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가리드. 홍염 기사단의 단장이다. 가리드 오빠라고 불러봐.’
‘…아저씨.’
‘…삼촌.’
‘아저씨.’
‘…단장님, 그 나이에 오빠라고 불러 달라고 하는 건 양심이 너무 없는 거 아닙니까?’
‘큭…!’
가리드를 만나고 얼마 안 됐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가리드를 아저씨라고 불렀다.
길지 않은 빈민가 생활로 배운 게 몇 있었는데, 그 중엔 모든 사람이 선한 건 아니라는 것과 선의를 베풀어 줬다고 해서 마냥 믿으면 안 된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가리드가 입은 갑옷에 붉은 불꽃을 형상화한 홍염 기사단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지만 빈민가에 살던 내가 그걸 알아볼 리 없었다.
애초에 홍염 기사단이란 이름도 흘러가는 풍문으로 얼핏 들은 게 전부였으니까.
‘카나, 내 양녀로 들어오지 않을래?’
‘…?’
‘아, 양녀란 건 입양한 아이를 뜻하는 말인데-’
‘뜻은 알아.’
‘그, 그러냐? 그래서, 생각 있냐?’
‘…뜬금없어. 갑자기 왜…?’
‘이것도 인연이잖냐. 쪼그만 꼬맹이가 끝까지 마물과 싸우는 게 마음에 들었거든. 보아하니 재능도 있는 것 같고.’
‘….’
‘솔직히 내가 좋은 아빠 노릇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마 할 수 없겠지. 그래도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 수 있게 해주마. 이래 봬도 돈은 많거든.’
‘양녀…. 응, 할게.’
‘오오, 정말이냐? 절대 후회하진 않을 거다. 자아, 그럼 이제 아빠라고 부르려무나. 자, 따라 해봐. 아빠.’
‘아저씨.’
‘….’
가리드의 양녀가 되고, 시간이 지나 유대감이 쌓여서.
‘…가리드.’
‘어엉?’
‘손에 물 안 묻히게 해준다며. 혹시 지금 내 손에 묻은 건 물이 아니야?’
‘으하하, 미안하다! 내가 요리 실력이 없어서리.’
‘…청소는 왜 안 하는 거야.’
‘어차피 더러워질 텐데 금방금방 할 필요 있나? 못 버티겠다 싶으면 그때 하면 되는 거지. 하하하!’
‘….’
‘….’
‘가리드.’
‘어, 엉?’
‘죽어.’
‘자, 잠깐만. 카나?!’
그를 좀 더 믿을 수 있게 되자 가리드를 부르는 호칭은 이름으로 바뀌었다.
‘여어, 카나!’
‘단장, 여긴 왜 왔어.’
‘내가 뭐 못 올 곳 왔냐? 그것보다 단장이라고 하지 말고 아빠라고 부르라니까? 아니면 평소처럼 이름으로 부르든가!’
‘단장, 공과 사는 구분해 줘.’
‘하이고…. 잘났어 아주. 그냥 네가 단장하지 그러…. …쿨럭!’
‘…단장!’
‘아, 이런. 또 시작이네. 호들갑 떨지 마 카나. 한두 번 있던 일도 아니잖아.’
‘…그냥 쉬는 게 어때.’
‘안 되지. 나도 네가 단장이 되는 건 사양이거든. 이런 꿀 같은 자리를 너한테 넘겨줄 순 없지.’
‘꿀은 무슨. 짖으라면 짖고, 물라고 하면 무는 개겠지.’
‘그래서 너한테 이 자리를 못 넘겨주겠다는 거야. 조금만 마음에 안 들어도 들이박고 싸울 게 분명한데 어떻게 너한테 넘겨주겠냐?’
가리드가 있는 홍염 기사단에 들어가고 부단장 자리에 올랐을 때는 단장이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사적인 자리에선 여전히 이름으로 불렀지만.
‘쿨럭, 쿨럭!’
‘가리드….’
‘거, 걱정 마라…. 네가 결혼해서 애 낳는 걸 보기 전까진 죽을 생각 없으니까….’
‘그럼 내가 죽을 때 같이 죽겠단 말이네.’
‘얌마, 그럼 안 되지! 애는 안 낳더라도 결혼은 해야지. 혼자 살다 죽는 건 너무 외롭잖아.’
‘가리드도 결혼 안 했잖아.’
