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Chapter 42

각양각색의 꽃들이 화사하게 핀 정원.

험상궂은 얼굴의 남자가 울타리를 열고 정원에 발을 들였다.

인상에 맞지 않게 흐뭇한 눈으로 둘러보던 가리드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천둥처럼 요란한 외침이 터졌다.

“어어이! 카나!”

마침 근처를 지나가고 있던 행인이 가리드의 갑작스러운 외침에 화들짝 놀라 튀어 올랐다.

째릿,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는 행인에게 가리드는 머리를 긁으며 머쓱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의 외침은 주변의 이목을 있는 힘껏 끌어왔지만, 정작 그가 원하는 인물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가리드가 다시 한번 소리를 지를까, 아니면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끼익.

“…뭐야.”

집 문이 열리며 분홍색 머리카락과 분홍색 눈을 가진, 귀여운 인상의 소녀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자다가 일어났는지 카나의 얼굴엔 아직 졸음기가 묻어 있었다.

“뭐야, 해가 중천에 떴는데 아직도 자고 있었냐? 푹 자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찍 일어나서 몸을 움직여야 키가 크지!”

“움직여서 클 거였으면 진작 컸겠지…. 소용없는 거 알면서 짜증 나게 하지 마.”

무슨 말을 하든 늘 무덤덤한 반응만 보이는 카나는, 키 얘기가 나오면 뾰족하게 날을 세우곤 했다.

당연히 가리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카나의 키를 들먹인 건, 순전히 재미 때문이었다.

‘녀석들이 딸을 놀리던 게 이래서였나.’

아까도 말했지만, 평소엔 반응이 없다시피 하는 카나인지라 발끈할 때의 반응이 더욱 극적으로 대비되었다.

“그래서, 이번엔 또 뭐야.”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 졸음기를 떨쳐낸 카나가 조금 전보다 선명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또 뭐냐니. 누가 보면 내가 맨날 이러는 줄 알겠다 야.”

“….”

카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에 담긴 행간을 읽은 가리드가 부러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씨알도 먹히지 않은 걸 알고 금방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가리드는 등 뒤에 숨기고 있던 손을 카나에게 내밀었다.

“자, 어때?”

“…꽃? 고작 이거 보여 주려고 그 난리를 피운 거야?”

“어허, 이건 그냥 꽃이 아니야. 자, 다시 한번 봐봐.”

그는 그렇게 말하며 카나에게 조금 더 가까이 손을 가져갔다.

그가 내민 화분에는 올망졸망한 분홍색 꽃잎이 인상적인 꽃이 심겨 있었다.

꽃을 내려다보던 카나가 그래서? 라고 묻는 듯한 눈으로 가리드를 보았다.

“어때. 너랑 닮지 않았냐?”

“…딱히.”

“완전 닮았는데. 쪼끄마한 게 딱 너와 똑같…. 농담이다, 농담. 이거 무서워서 장난치겠나. 어휴, 내가 저 녀석한테 왜 검을 가르쳐 줘서….”

반응이 없을 건 이미 예상한 그였지만, 내심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이들은 왜 이렇게 부모의 마음을 몰라주는 건지.

한숨을 쉬며 화분을 내려놓은 가리드가 말했다.

“카나.”

“?”

“난 네가 이 꽃과 같았으면 좋겠다.”

“…무슨 뜻?”

“봐라.”

모종삽을 든 가리드가 땅을 파내고, 화분에 있던 꽃을 옮겨 심었다.

꽤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었지만 카나는 그가 움직이는 걸 묵묵히 지켜보았다.

작업이 끝나자, 화분에 홀로 외로이 피어있던 꽃은 다른 꽃들과 어우러져 수줍게 웃고 있었다.

“어때. 원래도 예뻤지만 이렇게 있으니까 훨씬 예쁘지 않냐?”

“….”

“너도 이 꽃처럼, 다른 사람들과 어우러지면 훨씬 예쁠 거다. 친구도 사귀고, 믿음직스러운 동료도 만나고…. 그리고, 어? 마음에 드는 남자와 결혼도 하고 인마.”

“쓸데없는 오지랖이야.”

조용히 듣고 있던 카나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더니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다는 양 집으로 들어갔다.

카나의 뒷모습이 집 안으로 사라지자, 홀로 남겨진 가리드는 혀를 쯧쯧 찼다.

“성질만 좀 죽이면 남자들이 줄을 설 텐데, 저런 녀석을 누가 데려갈는지.”

