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광등 하나가 깨져서 조금 어두워진 복도와 음식이 타는 것 같은 불쾌한 냄새.
마치 꿈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광경에, 은색 소녀는 방문을 다시 닫아버렸다.
하아. 하아.
은색 소녀는 가슴 위에 손을 올리고, 천천히 심호흡을 시작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꿈은 꿈에 불과하니까.’
‘꿈에서 봤던 나는 바로 밖으로 나갔지만, 나는 문을 닫았잖아? 그 꿈은 예지가 아니야.’
은색 소녀는 눈을 꼭 감고 남색 열매를 손에 꼭 쥔 채, 혼란과 공포 그리고 호흡이 정돈되기를 기다렸다.
‘인간….’
미니 새싹 사신은 그 모습을 올려다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은색 소녀가 열매를 먹지 않는 한,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없고, 닿고 싶어도 닿을 수 없었다.
그저 더 이상 늦기 전에, 애착 인간이 열매를 먹어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
시설에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시행하는 역사 수업 시간.
아이들을 강당에 모아두고 영상을 흘려보낼 뿐인 시간이었지만, 그 누구도 그 영상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인류 문명은 예상치 못한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그것은 충분히 제어되고 있다고 여겨지던 오브젝트의 갑작스러운 습격이었습니다.]
[인류는 그 돌발적인 습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생존한 사람들은 한 줄기 희망을 품고 지하에 있는 최후의 요새로 숨어들었습니다.]
[과학자들은 쉬지 않고 오브젝트에 맞설 새로운 기술을 연구하고, 아이들은 언젠가 다가올 반격의 날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은색 소녀는 도무지 영상 내용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똑같아. 꿈속이랑 똑같아.’
하필이면 복도 형광등이 깨진 날에 맞춰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하는 역사 수업을 한다니?
정말로 꿈이 예지몽이라도 되는 걸까?
은색 소녀는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져서, 영상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매번 완전 똑같은 영상이 흘러나왔었지만, 언제나 모든 내용을 필기할 정도로 열심히 들었었는데도 말이다.
똑같은 내용의 요약 노트가 10권이 넘을 정도였는데….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열매의 달콤한 향기와 함께 짧은 의문이 스쳐 지나갔다.
‘뭔가 이상해. 어째서 매번 같은 영상을 보여주는 거지?’
하지만 그런 생각은 순식간에 사그라들고, 그 자리를 친구에 대한 걱정이 채웠다.
그래도 소녀의 마음속에는 한 조각의 의심이 자리 잡았다.
‘시설’이 뭔가 수상하다고.
***
오늘의 마지막 수업 시간이 되자, 은색 소녀는 되려 침착한 기분이 들었다.
‘꿈이랑 전부 똑같아.’
오늘 일어난 일들은 자신의 반응을 제외한 모든 것이 꿈과 똑같았다.
하아.
은색 소녀는 주먹 속에 숨긴 열매의 향기를 맡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이제와서 꿈은 꿈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아마, 내 두 번째 초능력이 개화한 거겠지.’
이제 시설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한 소녀는 예지몽을 꿨다는 가정하에,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정말로 ‘시설’이 그런 짓을 하고 있었다면? 내가 가진 미약한 가속 능력으로 ‘시설’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있었더니, 어느새 수업이 끝나버렸다.
그때, 심각한 표정의 은색 소녀를 향해 갈색 소녀가 다가왔다.
“먼저 갈게. 너무 걱정하지 마. 너도 금세 올 수 있을 거야!”
갈색 소녀는 찌그러진 소녀의 입가를 붙잡고 끌어올리며, 씨익 웃었다.
“마지막 배웅은 웃으면서 해줘.”
“저기, 그게 그러니까….”
“?”
당장이라도 예지몽 이야기를 꺼내고 싶었지만, 차마 꺼낼 수 없었다.
“그래, 곧 다시 보자.”
은색 소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힘껏 웃으면서 말했다.
***
늦은 밤의 어둠이 어스름하게 깔린 송파구 외곽, 제임스 타워의 상층부에 위치한 개인실.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제임스의 날카로운 눈빛은 여러 장의 보고서를 훑어보는 중이었다.
