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원의 고요함을 가르며 황동빛 거대 차량이 질주했다.
그 모습은 마치 움직이는 요새와도 같았다.
두꺼운 장갑으로 무장한 차체, 탱크를 연상시키는 무한궤도, 그리고 건물만큼이나 거대한 크기.
이 괴물 같은 기계는 도시 프로스트의 생명줄인 ‘기계 심장’을 품고 있었다.
차량 내부에서는 의원들과 선전부 직원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들의 눈빛에는 승리의 기쁨과 해방감이 어려 있었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도시를 벗어나는군. 조금 더 뽑아먹을 수 있을 것 같긴 했는데, 이 정도가 적당한 타이밍이겠지.”
한 의원이 뒷창문을 통해 멀어지는 도시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른 의원이 맞장구를 쳤다.
“좋은 타이밍에 사건이 터졌어. 조만간 도시를 버리고 떠나려고 했는데, 이렇게 좋은 기회가 생기다니 다행이군.”
그들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대화는 도시에 대한 경멸, 의장에 대한 조롱으로 가득했다.
차량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의원들은 이제 자신들의 미래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빼돌린 물자로 누릴 호화로운 삶, 오브젝트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한 새로운 터전.
그들의 눈은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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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기치 못한 강력한 충격이 차량을 강타했다.
의원들의 웃음소리가 순식간에 비명으로 바뀌었다.
차량은 그 거대한 크기가 어울리지 않게, 마치 장난감처럼 몇 바퀴나 굴러버렸다.
“으윽….”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의원의 눈에 들어온 것은 참혹한 광경뿐이었다.
차량 내부는 흩뿌려진 피와 부서진 물건들로 가득했고, 동료들은 기절했는지 미동도 없었다.
그는 자꾸만 눈을 가리는 핏물을 닦아내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젠장!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차량 내부는 어둡고 조용했다.
오직 ‘기계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맥동만이 유일한 소리였다.
의원은 혼란스러운 머리로 상황을 정리하려 했다.
‘움직이는 요새나 다름없는 차량이 이 지경이 되다니…. 어디 절벽 같은 곳에서 떨어진 건가?’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외부 상황을 확인하려 했다.
그 순간, 차량의 한쪽 면이 마치 종이처럼 찢어져 나갔다.
‘!’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차량 내부로 밀려들었고, 그 너머로 의원은 평생 잊지 못할 광경을 목격했다.
거대한 기계 거인의 붉게 빛나는 두 눈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돼…. 이럴 순 없어….”
절망적인 중얼거림과 함께 의원은 비로소 깨달았다.
도시를 덮친 눈보라는 ‘좋은 기회’ 따위가 아니었다.
눈보라 속에는 더욱더 큰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기계 거인의 거대한 손아귀가 차량을 움켜쥐었다.
금속이 찌그러지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의원의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기술자인 의원들이 합심해서 만든 튼튼한 차량이라서 그런 걸까.
차량은 단번에 찌그러지지 않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찌그러지기 시작했다.
“아아악!”
의원은 자기 뼈가 하나씩 부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뒤이어서 차량 속에 있었던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기 시작하자, 수많은 비명이 금속 덩어리에서 새어 나왔다.
마치 합창하듯이 흘러나오던 비명은 금속의 찢어진 입구가 작아지면서 점점 작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지던 비명이, 깊은 동굴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점점 희미해져 가는 것만 같았다.
마지막으로 기계 거인의 손아귀가 차량을 완전히 찌그러트리자, 주르륵하고 핏물이 흘러내려 새하얀 설원을 붉게 물들였다.
***
마치 얼음이 으스러지는 듯한 소음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나는 ‘뀩’을 쓰던 손을 떼며 거대 개구리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사용하던 ‘뀩’의 여운이 아직 내 손끝에 맴돌고 있었다.
‘별로 강해 보이지도 않고 헤일로도 가짜 같은데, 공간 절단을 막을 수 있네?’
조금 신기한 기분이었다.
[그 능력은…!]
그저 호기심이 전부인 나와 달리, ‘뀩’을 본 개구리의 반응은 격렬했다.
[거짓된 신이…. 아직 살아있었다니!]
개구리의 왕관에서 눈 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을 따라 개구리의 거대한 몸체가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헤일로를 쓴 거대 개구리의 입꼬리가 귀에 닿을 듯 끌어올려졌다.
