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드디어 도착했어…!”
오르도야!
도시를 아우르는 성벽을 보며 저니가 감격의 눈물을 쏟아냈다.
오르도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은 팔을 활짝 펴고 소리를 지르는 그녀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렸다.
“….”
나는 후드를 푹 눌러쓰고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앗, 카나야!”
…쓸데없이 눈치만 빨라서는.
자신한테 날아드는 공격은 제대로 보지도 못하면서, 내가 거리를 벌리자 저니가 귀신같이 눈치를 채고 따라붙었다.
“후드, 왜 썼어?”
“…알아볼 수도 있으니까.”
내 모습을 아는 사람이 많지는 않겠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귀찮은 일은 최대한 피하고 싶다.
다소 불성실한 대답에도 저니는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방금까지만 해도 골골대면서 아주 죽으려고 했던 주제에 잘만 돌아다니네.
“역시 엄살이었구나.”
“엄살이라니! 진짜 죽는 줄 알았거든?!”
저니가 갑자기 유창해진 그라닉으로 열심히 항변했다.
죽는 줄 알았다니.
“죽기 직전엔 항상 구해줬는데.”
“그런 의미가 아니야….”
카나랑 여행한다고 해서 잔뜩 기대했는데, 정작 이상한 사람들은 꼬이고. 도와줄 줄 알았던 카나는 구경만 하고… 아니, 오히려 빨리 안 싸우고 뭐 하냐는 식으로 부추기고. 물론 구해준 건 고마운데 그럴 거면 그냥 처음부터 막아주면 되는 거 아니야? 내가 생각했던 오붓한 데이트는 도대체 어디에…?
아르키쉬로 음울하게 중얼거리는 저니.
척 봐도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이게 다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일인데, 고마운 줄 모르고 말이야.
오르도로 오는 내내 저니는 사도들에게 휘둘렸다.
정중하게 싸움을 요청하는 사도도 있었고, 다짜고짜 검을 들이밀며 싸우자고 하는 사도도 있었다.
갑자기 기습하거나 멀리서 마법이나 활을 쏴대는 놈들도 있었는데, 그런 놈들은 내가 직접 나서서 처리했다.
내 목적은 어디까지나 저니의 실력 향상이지, 그녀를 괴롭히는 게 아니었으니까.
물론 당당하게 싸움을 신청하는 경우엔 무슨 무기를 쓰든 내버려두었다.
한 가지 특이했던 점이라면 싸움이 끝나면 꼭 사도들이 무언가 주길 바라는 눈치로 나를 쳐다봤다는 것인데… 아마 처음에 주화를 받아 간 사도가 퍼뜨린 소문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가 무슨 황금 고블린도 아니고….
몇 명쯤 주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주머니를 닫고 악수로 대신했다.
물론 내 의견이 아니라 사도들의 요청을 받아 한 행동이었다.
왜 악수를 원하는지는 도저히 알 수 없었지만.
‘나야 돈 아끼면 좋지.’
아, 당연히 저니에게 패배한 사도한테는 해주지 않았다.
저니가 죽는 것을 막아 싸움을 방해한 게 미안해서 보상성으로 주기 시작한 건데 저니가 이긴 상대면 줄 이유가 없으니까.
그랬더니 왠지 모르게 저니에게 달려드는 사도들의 기세에 제대로 불이 붙었더랬다.
대체 저니가 무슨 짓을 했길래 그녀에게 죽자고 달려드는 사람이 그렇게 많았던 걸까.
“….”
저니가 순간 쌓인 게 많은 눈으로 나를 본 것 같은데.
아마 기분 탓이겠지.
그나저나, 못 본 사이 오르도에 이상한 게 생겼네.
“다음 분 오십시오.”
도시로 들어가는 입구에 주르륵 줄 서 있는 게 이상하다 싶었는데 성문에 세워진 검문소에서 경비병들이 드나드는 사람을 엄중하게 검사하고 있었다.
간혹 몇몇 사람들이 검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쫓겨나는 걸 보면 형식만 갖춘 건 아닌 듯했다.
검문소 자체는 전에도 있었지만 저렇게 출입을 통제하진 않았었는데, 자유도시가 되면서 정책이 바뀐 건가?
나는 저니의 소매를 쭉 당겼다.
