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니는 퍽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오크 고기라고 해도 따지고 보면 돼지랑 다를 게 없잖아. 벌레를 먹는 것도 아니고, 맛이 없는 것도 아닌데 딱히 먹지 않을 이유도 없어. 그렇지 않아?”
-이제 와서 그래봤자..
-혓바닥이 기시네요^^
-그래서 로그아웃해서 도망가려고 하셨나요??
“겨, 결국 안 했잖아…! 그럼 됐지, 그걸로 꼬투리를 잡고 그래?”
안전 구역이 아닌 곳에서 접속을 종료하면 캐릭터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다.
그에 대한 데모닌스의 배려인지, 도시가 아닌 필드 곳곳에도 안전 구역이 많이 있었고, 필요한 경우 직접 만들 수도 있었다.
그래서 플레이어들은 도시를 떠나 필드에서 며칠을 보내든 딱히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NPC가 없는 경우에 한해서, 이지만.
도시 외의 안전 구역엔 NPC가 없었고, 직접 만드는 것 또한 플레이어들만 있을 때만 가능했다.
플레이어들은 데모닌스가 굳이 이렇게 번거로운 방식을 채택한 이유에 대해 분분하게 떠들었다.
수많은 말 중 가장 많은 공감을 받은 것은 현실감을 주기 위해서 이렇게 만들었다는 주장이었다.
게임인 이상 편의성을 아예 버릴 순 없고, 그렇다고 아무 데서나 접속을 종료하게 만들면 현실성이 떨어진다.
그러니 편의성과 현실성을 살리고 NPC들과 이질감을 느끼지 않게 만든 것이라는 주장이었지만….
‘정답은 데모닌스만 알겠지.’
시스템을 만든 데모닌스에 이유를 물어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니, 인터넷에서 아무리 많은 공감을 받은 주장이라고 한들 결국 추측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시간 배율에 이런 점까지 엮인 탓에, 호위 의뢰에 ‘백수들의 전유물’ 혹은 ‘백수들의 특권’이라는 밈이 붙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즉, 저니는 어제저녁 오크 고기를 피해 로그아웃으로 도망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 도망가지 못한 것이었다.
‘원래 스트리머는 좀 뻔뻔해야 하는 거야.’
능글맞게, 어?
방송을 처음 시작할 땐 정직하게만 대응하던 저니도, 짬밥을 먹은 지금은 이런 대처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방송을 보며 짬밥을 먹은 건 시청자들도 마찬가지였으니.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거겠지
-탈주 마려웠던 저니라면 개추
-구라치다 걸리면 손모가지 피 보는 거 안 배웠냐?
“…그나저나, 짬 날 때마다 가수면 모드 쓰고 불침번 모드를 쓴다고 해도 피곤한 건 어쩔 수 없나 봐.”
정곡을 찔린 저니가 슬쩍 말을 돌렸다.
-ㅋㅋㅋ 딱 걸렸죠?
-아무래도 침대에 눕는 것만 못하긴 하지ㅇㅇ
-비싼 캡슐은 침대보다 편하다던데
-비싼 캡슐 vs 비싼 침대
-닥전
-그치만 침대엔 게임 기능이 없는걸…
“아, 맞아. 전에 진~짜 비싼 캡슐을 써본 적 있는데, 왜 쓰는지 단박에 납득되더라. 기능도 기능인데, 안락함이 차원이 달라.”
-방장이 쓰는 것도 꽤 비싸지 않나?
-일반인들이 쓰기엔 차고 넘치긴 해
-내 캡슐은 심심하면 접속 끊기는데…
-그 정도면 좀 사라;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걸 역체감이라고 하던가? 한 번 겪으니까 안 좋은 점이 눈에 확 들어오더라고. 진짜, 지를 뻔한 거 겨우 참느라 혼났어.”
-지르고 싶으면 지를 수 있는 돈이 있다는 게 부럽다…
-실례가 안 된다면 아이스크림 하나만 사주십쇼
“당연히 일시불은 못 하지. 한 48개월 할부면 되지 않을까? 아이스크림? 야, 그 정돈 네 돈으로 사 먹어…!”
-48개월은 씹ㅋㅋㅋ
-노예가 스스로 걸어 들어오네ㄷㄷ
‘좋긴 했지.’
저니는 입맛을 쩝 다셨다.
값이 비싸다고 해서 모든 물건이 제값을 하는 건 아니지만, 그녀가 체험한 캡슐은 가격이 이해되는 품질이었다.
그때는 실리아 온라인이 나오지 않았을 때라,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강림한 지름신을 물리치고 충동을 이겨낼 수 있었다.
‘지금은 나쁘지 않을지도….’
실리아 온라인이 출시한 지금은 그때와 다르게 캡슐에 들어가 있는 시간이 더 기니까.
저니는 참아야 할 이유가 아닌, 사기 위한 이유를 찾으며 마차의 흔들림에 몸을 맡겼다.
그러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으니.