포기하고 있던 무언가를 다시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두웅. 두웅.
그리고 개구리의 왕관에서 기묘한 파장이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끝없는 한기가 번져 나오고, 공간 자체를 침식하고 얼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공기 자체가 얼어붙어서 눈송이처럼 바닥으로 떨어졌고, 하늘에는 거미줄같이 서리가 번져나가고 있었다.
공간 침식이었다.
내 몸 위에도 서리가 마구 달라붙어서 움직임을 방해했고, 내 주변의 미니 사신들은 서리가 쌓이다 못해 얼음덩어리가 되어버렸다.
‘움직이지 않아!’
‘개구리!’
그 얼음덩어리의 모양은 개구리 모양이었다.
내가 이 공간 안에서도 무리 없이 움직이는 것을 보자, 개구리는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염파를 뿜어냈다.
[역시 이 정도로는 묶어둘 수가 없는가….]
순식간에 개구리의 양손에 얼음 칼날이 생겨났다.
그러고는 마치 회오리바람처럼 빠르게 회전하며 회색 사신을 향해 돌진해 왔다.
‘!’
산처럼 거대한 개구리가 자기 몸을 들이밀자, 나는 깜짝 놀라서 양손으로 공간을 찢어버렸다.
‘뀩!’보다. 훨씬 강력한 힘이 담긴 공간 절단이 휘몰아치자, 개구리는 푸른 옥으로 변해 갈기갈기 찢어져 버렸다.
그렇게 끝나는 건가 싶었지만, 산산조각 났던 옥 개구리의 파편들이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허공에서 뭉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개구리는 다시 온전한 모습을 되찾았다.
[황제가 명한다! 전군 돌진하라!]
황제 개구리의 웅장한 염파와 함께, 지평선 너머로 기계 거인들의 대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마치 쇠로 만들어진 파도처럼 장벽을 향해 몰려들었다.
짝. 짝.
나는 박수 두 번을 쳐서 미니 사신 정원을 넓게 펼쳐낸 뒤, 의지를 내뿜어서 미니 사신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자, 저기에 해로운 오브젝트의 하수인들이 잔뜩 있어.’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미니 사신들의 물결이 기계 거인들을 향해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서리가 가득한 공간과 미니 사신 정원의 충돌이었다.
다시 한번 허공에 떠오르는 개구리를 바라보며, 나는 ‘눈’으로 파괴 조건을 확인했다.
<기계로 만들어진 심장의 증기로 헤일로를 녹인다.>
‘기계로 만들어진 심장?’
나는 파괴 조건을 보자마자 이번 전투가 오래 걸릴 것을 직감했다.
***
차가운 바람이 도시를 휘감았다.
증기탑 광장은 평소와 달리 인파로 가득 찼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불안과 공포가 역력했다.
의장의 긴급 소집 명령에 따라 모인 그들은, 평소에는 접근조차 허용되지 않던 증기탑 근처에서 몸을 떨고 있었다.
증기탑.
이 도시의 심장이자 생명줄이었다.
끊임없이 뿜어내는 열기로 혹한의 설원 한가운데서도 도시를 따뜻하게 지켜주는 보루였다.
하지만 오늘, 그 증기탑이 이상했다.
“정상이 아냐.”
누군가가 속삭였다.
“맞아, 열기가 너무 약해.”
다른 이가 대답했다.
사람들은 불안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평소라면 멀리서도 느껴질 열기가 오늘은 마치 꺼져가는 모닥불처럼 희미했다.
증기탑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지만, 그 힘이 눈에 띄게 약해진 것이다.
산호빛 소녀가 불안한 표정으로 붉은 사신을 꼭 끌어안았다.
그러자 붉은 사신은 불안해하지 말라는 것처럼 소녀의 품속에서 따스한 온기를 뿜어내었다.
그때, 광장 한쪽에 마련된 단상 위로 의장이 올라섰다.
평소의 위엄 있는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의 어깨는 무거운 짐을 짊어진 듯 축 처져 있었다.
군중들의 잡음이 잦아들었고, 모두의 시선이 의장에게 집중됐다.
의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들어 군중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슬픔과 절망이 가득했다.
“시민 여러분. 오늘 저는 매우 비통한 소식을 전해야만 합니다.”
광장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해졌다.
“어젯밤, 우리 도시의 의원 전원이…. 증기탑의 핵심 부품인 ‘기계 심장’을 가지고 도망쳤습니다.”