고급 가죽 소파에 편안히 기대앉은 제임스의 주변으로 따스한 빛을 내는 황금 사신이 조명 대신 앉아 있었다.
‘인간, 언제 쉴 거야?’
황금 사신은 집에 왔으면서도 도무지 놀아줄 생각을 하지 않는 제임스를 시무룩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보고서를 계속해서 읽고 있었으면서, 제임스는 그런 기색을 금세 눈치채고 황금 사신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금방 끝날 거야. 조금만 기다려.”
‘빨리 와야 해!’
황금 사신은 제임스의 말을 듣더니, 히히 웃으며 음료수 컵 위로 꾸물꾸물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제임스는 그 모습을 보고 작게 웃더니, 핫초코를 살짝 마시고 다시 보고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확실히 의외의 결과로군. 신기해.”
제임스는 중얼거리며 보고서의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제임스가 보고 있는 보고서는 확실히 평범하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미니 사신 애착 인간의 대사증후군 유병률에 관한 보고서>
<기존 통계>
– 초기 애착 인간들에게서 일반 인구 대비 유의미하게 높은 대사증후군 유병률이 관찰되었음.
– 특히 당뇨병, 비만 등 정제된 당분 섭취와 연관된 질환의 발생 빈도가 현저히 높았음.
<최근 동향>
– 지난 6개월간 사신 애착 인간들의 대사증후군 유병률에 극적인 변화가 관찰됨.
– 놀랍게도 유병률이 0%로 급감하였으며, 기존 환자들의 완전 회복 사례도 다수 보고됨.
<가설>
– 골절상 등을 황금 사신이 인지할 경우, 다음날 치료되는 현상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됨.
<향후 연구 방향>
– 황금 사신의 치유 메커니즘에 대한 심층 연구 필요.
– 치유 효과의 지속성 및 재발 가능성 평가.
제임스는 쉽게 결론을 낼 수 있었다.
[황금 사신이 ‘대사증후군’을 인식하고 모종의 방법으로 회복시켰다.]
제임스는 미니 사신용 빨대로 코코아를 냠냠 먹고 있는 황금 사신에게 고개를 돌려서 물었다.
“잔뜩 먹어서 생기는 병을 어떻게 치료한 거지?”
‘?’
처음에는 제임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를 못해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제임스가 여러 가지 단어와 사례를 들어가면서 설명하자 황금 사신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비밀이야!’
하지만 황금 사신은 양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히히 웃을 뿐이었다.
***
나는 젤리 밀림 깊숙한 곳에 위치한 나선이 있던 곳에 도착했다.
‘전이랑 별로 바뀐 것은 없어 보이네.’
그곳은 여전히 마치 비닐봉지를 묶어둔 것처럼 공간이 우그러든 채로 굳어 있었다.
바뀐 점은 하나, 그 주변을 창을 든 황금 사신들이 뚜방뚜방 돌아다니고 있는 점 정도였다.
그 아이들은 다가오려는 미니 사신들에게 ‘엄마가 막아둔 곳이야!’라고 의지를 보내며, 나선에 함부로 다가가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잘하네.
세희 연구소 경비를 하다 보니 노하우가 생긴 건가?
나는 그런 황금 사신들을 지나쳐서, 나선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회색 액체도… 변화 없음.’
미니 사신 정원 전체를 아우르는 감각을 이용해서 살펴보자, 나선의 끝에 차 있던 염원의 수위는 그대로였다.
아무래도 미니 사신 정원과 염원의 흐름이 연결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다행이네.
나는 주변을 지키는 황금 사신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알려달라고 한 뒤, 그 자리에서 떠나갔다.
그렇게 마시멜로 평원에 도착하자, 미니 사신들이 잔뜩 모여서 뭔가를 만드는 것이 보였다.
황금 사신부터 시작해서 검은 사신, 노란 사신, 푸른 사신, 붉은 사신들까지 함께하는 대규모 작업이었다.
거대한 밀가루 반죽 위를 뚜방뚜방 밟는 거대 검은 사신들.
혼자서 요리사 모자와 복장, 그리고 신발까지 만들고 있는 노란 사신.