‘대신 난 딸이 있잖니. 아주 예쁘게 자란, 자랑스러운 딸이.’
‘…흥.’
뱀한테 입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인해 점점 상태가 악화되던 가리드는 결국 병상에 누운 채 일어나지 못했다.
‘…미안하다. 네가 결혼하는 걸 보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약속을 지킬 순 없을 것 같다.’
‘…애초에 약속했던 적도 없거든?’
‘하하, 그랬나…? 그랬다면 다행이네….’
‘가리드….’
‘…카나.’
‘….’
‘…카나리아.
‘…응.’
‘…자랑스러운 내 딸, 카나야. 사랑한단다.’
‘…나도, 나도 사랑해, 아빠….’
고작 아빠라는 한 마디가 뭐가 그리 부끄럽다고.
이별의 순간이 닥쳐서야 나는 숨겨왔던 마음을 꺼낼 수 있었다.
* * *
최근, 피시식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방송을 꼽으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주저 없이 고개를 들어 하나의 방송을 가리킬 것이다.
실시간 시청자 수 랭킹 1위에 빛나는 저니의 방송을.
시청자 수가 많으니 당연히 인기 있는 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방송을 켤 때마다 2위에 있는 방송과 매우 큰 차이를 내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게 가능했던 건 묘지기… 이젠 카나리아 그라시스라는 이름이 밝혀진 NPC 덕분이었다.
개발자가 술을 네댓 병 정도 들이켜고 만든 게 아닌지 의심이 되는 정신 나간 난이도의 레이드, 멋들어진 검이 꽂혀 있는 무덤, 오는 이들을 모조리 도륙 내며 사람을 거부하는 것까지.
누가 봐도 사연이 철철 넘치는 모습에 사람들은 매료되었다.
까칠하기 짝이 없던 카나가 마음을 열고 처음으로 이름을 알려줬을 땐 저도 모르게 훈훈한 미소를 짓는 사람들도 있었다.
저니가 카나와 친해지는 과정을 마치 자기 일처럼 몰입해서 보던 이들.
카나가 묘지 앞에 서서 ‘아빠’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냈을 때 그들은 아무 생각도 없었다.
왜냐하면 알아듣지 못했으니까.
그나마 친숙한 영어로 된 게임을 한다고 해도 한글 패치를 애타게 찾는데, 그보다 훨씬 낯선 그라닉이라는 게임 세상의 언어를 익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외국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발음, 사고방식, 문법 등…. 사람은 원래 자기가 나고 자란 나라의 언어에 최적화되어 있어서 대뜸 다른 언어를 배우는 건 상당히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게임은 재밌으려고 하는 건데 굳이 게임에서까지 공부를 해야 해?”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그라닉을 배우는 걸 포기하거나 암기하기 쉬운 단어 몇 개 정도만 외우고 다녔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었으니, 저니를 비롯한 일부 시청자, 일부 플레이어는 꾸준히 그라닉을 공부했고 덕분에 카나가 꺼낸 말을 해석할 수 있었다.
“아빠…라는데?”
-헉
-헉
-허ㅓㅓㅓㄱ
-비사ㅏㅏㅏㅇㅇ!!!
갑자기 아빠가 그리워져서 저도 모르게 나온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무덤 앞에 서서,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은 애달픈 눈으로 말하면 과연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어지간히 눈치가 없는 이가 아니라면 입을 꾹 닫을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아니 개새끼들아]
너희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훔칠 게 없어서 저런 어린애 거를
그것도 애 앞에서 아빠 유품을 훔쳐 가려고 하냐?
[댓글]
-? 이 새끼 갑자기 왜 지랄;
┗약 먹을 시간 지났냐?
┗(링크) 보고 오셈
┗이게 뭔데
┗이 개새끼들; 너희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태세 전환 개 빠르네
무덤 앞에서 아빠라고 부르는 카나와 그 앞에 꽂힌 검.
그 검이 아빠의 유품이라고 추측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몰랐으니까!]
유품인 줄 몰랐으니까…!
내가 그럴 줄 알았냐고 ㅅㅂ;
그런 건 줄 알았으면 나도 안 그랬지
[댓글]
-상식적으로 무덤 앞에 꽂혀 있으면 유품이라고 생각하는 게 정상 아니냐
┗엑스칼리버 절대 못 참지
┗미친놈아 안 그랬을 거라며
┗그걸 믿음??
