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익스플로러호가 끝없는 푸른 물결을 가르며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나는 갑판 난간 근처에 서서, 눈 부신 햇살 아래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깊고 진한 푸른빛이 수평선 끝까지 이어졌다.
따스한 햇살이 내 피부를 감싸고, 부드러운 해풍이 머리카락을 살랑거리며 어루만졌다.
잔잔한 파도가 배의 선체를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리듬감 있는 소리는 마치 대양의 심장 박동 같았다.
근처에 섬이라도 있는 걸까, 멀리서 갈매기 한 쌍이 우아하게 비행하며 그들만의 춤을 췄다.
그렇게 바다를 계속 구경하다 보니, 나는 어느새 난간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구경하고 있었다.
‘난간이 너무 높아….’
보통 바다를 구경할 때는 난간에는 손을 올리고 구경하는 것이 보통이겠지만, 나는 난간보다 키가 작으니 난간 사이로 머리를 내밀 수밖에 없었다.
푸른 하늘과 바다를 보고 있으면 평화로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지만, 이상하게도 작은 불안감이 내 심장 부근에 계속 달라붙어 있는 것만 같았다.
‘흐음. 뭐, 내가 배를 같이 타고 가고 있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해결할 수 없는 불안감은 마음 한구석으로 밀어두고, 나는 갑판 위에 마련된 내 전용석으로 향했다.
그리고 푹신한 마시멜로 위에 그대로 몸을 맡기듯 누워, 미니 사신 정원에서 가져온 TV를 꺼내 들었다.
TV를 켜자 익숙한 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세희 연구소] – [미니 사신 정원] – [제임스 익스플로러호]로 이어지는 TV 전파의 흐름 덕분이었다.
그야말로 나만이 할 수 있는 잔재주였다.
히히.
TV를 켜기 무섭게, 몇몇 황금 사신들이 꾸물꾸물 내 근처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내 피부에 찰싹 달라붙었다.
아무리 봐도 이 녀석들은 TV를 제대로 볼 생각이 없어 보인단 말이지….
‘뭐, 상관없나?’
나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황금 사신들을 무시하고, TV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TV에서는 이번에 내가 해결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태평양에서 발견된 미지의 섬과 관련해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제임스 연구소는 이 섬이 최근 유럽에서 발생한 대규모 납치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피해 규모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연구소 측에 따르면 피해자 수는 최소 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며, 생존자는 겨우 수십 명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현재 생존자들은 한국 제임스 타워로 이송되어 종합 검진과 치료를 받고 있으며, 향후 거취는 회복 상태를 지켜본 후 결정될 예정입니다.]
[이번 사건도 한국의 특급 오브젝트인 ‘회색 사신’이 해결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 뒤를 이어서 나를 새로운 오브젝트로 분류해야 한다는 사람들의 인터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유익한 오브젝트 등급’이나 ‘서울의 수호신 등급’, 등등.
다양한 등급 명칭이 나왔다.
히히.
내심 으쓱해지는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동안 해온 일들이 인정받는 듯한 느낌이랄까.
사실 인간들이 나를 뭐라 부르든 크게 개의치 않았었지만, 이렇게 칭찬 섞인 별명들을 듣다 보니,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사실 처음에는 ‘착한 오브젝트’라는 소리를 들으면 귀찮은 일들이 꼬리를 물고 생길까 걱정도 했었다.
하지만 내가 예전에 해왔던 일들 때문인지, 성가신 일은 생기지 않았다.
뭐, 이제는 생겨도 무시하면 되니까, 별문제는 없었겠지만.
‘엄마, 대단해!’
‘대단해!’
TV에 내 모습이 나오자, 황금 사신들은 지나가던 보라 사신에게 해석을 부탁하더니, 해석을 듣고 열광하기 시작했다.
마치 자기들이 칭찬을 받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래, 그래. 대단하지, 대단해. 히히.’
그렇게 히히 웃고 있었더니, TV에서는 다른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이 논의 자체가 시기상조라며 우선순위를 재고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곳곳을 누비며 쉼 없이 인류에게 봉사하는 황금 사신이 있는데, 회색 사신의 유용성을 논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인터뷰하는 과학자의 목소리에는 격정이 서려 있었다.
[“회색 사신의 의도와 성향은 여전히 모호하게 느껴집니다. 반면 황금 사신은 어떻습니까?”]
과학자는 자기 어깨 위에 앉아 있는 황금 사신을 가리켰다.
카메라가 그의 어깨 위 황금 사신을 클로즈업했다.
그러자 조그마한 젤리를 옴뇸뇸 먹고 있던 황금 사신은 고개를 들고 배시시 웃었다.
[“황금 사신의 선의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흠….
내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자, 황금 사신들은 나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황금 사신들은 TV에서 나온 내용이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 거겠지만, 왠지 나를 놀리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괜히 짜증이 나서, 내 주변에 있는 황금 사신들을 입속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앗!’
‘엄마가 화났어!’
‘앙대!’
그렇게 황금 사신들에게 이유 없는 재난이 닥쳐들었다.
***
한때 차분한 푸른빛으로 빛나던 공기가 이제는 피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설탕이 타는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냄새가 공기를 가득 채웠다.
그 냄새는 단순한 냄새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얀 아귀 낙원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였다.
