 멸종이었다.
정체불명의 기억은 그렇게 끝이 났다.
내 예상보다 ‘검은 점액’ 사태는 심각해 보였다.
해로워 봐야 오브젝트도 녹이는 염산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무한 증식하는 염산이라니 도를 지나쳤다.
‘좋아, 도와줄게.’
내가 도와주겠다는 마음을 먹자, 주황색 달의 환영이 흐릿해지더니 사라져 버렸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구름 고래가 하늘로 다시 힘차게 날아올랐다.
구름 고래가 하늘로 날아오르자, 그것을 뒤따라서 작은 구름 고기들도 하늘로 떼를 지어서 날아올랐다.
시야가 확 트인 세희 연구소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하늘 위에 강이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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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고기들이 길 안내를 해주는 것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하늘색과 하얀색, 그리고 주황색이 어우러져 흐르는 천상의 강이었다.
세희 연구소 상공에서 시작된 구름 고기의 강은 동쪽으로 끝없이 이어져, 지평선에 맞닿아 있었다.
새하얀 색의 구름 고기들은 마치 석양의 마지막 불씨를 뱃속에 머금은 것처럼 희미하지만 매혹적인 주황색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어두운 하늘에서도, 별빛에 지지 않고 길 안내를 해주기 위한 아름다운 불빛이었다.
마치 별을 머금은 것처럼 주황색으로 빛나는 구름 고기의 은하수였다.
동쪽으로 흐르는 구름 고기의 은하수를 보니, 내가 가야 할 길이 명확히 보였다.
***
때찌때찌.
볼 위로 작은 손바닥이 사정없이 내리쳐지는 감각에 눈을 떴다.
눈을 뜨자 생소한 천장이 보였다.
“아, 구름 고기 마을이었지.”
소녀는 신비로운 구름 고기로 가득한 마을에 도착해서, 방을 잡고 잠이 들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그나저나 도대체 누가 깨운 거지?
금발 소녀는 ‘아저씨가 자신을 깨워준 건가?’ 하는 생각에 텅 빈 방 안을 돌아보았지만, 검은 요원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텅 빈 방 안을 두리번거리고 있자, 콕콕하고 자신의 손등을 찌르는 감각이 느껴졌다.
밑을 내려보자, 해맑은 표정의 붉은 사신이 있었다.
짝.
아직도 꿈속인가 싶어서 양손으로 뺨을 세게 내리쳤지만, 여전히 붉은 사신은 존재했다.
붉은 사신은 갑자기 뺨을 내리친 금발 소녀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