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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1

아르디나 대륙의 검객이라면 누구나 아는 유명한 말이 있다.

‘검을 맞대면 그 사람의 인생을 알 수 있다.’

나는 그 말이 완전히 맞진 않아도 완전히 틀리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검을 맞대다 보면 느껴지는 게 있기 때문이다.

움직임이 급한 걸 보면 이 사람은 성격이 급하구나, 회피에 집중하는 걸 보니 소극적이구나.

비단 성격만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검을 정석으로 배웠는지 실전에서 익힌 건지, 어떤 동작을 즐겨 하는지, 좀 더 나아가서 어느 나라 출신인지 같은 것까지.

검술에는 생각보다 많은 것이 녹아있다.

부웅!

머리를 가볍게 숙여 목을 잡아 뜯을 듯한 기세로 달려드는 대검을 피했다.

심리전보단 기술과 힘에 의존하는 검술. 묘하게 조금씩 어긋나 있는 타점. 어디서든 날아올지 모르는 공격을 경계하는 눈.

아무래도 대검 삐약이는 사람이 아닌 것들과 싸울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사람을 상대한 경험이 없는 것 같진 않지만 대검으로 상대해 본 적은 그리 많지 않은 느낌.

날아드는 공격을 피하고 막으며 나는 거듭 고민했다.

‘이걸 봐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까 그 공격을 보고도 망설임 없이 검을 들이민 녀석이니 봐주지 않아도 될 것 같긴 한데.

어차피 사도라서 죽어도 죽는 게 아니고.

근데, 그렇게 보내면 더 달려들 것 같단 말이지.

흐으음….

“응, 결정했어.”

편린 정도만 보여주자.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그뿐인 거고, 깨달음을 얻으면 더 이상 귀찮게 굴지 않겠지.

그렇게 결정한 것과 동시에 검에 옅게 두르던 마나를 완전히 끊었다.

대검 삐약이도 이상을 느낀 건지 내내 휘두르던 대검을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뭐야? 갑자기 왜? 설마 벌써 끝이라고 하는 건 아니지?”

흔히들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이들을 보고 통달했다고 말한다.

통달. 고작 두 글자로 이루어진 단어이건만, 그 안에 실린 무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무게가 가벼웠다면 마스터의 벽을 넘지 못하고 고배를 마신 이가 이토록 많지 않았겠지.

마스터란 경지는 마나’도’ 잘 다뤄야 하는 경지이지, 단순히 마나만 잘 다룬다고 해서 오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으음… 어떤 게 좋을까.

그래, 현대식으로 비유해볼까?

아무리 좋은 총알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그것에 맞는 총이 없으면 아무 쓸모 없는, 그런 거지.

요컨대 총알은 마나, 총은 그 사람이 지닌 능력 같은 거다.

여기서 말하는 능력이란 기술, 신체, 영혼 등을 아우르는 말인데 이건 그냥 넘어가고….

아무튼, 한마디로 말해 마스터 딱지를 단 사람들은 자기들이 쓰는 무기 하나는 귀신같이 잘 다루는 놈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나도 그런 놈들 중 하나이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자 삐약이가 대검을 세게 쥐었다.

“끝인 줄 알고 놀랐잖아.”

언뜻 가볍게 느껴지는 투정 부리는 말투.

그러나 그녀의 눈동자는 내 움직임을 세심하게 훑고 있었다.

마나를 거두었으니 방심하거나 자기를 무시한다고 화낼 법도 한데 말이지.

열정적이던 첫인상과 다르게 냉철한 면이 있는 삐약이네.

내가 본 사도들 중에 가장 강한 이유가 있구나.

들어오라는 의미를 담아 슬쩍 검을 까딱이자 내 뜻을 알아챈 삐약이가 강하게 땅을 박찼다.

싸우면서 느낀 점이 있었는지 시야를 가득 채운 대검은 정확히 내 머리를 노리고 있었다.