가리드는 문득, 남자가 카나에게 애정을 갈구하는 광경을 상상했다.

꽃다발을 내미는 청년과, 꽃다발을 받아 들며 수줍게 웃는 카나.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보던 둘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언젠가 카나가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화목한 가정을 꾸리는 걸 바라고 있는 그였지만, 막상 그런 광경을 상상하니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만약 카나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며 웬 외간남자를 데려온다면….

“…좋은 남자인지 아닌지 확인해야겠지.”

그리고 카나를 지킬 능력이 있는 남자인지도.

음산하게 중얼거리는 가리드의 모습은 그가 그토록 질색하며 피하던 팔불출 같은 동료들의 모습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 * *

‘…그런 일도 있었지.’

벌써 몇 년이나 된 일이건만 바로 어제 있었던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설마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또다시 듣게 될 줄이야.

‘어때. 너랑 닮지 않았냐?’

‘이 꽃, 카나 닮지 않았어?’

다르지만 같은 말들.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말에 나는 그저 멍청하게 저니를 바라보다가 황급하게 자리를 피했다.

분명 내가 자리를 피할 이유는 하나도 없을 텐데, 나는 왜 도망치듯 자리를 피한 걸까.

“….”

아마 가리드가 가져왔던 꽃과 완전히 같은 꽃을 보고 감상에 젖은 탓이겠지.

“여기에 왔던 거야?”

물론 가리드가 가져온 이름 모를 분홍색 꽃이 여기서만 피는 게 아닐지도 모르지.

그러나 나는 그가 과거 이 마을에 들렸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논리적인 추측이 아니라 단순한 바람에 불과하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아.

하지만….

‘이렇게라도 가리드의 흔적을 느끼고 싶은걸.’

잠깐이나마 같이 있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해.

그렇지만 이젠 달콤한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다.

“여기 오우거 시체가 있다!”


“저, 정말로 해치운 거야?!”


“…허억! 차원수…!”

당연히 도망쳤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상단 사람들과 마을 사람들이 앞다투어 달려오더니 오우거와 차원수를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쉽사리 다가오지 못하던 사람들은 그것들이 이미 생명이 빠져나간 시체라는 것을 알고 나서야 안도하고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한 놈은 아직 안 죽었는데.’

차원수란 놈들은 생명이 완전히 끊어지면 코어만 남긴 채 사라진다.

즉, 저렇게 형태가 남아있다는 건 아직 숨이 붙어 있다는 뜻이다.

세 쌍이나 되는 다리도, 날카로운 이빨도 모두 잃고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으니 사실상 시체나 다름없지만.

파스스스-

“허어억!”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차원수의 시체가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혹시 차원수가 살아난 걸까 기겁하며 도망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모습들이 꽤나 우스웠다.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던 사람들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

“아까 사라졌던 아이 아니야? 설마 정말로 저 아이가 오우거 무리와 차원수를 해치운 거야…?”


“우리 딸보다 어려 보이는데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분명 사도님들이 힘쓰신 거겠지.”


“사도님들이? 그렇게 강해 보이진 않던데…?”


“어허, 큰일 날 소리를…!”

자기들끼리 떠들던 사람 중 일부가 내게 다가왔다.

“큼큼…. 얘야, 여기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봤니?”

“….”


“얘, 얘야?”


“자네 얼굴이 너무 험상궂어서 겁먹은 거 아니야?”


“만약 그런 거라면 내가 아니라 자네 얼굴을 보고 그런 거겠지. 저번에 푸줏간 집 아들이 자네를 보고 울음을 터뜨린 걸 벌써 잊었나? 돼지 시체를 보고도 방실 웃던 녀석인데 말이야.”

음….

뭐라는 거야?


“앗, 잠시만요!”

그때, 버려두었던 번역기…가 아니라, 저니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제 동생은 아르키쉬를 모르거든요. 궁금한 게 있으면 저한테 대신 말해주세요.”


“아… 어쩐지 말이 없는 게 이상하다 했습니다. 동생이 참 귀엽네요.”


“그렇죠?”


“그런데, 이 오우거들과 아까 그 차원수는 사도님들이 해치우신 건가요?”


“아, 음….”

저니가 난처하다는 듯 말을 흐리더니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카나? 왜 눈을 피해?”

“…아무것도.”

…왜인지 모르지만 눈을 마주치기가 껄끄러워.

나는 저니를 바라보지 않은 채로 말했다.

“무슨 일?”

“아, 응. 오우거랑 차원수를 죽인 게 우리냐고 물어보는데?”

