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나. 밥 먹어야지.”
“….”
저니는 부드럽게 말하며 초콜릿 상자를 열려고 하는 카나를 만류했다.
잠시 망설이던 카나는 얌전히 상자를 내려놨다.
저니는 인벤토리에서 음식을 꺼내는 자신을 보면서도, 아쉬운 눈치로 초콜릿을 힐끗거리는 카나를 보며 절로 나오려는 웃음을 삼켰다.
누가 훔쳐 가는 것도 아니니 좀만 참으면 될 텐데, 저러는 걸 보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애는 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의 아침은… 두구두구… 짠, 잠봉뵈르야! 그리고 이건 곁들여 먹을 달콤한 생과일주스.”
햄을 뜻하는 ‘잠봉’, 버터를 뜻하는 ‘뵈르’.
햄과 버터라는 단순한 이름에 걸맞게 잠봉뵈르를 만드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햄, 버터, 빵. 세 가지 재료를 모두 사서 만든다고 가정하면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실제로 저니가 지금 들고 있는 잠봉뵈르는 그녀가 직접 만든 것이었다.
저니의 머릿속에 만든다는 말보다 조립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잠깐 들었다가 금방 사라졌다.
뭐든 맛있게 먹으면 그만 아니겠어?
“이건 카나 거. 유키 님도 하나 드세요.”
“….”
“고마워요.”
저니는 햄이 가장 많이 들어간 잠봉뵈르를 골라 카나에게 건넸다.
애들은 많이 먹고 쑥쑥 커야 하니까.
그렇다고 다른 것들엔 햄을 적게 넣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가상현실에서 무엇을 얼마나 먹든 현실의 몸에 영향을 끼치지 않으니 칼로리 따윈 신경 쓰지 않아도 됐으니까.
물론 실리아에도 포만감은 있어서 정말로 배가 터지도록 먹을 순 없지만, 맛은 좋아도 건강엔 좋지 않은 음식을 양껏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장점이었다.
햄이 듬뿍 든 잠봉뵈르를 크게 베어 물며 저니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크… 이게 인생이지. 현실에서 이렇게 먹으면 살이 뒤룩뒤룩 쪄서 못 먹는단 말야. 이거 하나 다 먹으면 트레드밀을 몇 시간을 뛰어야 할까….”
-방장은 마른 편이라 먹어도 될 듯
-엥 난 맨날 저 정도 먹는데
-나도 예전엔 저렇게 먹었는데 요즘은 소화 안 돼서 못 먹겠더라…
-실례지만 연세가..?
-ㅇㅈㅇㅈ
-저렇게 햄 많이 넣으면 비싸서 못 먹지
“아, 확실히 비싸긴 하지. 카페에서 사 먹는 건 진짜 너무 비싸서 엄두가 안 나. 직접 만든다 해도 재료비가 부담스럽고…. 빵도 비싸고, 햄도 비싸고, 버터도 비싸고. 안 비싼 게 없어.”
실리아의 햄은 저니가 알던 햄의 맛과 조금 다르긴 했지만 그렇게 큰 차이는 없었다.
‘하긴, 햄도 보존식품의 일종이니까.’
오래 보관하기 위해 소금에 절이고 말린 것이니 큰 차이 없는 게 당연하겠지.
저니는 혼자서 생각하고 혼자서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이번엔 그녀의 눈이 다른 곳을 향했다.
분홍색 소녀가 얌전히 앉아 잠봉뵈르를 베어 물고 있다.
부산스럽지도, 주접스럽지도 않게 조용히 한 입씩 베어 물고 오물거리는 모습.
이젠 소녀의 신분을 알아서일까, 나이프와 포크를 써서 멋스럽게 먹는 것도 아니었지만 묘하게 품위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설마 카나가 왕국의 기사단장이었다니.’
저 나이에?
외모만 보면 납득이 안 됐지만, 유순해 보이는 외모에 숨겨져 있는 무력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이 들며 납득이 됐다.
저니가 장담하건대 현재 실리아 온라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물은 단연코 카나라고 할 수 있었다.
신규 레이드 보스의 발견으로 한 번, 카나라는 이름과 여린 목소리로 두 번, 마침내 드러난 외모와 압도적인 무력으로 세 번.