“왜 그래, 카나?”
“저거.”
“검문? 그게 왜?”
저니가 딱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걸 보면 흔하게 있는 일인 모양이네.
설명을 요구하는 뜻을 담아 올려다보자 내 뜻을 알아챈 저니가 말했다.
“신분을 확인하는 거야. 용병 패나 상단증 같은 거.”
“음….”
그렇게 말하며 저니는 용병 패를 꺼내들었다.
금으로 된 패가 어스름하게 저무는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이런 실력으로 금급 용병이라니, 말세네.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신분….”
과거에는 그런 걸 걱정할 필요가 없었는데.
홍염 기사단의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죽 도열해 있는데 누가 의심하겠어.
하지만 지금의 나는 신분을 증명할 수단이 없는데.
“다음!”
고민을 하는 사이 앞에 있던 줄이 사라지고 어느새 우리 차례가 되었다.
검문소 안의 풍경은 다소 삭막했다.
감옥, 책상, 의자, 소요를 막기 위한 장비.
정말 ‘검문소’라는 단어에 충실한 장소였다.
광이 나게 잘 닦인 갑옷을 입은 경비병이 우리가 들어서는 것을 보고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케이프를 벗어주시겠습니까?”
“카나, 케이프.”
나는 군말 없이 후드를 벗었다.
의외라는 듯이 잠시 커졌던 경비병의 눈이 빠르게 원 상태를 되찾았다.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계십니까?”
“여기….”
“리베리의 용병이시군요. 확인했습니다.”
저니가 건넨 용병 패를 확인한 경비병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이번엔 내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쪽 꼬마 숙녀 분은….”
“아, 죄송해요. 제 동생이 아르키쉬를 못해서…. 저어기 구석 시골 마을에서 살다가 이번에 오르도에 처음 왔거든요. 제가 보증할 테니 어떻게 안 될까요?”
“음… 금급 용병이시니 보증은 문제없겠죠. 대신 하나만 확인하겠습니다. 원래 살고 계셨던 마을 이름이 뭡니까?”
“어, 음… 뭐였지…? 아니, 거짓말이 아니라 까먹어서…!”
경비병이 의심하는 기색을 보이자 저니가 당황해서 팔을 아무렇게나 휘적거렸다.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내 신분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신분을 증명할 만한 거….’
아, 하나 있다.
불현듯 잊고 있던 게 떠올라 품을 뒤적였다.
제국 주화와 그라시스 기념주화 사이에 대충 던져놔서 찾는 데 좀 걸리긴 했지만, 결국 원하는 것을 찾은 나는 그것을 곧바로 경비병에게 보였다.
“이거면 돼?”
“음? 이건….”
눈을 가늘게 뜨고 내가 건넨 물건을 주시하는 경비병.
침음을 흘리며 진중하게 살피는 모습에 나는 일이 쉽게 풀리겠구나, 하고 가볍게 생각했고.
철컹!
“…에?”
검문소 한쪽에 있던 감옥에 갇혔다.
* * *
아니!
저니가 입에서 불을 뿜었다.
물론 정말로 불을 뿜은 건 아니고, 그렇게 보일 정도로 흥분해서 외쳤다.
“진짜로 나쁜, 나쁜… 어….”
카나가 감옥에 갇힌 후, 검문소에서 쫓겨난 저니는 카나의 무고를 증명하기 위해 열변을 토하다가 순간 멈칫했다.
머릿속에 그동안의 고생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잠시 미혹에 휩싸였던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나쁜 애가 아니라니까요! 너무 시골이라서 이름이 기억 안 날 뿐이에요!”
“자꾸 소란 피우시면 아무리 리베리의 용병이라고 해도 신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아니…!”
무슨 말을 해도 딱딱한 반응만 돌아오니 한순간에 일행이 없어진 저니로서는 그야말로 미칠 노릇이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지금까지 카나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방 엔딩은 생각도 못 했는데ㅋㅋㅋ
-감옥 갇히면 어떻게 됨?
-풀어줄 때까지 그냥 기다려야 됨. 로그아웃해도 다시 로그인하면 감방 안이라 못 벗어남
-근데 카나는 NPC라서 어떻게 될지 몰루?
저니의 속이 타들어 가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웃고 떠들기 바쁜 채팅창.