지하 공동 바닥에 웅크린 채, 젤리 실지렁이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한때 안전했던 그들의 피난처가 이제는 붉은 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실지렁이의 몸은 천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불꽃이 실지렁이의 젤리 몸통을 핥아 올랐고, 그 불쾌한 감각에 몸서리쳤다.
더 나은 삶을 위한 일이, 더한 지옥을 불러들이게 된다니….
젤리 실지렁이는 그렇게 지하 공동 구석에서 천천히 녹아내렸다.
쿵. 쿵. 쿵.
지하 공동을 불태우는 골렘의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지면을 타고 울려 퍼졌다.
하얀 아귀만을 태우던 골렘은 이제, 젤리 실지렁이와 하얀 아귀를 가리지 않고 수확하는 중이었다.
뀨힝힝.
멀지 않은 곳에서 하얀 아귀들의 애처로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곳에는 투명한 설탕 항아리들이 잔뜩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억울한 표정의 하얀 아귀들이 가득!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은 예전에 실지렁이들이 갇혀 있던 바로 그 장소였다.
인과응보라고 해야 할까?
인간을 수없이 잡아먹은 지렁이들의 운명.
그리고 아귀는… 그저 하얀 아귀라서 괴롭힘당하는 슬픈 운명.
운명의 수레바퀴는 무자비하게 돌고 있었다.
하늘 위에서는 붉은 사신들이 ‘혁명!’을 외치며 날아다녔고, 그 중심에는 금발 소녀가 있었다.
금발 소녀는 황금 사신을 어깨 위에 두고 조그마한 노트를 펼친 채,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 지렁이들이 인간을 많이 죽였다는 거지?”
황금 사신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우울한지,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금발 소녀는 여러 가지 데이터를 취합한 뒤, 붉은 사신에게 형량을 전달했다.
‘젤리 실지렁이, 소각로 통구이형!’
***
송파구 외곽 세희 연구소, 깊숙한 곳.
연구소 구석에 자리 잡은 회색 사신 격리실은 언제나처럼 따뜻하고 안락한 분위기를 풍겼다.
산더미처럼 쌓인 간식들.
은은한 조명.
회색 사신을 위해서 특별히 제작된 침대.
하지만 이 공간의 주인공인 회색 사신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엄마의 빈 자리를 채우려는 듯이, 푹신한 침대 위로 미니 사신들이 잔뜩 몰려들어 있었다.
평소처럼 폴짝폴짝 뛰며 이리저리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지만, 어쩐지 모두가 조금은 시무룩해 보였다.
포근한 구름처럼 폭신폭신한 침대 위에는 파스텔 톤의 부드러운 잠옷을 입은 예린이 누워있었다.
시무룩한 표정의 예린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신이… 늦네에….”
그러자 주변의 미니 사신들도 예린에게 동화되듯이 더욱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몇몇은 굉장히 슬픈 표정으로 다가와서 예린의 어깨를 토닥이기도 했다.
예린의 손에는 알록달록한 색채의 전단지가 들려 있었다.
자세히 보니, <회색 사신 테마파크, 곧 오픈 합니다!> 이라는 글귀가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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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린은 전단지를 바라보며 입술을 살짝 비죽였다.
“회색 사신 테마파크가 완성되어 가는데….”
그녀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곧 희망 섞인 눈빛으로 미니 사신들을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그전에는 돌아오겠지?”
방 안에 가득한 미니 사신들은 마치 그 말에 화답하듯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니 사신들의 대답에 예린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번졌다.
‘사신이랑 테마파크 가면 정말 재밌을 거야!’
예린은 전단지를 가슴에 안은 채, 눈을 감고 회색 사신과 함께하는 테마파크를 상상하며 미소 지었다.
“자, 이제 과자 먹자!”
예린은 그렇게 말하며 특별히 준비해 온 과자들을 늘어놓았다.
미니 사신들은 처음 보는 과자에 만세를 하며, 예린에게 마구마구 달라붙어서 행복하게 웃었다.
***
태평양을 나아가는 제임스 익스플로러호.
나는 뭔가 불안한 느낌이 들어서, 배의 난간 근처로 걸어가 수평선 너머를 쳐다보고 있었다.
바람과 파도가 잦아들었고, 태양은 아무 이유도 없이 점점 그 밝기를 잃어갔다.
황금 사신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제임스 연구소 소속 직원들도 정체불명의 현상에 분주히 뛰어다녔다.
그때,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곳에서 거대한 푸른 벽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마치 벽처럼 보일 정도로 짙은 안개였다.
짙고 불길한 기운을 풍기는 푸른 빛의 안개가 섬뜩한 속도로 배를 향해 밀려오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하늘에 어둠이 드리웠다.
태양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고, 주변의 모든 것이 기이한 푸른 빛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바다는 더 이상 푸르지 않았다.
검은 잉크 같은 색으로 변해가는 바다 위로 불길한 기운이 감돌았다.
푸른 안개는 당장이라도 갑판 위로 올라올 것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마치 파도가 치는 것처럼, 밀려드는 안개가 내 발목을 감싸자, 차갑고 축축한 감촉이 온몸을 타고 올라왔다.
‘드디어 왔구나.’
계속해서 느껴졌던 불안감의 정체가 드러나자,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외신의 강력한 존재감이 바다 전체에 흩뿌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