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니가 몸을 긴장시키며 물었다.
“제국이 왜 여기에?”
“우문이군.”
기사 하나가 비뚜름한 미소를 지은 남자를 제치며 걸어 나왔다.
“위대한 아르카 제국의 검은 태양이 닿지 못할 곳은 없다. 설령 악명 높은 마대륙이라고 해도.”
다른 기사들과 확연히 다른 생김새의 갑옷, 위압적인 말투가 기사의 직위를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애초에 저 많은 기사 중 혼자 나선 것부터 그가 범상치 않은 걸 증명한 것이지만.
기사단을 이끄는 기사단장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죄인이 이곳에 있다고 들었다만, 너희들은 누구지?”
“…죄인?”
“죄인을 옹호하는 자들입니다. 또한 제국의 영광을 알지 못하는 눈먼 자들이지요.”
“호오, 그러한가.”
남자의 말을 들은 단장은 다소 과장된 태도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것참 안타까운 일이군. 하지만 제국은 관대하다. 지금이라도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한다면 사소한 잘못 정도는 눈감아주지. 같이 싸운 전우를 베고 싶진 않으니.”
“…저게 다 무슨 소리예요? 같이 싸운 전우라니, 전 제국 편에 붙은 적이 없는데요.”
“그라시스와 전쟁했을 때를 말하는 거 같아요. 제국에게 고용된 리베리 용병들도 그 전쟁에 참여했었거든요.”
“아하….”
파인과 저니가 소곤소곤 대화를 나눴다.
말하면서도 슬쩍 눈치를 보는 게, 애써 아닌 척해도 기사들이 내뿜는 기세에 눌린 듯한 모습이었다.
인원 자체는 플레이어가 훨씬 많지만, 여기 모인 플레이어가 모두 저니의 편인 것은 아니다.
만약 아웃로의 대표로 추대된 유키의 제안을 받아들여 성공적으로 합의했다고 해도 그들이 아군으로 바뀌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같은 편이라고 해도 제국에 대항하는 건 별개의 이야기다.
실제로 기사들을 보고 슬금슬금 전장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한 걸 묻네.”
유키가 씨익 웃었다.
“당연히 싸워야지.”
“…유키 님, 아웃로 아니었어요?”
“억지로 떠맡은 자리보다 재밌는 게 나타났는데 그게 대수야? 마침 기사는 얼마나 강할까 궁금했는데 잘됐네.”
“미친년아!”
파인이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검을 뽑아 든 유키를 급하게 말렸다.
“네가 그러면 우리 다 죽는다고…!”
“이 기회에 너도 투쟁의 매력에 빠져보는 게 어때.”
“싫어 미친년아!”
아무리 봐도 얘는 시대를 잘못 태어난 게 분명하다.
아니면 세계를 잘못 태어났거나.
파인은 유키를 뜯어말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물러나는 게 맞는데….”
“에, 물러나는 거야?”
“….”
상대가 될 리 없다.
저쪽은 전문적인 훈련을 거친 정예 기사들인 반면, 이쪽은 제대로 된 지휘관조차 없는 오합지졸이다.
기사들의 무력이 어느 정도일지는 모르지만, 그 아르카 제국의 기사가 약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저니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남들이 걷지 않은 길을 먼저 걷는 건 좋지만, 많은 플레이어와 반목하고 제국과 척지면서까지 그럴 필요가 있을까?
그녀의 머릿속에 며칠 동안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카나에게 목숨을 구해진 후, 낑낑거리며 산을 올라 음식을 갖다주던 나날들.
고맙다고, 보답을 하겠다고 한 건 자신이지만 막상 아무 반응도 없는 걸 보니 얄밉긴 했다.
그런 카나가 검을 가르쳐주고 이름을 알려주었을 때 얼마나 감동했던가.
저니는 깨달았다.
“전 싸울게요.”
여우를 길들이려 했지만, 사실 여우는 카나가 아니라 자신이었다는 것을.
누군가는 고작 그런 걸로 정을 붙이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그녀에게는 ‘고작’이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 병원에 누워있을 때부터 그런 관계를 바랐으니까.
그리고 다른 이유도 있었다.
“저 때문에 일어난 일이잖아요. 그렇다면 제가 책임지는 게 맞죠. 그게 어른이니까요.”
“오오, 멋지네요.”
“저니 님….”
저니를 바라보는 파인은 복잡미묘한 표정이었다.
“파인 님한테까지 손을 벌리진 않을게요. 이미 충분히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까요.”
“저는 기꺼이 같이 싸울게요.”
“고마워요 유키 님.”
조금 이상하긴 해도 레벨은 플레이어 중 가장 높고, 전투 경험도 많은 유키만큼 든든한 아군이 또 없었다.
“아이씨, 진짜….”
파인이 짜증스러운 기색을 한 채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알았어요. 저도 싸울게요.”
“괜찮겠어요? 제국과 척질 수도 있는데?”
“시청자와 척지는 것보단 제국과 척지는 게 낫죠. 이왕 이렇게 된 거, 영상으로 만들어서 조회수나 빨아먹어야겠네요.”
