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붉은 사신과 아귀 사신의 전투, 아니 회색 사신과 아귀 사신의 전투가 끝이 났다.
그 결과는 여동생 입장에서는 꽤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화려하면서도 가벼운 몸놀림과 무엇이든 잘라버리는 칼날, 거기다가 주변의 모든 것들을 태워버리는 불꽃까지 갖춘 아귀 사신의 패배라니!
회색 사신이 승리하자, 반짝이는 눈으로 싸움을 구경하던 황금 사신들은 사방을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축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 정말로 순수하게 기뻐 보이는 표정 때문인지 아니면 황금 사신이 가진 정신 오염 때문인지, 그 모습을 구경하던 여동생도 회색 사신의 승리가 조금 즐겁게 느껴졌다.
너무 신나게 폴짝거리다가, 서로 부딪쳐서 데굴데굴 구르기까지 하던 황금 사신을 구경하던 도중,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콜록콜록.
바로 근처에서 듣지 않았다면 듣지 못했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설마, 아니겠지.
언니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생겨난 환청일 것 같아서 애써 무시했다.
혹시나 하는 불안한 소망을 안고 고개를 내렸더니, 언니가 계속 그대로라면 마음이 무너져 버릴 것만 같았다.
콜록콜록.
그 순간, 작지만 확실하게 들리는 기침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환청이 아니야?
“언니?”
여동생은 떨리는 목소리로 고개를 아래로 숙이자, 희미하게 눈을 뜨고 있는 언니가 여동생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을 뜬 언니의 모습을 보자, 여동생은 그저 눈물을 계속 흘리기만 했다.
분명 무슨 말이라도 해야만 할 텐데, 여동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울기만 했다.
“내가 말했잖아. 나는 목을 자르지 않으면 죽지 않는다고….”
문신투성이 여자는 힘겹게 손을 들어 올려 여동생의 눈물을 닦아주며 씨익 웃었다.
“응.”
여동생은 그 손이 마치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처럼 꼭 붙잡으면서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황금 사신들은 작은 손으로 박수를 짝짝 치면서 여동생과 언니의 재회를 축하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어디론가 뛰어가서 커다란 마시멜로 덩어리를 가져오더니, 먹으라는 것처럼 내밀었다.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커다란 마시멜로 조각이었다.
그 커다란 조각은 무려 여동생의 머리통만 한 크기를 하고 있어서, 심상치 않은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사람 머리만 한 마시멜로가 갑자기 튀어나온 게 이상해서 시선을 돌려보니, 까맣게 탄 응접실 구석에 커다란 마시멜로 덩어리가 하나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 근처에는 황금 사신들이 잔뜩 달라붙어서 아예 까맣게 타서 부스러지는 부분을 제거하고 노릇노릇한 부분만 잔뜩 떼어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런 마시멜로가 있었던가?
조금 떼어서 먹어보니, 보통의 마시멜로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맛있었다.
“언니, 이거 맛있어. 먹어볼래? 아니 먹어도 괜찮아?”
너무 맛있어서 여동생은 언니한테도 주려고 했지만, 하반신이 싹둑 잘려 나갔었다는 것을 기억해 내고 언니에게 물었다.
물론 잘려 나간 하반신은 언니가 정신을 차린 순간 빠른 속도로 회복해서,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였다.
하지만 여동생 생각에는 그런 큰 상처가 있었으니, 다 회복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물어보았다.
“괜찮아. 피가 너무 부족해서 어지러운 것만 빼면 멀쩡해.”
“그럼 같이 먹자!”
여동생은 싱글벙글 웃으며 마시멜로 조각을 언니의 입에 넣어주었다.
여자는 그 조각을 받아먹으면서도 무언가 이상해서 미간을 살짝 좁혔다.
‘상황에 비해 분위기가 너무 화기애애해졌는데, 정신 오염인 건가? 분명 단약을 챙겨줬을 텐데….’
하지만 뭔가 하기에는 여자는 너무 크게 다친 상태였기에, 의심만 할 뿐이었다.
여동생과 언니가 먹은 마시멜로는 적당하게 구워져서 정말 맛있었다.
그 행복한 자매의 뒤편에서 구슬픈 울음소리가 배경음으로 작게 깔렸다.
“뀨힝힝”
***
아귀 사신의 필살기에 맞아 구워진 하얀 아귀를 뜯어먹으며, 승리를 자축했다.
그리고 수시로 미니 사신 정원을 확인하며, 아귀 사신이 과자로 탄생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귀 사신에게 한번 죽은 뒤로, 최대한 빨리 그 녀석의 머리통을 마구 때려주고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귀 사신은 좀처럼 탄생하지 않았다.
마냥 기다릴 수는 없어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의지를 전달했다.
‘던전 보스’를 물리쳤으면 보물 상자도 찾아봐야 하는 법이다.
‘얘들아, 가자!’
뚜방뚜방, 기분 좋은 걸음걸이로 걸어 나가는 곳은 전혀 손상되지 않은 고풍스럽고 커다란 문.
아귀 사신이 지키려고 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던 문을 향해서 나아갔다.
그리고 커다란 문을 가볍게 밀자,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열리며 내부의 전경을 드러냈다.
드러난 풍경은 그야말로 판타지!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마법처럼 저절로 불이 붙은 횃불들이 방안을 저절로 밝혔다.
처음 보는 기기묘묘한 식물들이 화분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선반에 잔뜩 놓인 유리 플라스크에서는 알록달록한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오고 있었다.
커다란 탁자 위에는 별이 둥실둥실 떠다니는 신비로운 수정구가 놓여있었다.
그 옆에는 측량 기구인 아스트롤라베와 육분의가 정갈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벽에는 잘 벼려진 검 여러 자루와 두꺼운 가죽으로 만든 코트가 걸려있었다.
