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배신자’를 잡으라는 방송이 울려 퍼진 시설 내부, 인간 도축장.
점멸하는 적색 비상등이 벽과 바닥에 꿈틀거리는 기괴한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사방에서 사람들의 고함 소리와 발소리가, 날카로운 경고음 사이에 섞여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중에는 은색 소녀에게 너무나 익숙한, ‘시설’ 소속 아이들의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어떡하지?”
갈색 소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당황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은색 소녀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이 참상이 발견되면 어쩌려고 훈련하던 아이들까지 동원하는 거지…?”
은색 소녀 역시 혼란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도 은색 소녀는 이 상황을 해결하려고, 최대한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굉장히 넓고 길쭉하고, 양 끝에 입구와 출구가 하나씩 있는 방.
방에 잔뜩 걸려있는 참상들.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발소리.
‘이대로 있으면 안 돼.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하지?’
꽤 오랜 시간을 보냈던 ‘시설’ 내부였지만, 여기서 탈출할 길 따위는 기억 속에 없었다.
그 순간, 은색 소녀의 시야에 조그마한 무언가가 보였다.
저 멀리서 손을 흔드는 머리 위에 귀여운 새싹이 돋아난 수상쩍은 오브젝트.
[인간! 이쪽이야!]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
은색 소녀에게 열매를 먹으라고 했던 그 목소리였다.
게다가 아주 작은 목소리인데도, 이 소음 속에서 명확히 들리고 있었다.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갈색 소녀를 보면, 아마 자신에게만 들리는 정신 오염 같은 거겠지.
‘그래도 다른 선택지가 없어.’
은색 소녀는 갈색 소녀의 손을 잡아당기며, 새싹 오브젝트가 부른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벽면에 숨겨진 사각형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고기에 가려져서 얼핏 보기에는 찾기가 힘든 구멍이었다.
“여기 구멍이 있어! 핏자국…. 뭔가 폐기물을 버리는 구멍인 것 같아.”
그리고 갈색 소녀는 이걸 어떻게 발견한 거냐며, 정말 눈이 좋다고 칭찬했다.
그 칭찬에 은색 소녀의 시선은 저절로 새싹 오브젝트에게 향했다.
[빨리 가야 해!]
새싹 오브젝트는 굉장히 초조한 표정으로 은색 소녀를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굉장히 무해해 보이고 인간에게 친화적으로 보이는 모습이었다.
은색 소녀는 그 모습을 보고 친화적인 오브젝트를 조심하라는 당연한 이야기가 생각났지만, 애써 무시했다.
어차피 열매를 먹은 시점에서 돌이킬 수 없어.
게다가 여기서 탈출할 다른 방법도 보이지 않아.
은색 소녀는 새싹 오브젝트를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갈색 소녀와 함께 구멍 속으로 몸을 던졌다.
***
미니 사신 정원, 마시멜로 평원.
나는 적당히 안뜰과 가까워서 무선 신호가 잡히는 곳에 누워, 조그마한 TV를 보고 있었다.
[다음은 최근 태평양에서 발생한 ‘푸른 안개’ 사태와 관련한 소식입니다.]
[제임스 연구소가 이번 사태를 조사하기 위해 연구원들을 파견한다고 밝혔습니다.]
[주목할 만한 점은 파견되는 모든 연구원이 특급 오브젝트로 알려진 미니 사신과 동행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제임스 연구소 측은 앞으로 위험 지역 탐사에 나서는 직원들의 경우, 인간에게 우호적인 미니 사신과 함께 갈 수 있는 사람만을 선발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나라의 일부 연구소에서는 오브젝트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뉴스에서 드디어 제대로 된 조사팀이 파견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동안 매일 5분씩 투자해야 했던 귀찮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 기분이 엄청나게 좋아지는 소식이었다.
히히.
그 ‘푸른 안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정말 불안했는데, 다른 연구소들은 조사할 생각이 없어 보여서 조금 짜증이 났었다.
아마 바다를 직접 조사하는 게 힘들어서 그런 거겠지.
역시 제임스 연구소 유능해!
그렇게 기분 좋은 뉴스가 끝나고 광고가 흘러나오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었더니, 예상치 못한 장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TV 화면에 황금 사신이 가득했다.
화면 속에서 황금 사신들이 우글우글 모여, 행복한 표정으로 쿠키를 야금야금 뜯어 먹고 있었다.
[황금 사신을 위한 최고의 간식!]
[전문적인 연구소에서 제작해서 안심할 수 있는 간식!]
[황금 사신 쿠키!]
마지막 장면에서 황금 사신이 쿠키를 품에 안은 채, 행복하게 웃는 것과 함께 제품 로고가 나타나며 광고가 마무리되었다.
‘세희야….’
광고 나레이션 목소리는 세희였고, 쿠키를 만든 곳은 ‘세희 연구소’였다.
아마 저 광고도 세희 연구소에서 찍지 않았을까?
