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드.”
만약 부모의 품을 떠나 한 명의 사람으로 독립하는 걸 소년기의 끝이라 정의한다면, 나는 아직 소년기를 벗어나지 못했을 거야.
어쩌면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르지.
가리드는 내 모든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착잡한 눈으로 크림슨 이지스를 내려다보던 나는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아직도 내키진 않아.”
가리드를 떠나야 하는 것도, 세상에 나가는 것도.
“‘가리드도 내가 이렇게 사는 걸 원하진 않았을 거야’ 같은 말은 하지 않을게.”
가리드라면 정말 원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가리드의 뜻을 내 행동에 대한 변명으로 써먹고 싶진 않아.
그러니까 내가 가리드의 곁을 잠시 떠나기로 한 건 오롯이 내 의지야.
“…알아보고 싶은 게 생겼거든.”
고고하신 몸을 끌고 이곳까지 올 것 같진 않으니 별 수 있나.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야지.
뱀이 쳐둔 결계 덕분에 도둑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져서 다행이야.
목숨을 걸고 맺은 맹약인데 결계에 수작을 부리진 않았을 테니 당분간은 안심해도 되겠지.
“그러니까….”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입술을 떼고 말했다.
“다녀올게, 아빠.”
꼭.
다시 올게.
* * *
“…늦어.”
이럴 줄 알았으면 약속 시간을 정해둘걸.
평소 저니가 오는 시간에 맞춰 산에서 내려왔건만, 기감을 넓혀봐도 아직 올 낌새가 느껴지지 않았다.
웅성웅성.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는데 이상한 것들은 꼬이고.
나는 멀찍이 서서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주욱 훑어보았다.
죄다 인상이 흐릿한 걸 보면 사도들인 것 같은데….
딱히 적의는 느껴지지 않아서 내버려두고 있지만, 구경거리가 된 느낌이라 기분이 그다지 좋진 않은데.
으음….
톡톡.
허리에 찬 검을 톡톡 두드렸다.
…사도라면 한 번쯤 죽어도 괜찮지 않을까?
“카나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자, 잠시만요…! 지나갈게요! 우, 우왓?!”
두껍게 쌓인 인파의 벽을 뚫는 게 힘든 모양인지 한동안 낑낑거리던 저니가 떠밀리듯 불쑥 튕겨 나왔다.
뭐랄까, 그녀다운 등장이었다.
“늦어.”
“미안, 미안! 에, 그러니까…. 준비, 준비가 많아서!”
“준비물.”
“응, 준비물!”
묻지도 않았는데 변명을 늘어놓은 저니가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나만 믿어. 집처럼 편안하게 해줄게!”
“음….”
…왜 이렇게 믿음직스럽지 않지?
“그런데, 우리 어디 가?”
봐. 목적지도 묻지 않고 무작정 데려가 달라고 한 것부터 정상이 아니잖아.
저런 사람을 어떻게 믿겠어.
“세데스 성국.”
그라시스는 아르디나 대륙의 서부에 위치…했던 왕국.
반면 세데스 성국은 대륙의 동남부 끝에 있으니 짧지 않은 여정이 될 것이다.
전심전력으로 달리면 얼마 안 걸리겠지만, 동행인이 있는 이상 그럴 순 없겠지.
“텔레포트 게이트를 쓰면…. 아.”
중얼거리던 저니가 무언가 깨달은 듯 흠칫 놀라더니 내 눈치를 살폈다.
텔레포트 게이트는 마탑에서 운영하는 사업이고, 그 마탑은 제국에 있다.
총본산인 건물이 제국에 있다 뿐이지 제국 소속은 아니지만 제국으로부터 매번 어마어마한 지원금을 받고 있으니 제국의 눈치를 안 볼 수 없겠지.
게다가 게이트를 타고 세데스 성국까지 가려면 한두 번으로 안 될 테니 필연적으로 제국 내에 있는 게이트도 이용해야 할 텐데, 아무래도 그건 좀 그렇지.
제국이 나를 잡으러 오지 않는 것과 내가 내 발로 제국의 영토로 기어들어 가는 건 다른 얘기니까.
그리고 다른 문제도 있다.
“돈 많아?”
“앗.”
텔레포트로 대륙을 가로지르려고 하면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할까.
괜히 사람들이 편하고 빠른 텔레포트 게이트를 두고 힘들게 마차나 말을 타고 다니는 게 아니다.
저번에 내가 기사들이 쳐들어온 걸 보고 어이없어한 것도 그런 이유였고.
전쟁 때도 굉장히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쓰지 않던 걸 타고 넘어왔으니 내 심정이 어땠겠어.
그런 걸 보면 뱀 새끼가 말한 ‘혈기 왕성한 녀석들’이란 표현은 좀 잘못된 것 같다.
‘돈 많고 혈기 왕성한 녀석들’이 맞지.
“그럼, 걸어가?”
“마차를 구해야지.”