순간 광장은 혼란스러운 웅성거림으로 가득 차올랐다.
의장이 손을 들어 올리자, 광장의 소란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의원들이 파괴한 통신망을 복구하는 등, 여러 가지 방안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뭡니까?”
누군가가 소리쳤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증기탑은 이미 정상 가동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는… 곧 차갑게 식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광장은 다시 한번 침묵에 빠졌다.
이번에는 충격과 절망의 침묵이었다.
“우리에게 시간이 얼마나 남은 겁니까?”
한 노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의장은 고개를 숙였다.
“길어야 일주일입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변했다.
공포와 절망이 광장 전체를 뒤덮었다.
한 젊은 여성이 앞으로 나섰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까? 증기탑을 수리할 수는 없나요?”
의장은 고개를 저었다.
“핵심 부품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대체할 기술이 우리에겐 없습니다.”
“그럼 우리는 그냥… 죽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누군가가 절규했다.
의장은 대답하지 못했다.
의장의 침묵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광장은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어떤 이들은 분노에 차 의원들을 저주했고, 또 어떤 이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 순간, 산호빛 소녀의 품에서 붉은 사신이 하늘로 날아 올렸다.
“앗!”
마치 붉은 혜성처럼 궤적을 남기며 날아가는 붉은 사신은 모두의 이목을 끌어당겼다.
“저게 뭐야?”
“오브젝트인가?”
증기탑 앞에 멈춘 붉은 사신은 주먹만 한 불덩어리를 만들어서 증기탑 쪽으로 날려 보냈다.
불덩어리를 만드는 데 힘을 상당히 많이 소비한 건지, 붉은 사신의 빛이 확연히 흐려졌다.
쿵. 쿵. 쿵.
그 순간, 증기탑에서 심장의 맥동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미세한 진동이었지만, 점점 더 커지더니 도시 전체를 뒤흔들었다.
시민들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설마?”
“증기탑이 살아난 걸까요?”
점차 그 소리는 시민들에게 생명의 맥동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후끈한 열기가 광장을 가득 채웠다.
“일곱 번째, 행운인 건가….”
의장은 붉은 사신과 증기탑을 번갈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절망이 가득했던 광장에는 희망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희망은 운명의 장난처럼 순식간에 부서져 버렸다.
콰앙!
멀리서 들려온 폭발음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처음에는 아무도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곧 거대한 그림자가 건물들 위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저게 뭐지?”
거대한 기계 거인들이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도시를 부수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대지를 흔들었고, 그들이 다가올수록 냉기를 머금은 바람이 밀어닥쳤다.
붉은 사신은 사나운 표정으로 기계 거인들을 노려보며, 산호빛 소녀 근처에 자리 잡았다.
***
서늘한 해변.
사람 하나 없는 바닷가에 황금 사신 하나가 누워있었다.
그 위로 불꽃으로 만들어진 나비 하나가 팔랑팔랑 날아왔다.
나비는 황금 사신의 위를 빙글빙글 날아다니며, 불씨를 뿌렸다.
마치 ‘빨리 일어나!”라고 외치는 듯한 느낌으로.
하지만 황금 사신은 붉은 나비가 왔다는 사실도 모른 채, 편안한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이자, 붉은 나비는 황금 사신의 통통한 뱃살을 꽉 깨물어버렸다.
‘으앙!’
그러자 황금 사신은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붉은 나비에 담긴 메시지를 확인한 황금 사신은 깜짝 놀라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미니 사신 네트워크에 신호를 보냈다.
‘동생이 위험해!’
그러자 전 세계에 퍼져있는 미니 사신들에게서 답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엄마 연락 안 돼?’
‘엄마 바빠!’
‘댖지 개구리!’
‘엄마 못 들어?’
‘엄마 댖지!’
‘히히.’
‘어떡해?’
‘동생을 구하러 가자!’
‘가자!’
‘너무 멀어….’
근처에 있는 미니 사신들이 붉은 사신을 구하기 위해서 모여들기 시작했다.
신호를 보낸 황금 사신 곁에도 어느새 구름 고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
황금 사신은 결연한 표정으로 구름 고기에 올라타며 의지를 내뿜었다.
‘기다려! 금방 구해주러 갈게!’
그런 황금 사신의 뱃살에는 물린 자국이 작게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