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황금 사신들이 즐겁게 뛰어노는 예린이의 아파트.
아이들이 노는 것을 계속 구경하다 보니, 왠지 조금 타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저런 유아적인 놀이기구가 재미있을 리는 없겠지만, 시험 삼아 타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그래서 놀이기구를 만들어 보려고 했지만, 도무지 만들 공간이 나오질 않았다.
힝.
아파트의 공간이 너무 부족해!
처음에는 미니 사신 롤러코스터를 몰래 부숴버리고 만들려고 했지만, 더욱 간단한 해결 방법이 떠올랐다.
부족하면 늘리면 되지!
생각이 나자마자 나는 공간의 헤일로를 머리 위에 뒤집어쓰고, 그대로 예린이 거실의 넓이를 10배로 늘려버렸다.
우선 정원에서 놀고 있는 검은 사신들을 불러들여 커다란 스프링을 만들었다.
그리고 내가 올라타도 괜찮을 정도로 커다란 하얀 아귀를 붙잡아 스프링 위에 꽂았다.
뀨힝힝.
하얀 아귀가 억울한 것 같은 소리를 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얀 아귀의 내부를 파내서 의자를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푸른 사신이 탄 것과 똑같이 생긴 놀이기구가 완성되었다.
물론 그 크기는 나에게 맞춰져서, 미니 사신 전용 놀이기구보다 비교도 안 될 만큼 컸다.
띠용 띠용.
아귀 위에 올라타서 몸을 앞뒤로 흔들며 놀이기구를 즐기고 있었더니,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별것도 아닌데 절로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히히.
푸른 사신은 내가 온 것을 깨달았는지, 모자를 푹 눌러써서 아예 얼굴을 가려버렸다.
하지만 놀이기구에서 내리지는 않았다.
뭐, 포기하기 힘들 정도로 재밌긴 하지.
찰칵찰칵.
예린이는 말없이, 대단히 진지한 얼굴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는 그런 예린이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눈빛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것을 발견한 사람처럼 반짝였고,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뭐가 그렇게 신기한 걸까?
나는 문득 예린이도 이 놀이기구를 타보고 싶어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린이에게도 하나 만들어줘야겠네.’
그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즉시 행동으로 옮겼다.
더욱 커다란 하얀 아귀를 불러들여 스프링 위에 꽂고, 내부를 파내어 의자를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는 예린이의 눈이 점점 커지는 게 보였다.
“어… 사신아, 이거 설마….”
예린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놀이기구가 완성되었다.
내가 아무 말 하지 않고 물끄러미 올려다보자, 예린이는 행복한 표정으로 슬리퍼를 벗더니 놀이기구 위에 올라탔다.
띠용 띠용.
이제 예린이도 내 옆에서 흔들흔들.
그녀의 포니테일이 공중에서 춤을 추는 모습이 재미있어 보였다.
우리 둘 다 신나게 놀이기구를 타고 있자, 미니 사신들도 호기심을 느끼고 다가왔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구경만 하던 미니 사신들도 이내 용기를 내어 놀이기구에 올라탔다.
미니 사신들의 즐거운 의지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다.
‘엄마!’
‘히히.’
‘빨라!’
나랑 예린이, 그리고 푸른 사신이 탈 때는 차분한 놀이기구 같았지만, 황금 사신들이 타기 시작하자 좀 더 격렬한 움직임을 뽐냈다.
마치 원심분리 회전목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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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예린이, 그리고 미니 사신들까지 일제히 놀이기구에 타고 있어서 그런지, 예린이의 아파트에는 기묘한 분위기가 풍겼다.
나는 계속해서 놀이기구를 타며 밤이 깊어져 가는 줄도 모르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상당한 시간을 놀던 도중, 몇몇 황금 사신이 벽면에 박치기를 해버렸다.
‘으앙!’
격렬하게 앞뒤로 흔들다가, 전방으로 발사되어 버린 것이다.
원인은 졸음운전!
늦은 밤이 되어서 그런지, 일찍 잠자리에 드는 황금 사신들이 꾸벅꾸벅 졸다가 벌어진 사고였다.
어느새 황금 사신들이 자야 할 시간이 되어버렸다.
놀이기구에서 빠져나와 거실로 향하자, 롤러코스터를 타던 아기 황금 사신들도 열차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거실 바닥에 잔뜩 낙하해 있었다.
‘앗!’
또 아기 사신 하나가 졸다가 회전하는 롤러코스터에서 떨어져, 콩하고 머리를 부딪혀서 잠에서 깨버렸다.
인간이었으면 죽었을 상황이었지만, 황금 사신은 부딪친 머리를 손으로 문지르더니, 히히 웃고는 바닥에 다시 누워 잠들었다.
‘난장판이네.’
예린이 집 거실은 마치 수면 가스라도 퍼진 것처럼 구석구석 잠든 황금 사신들로 가득했다.
나는 그런 유쾌한 거실의 풍경을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예린이는 내 뒤를 따라오며, 잠든 황금 사신들을 폭신한 황금 사신 전용 숙소 속에 집어넣었다.
뭐 사실 숙소라기보다는 말랑말랑한 비둘기집 같은 모습이었지만 말이다.
‘?’