“카나는 잠을 자긴 하는 걸까?”
어젯밤, 상단의 배려로 저니는 카나와 단둘이 한 텐트에서 잠을 청했다.
아마 순수한 호의는 아닐 것이다. 둘에게 잘 보이려는 속셈이었겠지.
순수하진 않다고 해도 그 덕에 넓은 텐트를 둘이서만 쾌적하게 쓸 수 있었으니 저니 입장에선 나쁠 게 없었다.
그 덕에 그녀는 카나가 자는 모습을 볼 수 있…
‘…지는 않았지.’
어린애들은 잠이 많다는데, 그 말을 부정하듯 카나는 저니가 접속을 종료할 때까지 무릎을 꼭 끌어안고 말똥말똥 깨어 있었다.
불침번 모드로 돌려놓고 캡슐에서 잔 후 다시 접속했을 땐 이미 활동하고 있었고.
그렇다고 마차에서 쪽잠을 취하는 것도 아니고.
NPC라고 해서 잠을 자지 않는 것도 아니니 분명 자긴 할 텐데 직접 본 적이 없으니 그런 의문이 드는 저니였다.
“잠을 푹 자야 키가 클 텐데.”
“….”
“…미안.”
아르키쉬로 한 거라 알아들었을 리 없건만, 무언가 낌새를 느낀 건지 자신 쪽을 향해 따가운 시선을 보내는 카나에 저니는 지레 찔려 사과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살기 감지 ㄷㄷ;
“읏즈 므….”
초성을 남발하는 시청자들에게 이를 악물고 경고를 하는 저니.
당연히 그녀의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 * *
나는 혼자서 떠드는 저니를 물끄러미 보았다.
가만히 보면 그녀는 혼잣말이 참 많은 것 같다.
혼자서 웃다가 갑자기 화내고, 진정됐나 싶으면 다시 웃고.
그러는 걸 보고 있으면 ‘어디 아픈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충분히 이상하게 여길 법 한 모습인데, 마차에 함께 탄, 자신을 캐서린이라고 소개한 여자는 그런 저니의 모습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모습이 익숙한 걸까.
‘….’
아니면….
“카나, 무슨 생각 해?”
“…아무것도.”
“흐음?”
불순한 의도가 느껴지는 손가락.
볼을 쿡 찌르려는 손가락을 피하며 대답했다.
그나저나 왜 자꾸 못 건드려서 안달인지.
지금까진 귀찮아서 내버려두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조만간 기강을 잡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는 사이에도 우리가 탄 마차는 다음 행선지를 향해 순조롭게 나아갔다.
어제 오크 무리를 만난 이후로 아무 몬스터도 만나지 않은 덕에 상단의 속도는 제법 빨랐다.
지도만 따지면 제국을 가로질러 가는 게 가장 빠르겠지만, 길이라는 것이 늘 형편 좋게 나 있지는 않다.
산이나 강에 막히거나, 울창한 숲이 가로막고 있다거나….
그런 연유로 내가 몸을 실은 이 상단은 제국의 영토 북쪽을 살짝 스치듯이 지나간다고 한다.
로 아르카 제국의 국방은 내가 전생에 살았던 한국처럼 국경을 꽉 막는 게 아니라, 요새와 도시를 세우고 그곳의 영주에게 맡기는 식이다.
도시의 영토 하나하나가 모여 국경의 역할을 하는 느낌.
이런 걸 보고 봉건제라고 하던가? 대충 그런 단어였던 거 같은데.
아무튼, 그 때문에 상단이 제국의 영토를 조금 가로지른다고 해서 딱히 문제가 생기진 않는다.
통행료는 좀 내야 하지만.
옛날 유럽도 이런 식이었으려나?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상단의 다음 행선지가 제국 남작령의 작은 마을이기 때문이었다.
원래는 그라시스에 속한 곳이었는데, 그라시스가 멸망하면서 남작령에 편입됐다나 뭐라나.
산에만 박혀 있던 내가 이런 사실을 알 리 없으니, 이건 다른 사람한테서 들은 내용이었다.
누구한테?
누구긴 누구야, 내 옆에서 칭얼대는 사도한테지.
“그 마을에 근처에 꽃밭이 있는데, 너무 예뻐서 찾아가서 보는 사람들도 있대.”
“….”
“같이 보러 가자, 응? 카나, 꽃 좋아하잖아. 분명 만족할 거야.”
“….”
난 꽃을 좋아하지 않으니 전제부터가 잘못됐다.
전제가 잘못됐으니, 내가 만족할 거라는 결론도 당연히 잘못되었다.
전제가 잘못됐다고 해도 찍어서 맞힐 수도 있지만, 안타깝지 않게도 오답이야.
내가 시들하게 있으니 저니는 애가 탄 듯했다.
“같이 보러 가면 맛있는 거 줄게!”
“…난 애가 아니야.”
“…으, 응. 나도 잘 알지. 우리 카나가 애가 아니라는 거. 어떤 나쁜 사람이 카나한테 애라고 했을까~?”