밀가루를 조금씩 떼어내서 뭉친 뒤, 화덕에 넣는 황금 사신들.
그리고 그 화덕에 신나게 불을 뿜는 붉은 사신들.
빵을 만들고 있는 건가?
내가 천천히 걸어서 다가가자, 화덕에서 빵을 꺼내든 황금 사신이 활짝 웃으며 의지를 보내왔다.
‘엄마도 먹을래?’
황금 사신이 내민 트레이에는 맛있어 보이는 빵과 이유 없이 같이 구워진 하얀 아귀가 담겨있었다.
뀨힝힝.
하지만 완전 미니 사신 전용 크기라서, 내가 먹기에는 너무 작았다.
‘너무 작아….’
‘앗!’
내가 그 점을 지적하자, 황금 사신은 깜짝 놀라서 푸른 사신을 불렀다.
그러자 푸른 사신들이 빗자루를 타고 날아오더니, 허공에 문자열을 수놓기 시작했다.
[빵은 커다래져 주세요!]
[먹을수록 건강해지는 빵이 되어주세요!]
푸른 사신의 마법이 조그마한 빵 위로 내려앉자, 빵은 순식간에 커다랗게 변했다.
‘건강해지는 빵이야!’
나는 황금 사신이 내미는 빵을 야금야금 뜯어 먹으면서, 미니 사신들의 제빵 작업을 구경했다.
조그마한 아이들이 꾸물꾸물해서 보는 맛이 있었다.
그렇게 제빵 작업이 끝나자, 미니 사신들은 각자 커다란 빵 한 조각을 챙겨서 흩어졌다.
아마 애착 인간과 같이 먹으려는 거겠지?
나는 미니 사신이 만든 빵을 먹은 애착 인간이 얼마나 놀랄지 생각하며 작게 웃었다.
그야, 황금 사신이 준 빵은 바게트마저도 설탕처럼 달았으니까.
히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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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모든 일정이 끝나자, 단 한 명만을 위한 졸업식이 시작되었다.
강당을 위에서 가로지르는 통로.
갈색 소녀는 졸업생만이 나아갈 수 있는 통로를 걸으며,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인류를 위한 최전선에 나갈 수 있다니!
통로를 걸어가며 위에서 내려다보자, 이제는 멀쩡한 표정을 짓는 은색 소녀가 있었다.
오늘 점심때까지만 해도 굉장히 표정이 안 좋았는데, 지금은 꽤 괜찮아 보였다.
오히려 어딘가 굳은 결심을 한 표정이었다.
‘다행이야.’
분명 은색 소녀라면 곧 최전선에 합류할 수 있을 거야.
살짝 쓸쓸한 기분을 느끼며 계속 걸어 나가자, 어느새 시설을 벗어나 있었다.
시설과 달리 어딘가 낡고 피 냄새가 나는 길.
‘?’
조금 이상하기도 하고 불안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갈색 소녀는 금세 그런 기분을 던져버렸다.
그렇게 길의 끝에 도달하자, 인류군 복장을 한 남자가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자, 여기 침대에 누워라.”
남자의 몸에는 짙은 피 냄새가 배어있었고, 그 표정에는 귀찮음이 가득했다.
게다가 인류군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사명감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저런 남자가 인류군에 있을 수가 있지?
갈색 소녀는 그런 의문을 품으면서도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철제 침대에 몸을 뉘었다.
철컥. 철컥.
두꺼운 강철로 된 구속구들이 소녀의 몸을 단단히 붙들었다.
“저기, 이건 도대체 뭘 하는 건가요?”
갈색 소녀가 조금 이상함을 느끼고 묻자, 남자는 여전히 퉁명스러운 태도로 말했다.
“뭐긴 뭐야. 도축이지.”
그 말과 함께 침대가 움직이더니 갈색 소녀를 거꾸로 매달아버렸다.
“어?”
갈색 소녀는 갑작스러운 말과 사태에 당황해서 어리둥절한 소리를 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남자는 날카로운 칼을 하나 꺼내 들고 그대로 소녀의 목을 향해 뻗었다.
그렇게 갈색 소녀의 목에 칼날이 닿으려는 순간.
쾅!
큰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은색 소녀가 남자를 발로 걷어차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