불길이 한 번 일 때마다 커뮤니티들이 뜨겁게 달아올랐고, 그때마다 게임 관련 커뮤니티는 물론이고 게임과 관련이 없는 다른 커뮤니티에도 카나에 대한 소식이 올라왔다.
실리아 온라인이 워낙 인기가 많아서 이용자 수 자체가 많은 데다가, 잡다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나누는 커뮤니티의 특성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메인 퀘스트나 가이드처럼 목적을 제시해 주는 시스템이 없는 탓에 정보를 얻기 위해 커뮤니티에 접속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도 한몫했다.
그렇게 세 번에 걸쳐 일어난 화재 때문에 실리아 온라인을 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하지 않는 사람도 카나라는 NPC를 알 정도였다.
그리고 그로 인해 생긴 여파는 생각보다 컸으니.
저니처럼 그라닉에 관심을 갖고 배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멸망해서 사라진 왕국의 역사에 관심을 갖고 탐구하는 사람도 있어서 묻혀 있던 정보들이 하나씩 드러났다.
그라시스에서 가장 권위 있던 기사단, 홍염 기사단의 이야기도 그중 하나였다.
기사단의 존재, 대대로 단장에게 하사하는 그라시스라는 성, 전대 단장의 이름 같은 단편적인 정보들.
마지막 기사단장에 대한 이야기는 이상할 정도로 찾기 힘들었지만 카나의 정체를 유추하기엔 그 정도 정보만으로도 충분했다.
저니는 그 사실을 알고 나자 카나를 죄인이라고 칭하던 제국 기사들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응? 벌써 다 먹었어? …설마 맛없었어?”
아직 반절 가까이 남은 잠봉뵈르를 내려놓는 카나를 보며 저니가 물었다.
설마 맛이 없었던 걸까.
저니가 조마조마하며 묻자 카나는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배불러.”
덤덤하게 답한 카나가 먹던 잠봉뵈르를 다시 포장지로 감싸서 한쪽에 조심스럽게 놓았다.
다행히 빈말이 아니었구나.
그녀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거나 말거나 상자를 집어 든 카나는 망설임 없이 뚜껑을 열어 초콜릿을 입에 쏙 넣었다.
우물우물.
“푸흐흐….”
표정이 변한 것도 아닌데 조금 전과 다른 표정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인지.
초콜릿을 빨리 먹고 싶어서 일부러 조금 먹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 저니였다.
“평화롭네.”
유키한테 말하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겠지만, 저니는 이런 평화로움이 좋았다.
그래서 여행을 다닐 때도 일부러 한적한 곳 위주로 찾아다니고, 잔잔한 캠핑을 즐겨할 때도 많았다.
언제까지고 이런 나날이 계속되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힘들겠지.’
저니의 눈이 채팅창을 힐끔 살폈다.
저니와 동조하는 채팅 70%, 궁금증을 묻거나 무언가를 요구하는 채팅 20%, 남들을 웃기고 싶어 하는 게 보이는 채팅 5%.
그리고 잡다하게 말하거나 불만을 표출하는, 나머지 5%의 채팅.
-매번 같은 장면만 보네
-지겨워 죽겠음
-방장님 다른 곳은 언제 가요??
-이분 혹시 지박령인가요?
‘겨우’ 5%라고 할 수도 있지만 시청자 수를 생각하면 결코 적은 수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이 정도로 많지 않았지만 날이 지날수록 늘어나더니 결국 이 정도 수가 되었다.
‘오히려 오래 버텼지.’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이라도 계속 보면 질리는 법.
카나 덕분에 오래 버티긴 했지만 슬슬 지루함을 표출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걸 보며 저니는 떠날 때가 다가왔음을 느꼈다.
그녀가 스트리밍을 하는 이상 민심에서 완전히 눈을 돌릴 순 없었으니까.
카나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주로 외국인들-이 여전히 많긴 했지만 그게 영원하진 않을 것이다.
‘여기를 거점으로 삼아서 주변을 돌아다니자. 그라시스 영토 탐방이라는 주제로.’
당장은 아니더라도 머지않은 시일에 다시 여행을 시작해야겠다.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며 저니는 마지막 남은 조각을 입에 털어 넣었다.