“…‘우리’ 카나도 아니야.”
…이미 말투부터가 글렀잖아.
삐진 애를 달래는 것 같은 사근사근한 말투랑 목소리에 묻은 웃음기나 어떻게 하고 말하지.
나는 나에게 꽂히는 따스한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얼굴을 찌푸렸다가, 이내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까지 꽃을 보고 싶나?
그러고 보면 기사단 시절에 봤던 귀족 영애들도 거의 다 꽃을 좋아했던 것 같다.
어쩌면 여자들에게 있는 본능 같은 걸지도 모르겠네.
내가 전생에 남자였기에 그런 건지, 아니면 감상이 삭막하게 메마를 정도로 척박한 삶을 살아서 그런 건지, 나는 특별한 감상을 느낄 수 없지만.
정확히 말하면 예쁘다고 느끼긴 하는데, 길 가다가 눈에 보이면 ‘예쁘네’하고 넘어가는 정도지 굳이 보러 가거나 죽치고 앉아 감상을 할 정도는 아니야.
그러다가 문득, 꽃집 앞에 앉아 꽃을 구경하는 가리드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경이지만, 그 광경을 그리는 건 쉬웠다.
우락부락한 근육질 몸매, 오른뺨에 대각선으로 길게 난 흉터, 곱상함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얼굴, 짧게 친 갈색 머리.
쭈그려 앉아 반짝거리는 눈으로 꽃을 바라보는 가리드와, 그 앞에서 난감해하는 꽃집 주인까지.
“푸흐흐….”
그 광경을 떠올리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순수한 웃음이냐 하면, 글쎄. 비웃음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고.
“어?! 카나, 웃었어? 웃었지?”
“….”
저니가 그새를 못 참고 호들갑을 떨었다.
“안 웃었어.”
“에이, 웃었잖아. 웃을 수도 있지, 왜 거짓말 해?”
오히려 내가 할 말인데.
웃을 수도 있지 왜 호들갑이야.
나는 캐서린과 손을 잡고 꺅꺅대는 저니를 한심하게 보았다.
둘의 작태를 보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았어. 가자.”
“어, 정말?!”
저니가 놀란 듯 목소리를 높였다.
자기가 가자고 해놓고 왜 저렇게 놀라는 거야.
“계속 튕길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카나는 꽃을 좋아하나 봐. 괜히 시큰둥하게 반응한 건 부끄러워서 그런 걸까? 아까 자기는 애가 아니라고 하는 것도 그렇고… 너무 귀엽지 않아? …죽여버리겠다고? 왜?!”
“싫으면 말고.”
“싫기는! 아, 급해서 나도 모르게…. 흠흠…. 아니, 너무 좋아! 그럼 같이 보러 가기로 약속한 거다?”
“응.”
보고 괜찮다 싶으면 돌아오는 길에 모종이나 씨앗을 사 와서 가리드에게 보여줘야지.
가리드라면 분명 좋아할 거야.
“아, 거의 다 왔나 봐.”
상단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어제와 달리 긴박함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어제처럼 몬스터가 습격한 건 아닌 것 같네.
저니도 그걸 느꼈는지 커튼을 열고 바깥에 머리를 내밀었다.
“오오… 보인다!”
신난 기색이 가득한 목소리.
목을 길게 빼고 밖을 구경하던 저니는 캐서린이 쿡쿡 웃는 걸 들었는지 민망한 얼굴로 다시 좌석에 앉았다.
“기대가 많이 되나 봐요.”
“아하하… 제가 여행하는 걸 좋아해서…. 죄송해요, 너무 들떴죠?”
“죄송하긴요. 보기 좋기만 하던데요.”
나는 마차에서 내릴 준비를 했다.
준비라고 해봤자 케이프를 눌러쓰고 짐을 점검하는 정도였지만.
마차의 속도가 서서히 줄어들고, 요란한 바퀴 소리가 사라지며 생긴 빈자리를 작은 마을 특유의 떠들썩하면서도 고즈넉한 분위기가 채웠다.
커튼을 걷고 밖을 살짝 내다보자 그림으로 그린 듯한 이상적인 마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우연히 눈이 마주친 한 남자아이의 눈엔 호기심과 기대감이 가득했다.
확실히, 이런 작은 마을에 사는 아이에게 상단의 방문은 특별한 일이겠지.
여기 마을은 아니지만, 이와 비슷한 마을에 방문한 게 처음은 아니지만 저런 표정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혼자 다니는 일 없이 늘 기사단과 함께 움직였고, 기사단이 마을에 방문했다는 건 마을의 경비대나 영주의 사병으로 처리할 수 없는 일이 생겼다는 뜻이었으니까.
따라서 그때마다 우리를 맞이한 건 저런 기대감과 호기심 같은 긍정적인 얼굴이 아니라 불안감, 공포, 절망 같은 부정적인 얼굴이었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아이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가리드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뭐, 나쁘지 않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