“…그래서?”

“사실대로 말하면 카나가 곤란할 거 같아서….”

아아.

그제서야 나는 저니의 고민을 깨달았다.

케이프로 모습을 꼭꼭 숨기고 다니니까 남들에게 알려지고 싶지 않아 한다고 생각했나 보네.

실제로 그게 맞기도 하고.

“….”

그렇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사실, 이제는 알려져도 크게 상관없긴 해.

뱀 새끼를 비롯한 제국 놈들이라거나, 사도들이나… 이미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많으니까.

어차피 케이프를 쓰고 다닐 거라면 조금 더 알려진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겠지.

다만, 전보다 조금 더 귀찮아질 건 분명했다.

“사실대로 말해도 돼.”

장고 끝에 나는 결정했다.

이것저것 따지고 내린 최선의 답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아니, 그렇게 말할 것도 없지.

이건 그냥 변덕이야.

오늘은 이랬지만 내일은 저럴 수도 있는, 어린아이가 부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변덕.

“괜찮아?”

“상관없어.”

나는 단지, 저니가 내게 보인 배려가 부담스러웠다.

명예를 원한다면 자기가 했다고 말하면 그만이고, 그게 켕긴다면 내가 했다고 말하면 그만인데.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고 구태여 내 의사를 물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무척이나 사소한 배려.

내가 변덕을 부린 건, 그 사소한 배려 때문이었다.

“대신, 조건이 있어.”

“…어려운 건 아니지? 막 몬스터랑 싸우라고 하거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아니지.

그런 건 어렵지도 않을뿐더러, 굳이 조건으로 붙이지 않아도 시킬 거였으니까.

부르르-


“왜, 왠지 오한이 드는데…?”

저니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무리 밤이라고 해도 그렇게 춥지는 않은데.

몸을 떠는 저니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일 수도 있지.

나는 저니에게 말했다.

“나한테-”

내 말을 들은 저니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그러더니 갑자기 손을 들어 볼을 꼬집어도 보고, 뺨을 두드리는 등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마침내 몇 차례나 이어지던 영문 모를 기행을 멈춘 저니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런 거라면 기꺼이 할게!”

따지고 보면 일이 늘어난 건데 뭐가 그리 기쁜 건지.

저니의 얼굴엔 함박웃음이 피어있었다.


           