나라고 해서 그 먼 거리를 걸어서 가고 싶진 않다.
몇 날 며칠을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보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며칠 내내 걷는 것보단 훨씬 나으리라.
내가 아니라 이 연약한 동행인한테 말이다.
“세데스까지 가는 상단이 있다면 호위로 껴들어 가도 되고, 없으면 따로 마부를 구해야지.”
각각 장단이 있는 만큼 어떤 게 낫다고 할 순 없겠네.
여기서 세데스까지 가는 상단이 있을까도 의문이고.
“일단 가자.”
“어, 어디로?”
“마을.”
상단이든, 마차든 여기서는 못 구할 테니까.
그러기 위해선 저 사도들을 뚫고 가야 할 텐데….
응, 알겠다.
스릉.
“잠깐만!”
와락!
검을 반쯤 뽑자 저니가 급하게 달려들었다.
“내가 말할 테니까…!”
어차피 죽어도 살아나는데 왜 그런담.
* * *
가리드의 고향은 험난한 산 밑의 작은 마을이다.
본인 말로는 어렸을 때부터 어른도 힘들어하는 험난한 산을 제 집처럼 오가며 왔다 갔다 했다는데, 믿거나 말거나.
가리드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 넘어가고, 이런 작은 마을에 상단이든 마차든 있을 리가 없어서 우리의 발걸음은 자연히 더 큰 도시를 향했다.
여기서 그나마 가까운 큰 도시라고 한다면 오르도겠네.
저니에게 오르도에 대해 알고 있는지 물으니 그녀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르도? 알아!”
그리고 설명을 시작했는데, 전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대충 알아들은 것만 정리하면 오르도란 도시는 여전히 있는 모양이다.
하기야 그렇게 큰 도시가 한순간에 망하긴 힘들겠지.
새삼 그 어려운 걸 해낸 그라시스가 대단하게 느껴지네.
아무튼, 그라시스가 멸망한 후 자립할 수 있는 경제력과 군사력이 있어서 그런지 오르도는 결국 제국에 속하지 않고 자유 도시로 독립하는 길을 선택한 모양이다.
오르도, 오르도라….
어쩌면 익숙한 얼굴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아참! 카나, 이거 받아.”
“…케이프?”
“수선했어. 어때? 괜찮지?”
솔직히, 수선해 주겠다는 저니에게 찢어진 케이프를 건네면서도 별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되면 좋은 거고, 아니면 말고.
제법 오래 썼던 거라 정이 든 것뿐이지, 이렇다 할 추억은 없어서 새로 산다 해도 조금 아쉬울 뿐이지 큰 유감은 없었으니까.
정말 중요한 것은 따로 있는걸.
“….”
나는 목에 건 초커를 만지작거렸다.
“…응. 괜찮네.”
찢어진 후드 부분은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하게 붙어 있었고, 군데군데 해어졌던 곳들도 멀끔하게 고쳐져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느질 자국이 보이긴 했지만 대충 봐서는 고친 건지 모를 정도로 깔끔한 수선이었다.
저니에게 이런 재주가 있을 줄이야.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검을 들고 용병을 할 게 아니라 수선점을 열었다면 대성했을 수도.
“응? 카나, 뭐라고 말했어?”
“아니.”
익숙한 손길로 케이프를 몸에 두르고 후드를 뒤집어쓰려 할 때였다.
“카나야, 잠깐만.”
“…?”
“후드, 안 쓰면 안 될까?”
뜬금없는 저니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왜?”
“귀여운 얼굴이 가려지잖아.”
“…뭐라는 거야.”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부끄러운 멘트를 아무렇지 않게 하다니.
전생이었다면 좀 설렜을지도 모르지만 온갖 풍파를 다 겪은 지금의 나로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홱 돌렸다.
후드는, 쓰지 않았다.
* * *
“…귀여워.”
저니가 작게 중얼거렸다.
카나는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달콤한 분홍색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소녀의 귀는 붉게 물들어 있었고, 새하얀 볼에도 보일 듯 말 듯 작은 홍조가 피어 있었다.
저니는 훈훈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돌리고 있는 카나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방송을 통해 보고 있던 시청자들도 저니의 마음에 십분 공감했는지 채팅창은 열광의 도가니였다.
-커엽ㅋㅋㅋㅋ
-쓰담쓰담 마렵네..
-왜너만왜너만왜너만왜너만왜너만왜너만
-나도 카나랑 말해보고 싶다 ㅠㅠㅠ
“어허, 카나는 내 거야.”
-셔틀이 언제부터 발언권이 있었죠????
-카나가 방장 꺼가 아니라 방장이 카나 꺼 아님?
-어이, 캔따개.
-저 씨! 주문 밀렸으니까 빨리 와서 배달이나 해!
“….”
저니는 이때다 싶어 득달같이 달려드는 하이에나 떼를 보며 눈을 뾰족하게 떴다.
하여튼, 놀리려고 안달 난 놈들 아니랄까 봐.