퍽!
저니보다 앞서 식사를 마쳤던 유키가 그새를 못 참고 덤벼들었다가 검에 얻어맞고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뇌물이 효과가 있었는지 유키를 때려눕힌 카나의 기색은 기분이 딱히 나빠 보이진 않았다.
피가 묻은 것도 아니면서 카나는 습관적으로 검을 한 번 턴 후 검집에 집어넣고 의자에 앉았다.
“괜찮아요?”
“…으흐흐.”
“…어우.”
저니는 대답 대신 들리는 음산한 웃음소리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제대로 싸우면 한 합도 버티지 못하면서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건지.
아픈 걸 싫어하는 저니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때, 바닥에 엎어져 꿈틀거리는 유키를 바라보던 카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이제 오지 마.”
“에?”
갑자기 내려진 싸늘한 축객령에 저니는 물론이고 채팅창도 술렁였다.
정작 유키는 알아듣지 못했는지 아무 반응도 없었지만.
저니는 그녀가 카나를 만나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저렇게 단호하게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없었다.
검으로는 말했지만, 아무튼 입으로 축객령을 내리진 않았다.
물론 저니가 알아듣지 못해서 하지 않은 걸 수도 있지만.
“그, 유키가 나쁜 사람은-”
-아니야, 라고 대신 변호하려던 저니에게 카나의 눈길이 닿았다.
“너도 마찬가지야.”
“어, 어? 나, 나도?”
끄덕끄덕.
갑자기 자신에게도 날아온 화살에 당황하여 되물었지만 카나의 답이 바뀌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왜, 왜?!”
내가 너에게 얼마나 잘해줬는데 어떻게 날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어…!
언젠가 봤던 소설 속 인물의 대사를 떠올리며 저니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카나는 그녀가 알아들을 수 있게 짤막한 단어로 답했다.
“여기, 떠날 거야.”
“…떠난다고?”
목적지는? 이라고 물으려던 저니였지만, 그라닉으로 목적지를 뜻하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서 물을 수 없었다.
저니는 그 대신 눈을 빛내며 외쳤다.
“나, 나도!”
“…응?”
“나도 같이 갈래!”
그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에 저니가 환호성을 질렀다.
마침 떠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차에 카나가 떠나야겠다고 말하다니, 그녀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완벽한 타이밍 아닌가.
‘…물론 카나가 허락해 줘야 성립되는 얘기지만.’
김칫국을 사발째로 마시던 저니가 불현듯 현실을 자각하고 밀려드는 불안함에 입술을 잘근잘근 물며 눈치를 살폈다.
못마땅한 것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달가운 것 같지도 않다.
평소와 같은 유순한 얼굴.
저니가 생각하기에도 카나가 그녀의 제안을 수락해서 얻을 이득이 딱히 없었다.
동료라고 하기엔 저니의 실력이 너무 하찮다.
실리아의 원주민이니 길 안내도 딱히 필요 없을 테고, 지금처럼 음식을 가져다줄 수도 없고.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저니는 마침내 자신의 유일한 이용 가치가 떠올렸다.
“통역! 카나, 아르키쉬 모르지?”
“….”
“내가 통역해 줄게! 말, 안 되면 답답해!”
말이 통했다면 좀 더 잘 설득할 수 있었을 텐데.
저니는 그 어느 때보다 진심을 담아 말했다.
얘가 갑자기 왜 이러지.
그렇게 말하듯 카나는 말없이 눈을 몇 차례 깜박였고, 저니는 카나의 대답을 기다리며 속을 졸였다.
세 번의 가을 같았던 수십 초가 지나고, 드디어 카나가 말했다.
“…마음대로 해.”
“저, 정말?”
끄덕.
“아싸아아!!”
갑자기 소리를 지른 저니 때문에 놀란 카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기쁨에 겨운 저니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아까까지 고민했던 것이 아무 의미 없어졌지만….
“알 게 뭐람! 카나와 같이 여행을 가게 됐는데!”
빠밤, 카나가(이) 파티에 합류했다!
그런 메시지가 보이는 것 같은 착각에 저니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카나가 정신 나간 사람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는 것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