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서린은 종종, 그날의 꿈을 꾸곤 했다.
얼기설기 엮어 만든 목책이 무너지고, 평화롭던 마을에 몬스터가 밀려들던 날의 꿈을.
작지만 따뜻했던 집도, 부모님을 도와 가꾸던 텃밭도, 그녀를 친절하게 대해 주던 아주머니의 집도.
모두 몬스터의 발아래 무참히 짓밟혔다.
블럼 마을보다 훨씬 작은 캐서린의 고향은 그렇게 사라졌다.
부모님의 손을 잡고 거친 산길을 달려 도망치며 그녀는 다짐했다.
반드시 강해져서, 다시는 이런 일을 겪지 않겠다고.
그날 이후 그녀는 검을 들었다.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이 혼자 묵묵히 검을 수련하고, 몬스터와 맞서 싸우던 나날들.
“축하합니다, 캐서린 님. 은 급 용병으로 승급하셨습니다.”
캐서린은, 결국 그녀의 힘으로 은패를 쟁취하는 데 성공했다.
은패.
어엿한 한 사람의 용병으로 인정받는 단계.
리베리로부터 은패를 받아들던 그날, 캐서린은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에 담긴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캐서린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눈물을 닦으며 그녀는 느꼈다.
과거의 다짐에 한 발짝 더 가까워졌다는 것을.
‘…아.’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마을을 향해 다가오는 오우거 무리 앞에서 캐서린은 깨달았다.
은 패를 받고 강해졌다고 착각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부모님의 손을 잡고 달리던 산골 마을 소녀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때와 다른 것이 있다.
누구 하나 도와줄 이 없고, 어디 하나 도움받을 곳 없던 산골 마을과 달리 지금은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캐서린은 저니에게 부탁했다.
부디 이 마을을… 또 다른 캐서린들을 구해 달라고.
마음씨 좋은 에델의 사도는 그녀의 부탁을 받아들였고, 모든 게 순조롭게 흘러가는 듯했다.
마을에 다가오는 오우거들의 수를 알기 전까지만 해도 분명 그러했다.
“여, 열 마리?!”
살았다고 안도하던 사람들은 공포에 질린 채 저마다 살길을 모색했다.
캐서린은 난장판이 된 광장 가운데에 멍하니 서서 자조했다.
‘결국 난 또 할 수 없었구나.’
이런 상황이 일어날 때를 위해 숨 가쁘게 달렸는데, 결국 아무 소용 없는 거였어.
절망에 빠진 그녀의 시선에 문득 저니가 들어왔다.
같이 온 소녀를 붙잡고 간절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말하는 모습.
캐서린도 그 소녀가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소녀가 아무리 강해도 오우거들과 맞서 싸울 순 없을 것이다.
검술이 뛰어나다고 한들 소녀와 오우거는 체구부터가 하늘과 땅 차이였으니까.
“비켜.”
저니의 말을 들은 소녀가 검을 빼 들고 앞으로 나섰다.
마을 밖을 향하는 발걸음.
‘설마, 싸우려는 거야?’
그 모습에 캐서린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부릅떴다.
“안 돼…!”
누군가 도와주길 바라긴 했지만, 저런 작은 소녀가 허망하게 목숨을 잃는 것을 바란 건 아니다.
그녀가 다급하게 소녀를 멈춰 세우려고 할 때였다.
사락.
소녀가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케이프를 벗어 던지고, 달빛 아래 드러난 소녀의 외모에 캐서린은 헛숨을 삼켰다.
케이프에 가려져 있던 얼굴은 그녀의 생각보다 더 어리고, 생각보다 훨씬 더 귀여웠다.
무척이나 순하게 생겨서 벌레 하나 잡지 못할 것 같은 아이.
저런 소녀가, 오우거와 싸우려고 한다고?
순간 정신이 번쩍 든 캐서린이 소녀를 향해 팔을 뻗었고.
“…어?”
캐서린의 팔은 허공을 갈랐다.
…분명, 이 자리에 있었는데.
소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놀란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사라진 소녀에, 소녀를 지켜보던 사람들 모두가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마, 마법사…?!”
“그렇게 작은 아이가 마법사라고?”