Chapter 42

Chapter 42

각양각색의 꽃들이 화사하게 핀 정원. 험상궂은 얼굴의 남자가 울타리를 열고 정원에 발을 들였다. 인상에 맞지 않게 흐뭇한 눈으로 둘러보던 가리드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천둥처럼 요란한 외침이 터졌다. “어어이! 카나!” 마침 근처를 지나가고 있던 행인이 가리드의 갑작스러운 외침에 화들짝 놀라 튀어 올랐다. 째릿,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는 행인에게 가리드는 머리를 긁으며 머쓱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의 외침은 주변의 이목을 있는 힘껏 끌어왔지만, 정작 그가 원하는 인물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가리드가 다시 한번 소리를 지를까, 아니면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끼익. “…뭐야.” 집 문이 열리며 분홍색 머리카락과 분홍색 눈을 가진, 귀여운 인상의 소녀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자다가 일어났는지 카나의 얼굴엔 아직 졸음기가 묻어 있었다. “뭐야, 해가 중천에 떴는데 아직도 자고 있었냐? 푹 자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찍 일어나서 몸을 움직여야 키가 크지!” “움직여서 클 거였으면 진작 컸겠지…. 소용없는 거 알면서 짜증 나게 하지 마.” 무슨 말을 하든 늘 무덤덤한 반응만 보이는 카나는, 키 얘기가 나오면 뾰족하게 날을 세우곤 했다. 당연히 가리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카나의 키를 들먹인 건, 순전히 재미 때문이었다. ‘녀석들이 딸을 놀리던 게 이래서였나.’ 아까도 말했지만, 평소엔 반응이 없다시피 하는 카나인지라 발끈할 때의 반응이 더욱 극적으로 대비되었다. “그래서, 이번엔 또 뭐야.”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 졸음기를 떨쳐낸 카나가 조금 전보다 선명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또 뭐냐니. 누가 보면 내가 맨날 이러는 줄 알겠다 야.” “….” 카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에 담긴 행간을 읽은 가리드가 부러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씨알도 먹히지 않은 걸 알고 금방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가리드는 등 뒤에 숨기고 있던 손을 카나에게 내밀었다. “자, 어때?” “…꽃? 고작 이거 보여 주려고 그 난리를 피운 거야?” “어허, 이건 그냥 꽃이 아니야. 자, 다시 한번 봐봐.” 그는 그렇게 말하며 카나에게 조금 더 가까이 손을 가져갔다. 그가 내민 화분에는 올망졸망한 분홍색 꽃잎이 인상적인 꽃이 심겨 있었다. 꽃을 내려다보던 카나가 그래서? 라고 묻는 듯한 눈으로 가리드를 보았다. “어때. 너랑 닮지 않았냐?” “…딱히.” “완전 닮았는데. 쪼끄마한 게 딱 너와 똑같…. 농담이다, 농담. 이거 무서워서 장난치겠나. 어휴, 내가 저 녀석한테 왜 검을 가르쳐 줘서….” 반응이 없을 건 이미 예상한 그였지만, 내심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이들은 왜 이렇게 부모의 마음을 몰라주는 건지. 한숨을 쉬며 화분을 내려놓은 가리드가 말했다. “카나.” “?” “난 네가 이 꽃과 같았으면 좋겠다.” “…무슨 뜻?” “봐라.” 모종삽을 든 가리드가 땅을 파내고, 화분에 있던 꽃을 옮겨 심었다. 꽤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었지만 카나는 그가 움직이는 걸 묵묵히 지켜보았다. 작업이 끝나자, 화분에 홀로 외로이 피어있던 꽃은 다른 꽃들과 어우러져 수줍게 웃고 있었다. “어때. 원래도 예뻤지만 이렇게 있으니까 훨씬 예쁘지 않냐?” “….” “너도 이 꽃처럼, 다른 사람들과 어우러지면 훨씬 예쁠 거다. 친구도 사귀고, 믿음직스러운 동료도 만나고…. 그리고, 어? 마음에 드는 남자와 결혼도 하고 인마.” “쓸데없는 오지랖이야.” 조용히 듣고 있던 카나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더니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다는 양 집으로 들어갔다. 카나의 뒷모습이 집 안으로 사라지자, 홀로 남겨진 가리드는 혀를 쯧쯧 찼다. “성질만 좀 죽이면 남자들이 줄을 설 텐데, 저런 녀석을 누가 데려갈는지.” 가리드는 문득, 남자가 카나에게 애정을 갈구하는 광경을 상상했다. 꽃다발을 내미는 청년과, 꽃다발을 받아 들며 수줍게 웃는 카나.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보던 둘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언젠가 카나가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화목한 가정을 꾸리는 걸 바라고 있는 그였지만, 막상 그런 광경을 상상하니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만약 카나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며 웬 외간남자를 데려온다면…. “…좋은 남자인지 아닌지 확인해야겠지.” 그리고 카나를 지킬 능력이 있는 남자인지도. 음산하게 중얼거리는 가리드의 모습은 그가 그토록 질색하며 피하던 팔불출 같은 동료들의 모습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 * * ‘…그런 일도 있었지.’ 벌써 몇 년이나 된 일이건만 바로 어제 있었던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설마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또다시 듣게 될 줄이야. ‘어때. 너랑 닮지 않았냐?’ ‘이 꽃, 카나 닮지 않았어?’ 다르지만 같은 말들.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말에 나는 그저 멍청하게 저니를 바라보다가 황급하게 자리를 피했다. 분명 내가 자리를 피할 이유는 하나도 없을 텐데, 나는 왜 도망치듯 자리를 피한 걸까. “….” 아마 가리드가 가져왔던 꽃과 완전히 같은 꽃을 보고 감상에 젖은 탓이겠지. “여기에 왔던 거야?” 물론 가리드가 가져온 이름 모를 분홍색 꽃이 여기서만 피는 게 아닐지도 모르지. 