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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1

전직 홍염 기사단 기사이자, 오르도의 경비대장 에릭.

평민 부모에게서 태어난 에릭은 그의 삶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가족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에 바쁜데, 저 높은 곳의 귀족들은 먹고 싶은 걸 마음껏 먹고, 먹다가 질리면 음식이 얼마나 남았든 서슴없이 버리지 않는가.

만약 에릭이 그런 짓을 했다간 아버지에게 맞아 죽을 게 분명했다.

어디 음식뿐인가? 사는 집, 입는 것, 시간적 여유로움 등….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평민보다 훨씬 풍족했다.

불공평하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함부로 뱉었다간 즉각 목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았기에, 그저 속으로 불만을 삭이던 에릭은 어느 날 그의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명예와 부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명예와 부? 그렇다면 홍염 기사단만 한 곳이 없지! 그라시스에서 가장 강한 녀석들이 모이는 곳이니 명예는 보장되어 있고, 그런 녀석들을 붙잡아 두려면 돈도 많이 주지 않겠냐?’

‘주지 않겠냐?’라는, 확신이 아닌 추측의 말.

애초에 그의 아버지도 하루 먹고살기 바쁜 사람이었기에 위쪽의 생태를 알 리 없었다.

그저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옛날이야기에 추측을 담아 말한 것뿐.

그러나 에릭은 그런 아버지의 말에 홀려 스스로 지옥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런 놈들이 그라시스에서 가장 강한 놈들이라고?’

에릭은 자신이 검술에 재능을 갖고 있다는 걸 알았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검을 잡았지만 워낙 배우는 게 빨라 금방 또래를 따라잡았고, 몇 년이 지났을 땐 검을 가르쳐주던 전직 용병을 꺾었다.

물론 그의 스승이 검을 제대로 배운 사람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어쨌거나 그의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실제로 그의 재능은 굉장히 뛰어난 편이라서 어렵지 않게 홍염 기사단에 입단할 수 있었다.

그렇게 기사단에 입단하여 다른 단원들을 둘러보던 에릭.

죄다 자신과 비슷하거나 좀 더 나은 수준인 것을 본 그는 생각했다.

‘이 정도면 단장이란 놈도 별거 없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단장에게 도전장을 던졌고-

‘…허접.’

목표했던 단장과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웬 어린 여자애에게 무참하게 패배했다.

실컷 두들겨 맞고 쓰러진 그를 무심하게 내려다보는 분홍색의 눈동자.

패배의 아픔을 뼈저리게 몸에 새긴 그날 이후로 그의 악몽이 시작됐다.

‘에릭, 물.’

‘에릭, 밥.’

‘…못 싸우겠다고? 응, 그럴 수 있지. 대신 나랑 싸우자.’

‘힘 조절 안 할 거니까 알아서 잘 피해.’

“…허억!”

집무실에 앉아 잠시 졸던 에릭은 절벽에서 떨어지는 꿈을 꾼 사람처럼 경기를 일으켰다.

쿵쾅대는 심장을 다스릴 정신도 없이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익숙한 집무실의 풍경을 확인하자 비로소 식은땀을 닦았다.

“꾸, 꿈이었구나….”

단장과 처음 만난 때의 꿈이라니.

악몽도 이런 악몽이 없다고 생각하며 그가 찬물을 들이켰다.

속이 시릴 정도의 차가운 물이 속에 깃들자 몽롱하게 가라앉았던 정신이 조금씩 깨어났다.

단장에게 도전장을 내민 그날, 그의 앞에 등장한 것은 단장이 아닌 자신을 부단장이라고 소개한 소녀였다.

기사단 내에서 가끔 봤던 얼굴이기에 아예 처음 보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그때마다 에릭은 소녀가 기사단의 일을 돕는 급사나 누군가 부리는 시종 정도로 생각했었다.

그가 입단한 후 부단장에 대한 소개는 받은 적도 없을뿐더러, 이런 어린 소녀가 부단장이라는 직위에 있을 거라곤 상상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부단장이 단장을 보좌하는 비서 같은 자리냐고 물었는데 그것도 아니라고 하니 에릭이 당시 느낀 황당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말인즉 고작 열 살이나 될 법한 소녀가 에릭, 그리고 다른 기사들보다 강하다는 뜻이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리 없으니 분명 소녀를 귀엽게 여긴 다른 사람들이 봐준 것이리라.

소녀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단장이 되겠다는 목표가 있는 에릭으로서는 소녀의 환상을 깰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다치지 않게 살살 하자.’

하지만 그때의 에릭은 몰랐다.

깨지는 건 소녀의 환상이 아닌 자신의 자존심이라는 걸.

“알았더라면 절대 안 덤볐을 텐데….”

부단장에게 패배한 이후, 그는 그야말로 개처럼 굴러야 했다.

건방지게 단장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는 이유로.

덕분에 실력은 일취월장하긴 했으나, 만약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다시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에릭은 다짐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천국이지.”

그를 개같이 굴리던 부단장도 없고, 전쟁에 나가 마물과 차원수, 제국군과 싸울 필요도 없다.