“그러면 이 모든 사람이 동시에 헛것을 봤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겐가?”
“그런 말이- …우와악?!”
후우우웅-!
예고도 없이 몰아친 바람이 사람들을 강하게 때렸다.
성인 남성조차 휘청거릴 정도로 강한 바람에 흔들리던 캐서린이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갑작스럽게 몰아친 거센 바람.
그 바람이 향한 곳은 마을 바깥이었다.
소녀는 사라진 게 아니었다.
캐서린의 눈에, 사람들의 눈에 그렇게 보인 것뿐.
그 사실을 깨달은 캐서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정체가 뭔가요?”
저니는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냥, 제 동생이에요.”
“….”
뭐라 말해야 할까.
입술을 달싹이던 캐서린이 고개를 푹 숙였다.
“…고마워요. 제 억지를 들어줘서.”
“제가 감사받을 일이 아닌걸요. 감사는 카나가 돌아오면 카나에게 해주세요.”
“…네. 그럴게요.”
그녀가 아까까지 느끼던 의심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반드시 그럴게요.”
검과 마나에 통달한 사람이 고작 오우거들 따위에 질 리 없으니까.
* * *
“서, 설마 오우거와 싸우러 간 거 아니야? 그러면…”
“그러면 뭐, 구하러 가자고? 오우거가 한 마리도 아니고 열 마리나 오고 있는데?”
“그렇게 작은 아이가 돕겠다고 나섰는데 부끄럽지도 않냐?”
“도와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나선 게 잘못이지!”
‘….’
저니는 사람들이 싸우는 걸 조용히 지켜봤다.
돕자고 하거나, 도망가자고 하는 건 이해된다.
하지만 고마워하기는커녕 잘못으로 몰아가는 건….
“좀 그렇네.”
-어른이 미안해…
-죽일까요?
-어우 좀 역하네ㅋㅋㅋ
그런 느낌을 받은 건 시청자들도 마찬가지라 저니의 채팅창이 활활 불타올랐다.
질린 얼굴로 구경하던 플레이어 중 하나가 말했다.
“도우러 가야겠죠?”
“저희가 가봤자 도움이 될까요?”
“…그런가?”
“어쩌면 벌써 끝났을 수도….”
오우거 가죽이 단단하다고 한들 그들이 밟고 선 땅보다 단단할까.
땅까지 갈라버리는 공격을 오우거들이 버틸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게다가 오우거보다 강할 게 분명한 제국의 정예 기사들도 순식간에 전멸시켰고.
그렇기에 저니도 가봤자 도움이 안 될 거라는 말에 공감했다.
“전 갈래요.”
하지만 그게 가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도움은 안 되겠지만, 마중은 나갈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저는-”
저니가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말을 멈춘 것은 비단 그녀만이 아니었다.
다투던 마을 사람들도, 허겁지겁 짐을 싣던 상단 사람들도, 굳은 얼굴로 무기를 매만지던 용병들도.
모두 움직임을 멈추었다.
────!
몸이 아닌 영혼을 때리는 듯한 울림.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느껴지는, 둔중하고 강렬한 울림.
저니의 고개가 돌아갔다.
아까 카나가 바라보던 산을 향해.
“저게, 뭐야…?”
* * *
“…읏!”
부웅!
머리를 으깰 것처럼 날아오는 진녹색 앞발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아니, 저런 거에 맞으면 머리만 으깨지는 게 아니라 몸 전체가 곤죽이 되겠지.
개인적으로 나는 개나 고양이 같은 소동물을 싫어하는 편은 아닌데, 어째 나는 그런 동물들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거 같아.
가리드를 처음 만난 날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그렇지 않아?”
“….”
“매정하네.”
녀석은 거친 콧바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말을 못 하는 걸까, 아니면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는 걸까.
어느 쪽이든 내가 할 일은 명확하지만.
“후우….”
나는 숨을 길게 내쉬며 검을 고쳐 잡았다.
마을 뒷산의 산등성이와 이어진, 오르도와 마을 사이에 위치한 커다란 산.
지금 내 앞에 있는 강아지는 그 산 정상에서 튀어나온 녀석이다.