스트리머란 직업은 민심으로 먹고 사는 직업이다.
시청자에게 무작정 휘둘리는 건 안 될 일이지만, 민심을 아예 무시할 순 없는, 그런 직업.
지금도 그가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채팅창이 ‘나’와 ‘락’으로 도배되고 있지 않은가.
‘쫄?’이라는 글자와 함께.
그에 파인이 발끈하여 외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제법 곱상하게 생겼다고 해도 그의 염색체는 확실히 XY였으며, ‘쫄’이란 글자는 남자로 태어난 이상 절대 참을 수 없는 마법의 글자였으니까.
“쫄긴 누가 쫄아! 내 인생에 쫄이란 쫄면밖에 없어!”
“헉… 노잼….”
“넌 닥쳐!”
“보아하니 반성할 생각은 없는 것 같군.”
스트리머 삼인방이 만담하는 꼴을 지켜보던 단장이 말했다.
대놓고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말을 들었지만 그는 딱히 분노한 기색이 아니었다.
너희들이 작당하여 모의를 해봤자 아무 소용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검은 태양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우매한 자들은 늘 그렇더군. 잘못을 깨우칠 기회를 줘도 제 발로 걷어차지.”
“그놈의 검은 태양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는 모르겠지만, 난 딱히 잘못 같은 건 한 적 없는데.”
“검은 태양의 영광을 모르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참으로 오만한 말.
하지만 동시에 로 아르카 제국의 힘을 보여주는 말이기도 했다.
아르디나 대륙 내에서 제국의 손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없었으니.
“그리고 죄인을 옹호한다는 것은 곧 죄인과 한 편이라는 뜻. 정의를 수호해야 할 기사로서 좌시할 수 없다.”
“자꾸 죄인, 죄인 하는데, 누가 죄인이야?”
“모르는 척하는 건가?”
단장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라시스 최후의 검, 붉은 사신. 수많은 제국인을 학살한 괴물 말이다.”
“…카나를 말하는 거야?”
“아아, 그래, 그런 이름이었지.”
플레이어들을 달려들어도 아무렇지 않게 도륙하는 무력하며, 사연 있어 보이는 모습까지.
범상치 않은 인물일 거라곤 생각했지만 제국에게 있어 카나의 이름은 저니의 생각보다 더 무거운 의미를 가진 듯했다.
“늙은이들은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무서워서 벌벌 떨더군. ‘이름을 부르면 사신이 찾아온다’고 지껄이면서.”
쿵, 하고 육중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뿌연 먼지구름과 함께 묵직한 충격이 공기를 강하게 때렸다.
“그래봤자 전쟁 중에 얻은 허명. 혼자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거늘, 겁먹고 움츠러든 참으로 우습지 않은가!”
단장이 팔을 뻗었다.
은색 갑옷을 따라 검은색 망토가 세차게 펄럭였다.
“오늘 우리는 괴물을 사냥한다. 그리고 괴물의 목을 베어 모두에게 보여줄 것이다. 너희들이 무서워하던 괴물은 고작 이런 것이었다고. 고이다 못해 썩어버린 기사단을 청소하고 우리가 그 자리를 차지하리라. 더 나은 제국을 위해! 검은 태양의 영광을 위해!”
“검은 태양의 영광을 위해!”
쿠웅!
단장의 말에 이어지는 복창.
백에 달하는 기사들이 조금의 오차도 없이 검을 내려찍었다.
그 압도적인 위용에 내내 기세등등하던 유키마저 한걸음 물러서서 경계 어린 눈을 했다.
“마지막 기회를 주마. 지금이라도 길을 비키면 없던 일로 치겠다.”
챙!
“그런가.”
대답 대신 뽑아 든 검, 활, 지팡이 등.
도망칠 이들은 진작 도망갔고 남은 사람들은 전의를 불태웠다.
아까에 비하면 확연히 적은 수였다.
반면 아웃로 중 일부는 은근슬쩍 기사들의 뒤에 붙어서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을 돕는다면 콩고물이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들로서는 빠질 이유가 없기도 했다.
“사도들은 죽지 않는다지? 그렇다면 똑똑히 보고 영혼에 새겨라.”
스릉.
“제국의 위대함을!”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들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느긋한 기사들의 표정과 다르게 속칭 카나단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누구 하나 움직일 생각조차 못 하고 몸을 긴장한 채 기사들의 거동을 살폈다.
하지만 모든 이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하아… 못 참겠어…!”
“야 이 미친년아!”
오줌이라도 마려운 사람처럼 몸을 배배 꼬던 유키.
제 몸만큼 큰 대검을 꼬나쥔 유키가 가장 먼저 달려들었다.
그녀가 달려드는 것을 신호로 기사들이 진형을 갖추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저니 님! 뒤로!”
“네, 넷!”
저니의 볼품없는 전투력을 알고 있는 파인이 다급하게 그녀를 뒤로 보냈다.
여기 있는 이들은 저니를 도우려고 모인 사람들이다.