치안 유지를 위해 정기적으로 순찰을 돌고, 가끔 범죄자나 마물 같은 위험 요소가 나타날 때만 나서서 싸우면 되는 평화로운 일상.

명예와 부를 쫓던 예전의 에릭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오늘 하루도 끝이구나~”

찌뿌둥한 몸으로 기지개를 켜며 그가 느긋하게 중얼거릴 때였다.

삐이익!

“뭐야?”

갑자기 울리는 호출 신호에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에릭은 평화로운 일상에 생긴 이변에 귀찮음을 느끼며 신호를 확인했다.

“검문소잖아?”

또 누가 난동이라도 부렸나.

머리를 벅벅 긁은 그가 검문소에서 온 신호를 받았다.

“어, 나야. 무슨 일인데?”

-아 그, 대장님….

“말 더듬지 말고 제대로 말해.”

-네, 넵! 수상한 이인조를 발견했습니다! 한 명은 사도고 다른 한 명은 어린 소녀인데, 소녀 쪽이 제시한 물건이 영 심상치 않아서 임시 감옥에 수감했습니다만… 아무래도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뭔 소리야…. 너 뇌물 받았냐?”

-아, 아닙니다!

“농담인데 뭘 또 그렇게 진지하게 받고 그러냐. 무안하게.”

‘이 녀석 이름이… 그래, 개럿이었지.’

요령 부리지 않고 성실하게 근무하는, 다른 말로 하면 융통성 없는 녀석이 뇌물 같은 걸 받았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아암…. 알았어, 바로 갈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넵!

검문소와의 연결을 끊은 주섬주섬 장비를 챙긴 에릭은 집무실에서 나갔다.

에릭이 그를 알아본 부하들의 인사를 대충 넘기며 검문소에 도착하자 미리 나와 있던 개럿이 그를 반겼다.

“충성!”

“인사는 됐고, 빨리 끝내고 퇴근할 거니까 빨리 말해.”

“이런 것을 받았습니다만….”

“…뭐야, 왕가의 문장…?”

이게 왜 여기서 나와?

그라시스 왕가의 문장이 새겨진 작은 패를 본 에릭은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등골이 싸해졌다.

뭔가, 뭔가… 말로 설명할 순 없지만 불길한 이 느낌.

그냥 느낌으로 치부하고 넘길 수도 있지만, 에릭은 그동안 수많은 전장에서 그를 살린 직감을 무시하지 않았다.

“…잠깐만, 이걸 누가 줬다고?”

“어린 소녀였습니다.”

“그 소녀 외모가 어땠냐?”

“어… 귀족가의 여식인가 싶을 정도로 귀여웠습니다. 크면 남자 여럿 울리겠던데요?”

“…혹시, 분홍색 머리였냐?”

“어, 네, 맞습니다.”

“눈도 분홍색이고?”

“그렇습니다만….”

이쯤 되니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눈치챈 개럿이 눈치를 살폈다.

“…아는 분, 입니까?”

어느새 소녀를 호칭이 달라진 개럿.

에릭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린 지 오래였다.

“…지금 어디에 있다고 했지?”

“…임시 감옥에 가둬놨습니다.”

그 말에 에릭은 무의식적으로 검문소를 살폈다.

다행히 검문소는 아직 어디 한 곳 부서지지 않고 멀쩡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개럿.”

“넵….”

“오늘 본 건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라. 그리고….”

삽시간에 십 년은 늙은 듯한 얼굴로 에릭이 말했다.

“제발 융통성 좀 키워….”

진심 어린 한 마디를 남기고 검문소 안으로 들어가는 에릭의 뒷모습은, 제 스스로 지옥문을 열던 젊은 시절 그의 모습과 매우 닮아 있었다.

* * *

‘카나, 이거 받아.’

‘…이게 뭔데?’

‘혹시 너를 괴롭히거나, 너에게 껄떡대는 후레…가 아니라, 놈이 있다면 이걸 보여 줘. 그럼 깔끔하게 해결될 거다.’

‘흐응….’

…가리드, 거짓말쟁이.

깔끔하게 해결되긴 무슨, 더 귀찮아졌잖아.

아니면 가리드가 말한 용도와 다르게 쓴 것이 화근이 된 건가….

나는 앞을 가로막은 철창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아니.’

…인정할 건 인정하자.

내가 너무 바보 같았어.

내 행동이 불러올 여파를 깊게 생각하지 않고 당장의 귀찮음을 피하려다가 더 귀찮은 일을 불러왔으니 말이야.

이럴 때마다 내가 인내심이 없다는 게 실감된다….

과거의 행동을 반성하던 나는 문득 고개를 치켜드는 억울함에 입술을 삐죽였다.

아니, 근데….

‘아무리 그래도 감옥에 처넣는 게 맞아?’

오르도 사람이 그라닉을 할 줄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말 한마디 들어볼 수는 있잖아!