문득 억울한 마음이 들어 입술을 삐죽였다.

‘나는 이렇게 고심해서 상대하는데.’

쟤는 그저 속 편하게 대검을 휘두르잖아.

동등한 실력이었다면 위험했을 공격도 서슴지 않고.

“에휴.”

이런 내 고충을 알기나 할까.

한숨을 쉬며 검 끝을 대검에 갖다댔고.

“…어?”

다음 순간, 대검 삐약이는 바닥에 처박힌 채 얼빠진 소리를 냈다.

* * *

재밌다. 즐겁다.

마참…내는 아니지.

유키는 뜨겁게 달아오른 머리를 식혔다.

실리아 온라인을 시작한 이래로… 아니, 기억을 통틀어 봐도 이렇게 즐거웠던 적이 없었다.

유키를 본 사람들은 누구도 예외 없이 말했다.

‘천재’라고.

축구면 축구, 농구면 농구, 검도면 검도.

유키는 몸 쓰는 일에 한해서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하루가 지나면 남들의 반년을 따라잡고, 일주일이 지나면 일 년을 따라잡았으며, 반년이 지나면 이미 저 높은 곳에 서서 아득바득 기어오르는 이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들에겐 높디높은 산도 그녀에겐 동네 뒷산만도 못한 언덕에 불과했으니, 어떠한 것도 그녀에게 흥미를 불어넣지 못했다.

정복도 정복해야 할 가치가 있어야 하는 것이었으니까.

이루자고 하면 이루지 못할 게 없었고, 하고자 하면 하지 못할 게 없으니 성취감과 경쟁심, 열정 따위의 것들은 유키가 평생이 가도 이해 못 할 감정이었다.

만약 실리아 온라인이 나오지 않았더라면 필시 그랬을 것이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느껴지는 즐거움, 생과 사가 오가는 투쟁.

무엇을 하든 쉽게 이룰 수 있었던 지금까지와 달리 온 힘을 쏟아야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세상에 유키는 깊게 매료됐다.

그렇기에 유키는 카나와의 싸움이 즐거웠다.

온 힘을 다해 휘둘러도 스치지도 못하고, 혹시 닿나 싶으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막아낸다.

쓰러트릴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상대.

생전 처음 맞이한 거대한 벽.

너무 높아서 오를 수 있을지 엄두조차 나지 않는 벽을 보며 그녀는 처음으로 호승심을 느꼈다.

카나가 마나를 거뒀을 땐 즐거운 시간이 벌써 끝났다는 생각에 실망했지만 이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닫고 환희에 젖었다.

카나의 머리카락처럼 분홍색으로 물들었던 검이 본래의 은색을 되찾았지만 유키는 방심하지 않았다.

애초에 검기 하나 두르지 않았다고 해서 꺾을 수 있는 상대였다면 그녀의 검은 이미 몇 번이나 카나에게 닿았을 것이다.

‘빠르되 서두르지 말고, 강하되 정확하게.’

대검의 무게를 최대한 살린 내려찍기.

문득 유키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녀가 지금껏 휘두른 검로 중 가장 완벽한 검로였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만족과는 별개로 멀리서 보면 가녀린 소녀에게 잔악무도한 짓을 저지르는 무시무시한 광경이었지만.

마나를 가득 머금은 대검을 카나의 머리에 내려찍으며 유키는 이번에야말로 카나가 쉽게 막아내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

“…어?”

세상이 일순간 뒤집혔다.

아니, 뒤집힌 것은 세상이 아니라 유키 자신이었다.

앞을 보고 있던 눈은 저 먼 하늘을 보고 있었고, 꼭 쥐고 있던 대검은 조금 떨어진 곳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었다.

“어?”

유키의 입에서 다시금 얼빠진 소리가 새어 나왔다.

카나가 검을 가져다 댄 것까진 기억한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자신은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유키는 이 둘 사이에 대체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건지 감도 안 잡혔다.