-인디아나 존스 님 보고 계십니까?
┗??? : 뭐야 시발 엮지 마요;
-저희 업계에서도 이건 좀..
신나게 말싸움을 벌이다가도 부모님 얘기가 나오면 조용해지는, 전문용어로 탈룰라가 되어버린 상황.
카나를 처음 발견한 사람이 쓴 글은 집중포화를 당해 순식간에 너덜너덜해졌고, 그 뒤로 표적이 된 건 퍼클을 위해 달리던 공대들이었다.
뜬금없이 총을 맞게 된 상황에 그들은 억울함을 토로했다.
[아니 나는 훔치려고 한 게 아니라]
그냥 레이드를 뛰고 싶었던 거라고ㅡㅡ
걔네랑 엮지 말라고!!!!!!!!
[댓글]
-그러니까 아무 목적 없이 어린 나이에 아빠를 여의고 혼자 사는 여자아이를 그냥 줘패고 싶었다는 뜻이죠?
┗아니 잠깐만
┗우우 쓰레기
┗우우 쓰레기
┗아니라고!!!
-경찰 아저씨 이 새끼예요!
-세상에 이런 쓰레기가 따로 없네
[솔직히 RPG 국룰이잖아]
어렸을 때 RPG 게임하면 다들 그러지 않았음??
열려 있는 집 있으면 들어가서 물건도 털어보고
항아리나 빈 상자 있으면 부수고
사연을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좀 있어 보이면 상호작용 해볼 법 하지ㅇㅇ
[댓글]
-님아; 자유도가 다르잖아요
-요즘은 다른 겜들도 눈 앞에서 대놓고 털면 잡혀가던데
┗그게 정상 아니냐
┗옛날 겜들은 안 그랬으니까
-작성자 지금 제국 감옥에 갇혀 계신답니다 글 내려주세요
┗어케 알았음?
┗집 들어가서 털다가 걸렸는데 바로 감옥에 가두더라 ㅅㅂ
┗이왜진;
┗그럼 안 잡혀가겠냐고ㅋㅋ
진심으로 욕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은 재밌는 해프닝 정도로 받아들였다.
어느 정도 웃고 떠드는 시간이 지나자 전쟁이나 카나에 대한 글이 조금씩 올라오기 시작했다.
[지금 제일 불쌍한 놈들은]
아웃로들임 ㅇㅇ
(로 아르카 제국의 기사들.jpg)
기사들 와서 이겼다고 좋아했는데
(카나 일도양단.jpg)
한 번에 다 쓸려나감ㅋㅋㅋ
진짜 다시 봐도 말도 안 되네;
랭킹 1위도 쩔쩔매는 놈을 한 번에 죽일 정도면 대체 얼마나 강한 거냐
[오늘부로 실리아의 아이돌은 카나다]
(카나 등장.gif)
(카나 일도양단.gif)
(카나 웃음.gif)
(유키와 싸우는 카나.gif)
귀여우면서 강하기까지 한 goat…
진짜 다시 봐도 미친듯이 귀엽다;
사탕 하나 쥐여 주고 쓰담쓰담하고 싶음
[댓글]
-페도페도야…
-쓰읍, 이건 좀 빡센데…?
-(카나 경악 콘)
┗??? 콘이 벌써 나옴?
┗(카나 끄덕끄덕 콘)
[근데 나만 이렇게 생각하냐]
지금까지 나온 NPC 중 제일 센 거? 그것도 그럴 수 있음
사연도 뭐 있을 수 있지
근데 잘 쳐줘도 중딩이나 될 법한 꼬맹이가 잘 훈련된 기사들을 이기는 게 말이 됨?
그것도 힘들게 이긴 것도 아니고 고작 칼질 두 번에 전멸시켜 버림
게임사가 너무 대놓고 노린 게 보여서 오히려 거부감 들더라
[댓글]
-ㅇㅈ; 나도 좀 거부감 듦
┗듦이 아니라 듬입니다
┗꺼져 ㅅㅂ
-좀 개연성이 떨어지긴 함
┗좀이 아님..
-사실 폴리모프한 드래곤이었던 것
┗그라시드였네;
┗데우스 엑스 마키나였던 거임;
┗그게 뭔데 씹덕아
┗씹덕들 또 신나서 있어 보이는 말 쓰네
이러나저러나 카나가 커뮤니티의 인기인이 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