마법사, 검사, 연금술사가 모두 생각나는 판타지 같은 공간이었다.
인형 대가리가 온 걸 보면 ‘연금술사’의 공방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긴 했다.
미니 사신들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방안에 놓인 신기한 도구들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나도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가자, 굉장히 신경 쓰이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정말로 커다란 거울이었는데, 그 안에는 동영상처럼 ‘나처럼 생긴 무언가’와 푸른 소녀 그리고 하얀 아귀의 모습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가족사진을 찍는 것처럼 환하게 웃는 푸른 소녀.
텅 빈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는 나랑 한없이 닮은 회색의 무언가.
그리고 정말 슬픈 표정의 미니 하얀 아귀였다.
푸른색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는 환영으로 꽤 자주 봐서 그런지, 친숙한 기분마저 들었다.
나랑 비슷하게 생기기까지 했으니, 더욱 그랬다.
이상하게도 나와 정말 똑같이 생긴 거울 속의 회색 사신은 ‘나’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기억이 없는 것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뭔가가 결여된 느낌이었다.
오브젝트를 접하다 보면 푸른색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가 자주 보이던데, 왠지 운명적인 무언가가 나를 인도하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도대체 무슨 의미인 걸까?
모르겠어.
거울이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생각을 거듭하고 있었는데, 황금 사신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달려왔다.
표정만 봐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엄마 빨리 와!’
황금 사신을 따라서 도착한 곳은 작고 아담한 방이었다.
푹신하고 커다란 침대, 그리고 작게 배치된 온갖 가구들.
이상하게 익숙했고, 편안한 분위기를 풍기는 방이었다.
왜 그런 건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여기에 TV 같은 전자기기들을 배치하면 완전히 내 ‘격리실’이랑 배치가 똑같아.
신기하네.
취향이 이렇게까지 똑같을 수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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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방 중앙에 놓인 커다란 침대에는 푸른 머리칼의 소녀가 누워있었다.
친숙하고 편안해 보이는 방 안에서 소녀는 깨진 구슬을 움켜쥔 채, 죽어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죽은 게 아니라 파괴된 상태였다.
그야, 소녀는 인간이 아니라 ‘오브젝트’였으니까.
소녀는 이미 파괴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나버린, 오브젝트였다.
***
작은 아귀는 아주 기나긴 꿈을 꾸었다.
그리운 과거로부터 현재까지를 관통하는 아주 길고 행복한 꿈.
꿈의 시작은 탄생의 순간부터였다.
커다란 플라스크 안에 엄중히 봉인된 ‘눈동자’를 올려다보며, 주인이 상냥한 목소리로 작은 아귀의 임무를 설명해 주고 있었다.
“저 눈동자를 지켜줘. 그리고 납 인형이 돌아오기 전에 다가오는 침입자들을 물리쳐 줘. 알았지?”
너무 쉬운 일이었다.
작은 아귀는 주인님의 역작으로 모든 마도서를 태울 수 있는 불꽃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뀨.”
하지만 작은 아귀는 불만스러운 소리를 토했다.
왜, 납 인형만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는 거지?
멍청하고 느리고, 자기 몸도 잘 가누지도 못하는데!
부러웠다.
주인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납 인형이 너무 부러웠다.
주인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계속 납 인형을 정비하고, 정비하고, 정비하고, 정비했다.
그리고 수년이 지나, 주인은 마침내 움직일 수조차 없게 되었다.
“만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주인은 자기 수명이 유한해서 ‘그’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을 한탄하고 있었다.
주인과의 마지막을 직감한 슬픈 작은 아귀는 쓰러진 주인의 몸을 침대에 옮겼다.
작은 팔다리로 천천히.
그리고 마지막 순간 주인은 작은 아귀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인데, 차라리 격려의 말을 해줬으면 했다.
주인이 죽자, 멍청한 납 인형도 동작을 멈춰버려서 주인의 공방은 끝없는 정적 속에 잠겨 들어갔다.
그래도 작은 아귀는 꿋꿋이 주인의 마지막 명령을 수행했다.
한때 동료였던, 하지만 코어를 집어삼키고 미쳐버린 이빨 아귀들을 수도 없이 태워죽였다.
몇 년이나 지난 걸까?
마침내 그 순간이 도래했다.
주인이 말했던 운명의 순간.
지상에서 희미한 폭발음이 울려 퍼지고, 납 인형이 사라져 버렸다.
주인은 뭐든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부러웠다.
왜 나는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래서.
그래서 작은 아귀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인의 명령을 어겼다.
‘눈동자’를 집어삼킨 것이다.
그저 눈동자를 지키다가 전달하는 역할이 아니라, 납 인형의 마지막 시련이 되기 위해서.
주인의 말대로라면 멍청한 납 인형은 작은 아귀를 손쉽게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이긴다면, 내가 좀 더 주인의 계획에 적합하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납 인형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익숙한 기척.
작은 아귀는 자신의 코어를 주인의 손에 쥐어주고, 길을 나섰다.
그리고 패배했다.
결국 주인의 말은 옳았다.
작은 아귀는 결국 납 인형을 이기지 못했다.
그래도 작은 아귀는 행복했다.
주인의 마지막 임무를 다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작은 아귀는 정말 슬펐다.
자신의 역할은 여기까지였으니까.
잠이 든 주인의 곁으로 영원히 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렸으니까.
그리고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꿈이 끝나고 진정한 죽음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의식이 수면 밖으로 끌려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폭신한 마시멜로의 대지와 핫초코의 냄새.
그리고 주먹을 말아쥐고, 싱그러운 미소를 띠고 있는 납 인형의 모습이 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