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희 연구소의 소장실에서 탁자를 중간에 두고, 노란 탐정과 이세희가 대면했다. 예린은 세희의 뒤편에 별 관심 없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나? 나는 탁자 가운데에 누워있었다.
연구소를 돌아다니면서 나비 쫓기 방역활동을 하려고 했는데, 예린이 나랑 관련 있는 일이라며 손을 잡고 끌고 와 버린 것이다.
다만 서론이 너무 길어져서,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탁자 위에 누워서 빨리 끝내라는 시위를 하고 있었다.
“회색 사신의 반출이 필요하시다구요?”
세희의 말을 듣고 노란 탐정은 각 잡힌 자세로 반짝반짝 금으로 장식된 명함 하나를 세희에게 건네주었다.
물론 무슨 명함인지 궁금해서, 중간에 인터셉트한 뒤 읽어보니 임시 오브젝트 관리 기구 소속이라고 적혀있었다.
내가 읽는 사이, 탐정은 어쩔 수 없이 한 장의 명함을 더 꺼내서 세희에게 건네주었다.
탐정의 황당해 보이는 표정을 보니 왠지 즐거워졌다. 그러길래 누가 나비를 끌고 오래?
“저는 지금 임시 오브젝트 관리 기구라는 임시로 만들어진 조직에 의뢰를 받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협회가 완전히 와해 되어버려서 그 자리를 대체하는 임시 조직이죠.”
“그래서 그 조직에서 왜 회색 사신을 필요로 하는 거죠? 보시다시피 통제하기가 쉽지 않아요.”
세희의 충격적인 발언에 깜짝 놀라 돌아보니 세희는 나를 보고 있지도 않았다.
“아직 정식으로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송파구 인근은 매우 위험한 상황입니다. 사람을 뒤집어쓰는 나비가 돌아다니고 있어요.”
탐정은 사건 사진 몇 가지를 나에게 먼저 내밀었다. 사람이 산산이 조각난 사진들이었다.
중앙 연구소에서 봤던 나비에게 터져 죽은 사람 사건 현장 같은 사진들이 잔뜩 있었다.
“초기의 사건에서는 나비에게 당한 사람은 이런 식으로 터져 죽었습니다.”
남자는 재차 사진을 꺼내들었다.
좀비처럼 비틀거리며 어정쩡하게 걸어 다니는 인간들의 모습이 잔뜩 찍혀 있는 사진이었다.
“시간이 좀 지나자 단순히 숙주를 죽이는 게 아니라 사람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움직이기 시작한 겁니다. 가장 큰 문제는 저런 좀비같이 어색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은 며칠 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죠.”
탐정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꺼낸 사진에는 구치소에 갇힌 사람이 찍혀있었다.
“학습을 마쳤는지 이제 사람을 뒤집어 쓴 나비는 전혀 어색한 점이 없습니다. 인간과 크게 다른 점이 보이지 않아요. 저 사람은 불법 감금임을 주장하면서 자신을 내보내달라고 주장할 정도입니다.”
세희는 사진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래서 왜 회색 사신이 필요한지는 안 알려주셨네요.”
***
“그래서 왜 회색 사신이 필요한지는 안 알려주셨네요.”
세희 연구소장의 물음에 대답이 궁해짐을 느꼈다.
회색 사신이 필요하다는 건 순전히 감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나타난 나비들은 중앙 연구소에서 최초 발생한 것이 분명해보였는데, 중앙 연구소에서는 생각보다 피해자가 너무 적었다.
중앙 연구소에 있던 무언가가 나비의 활동을 저해한 것으로 예상되는데, 내 생각에는 그게 회색 사신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입을 달싹이다가, 다시 다물었다.
혼자 활동하는 탐정이면 몰라도, 정부 기관을 대변하는 입장에서 예상만으로 요청을 하기는 힘들었다.
“별다른 이유가 없는 거네요? 안 그래도 이번 회색 붕괴 문제도 있는데, 회색 사신을 외부로 내보내는 건 여론에 안 좋을 것 같아요. 반출 요청은 거절하도록 할게요.”
역시 연구소장의 답은 거절이었다.
데이터로 남는 공식 요청은 FM대로 흘러갈 수밖에 없지.
***
‘흐음’
탐정에게는 말 못할 이유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다고 덜컥 허락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연구소가 허락한다고 마음대로 회색 사신을 파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사신이가 가기 싫은 곳에 억지로 보낸다?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거부한다고 해서 회색 사신이 따라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은 텅 비어있는 탁자를 보며 웃었다.
***
회색 사신이 나를 따라오고 있다.
이유는… 모르겠다.
[사람의 슬픔을 힘으로 삼는다.]
[사람의 비탄을 힘으로 삼는다.]
[사람의 고통을 힘으로 삼는다.]
[대상을 가장 빠르게 죽이는 방법을 안다.]
뒤를 돌아볼 때마다 저 문구들이 구석으로 슬금슬금 움직이면서 숨었다.