부활 포인트에서 부활할 수 있다고 해도 그녀가 죽는다면 사기가 꺾일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이 전쟁이 끝나면 그녀에게 고백하겠어.”
“플래그 꽂지 말고 집중해!”
플레이어들이 무기에 마나를 두르자, 그에 응하듯 기사들도 검과 방패에 마나를 둘렀다.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들쭉날쭉한 플레이어들의 마나와 달리 기사들의 마나는 한점 흔들림 없이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경지가 같다고 해도 무력이 같은 것은 아니다.
누군가 했던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으악!”
용감하게 달려든 검사의 몸에 붉은 선이 그어졌다.
그는 그렇게 방패에 튕겨나간 검을 미처 수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갔다.
“하압!”
부웅!
검사 한 명을 먼 곳으로 보낸 기사에게 묵직하게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대검이 날아들었다.
검으로 막을 수 있을까.
잠시 고민하던 기사가 다른 손에 들린 방패로 대검을 막아냈다.
“크윽…!”
팔에 가득 실리는 무게감에 기사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눈앞의 여자는 다른 녀석들과 다르다…!
한 번의 교전으로 그것을 느낀 기사가 이를 악물었다.
“아… 피가 끓는 듯한 이 감각… 너무 좋아…!”
입꼬리를 비죽 끌어올린 유키가 다시 땅을 박찼다.
허리를 있는 힘껏 비튼 후, 그대로 몸을 돌리며 대검을 휘둘렀다.
마나를 이용한 신체 강화와 원심력이 합쳐져 가공할 속도가 완성되었다.
기사는 이번에도 검을 맞댈 수 없었다.
기사가 한 걸음 물러나면 유키가 한 걸음 다가가고, 다시 물러나면 또 다가가는.
고작 사도 따위에 밀리는 한심스러운 꼬락서니를 본 단장이 혀를 찼다.
“쯧. 이리 한심해서야.”
돌아가면 연병장 백 바퀴를 돌려야겠군.
단장이 검을 치켜세웠다.
오싹!
순간, 유키의 등골에 차가운 한기가 흘렀다.
마치 얼음을 들이부은 것 같은 한기에 그녀는 대검을 억지로 회수하며 몸을 뒤로 날렸다.
촤악!
“…!”
방금까지 그녀가 있던 자리에 검기가 날아들었다.
“으, 으아아악!”
“뭐야! 뭐가 날아온 거야!”
“검기다! 피해!”
유키와 일직선상에 있던 모든 것이 양단되었다.
팔을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는 사람.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빛무리로 화한 사람.
사라진 동료를 보며 기겁하는 사람까지.
순식간에 벌어진 참상에 저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강해….”
순리에 어긋난 움직임을 취한 반동이 뒤늦게 찾아왔다.
삐걱거리며 비명을 지르는 허리를 애써 무시하며 유키가 숨을 가다듬었다.
“이건 좀 힘들지도.”
쉴 새 없이 싸워서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유키는 본능적으로 단장을 상대할 수 없다는 걸 느꼈다.
시스템의 구속이 채워진 보스였다면 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이건 레이드나 보스전이 아니라 전쟁이다.
나약한 자들은 살아남지 못하는.
땅거죽까지 옅게 갈라버리는 검기를 날렸음에도 단장은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재차 검을 치켜들었다.
웅웅- 울리는 진동과 함께 마나가 서서히 모여들었다.
저 마나가 완전히 모이면 방금과 같은 일격이 날아올 것이다.
집중력을 최대한 끌어올린 채 단장을 주시하던 유키가 눈을 크게 떴다.
단장의 눈은, 자신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
“피해!”
그의 시선이 끝나는 종착지.
그곳에 위치한 것은 저니였다.
유키의 다급한 외침을 들은 저니가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단장의 팔은 지면을 향해 내리긋고 있었다.
쐐액!
“…!”
거대한 검기가 공기를 가른다.
부릅뜬 저니의 두 눈에 검기가 날아드는 모습이 담겼다.
‘이건 피할 수가-’
죽음이 임박하자 저니의 시간이 길게 늘어졌다.
자신의 몸을 향해 날아드는 검기가 똑똑히 보인다.
하지만 늘어진 시간에 속한 것은 저니도 마찬가지였으니.
죽음을 직감한 저니의 두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렇게 1초, 2초, 3초….
“…?”
눈을 꼭 감고 기다린 지 수 초가 지났지만 아무 고통도 찾아오지 않았다.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죽은 거야…?’
차라리 그랬으면 좋을 텐데.
눈을 뜨는 순간 날아든 검기에 저/니가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저니는 몸을 바들바들 떨며 살그머니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분홍색.
벚꽃처럼 부드러운 분홍색의 머리카락이 잔잔하게 흔들리고, 달콤한 향기가 저니를 가볍게 휘감았다.
다음으로 보인 것은 저니보다 머리 두 개는 작은 것 같은 자그마한 몸과, 몸을 감싼 허름한 검은 케이프였다.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 검을 들고 그녀의 앞에 당당하게 선 소녀.
그토록 보고 싶었던, 하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지만 저니는 본능적으로 소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