그러나 나는 그가 과거 이 마을에 들렸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논리적인 추측이 아니라 단순한 바람에 불과하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아. 하지만…. ‘이렇게라도 가리드의 흔적을 느끼고 싶은걸.’ 잠깐이나마 같이 있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해. 그렇지만 이젠 달콤한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다. “여기 오우거 시체가 있다!” “저, 정말로 해치운 거야?!” “…허억! 차원수…!” 당연히 도망쳤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상단 사람들과 마을 사람들이 앞다투어 달려오더니 오우거와 차원수를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쉽사리 다가오지 못하던 사람들은 그것들이 이미 생명이 빠져나간 시체라는 것을 알고 나서야 안도하고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한 놈은 아직 안 죽었는데.’ 차원수란 놈들은 생명이 완전히 끊어지면 코어만 남긴 채 사라진다. 즉, 저렇게 형태가 남아있다는 건 아직 숨이 붙어 있다는 뜻이다. 세 쌍이나 되는 다리도, 날카로운 이빨도 모두 잃고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으니 사실상 시체나 다름없지만. 파스스스- “허어억!”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차원수의 시체가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혹시 차원수가 살아난 걸까 기겁하며 도망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모습들이 꽤나 우스웠다.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던 사람들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 “아까 사라졌던 아이 아니야? 설마 정말로 저 아이가 오우거 무리와 차원수를 해치운 거야…?” “우리 딸보다 어려 보이는데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분명 사도님들이 힘쓰신 거겠지.” “사도님들이? 그렇게 강해 보이진 않던데…?” “어허, 큰일 날 소리를…!” 자기들끼리 떠들던 사람 중 일부가 내게 다가왔다. “큼큼…. 얘야, 여기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봤니?” “….” “얘, 얘야?” “자네 얼굴이 너무 험상궂어서 겁먹은 거 아니야?” “만약 그런 거라면 내가 아니라 자네 얼굴을 보고 그런 거겠지. 저번에 푸줏간 집 아들이 자네를 보고 울음을 터뜨린 걸 벌써 잊었나? 돼지 시체를 보고도 방실 웃던 녀석인데 말이야.” 음…. 뭐라는 거야? “앗, 잠시만요!” 그때, 버려두었던 번역기…가 아니라, 저니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제 동생은 아르키쉬를 모르거든요. 궁금한 게 있으면 저한테 대신 말해주세요.” “아… 어쩐지 말이 없는 게 이상하다 했습니다. 동생이 참 귀엽네요.” “그렇죠?” “그런데, 이 오우거들과 아까 그 차원수는 사도님들이 해치우신 건가요?” “아, 음….” 저니가 난처하다는 듯 말을 흐리더니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카나? 왜 눈을 피해?” “…아무것도.” …왜인지 모르지만 눈을 마주치기가 껄끄러워. 나는 저니를 바라보지 않은 채로 말했다. “무슨 일?” “아, 응. 오우거랑 차원수를 죽인 게 우리냐고 물어보는데?” “…그래서?” “사실대로 말하면 카나가 곤란할 거 같아서….” 아아. 그제서야 나는 저니의 고민을 깨달았다. 케이프로 모습을 꼭꼭 숨기고 다니니까 남들에게 알려지고 싶지 않아 한다고 생각했나 보네. 실제로 그게 맞기도 하고. “….” 그렇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사실, 이제는 알려져도 크게 상관없긴 해. 뱀 새끼를 비롯한 제국 놈들이라거나, 사도들이나… 이미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많으니까. 어차피 케이프를 쓰고 다닐 거라면 조금 더 알려진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겠지. 다만, 전보다 조금 더 귀찮아질 건 분명했다. “사실대로 말해도 돼.” 장고 끝에 나는 결정했다. 이것저것 따지고 내린 최선의 답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아니, 그렇게 말할 것도 없지. 이건 그냥 변덕이야. 오늘은 이랬지만 내일은 저럴 수도 있는, 어린아이가 부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변덕. “괜찮아?” “상관없어.” 나는 단지, 저니가 내게 보인 배려가 부담스러웠다. 명예를 원한다면 자기가 했다고 말하면 그만이고, 그게 켕긴다면 내가 했다고 말하면 그만인데.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고 구태여 내 의사를 물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무척이나 사소한 배려. 내가 변덕을 부린 건, 그 사소한 배려 때문이었다. “대신, 조건이 있어.” “…어려운 건 아니지? 막 몬스터랑 싸우라고 하거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아니지. 그런 건 어렵지도 않을뿐더러, 굳이 조건으로 붙이지 않아도 시킬 거였으니까. 부르르- “왜, 왠지 오한이 드는데…?” 저니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무리 밤이라고 해도 그렇게 춥지는 않은데. 몸을 떠는 저니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일 수도 있지. 나는 저니에게 말했다. “나한테-” 내 말을 들은 저니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그러더니 갑자기 손을 들어 볼을 꼬집어도 보고, 뺨을 두드리는 등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마침내 몇 차례나 이어지던 영문 모를 기행을 멈춘 저니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런 거라면 기꺼이 할게!” 따지고 보면 일이 늘어난 건데 뭐가 그리 기쁜 건지. 저니의 얼굴엔 함박웃음이 피어있었다.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