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예린의 아파트 창문으로 새벽의 푸른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세희 연구소로 출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거울 속 자기 모습을 바라보며, 예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사신이가 오겠지?”
무심코 중얼거리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묻어났다.
회색 사신이 연구소에서 사라진 지 벌써 두 달.
그 어디에서도 회색 사신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평소라면 며칠 정도 모습을 감추더라도 곧 어딘가의 난장판이 된 사건 현장에서 목격되곤 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딱히 커다란 사건도 없었고, 회색 사신의 행방도 오리무중이었다.
예린은 옷장 문을 열며 생각을 이어 나갔다.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걸 보면, 사신이는 분명 지구의 엄청난 위기 상황을 막아내고 있을지도 몰라.’
그래도 며칠 전의 자신보다는 지금이 훨씬 나았다.
당시 그녀는 거의 좀비처럼 돌아다녔으니까.
미니 사신들 근처만 지나가도, 미니 사신들이 다가와 대신 울어줄 정도였다.
예린의 상태가 호전된 것은 하늘에 그려진 빛의 고리 숫자가 하나 늘어난 것을 발견하고 나고부터였다.
회색 사신이 뭔가를 해결하고 나면 달이 늘어나거나, 고리가 더해지곤 했으니까.
‘그래, 사신이는 분명 오늘 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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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예린은 주방으로 향했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며 TV를 켰다.
화면에서는 며칠 전 일어난 사건에 대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난주 세희 연구소 근처 하늘에 나타난 거대 염소 사건의 여파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린은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엄청난 크기의 염소가 하늘을 뚫고 나타났을 때, 세희 연구소도 긴장했었다.
회색 사신이 없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으니까.
수많은 미니 사신이 거대 염소를 향해 돌진했고, 염소가 내뿜는 불꽃에 황금색 불씨가 되어 스러지길 반복했다.
그때 미니 사신들의 표정은 정말 진지하고 비장해서, 전쟁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
상황이 절망적으로 보이던 그때, 하늘을 가르며 검을 든 황금 사신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 멋진 모습에도 불구하고 역부족이었다.
정확히는 염소는 황금 사신의 검격에 빠른 속도로 너덜너덜해졌지만, 염소가 다치는 속도보다 황금 사신의 지치는 속도가 더 빨라 보였다.
검을 든 황금 사신이 빠른 속도로 그 빛을 잃어가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보라 사신처럼 다른 강력한 미니 사신들의 참전이 늦어지고 있었다.
이대로 세희 연구소를 포기해야 하나 싶은 순간.
황금 뿔 사신이 세희 연구소에 나타났고, 하늘 위로 황금색 오로라가 드리워졌다.
태양처럼 찬란한 황금빛 물결 속에서 제1 검의 칼날이 무섭도록 타오르더니, 섬광과 함께 염소는 재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무심코 박수를 칠 정도로 멋진 장면이었다.
그 사건을 송출하는 TV에서 눈을 떼고 프라이팬의 뚜껑을 열자, 예상외의 광경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프라이팬 안에서, 황금 사신이 계란프라이를 이불처럼 덮고 있었다.
깜짝 놀란 예린은 서둘러 젓가락으로 황금 사신을 집어 흐르는 물에 넣었다.
“괜찮아? 뜨겁지 않아?”
하지만 황금 사신은 아프지도 않은지, 히히 웃기만 했다.
오히려 흐르는 물이 재밌는지,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향해 고개를 도리도리하며 물살을 즐기고 있었다.
예린은 황금 사신을 충분히 식힌 뒤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아기 황금 사신이네. 언제 온 거야?”
그녀는 손가락으로 아기 황금 사신의 통통한 볼을 콕콕 찌르며 중얼거렸다.
매일같이 사신과 노는 예린도 자주 보기 힘든 아기 황금 사신이 프라이팬 속에 있었다니….
예린은 아직도 빨리 뛰는 심장을 차분히 억누르고 프라이팬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프라이팬을 내려다보자, 이번에는 그 위에 더 많은 아기 황금 사신이 계란프라이를 덮고 있었다.
‘!!!’
예린이 깜짝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으앙!’
그 순간 발밑에서 말랑한 감촉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엄청난 수의 아기 황금 사신들이 방 안을 뚜방뚜방 돌아다니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뭔 일이래?”
예린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지만, 황금 사신들은 그저 행복한 표정으로 즐겁게 웃을 뿐이었다.
‘히히.’
***
검은 사신들이 잔뜩 죽어있던 동굴.
‘앙대!’
그곳에서 나는 마지막까지 얼굴에 붙어 있던 검은 사신을 떼어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놓지 않겠다는 기세로 내 볼을 붙잡고 있던 그 작은 사신은 내가 떼어내자 슬픈 표정으로 축 늘어져 버렸다.
그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아, 힘들어….’
그렇게 고생해 가며 가까스로 모든 검은 사신들을 떼어낸 나는 검은 후드 사신의 인도를 따라 동굴 깊숙한 곳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런 내 뒤를 수많은 검은 사신이 마치 오리 새끼들처럼 졸졸 따라오고 있었다.
‘저기, 엄청나게 크고 신기한 거 있어!’
검은 후드 사신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자, 무지막지한 크기를 자랑하는 거대한 화로가 놓여 있었다.