푸우, 하고 숨을 내뱉은 저니가 표정을 바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응~ 너희들이 아무리 그래도 카나와 데이트하는 건 나야. 부럽지? 배 아프지? 샘나지? 그래서 너희들이 지켜보는 거 말고 뭘 할 수 있는데?”
-이런 ㅆ
-삭제된 메시지입니다.
-삭제된 메시지입니다.
-죽일까 마스터?
“어허, 나쁜 말 금지야.”
티키타카는 선을 지켜서.
저니는 은근슬쩍 선을 넘으려는 놈들을 처단했다.
-딱 기다려. 죽이러 간다
-오르도 가는 길 확인
-내가 검을 갈고닦은 건 이날을 위해서였다…
“덤비려고? 내 옆에 카나 있는데? 우리 카나 이길 자신 있어? 와 볼 테면 와보든가~”
-아오 ㅋㅋㅋ 딱밤 마렵네
-어린애를 방패로 쓰다니 부끄럽지도 않음??
-추한 청년
“헤헹, 그래봤자 아무렇지도 않죠?”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잘 먹는다고, 용례가 조금 다르긴 해도 시청자들의 놀림을 하도 많이 겪은 저니는 어떻게 하면 사람을 약 오르게 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예상한 대로 약 올라 죽으려고 하는 채팅창을 보며 연신 히죽거렸다.
어린애 뒤에 숨는 게 부끄럽지도 않냐는 말은 조금 찔리긴 했지만….
‘이미 한 번 해본 거, 두 번이라고 못 할 거 있나?’
로 아르카 제국의 기사들이 쳐들어왔을 때 카나에게 보호받은 전적이 있는 저니로서 가볍게 넘길 수 있었다.
과연 그걸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게 옳은지 그른지는 그녀의 머릿속에 없었다.
부끄러워 하는 카나를 구경하고 시청자들을 놀리다 보니 어느새 잘 닦인 길이 저니의 눈앞에 펼쳐졌다.
“이 길, 따라서 쭉 가면 오르도야. …카나는 이미 알고 있겠지만!”
저니는 시청자들에게 하던대로 설명하려다, 카나가 그라시스 출신이란 걸 깨닫고 무안하게 말을 마쳤다.
이거 완전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꼴이잖아.
정작 카나는 아무렇지 않은 태도였건만 저니는 창피함에 얼굴이 붉어졌다.
손부채질하며 얼굴을 식힌 저니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
“도착하면 맛있는 거 먹을….”
터벅터벅.
탁.
“…찾았다.”
그러나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으니.
평화롭게 길을 걷던 둘 앞에 괴한이 나타나 검을 겨누었다.
“딸꾹!”
순간 카나를 추격한 기사인가, 싶어서 고개를 든 저니가 자신을 겨눈 검에 놀라 딸꾹질했다.
기사가 아니라 플레이어…!
괴한의 정체를 눈치챈 저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누, 누, 누구세요…?”
“와 볼 테면 와보라 해서 왔다!”
“딸꾹!”
설마 진짜 찾아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던 저니였던지라 갑작스러운 방문에 당황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ㅋㅋㅋㅋㅋㅋ
-꼴이 좋아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잊지 않겠습니다 열사 니뮤ㅠㅠㅠㅠ
채팅창은 이미 축제 분위기였다.
모두가 그녀의 죽음을 바라는 상황.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상황을 살피던 저니가 돌연 피식 웃었다.
“흐, 흥! 나한텐 카나가 있거든?”
평소라면 설득하거나, 어떻게든 도망칠 궁리를 찾았을 그녀였지만, 지금은 든든한 호위가 있지 않나.
저니는 몸을 돌려 카나를 불렀다.
“카나야?”
“응?”
“저기 봐! 우릴 막고 있어!”
처리…해야겠지?
기대감을 한껏 담은 저니와 눈을 마주치던 카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서?”
“…어?”
이, 이런 반응이 아닌데….
괴한이 등장했을 때보다 더 당황한 저니가 다시 한번 말했다.
“그… 우리가 가는 길을 막고 있다니까?”
“응, 그래서?”
하지만 저니가 몰랐던 게 있었으니.
첫 번째로, 카나는 특별한 상황이거나 적의가 있는 게 아닌 이상 굳이 먼저 검을 뽑지 않는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카나의 적의 감지 능력은 상당히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즉, 괴한이 적의를 품은 게 자신이 아니란 걸 눈치챈 카나로서는 딱히 먼저 나설 마음이 없었다.
“아무래도 너한테 볼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잘 해결해 봐.”
전부 알아들은 것은 아니지만, 대충 알아들은 내용과 팔짱을 끼고 한 발짝 물러나는 행동을 통해 카나의 뜻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카, 카나야아아아!”
“후, 후후후후….”
믿었던 이에게 배신당한 사람의 절규와 괴한의 비웃음, 그리고 시청자들의 비웃음이 한데 어우러진 하모니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