황금 사신이 병아리처럼 잔뜩 나온 것을 보면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서아가 저 광고를 허락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광고가 나왔다는 사실 자체였다.
황금 사신의 애착 인간이 저런 광고가 통과될 정도로 많아졌다는 소리잖아?
아무래도 나중에 한번 황금 사신 숫자를 확인해 봐야겠어.
설마 억 단위는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더니, 저 멀리서 황금 사신들이 잔뜩 화난 눈초리로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 아이들의 손에는 문장이 적힌 길쭉한 마시멜로가 하나씩 쥐어진 상태였다.
그 내용을 확인해 보니….
<노란 사신 – 환상 구현화 헤일로 사용 가능.>
<가짜 안대 보라….>
<….>
‘저거, 내가 썼던 헤일로 테스트 정리용 낙서잖아? 안 치웠나 보네.’
그리고 황금 사신들은 그 마시멜로로 나를 마구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엄마 규칙!’
‘규칙!’
나는 내가 만든 규칙을 자기가 안 지켰다며, 한참 동안 뚜시뚜시를 당해야만 했다.
힝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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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펼쳐진 푸른 태평양의 물결 위로 거대한 연구선이 천천히 나아갔다.
수평선 너머로 지는 해가 바다를 주황빛 물감으로 물들이는 가운데, 선체는 부드럽게 출렁이는 파도를 가르며 전진했다.
갑판 위에 선 여자를 향해서, 바닷바람이 휘몰아쳤다.
갈매기 울음소리가 간간이 들려왔지만,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귓가를 채운 것은 파도가 선체에 부딪히는 소리와 바람이 돛대를 스쳐 지나가는 소리뿐이었다.
다들 바다와 배가 만들어 내는 분위기에 취한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다들 머리 위에 미니 사신을 얹고 있어서, 조금 이상한 느낌이었다.
애착 인간의 머리 위에서 얌전히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는 검은 사신들.
바닷바람을 느끼려는 듯, 머리 위에 서서 양팔을 벌리고 있는 황금 사신들.
여자는 그 모습을 보고 애착 사신을 내려다보았지만, 그녀의 애착 사신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잠들어 있었다.
배에 오르기 전까지만 해도 둥실둥실 주변을 날아다니던 밍밍이는 배에 오르기 무섭게 잠들어버렸다.
배추로 자기 몸을 감싸더니, 피부색도 보호색처럼 배추가 되어버렸다.
‘매번 잠들 때마다 이러네. 무슨 이유라도 있나?’
여자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잠이 든 밍밍이의 볼을 콕콕 찔렀다.
그리고 밍밍이에서 시선을 떼더니, 배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제임스 익스플로러’ 호는 그 이름값을 하는 웅장한 모습이었다.
250미터가 넘는 길이의 선체는 마치 떠다니는 요새처럼 보였다.
최첨단 장비들이 가득한 갑판 위로 여러 개의 안테나와 위성 접시가 솟아 있어 그 존재감을 한층 더했다.
게다가 튼튼한 복합 장갑과 흉흉해 보이는 함포까지.
물론 그런 것들은 강력한 오브젝트에게 크게 소용 있는 무장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이 배를 지키는 가장 큰 전력은 선원 숫자만큼 돌아다니는 ‘미니 사신’들일 것이다.
사람들 머리 위에 앉아있는 미니 사신들을 보면 어떤 오브젝트가 와도 괜찮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지하에 있는 ‘시설’ 깊숙한 곳.
창문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빛만이 방을 밝히는 가운데, 두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창문 근처에 서서 밖을 내다보는, 그야말로 밤의 귀족을 그린 듯한 남자.
그리고 근처에 고개를 숙이고 엎드리고 있는 남자였다.
“각하. 어째서 놓아준 것입니까?”
“필요하기 때문이다.”
부복한 남자가 묻자, 그의 주인은 동굴 천장이 내뿜는 별빛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가짜 별빛을 올려다보는 남자의 입가에는 정말로 즐겁다는 듯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마침내. 가장 필요한 가축을 찾았다.”
별빛을 올려다보던 남자가 그렇게 말하자, 엎드린 남자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올린 그곳에, 그의 주인은 없었다.
“그 조각만 얻으면 나는, 그리고 우리는 지상으로 올라가 모든 것을 지배할 힘을 얻게 될 것이다.”
마치 순간 이동한 것처럼, 주인의 목소리는 그의 뒤편에서 들려왔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아직 부족하다.”
그때, 멀리 있던 그의 주인이 어느새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었다.
부복한 남자는 그 손길에 숨도 쉬지 못할 만큼 긴장했다.
“그러기에 너의 역할이 중요하다. 집 나간 양이 희망을 품고 최대한 발버둥 치도록 만들어라.”
“예.”
부복한 남자가 폐에서 숨을 쥐어짜 내듯이 대답하자, 어느새 그의 주인의 기척은 방에서 사라진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