어지간한 성벽과 비견될 정도로 거대한 차원수를 강아지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지만.
사실 딱히 강아지처럼 생긴 것도 아니긴 해.
굳이 따지면 늑대와 좀 비슷하게 생겨서 그렇게 부르는 거지, 늑대는 다리가 여섯 개 있지도 않고, 머리가 두 개도 아닌 데다가, 몸에 입이 달려있지도 않거든.
하여튼 차원수라는 것들은 죄다 이상하게 생겼다니까.
“혹시 차원수 가입하려면 못 생겨야 한다는 요건이라도 있어?”
“그르르르….”
“아님 말고.”
정말 궁금해서 물어봤는데 너무하네.
농담은 여기까지만 할까.
다소 장난스럽게 대하긴 했지만, 이 차원수….
으음… 일일이 차원수라고 부르기 귀찮으니까 늑대라고 하자.
아무튼 이 늑대는 제법 강한 놈이니까, 조금 집중해 볼까.
질 것 같지는 않지만, 물리면 광견병에 걸릴지도 모르고….
“여섯 개나 있으니까, 하나 정도는 없어도 되지?”
쐐애애액!
연분홍색 검기가 공간을 찢어발겼다.
늑대가 세로로 날아드는 검기를 피해 옆으로 뛰었다.
애초에 검기는 속임수.
나는 이미 늑대가 피할 자리에 도착해서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카나리아류-
아직, 내 이름에 대한 감정을 완전히 떨쳐낸 건 아니야.
아무리 어감이 좋다고 한들 부모란 작자들이 무슨 생각으로 ‘카나리아’라는 이름을 준 건지 아는데 어떻게 긍정적으로만 받아들이겠어.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만든 검술에 나의 이름을 붙인 이유는….
“부리 쪼기.”
왜긴 왜야. 가리드 덕분이지.
나는 아직 땅에 착지하지 못한 늑대를 향해 쇄도했다.
순간적인 급가속을 거친 몸과 함께 쏘아지는 분홍색 섬광.
한 번, 그리고 두 번.
거의 동시에 날아든 두 번의 찌르기는 먹잇감을 노리는 새처럼 날아들어 늑대의 다리를 쪼았다.
콰지지직!
쿠-웅!
두 번의 찌르기가 정확히 적중한 다리가 마치 종잇장처럼 찢겼다.
뜯겨나간 다리 밑쪽이 땅에 떨어지고, 늑대가 아가리를 크게 벌리며 비명을 질렀다.
“깨갱!”
“뭐야, 진짜 개였어?”
깨갱이라니. 정말 안 어울리는 소리네.
검을 한 바퀴 돌려서 다시 베기에 적합한 형태로 고쳐 잡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연격.
오른발을 강하게 구르고, 허리를 있는 힘껏 비튼다.
다리부터 시작된 힘이 허리, 그리고 팔을 타고 검까지 이어졌다.
언젠가 저니한테도 알려준 적 있는 기술이다.
기술이라고 해봤자 그냥 강하게 휘두르는 방법에 불과하지만.
“크르릉!”
아쉽게도, 다리가 짝수에서 홀수가 된 녀석의 회복은 굉장히 빨랐다.
다시 짝수로 만들어 줄 생각이었는데.
뒤로 훌쩍 물러나며 앞발을 휘두른 탓에 공격이 수포로 돌아갔을 뿐 아니라 추격도 실패했다.
사람이었다면 팔다리 중 하나가 뜯겨나갔을 때 저렇게 빨리 정신차리지 못할 텐데.
인간이 아닌 것들을 상대하는 게 이렇게 귀찮다.
몬스터라든가, 마물이라든가, 뱀 새끼라든가….
늑대는 섣불리 달려들지 않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에게 경계심을 느끼면서도 자신이 질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 모습.
하지만 나를 더욱 거슬리게 하는 건 따로 있었다.
“있잖아, 나는 키 큰 놈들이 싫어.”
고작 키가 좀 클 뿐인데 뭐라도 된 것처럼 내려다보고 말이야.
그러니까, 일단 다리부터 다 뜯어내줄게.
다리가 다 뜯겨나가서, 바닥을 기면서도 내려다볼 수 있는지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