그녀가 애꿎은 채팅창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훑고 있을 때, 딱딱한 표정으로 서 있던 경비병이 입을 열었다.
“신분 때문이 아닙니다.”
카나가 제시한 물건을 본 경비병.
그의 신분이 미천하여 그 물건의 정체와 진가를 제대로 알아보진 못해도 한낱 시골 마을에서 살던 여아가 들고 있을 물건이 아니란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처음 얼굴을 봤을 때부터 심상치 않다고 생각한 그였지만, 소녀가 멸망한 그라시스 왕가의 문장을 새긴 물건을 떡하니 내밀었을 땐 외모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이미 멸망한 나라라고 해도 왕가의 문장을 함부로 쓰는 건 좌시할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에 그는 소녀를 감옥에 가둔 후 즉시 윗선에 보고했다.
만약 문장의 뜻을 모르고 멋대로 쓰고 있던 거라면, 어린 나이에 안타까운 일이지만 작지 않은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소녀가 왕가와 관련된 인물이라면….
‘아니. 그럴 리가 없지.’
경비병은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다.
왕가의 구성원을 모두 아는 것은 아니나, 저런 소녀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게다가 차원수의 침공과 동시에 죽거나 제국으로 망명한 인간들이 이제 와서 오르도에 방문한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차라리 돌아가신 가리드 님이 돌아왔다는 말을 믿지.’
그분은 정말 그라시스를 사랑한 분이셨는데.
그는 언젠가 먼 발치에서 봤던 얼굴에 긴 흉터가 있던 남자를 떠올리며 몰려오는 씁쓸함에 입맛을 다셨다.
‘그러고 보니, 가리드 님 다음 단장에 대해선 들은 게 없군.’
단장 자리가 공석이 됐으니 분명 누군가 그 자리에 오르긴 했을 텐데.
아주 개차반이라서 마음에 안 들면 적이고 부하고 가차 없이 죽인다더라, 키가 다른 사람의 두 배는 되는 거인이라더라, 왕족도 때려눕힌 적이 있다더라….
…같은, 뜬소문만 무성했지 명확하게 밝혀진 게 없었다.
한 번은 홍염 기사단에 소속이었던 그의 상사에게 물어봤지만, 상사는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대답을 피했다.
그에게 무섭게만 느껴지는 상사마저 그런 반응을 할 정도니, 소문이 사실이었나 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다.
‘…의미 없는 생각을 했군.’
이미 그라시스는 멸망했는데 옛 생각을 해서 무엇 한단 말인가.
솔직히, 그는 멸망하기 전보다 지금이 더 살기 좋다고 느끼는 터라 딱히 예전이 그립지도 않았다.
남아있던 조금의 상념까지 털어낸 그가 단호한 태도로 저니를 밀었다.
“조사해서 문제가 없다면 풀어드릴 테니 이제 그만 가십시오. 원칙대로면 동행인 당신도 수감해야 하지만 에델 님의 사도라서 넘어가는 겁니다.”
“이왕 넘어갈 거면 카나도 좀 풀어주지….”
투덜대던 저니는 경비병의 매서운 눈빛을 맞고 꼬리를 말고 도망쳤다.
-동료를 버리고 도망치다니 실망입니다..
-등짝의 상처는 검사의 수친데;
-저니 / 인성 논란 / 유기
“시끄러워! 그리고 도망이 아니라 전략적 후퇴야! 어차피 계속 있어봤자 뾰족한 수가 나오는 것도 아니잖아!”
아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자꾸 자신의 예상 밖으로 흘러가는 상황에 저니는 한숨을 쉬었다.
물론 이 와중에도 카나가 위험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저니가 아는 카나라면 검을 뺏겼다고 해도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 되면 도시를 반파해서라도 빠져나올 것 같았으니까.
다만, 도망자 신세가 돼서 쫓겨다니는 건 저니도 바라지 않았다.
“대체 카나가 내민 게 뭐길래….”
카나에 대해 조금 알 것 같다 싶으면 모르는 게 튀어나오고, 또 알 것 같다 싶으면 또 튀어나오고….
참 양파 같은 아이야.
속으로 푸념을 늘어놓은 저니가 발걸음을 옮겼다.
감옥에 갇힌 작은 새를 풀어주기 위한 방법을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