왕가의 문장을 보여줘서 문제가 생긴다고 해도 말로 할 줄 알았지, 이렇게 다짜고짜 감옥에 가둘 거라곤 생각 안 했다고….

나는 가리드처럼 나들이를 좋아한 것도 아니라서, 패를 받은 후로 한 번도 쓸 일이 없었던 터라 설마 이런 상황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왕족이나 귀족이 부르는 게 아니라면… 그마저도 내가 꼭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내가 나서는 일은 거의 없었고, 그놈들은 나를 알고 있어서 패를 보일 필요도 없었으니까.

‘소란을 일으키긴 싫은데.’

그렇다고 얌전히 감옥에 갇혀 있는 건 더 싫고.

으음.

“사람들한테만 피해 안 주면 되겠지.”

철창을 두드려 내구성을 확인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게 하자.

내가 탈옥해서 곤란해지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까지는 내 알 바 아니니까.

건강이 제일이란 말은 어쨌든 몸만 안 다치면 된다는 거잖아?

철창을 두 손으로 잡고 마나를 끌어올리려고 할 때였다.

급박한 발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검문소의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왔다.

타다다닷!

벌컥!

“단장님! 기다려 주세요!”

“…단장?”

그런 호칭으로 나를 부를 사람은 많지 않은데.

“어억!”

휘청.

나를 단장이라고 부른 남자는 급하게 움직이다 발이 꼬여 휘청거리면서도 내 앞으로 다가왔다.

철창을 사이에 두고 남자의 얼굴을 맞닥뜨린 나는 그제서야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안녕 허접.”

“허접이 아니라 에릭입니다…! 대체 단장님이 왜 여기에 들어가 계신 겁니까?!”

“가두니까 들어왔지.”

내가 미쳤다고 내 발로 여기 들어왔을까.

태평하게 중얼거리자 머리를 짚은 에릭이 품을 뒤적여 열쇠를 꺼내 감옥 문을 열었다.

끼익.

“이렇게 열어줘도 돼?”

“어차피 얌전히 갇혀계실 분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감옥을 나와 에릭이 권한 의자에 앉았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사라지신 분이 갑자기 나타나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몰라.”

“물어본 게 아니라고요….”

마른세수를 한 그가 맞은편에 놓인 의자에 털썩 앉았다.

안 본 지 몇 년밖에 안 됐는데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에릭의 얼굴은 폭삭 늙어 있었다.

내가 알기로 에릭의 나이는 그리 많지 않을 텐데.

안타깝네….

“다 부단장… 단장님 때문이지 않습니까!”

“…응? 나?”

“맨날 물 떠와라 먹을 거 가져와라 심부름시키질 않나, 마물 무리와 마주치면 빨리 싸우라고 엉덩이를 걷어차질 않나, 모처럼 쉬려고 하면 불러서 패질 않나…!”

뭐 그리 쌓인 게 많은지, 에릭은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나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한참 동안 그의 불만을 묵묵히 듣고 있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구나.”

“…그게 다입니까?”

“그럼 무슨 반응을 원해?”

“에휴….”

에릭은 그러면 그렇지, 뭘 기대했냐는 듯한 한숨을 토했다.

근데, 듣고 있으니 나도 좀 억울하네.

누가 보면 아주 그냥 내가 상종 못할 나쁜 년인 줄 알겠어.

“심부름시킨 건 너도 동의한 거잖아.”

그가 가리드에게 도전하는 대신 나에게 도전하기로 했을 때 나와 그는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에릭이 이기면 단장 자리를 넘겨주기로.

하지만 내가 이기면 무슨 일을 시키든 군말 없이 따를 것.

서로 저울에 올린 것의 무게가 다른 걸 알면서도 좋다고 동의한 건 자기면서 왜 이제 와서 다른 말을 하는지?

“윽, 그, 그건 그렇지만….”

“엉덩이를 찬 건, 네가 겁먹고 안 싸우고 있어서 그런 거고.”

“….”

“쉬는 날에 부른 건 네가 너무 건방져서.”

나에게 한차례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렸는지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길래 기강을 잡았다.

그렇게 몇 번 당하고 나니까 드디어 콧대를 낮추더라.

“애초에 가리드를 건드리지 않았다면 네가 뭘 하든 그냥 내버려뒀을 거야.”

그러게 아픈 사람을 건드리긴 왜 건드려.

에릭이 찔린 표정을 지었다.

“아, 아니 저도 그땐 단장님이 아프신 줄 몰랐죠…. 알았다면 그랬겠어요?”

“너라면 그랬을 거 같은데.”

“에헤이! 저 그렇게 막 나가는 사람 아닙니다!”

“음….”

“진짜라니까요!”

의심하는 눈초리로 보자 에릭이 펄쩍 뛰며 외쳤다.

뭐, 그럼 그런 거로 하자.


           


I Became a Raid Boss

I Became a Raid Boss

레이드 보스가 되었다
Score 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One day, when I came to my senses, I found myself reincarnated in another world. After enduring a rough life post-reincarnation, I thought I could finally settle down, quietly tending to a flower garden in the mountains… …But something feels o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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