당연히 막아낼 거라곤 생각했지만 설마 이런 방식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대체 무슨 일이…?”

영문을 모르는 것은 유키뿐만이 아니었다.

둘의 싸움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한 건 매한가지였다.

“…뭐임? 뭐예요?”

“그걸 저한테 물으셔도….”

“그래도 저니 님은 묘지기… 카나… 카나리아… 아니 대체 어떻게 불러야 하지? 아무튼 카나 님한테 검술을 배운 유일한 사람이잖아요.”

“제 방송을 보셨으면 아시잖아요. 전 저런 걸 배운 적은 없어요. 게다가 전 카나가 저렇게 강한지도 몰랐단 말이에요.”

“아… 하긴.”

“…뭐요.”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말하려고 했잖아요.”

“아무 말도 안 했다니까요? 근데 저니 님은 그… 카나 님을 편하게 부르네요?”

화제를 돌리려는 파인의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아….”

저니가 볼을 긁적였다.

“처음에는 무서웠는데 보다 보니 여동생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래서 말을 높이기가 쉽지 않네요.”

“동생이 있으셨어요?”

“아뇨?”

“…?”

“그보다 파인 님도 묘지기니 뭐니 하면서 편하게 불렀잖아요.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왜 그래요?”

“직접 보니까 쉽게 부를 수가 없더라고요. 왜, 연예인 이름 부를 때 아무렇게나 부르다가도 대면하면 그렇게 안 부르잖아요.”

“아하, 그런 느낌.”

그런 느낌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저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파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사실은 저니 님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다거나 하면 어떡해요?”

“네?”

“아니… 그렇잖아요.”

파인은 카나를 잠시 흘깃 쳐다봤다.

다시 봐도 경탄밖에 나오지 않는 외모다.

저런 외모를 가리고 있던 케이프가 대역죄인처럼 느껴질 정도로.

지금은 채 빠지지 않은 젖살이나 작은 체구 때문에 그저 귀여울 뿐이지만 그럼에도 은연 중에 어여쁨이 느껴지는 걸 보면 무탈하게 성장하면 분명 나라를 기울여도 이상하지 않을 미인이 되리라.

“저니 님도 아시잖아요. 저 나이에 저런 무력을 가지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실리아 세계에서 강자 반열에 든 이들은 전부 어느 정도 나이가 찬 이들뿐이다.

이는 묘지기에 대한 떡밥이 처음 돌 때부터 나온 말이었다.

실은 어린애가 아니냐는 주장을 씹덕 망상 취급하며 물리칠 때 쓰던 말.

‘그땐 몰랐지. 그들이 옳았을 줄은.’

다시 생각해도 우스운 일이라고 파인은 생각했다.

“무협에 나오는 것처럼 반로환동이라도 했다는 말이에요?”

“아니 뭐 가능성은 있지 않을까 해서….”

“차라리 드래곤이 폴리모프 했다는 말이 더 설득력 있을 것 같은데요.”

파인의 헛소리를 일축한 저니였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그녀도 카나의 무력이 지극히 비상식적이란 걸 느꼈기 때문이다.

‘만약 정말로 나보다 나이가 많다면….’

저니는 순간 불안한 마음이 들어 그녀의 행적을 돌아보았다.

마구마구 쓰다듬으며 잔뜩 귀여워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다행히 아직 결례를 범한 기억은 없었다.

만약 연장자에게, 그것도 왕족은 아니라고 해도 나라의 국호를 성에 쓸 정도로 중한 사람에게 그런 짓을 했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한 상황에 저니는 남모를 욕망을 숨기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I Became a Raid Boss

I Became a Raid Boss

레이드 보스가 되었다
Score 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One day, when I came to my senses, I found myself reincarnated in another world. After enduring a rough life post-reincarnation, I thought I could finally settle down, quietly tending to a flower garden in the mountains… …But something feels o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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