그렇게 잠든 황금 사신들의 모습을 구경하다 보니, 거실 구석에 놓인 조그마한 도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는 미니 사신 사이즈의 책상과 크레용, 그리고 도화지가 잔뜩 비치되어 있었다.
‘미니 사신용 그림 도구? 예린이가 만든 건가?’
크레용을 하나 집어서 자세히 살펴보니, 세희 연구소 인장과 함께 테스트용 샘플이라고 적혀있었다.
‘세희가 만든 거구나….’
안타깝게도 놀이공원 때문인지 그림 도구는 인기가 없었는데, 잔뜩 늘어선 책상에 자리 한 미니 사신은 황금 사신 하나뿐일 정도였다.
꾸벅꾸벅 졸면서도, 크레용을 꼭 붙들고 그림을 그리는 황금 사신이었다.
천천히 다가가서 확인해 보니, 나는 깜짝 놀랐다.
생각보다 그림을 잘 그리네.
조각을 잘하는 황금 사신이나 싸움을 잘하는 황금 사신처럼, 그림을 잘 그리는 황금 사신인 걸까?
그때, 예린이가 그림 그리던 황금 사신도 숙소에 집어넣더니, 하품하며 말했다.
“사신아, 우리도 자자.”
그러고는 예린이가 나를 고양이처럼 들어 올리더니, 침실로 끌고 들어갔다.
그렇게 나는 예린이의 품에 안겨, 잠자리에 들었다.
예린이네 집은 이제 조용해졌지만, 어두운 거실에는 아직도 미니 사신들의 신나는 감정이 서려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
나는 깊은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이제까지 꿈에서 봐왔던 광경과는 조금 달라 보였다.
거대한 옥 신전이 뒤편에 우뚝 서 있었고, 하늘은 검은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태양은 그 어둠 속에 가려져, 희미한 빛만이 간신히 새어 나오고 있었다.
발아래로는 아찔한 높이의 절벽이 있었고, 그 밑으로는 마치 살아 있는 듯 꿈틀거리는 진화액이 넘실거렸다.
이 기이한 풍경 속에서 두 인물이 마주 서 있었다.
한 명은 나와 똑같이 생긴 푸른 머리카락의 소녀였고, 다른 한 명은 얼굴이 연기처럼 모호한 장신의 남자였다.
그들 사이의 공기는 묘했다.
굉장히 적대적이면서도, 동시에 서로 아는 사이인 것처럼 보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두껍고 튼튼해 보이는 양피지가 놓여 있었다.
[다시 한번 계약을 확인하지.]
연기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양피지에는 정갈한 필체로 계약 내용이 쓰여 있었다.
<‘계약의 마도서’와 ‘최후의 연금술사’의 계약서>
– ‘최후의 연금술사’는 두 가지 도움을 대가로 영생을 포기한다.
– 이후로 ‘계약의 마도서’는 ‘최후의 연금술사’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두 가지 도움>
1. 작은 램프를 만들어서 격을 분할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2. 이 검게 물든 세계를 떠나, 현재 육신 그대로 ‘신을 죽인 마도서’가 향하는 곳으로 최대한 빨리 보내 준다.
계약서 아래에는 추가 조건들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방금 적은 것처럼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점과 조건마다 글씨체가 다른 것으로 볼 때, 계약 과정에서 서로서로 추가한 것으로 보였다.
<추가 조건>
– 계약이 성립될 경우, ‘계약의 마도서’는 ‘최후의 연금술사’를 목적지에 그 어떤 마도서보다 먼저 도착하게 해야 한다.
– 계약이 실현된 후, ‘최후의 연금술사’와 그 능력에서 태어난 존재는 모두 ‘계약의 마도서’에게 해를 입힐 수 없다.
– 계약이 실현된 후, ‘최후의 연금술사’의 앞에 ‘계약의 마도서’가 나타날 경우, ‘계약의 마도서’는 계약의 중대한 위반으로 즉각적이고 영구적인 방법으로 소멸한다.
– ‘최후의 연금술사’와 조우함이란, ‘최후의 연금술사’의 현재 육신에, ‘최후의 연금술사’의 영혼이 있을 때만을 지칭한다.
푸른 머리카락의 소녀는 계약서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마침내 고개를 들어 연기 남자를 바라보았다.
“좋아. 이 정도면 괜찮은 것 같네. 계약의 마도서.”
연기 남자는 작게 웃으며 과장된 동작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계약을 이행하도록 하지.]
그의 표정은 너무나 의미심장해서, 푸른 소녀가 뭔가 큰 실수를 저지른 것만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짝.
연기 남자가 박수를 치는 순간,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꿈이 끝나버렸다.
나는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예린이의 팔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으음, 사신아….”
예린이는 내가 품에서 빠져나가자, 잠결에 손을 허우적거렸다.
나는 커다란 하얀 아귀를 예린이 품에 안겨주고는 뚜방뚜방 거실로 향했다.
뀨힝힝.
창가에 서서 야경을 내려다보았다.
한때 폐허였던 송파구는 이제 제법 도시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형형색색의 달들과 그 뒤로 보이는 거대한 검은 행성이 눈에 들어왔다.
꿈속의 풍경과는 너무나도 다른, 하지만 다른 방향으로 기이하게 변해가는 현실이었다.
나는 한동안 그 광경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이번에 보인 꿈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민하면서.
이상하게 불안한 기분이 드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