보이지는 않는 것을 보면 유령화 상태인 것으로 보였는데, 유령화 상태이면서 왜 숨는 거지?
아무튼 최초 목적이었던 ‘회색 사신을 현장으로 데려가기’를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
회색 사신의 나비를 방해할 수 있는 능력도 이미 확인 되었다.
내가 나비에게 해방된 것만 봐도 그랬다.
다만 걱정이 되는 것은 저 정도로 통제가 안 되는 존재를 데려가도 되는 건가? 하는 의문뿐이었다.
***
차량에 탑승하자, 이젠 숨길 생각도 없어졌는지 회색 사신은 조수석에서 당당히 나타났다.
회색 사신은 심심한지 차량 안의 이것저것을 열어보고 있었다.
세희 연구소 최신 보고서에 따르면 회색 사신은 ‘귀여운 강아지’처럼 말은 이해하지만 의사소통이나 통제는 불가능한 오브젝트라고 했었지.
나는 자주 사용하는 동전을 하나 꺼냈다.
오브젝트를 꺼내자, 흥미가 있는지 회색 사신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동전의 이름은 ‘행운을 가늠하는 동전’ 튕기면 1~20의 사이의 숫자가 동전 면에 나타난다.
신기하게도 양면이 모두 동일한 숫자.
1이면 재수가 정말 없는 날이고,20이면 운이 정말 좋은 날이라는 심플한 능력의 오브젝트였다.
지금은 아무도 튕기지 않았기에 ‘0’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팅!
내가 튕겨서 값을 확인하니 그 값은 5.
썩 운이 좋은 숫자는 아니었다.
내가 동전을 회색 사신의 손 위에 올려주자, 희희낙락하며 자기도 동전을 튕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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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에게 나온 숫자는 20.
오늘은 회색 사신의 절호조인가?
뭐, 운이 좋은 건 좋은 거다.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겠어?
***
악몽을 꾸었다.
이런 일이 현실일 리가 없어.
집이 없어졌다.
커다란 싱크홀이 생겨서 없어져버린 것이다.
송파구에서 엄청난 숫자의 사람이 죽었지만, 우리 가족은 그 때 여행을 간 참이라서 참사를 피할 수 있었다.
집이 없어서 들어가게 된 ‘송파구 싱크홀 이재민 캠프’는 처음에는 나름대로 괜찮았다.
학교에 안 가도 된다고 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점점 맘에 안 드는 것들이 점점 늘어가기 시작했다.
컨테이너로 만들어진 집들도 그랬고, 거기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도 그랬다.
불만을 참고 이래저래 지내던 중, 문제가 되는 일이 벌어졌다.
끔찍한 살인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피부와 내장이 모두 파헤쳐져서 죽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군인들이 나타나서 캠프 전체를 봉쇄하기 시작했다.
이 봉쇄는 오브젝트 특별법에 의한 적법한 봉쇄이고 절대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후에도 똑같은 살인 사건이 몇 번이나 더 발생했다.
그쯤 되자 캠프의 분위기는 날이 선 것처럼 날카롭게 변했다.
조그마한 소리에도 언성을 높였고, 밤에는 아무도 밖을 돌아다니지 않았다.
사람들은 서로를 살인마로 의심하고, 나가지 못하게 하는 정부에 강하게 불만을 품었다.
어른들은 정부의 봉쇄 조치에 강한 불만을 품고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연락을 해서 몰려온 언론사들이 그 장면을 찍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봉쇄는 풀리지 않았다.
엄마아빠도 시위에 참가해서 열심히 목소리를 내곤 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시위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그 이유는 나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시위대가 하는 말이 개소리였으니까.
정부에서 전염병을 퍼트렸다는 둥, 우리를 제물로 바치는 의식을 준비 중이라는 둥.
이해할 수 없는 의견이 점점 많아져만 갔다.
이런 식이면 절대로 동조를 얻을 수 없다며 투덜거리던 부모님은 저 음모론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모아서 시위대를 따로 구성해야겠다며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날 밤,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눈을 뜨자, 눈앞에서 부모님이 입에서 내장을 잔뜩 뱉어내고 있던 것이다.
너무 깜짝 놀라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내장이 모두 사라진 것처럼 홀쭉 말라버린 부모님은 가죽만 남은 것처럼 변해버렸다.
너무 충격적인 장면이라 그랬던 걸까.
나는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현석아 일어나야지!”
부모님이 부르는 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역시 악몽을 꾸었다.
그런 일이 현실일 리가 없어.
“오늘은 같이 시위에 나가야지. 정부의 전자파가 사람들을 터트려 죽이고 있는 게 분명해!”
엄마는 해맑게 웃으면서 이상한 소리를 했다.
“너 목 아프다며? 정부에서 독가스를 캠프에 풀었어, 너도 마스크를 물에 적셔서 잘 써야지!”
아빠도 해맑게 웃으면서 이상한 소리를 했다.
아직도 악몽을 꾸고 있다.
이런일이 현실일 리가 없어.
왠지 컨테이너 안에서 짙은 피 냄새가 나는 검은 나비가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