비록 지금은 싸늘하게 식어버렸지만, 공간 자체에 열기의 흔적이 감돌 정도로 오랜 시간 장작을 태웠던 흔적이 역력했다.
그 화로를 보자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크기 차이가 심하게 나긴 하지만, 비슷한 화로를 본 적이 있었다.
아마 주황 달이 있었던 곳이었을 것이다.
그곳에 검은 사신은 없었지만, 장작을 태우는 화로는 확실히 있었던 것 같았다.
화로 주변 벽면에는 엄청난 양의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벽을 깎아 만든 그 조각들은 전부 검은 거인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부조였다.
‘꽤 잘 만들었네….’
조각을 잘하는 황금 사신급 정교함과 웅장함에 나도 모르게 감탄이 나왔다.
‘앗!’
‘엄마가 보고 있어!’
내가 그 조각을 구경하고 있자, 내 뒤를 따라다니던 검은 사신들이 후다닥 달려들어 조각을 바꿔버렸다.
힘이 세서 그런지, 조각을 새로 만드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이번에는 전부 내 모습이네.
내가 화낼까 봐 그러는 것 같아 조금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동굴을 구경하며 동굴의 끝에 도착하자, 그곳에는 거대한 차원의 통로가 열려 있었다.
색채 우주를 향해 열려 있는 통로.
이 공간 자체가 이 통로를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통로는 막대한 존재감을 흘리고 있었다.
‘이런 위험한 통로를 그냥 열어두면 안 되겠지….’
나는 공간의 헤일로를 뒤집어쓴 뒤, ‘뀩’으로 색채 우주로 열린 공간의 틈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나를 졸졸 따라오며 미어캣처럼 올려다보는 미니 사신들을 향해 돌아본 뒤 의지를 전했다.
‘자, 집으로 돌아가자.’
그리고 미니 사신 정원을 향한 커다란 통로를 열었다.
‘집?’
검은 사신들의 표정에서 어리둥절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미니 사신들은 곧 차례차례 통로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그렇게나 북적였던 동굴이 텅 비어버렸다.
나는 다시 한번 낙오된 미니 사신이 없는지 살펴본 뒤, 통로를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
나는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서, 검은 사신들의 생활감이 잔뜩 묻어 있는 공간을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슬픔과 희망, 그리고 의지가 서린 공간.
‘마지막까지 수고했어.’
나는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의지를 남기며, 미니 사신 정원으로 돌아갔다.
***
탁. 탁. 탁.
후배 2호가 지팡이를 두들기는 경쾌한 소리가 세 번 울리자, 주변 풍경이 변모하며 세련된 연구소의 모습이 펼쳐졌다.
투명한 재질로 막혀 있는 오브젝트 격리실.
제임스 사에서 만든 첨단 계측 도구.
복도를 돌아다니는 피곤한 표정의 연구원들.
세희 연구소와 달리, 지극히 평범한 연구소의 풍경이었다.
천장 대신 보이는 일렁이는 공간의 왜곡만 없었다면 말이다.
후배 2호는 긴 복도를 따라 걸어가다 연구소 내부에 자리 잡은 탐정 사무실 앞에 섰다.
문을 열며 후배 2호는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 저 왔어요.”
최근 후배 2호는 지구와 틈새 연구소를 오가는 잦은 여행으로, 시차 적응 문제와 비슷한 피로를 호소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시차 적응이 아니라, 차원 적응 문제였다.
“아, 왔어?”
탐정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추었다.
잠시 기다려 달라는 몸짓과 함께 다시 책상으로 시선을 돌려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요즘 노란 탐정의 바쁜 모습은 예전 중앙 연구소장 탈출 계획을 세울 때만큼이나 정신없어 보였다.
후배 2호는 사무실 한편의 푹신한 소파에 몸을 기댔다.
옴뇸뇸.
그 순간 황금 뿔 사신이 재빨리 탁자 위로 뛰어올라 과자를 야금야금 먹기 시작했다.
사무실 구석에 놓인 코르크 보드가 후배 2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보드 위에는 다양한 그림들이 붙어 있었고, 일부 그림 위에는 붉은색으로 X표가 그어져 있었다.
그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 탐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보드 앞으로 다가갔다.
슥, 슥.
탐정은 파란 털의 염소 그림 위에 새로운 X표를 그렸다.
코르크 보드의 그림들은 후배 2호와 뿔 사신이 미니 사신들을 도와 처리한 오브젝트들의 기록이었다.
특히 최근 들어 출동 횟수가 늘어나면서, 코르크 보드 위의 그림도 상당히 많아져 버렸다.
그만큼 후배 2호도 틈새 연구소에서 제대로 쉬지 못하고, 지구와 연구소를 왕복하고 있었다.
표시를 마친 탐정은 커피를 한 손에 들고 자리로 돌아와 진지한 표정으로 앉았다.
후배 2호는 약간 지친 목소리로 물었다.
“또 무슨 시킬 일이라도 있어요?”
“음.”
탐정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봉투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이번에는 좀 오래 걸릴 거야. 정말, 정말 큰 물고기를 잡아야 하거든.”
탐정은 그렇게 말하며 불이 꺼진 강철 램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탐정의 얼굴은 피곤해 보였지만, 예전과는 달리 희망의 빛이 깃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