램프를 처리하고 난 뒤, 나는 분지 근처 바위산 정상에 서서, 아래로 펼쳐진 분지를 내려다보았다.
날카롭게 치솟은 암벽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고, 그 틈새를 비집고 자란 짙푸른 침엽수들이 산의 경사면을 따라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이 만들어 내는 소리는 어딘가 조금 쓸쓸하게 들렸다.
‘….’
나는 분지 한가운데에 자리한 마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천천히 마을의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을을 빙 돌아 나오는 투명한 시냇물을 따라 뚜방뚜방 나아갔다.
마을의 입구는 무너진 바위와 흙더미로 막혀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산사태로 벌어진 일처럼 보였지만, 흙더미들 사이에서 희미한 피 냄새에 섞여 가스램프의 냄새가 흘러나왔다.
하긴, 아무리 산사태가 일어났어도 사람이 멀쩡히 살고 있는 마을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굶주릴 정도로 고립될 리가 없지.
시선을 돌리자, 푸른 사신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마을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TV에서 배운 건지, 마치 기도하는 것처럼 두 손을 꼭 부여잡고 조그마한 소원을 빌고 있었다.
<인간에게도 우리들처럼 죽은 뒤의 세계가 있기를….>
나는 푸른 사신의 기도를 지나쳐서, 텅 빈 마을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깔끔했을 집에는 먼지가 내려앉았고, 손질되지 않은 정원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녹슨 대문은 삐걱거리며 바람에 흔들렸고, 깨진 유리창 너머로 버려진 일상의 파편이 보였다.
시간과 자연의 힘이 천천히 인간들의 흔적을 지우고 있었다.
푸른 사신과 함께 마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더니, 나를 호출하는 미니 사신의 의지가 들려왔다.
‘엄마, 찾았어! 램프 냄새가 나!’
나는 그 소식을 듣고 푸른 사신의 모자 위를 톡톡 두들겨 준 뒤, 미니 사신을 향해서 순간 이동했다.
***
순간 이동을 할 때 느껴지는 가벼운 부유감이 사라지자, 나는 낯선 풍경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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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풍경을 배경으로 황금 사신이 해맑게 웃으며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
나는 그 모습을 보자, 조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임무가 없는 황금 사신들은 전부 가출한 줄 알았는데?
내가 신기한 마음에 그 황금 사신을 손아귀에 집어 들자, 황금 사신은 히히 웃으며 내 손바닥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니, 보통의 황금 사신과는 다른 점들이 눈에 띄었다.
이 황금 사신은 보통의 황금 사신보다 살짝 작고, 조금 더 통통했다.
그 모습을 보자,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황금 사신들의 대규모 가출 사태 이후에 태어난 황금 사신이라서 그랬구나.
나는 통통한 아기 황금 사신을 손바닥 위에 올려둔 채,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이곳은 상반된 분위기가 뒤섞인 곳이었다.
한편으로는 마치 대지진의 흔적처럼 곳곳에 무너진 콘크리트 잔해가 널브러져 있는 폐허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 폐허 속에서 사람들이 부지런히 무너진 시설들을 복구하려 애쓰는 모습도 보였다.
마치 복원 작업이 한창이던 시절의 송파구를 연상케 하는 광경이었다.
물론 재건 중인 송파구와 다른 점도 눈에 띄었다.
송파구와 달리 폐허가 된 도시 곳곳에 숨어 사는 사람들의 기척이 간간이 느껴졌다.
흠.
하지만 이 도시는 이상하게도 어딘가 익숙한 느낌을 자아냈다.
‘그래서 램프의 흔적이 어디 있다는 거야?’
나는 손바닥 위의 아기 황금 사신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저쪽!’
아기 황금 사신은 조그마한 손가락을 쭉 뻗어서, 이리저리 부서진 도로의 너머를 가리켰다.
나는 아기 황금 사신의 안내를 따라 천천히 그 도로를 따라 걸어갔다.
걸음을 옮길수록 기시감은 더욱 강해졌다.
‘분명히 전에 와본 적이 있는 곳 같은데….’
아기 황금 사신은 계속해서 목적지를 손가락 끝으로 가리키면서도, 종종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엄마다!’하고 해맑게 웃었다.
마치 내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사실 그럴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기 황금 사신이 서 있는 곳은 내 손바닥 위였으니까.
마침내 나는 아기 황금 사신의 인도에 따라 도로의 끝에 도달했다.
그곳은 마치 폭격을 맞은 듯 처참하게 무너져 있었다.
아기 황금 사신은 목적지에 도착하자, 내 손바닥 위에서 폴짝폴짝 뛰며 의지를 내뿜었다.
‘엄마! 여기야!’
확실히 아기 황금 사신이 장담한 것처럼, 가스램프의 기척이 도로 끝에 짙게 배어있었다.
그리고 그 기척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내 머릿속을 괴롭히던 기시감의 정체가 드러났다.
여기는 도시 RS잖아!
핏물에 젖은 채 박살 난 도로.
사람들이 보존해 놓은 아귀 캠프파이어의 흔적들.
이곳은 황금뿔이 돋아난 사람들처럼, 오브젝트가 발현된 사람들이 섞여 살던 도시였다.
검은 녹이었던가?
문제는 이곳은 이미 내가 램프를 부쉈던 적이 있는 곳이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나는 쓸모없는 제보를 한, 아기 황금 사신을 댖지로 만들어버렸다.
아기 황금 사신은 ‘어째서?’라는 표정으로, 댖지가 되어 짧아진 팔다리를 버둥버둥 흔들었다.
‘앙대!’
그리고 나는 댖지가 된 황금 사신을 까맣게 탄 흔적이 남은 아귀 캠프파이어 자리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히히.
그렇게 아기 댖지를 만들기 무섭게, 미니 사신들의 의지들이 잔뜩 들려오기 시작했다.
‘엄마, 여기 램프!’
‘엄마, 찾았어!’
‘엄마!!’
이상하리만치 많이 들려오는, 램프의 존재를 알리는 의지들.
램프가 이렇게 많았던 건가?
나는 미간을 살짝 좁히며, 나를 부른 미니 사신들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에도.
‘엄마!’
‘램프, 여기 있어!’
‘엄마!!’
‘큰일이야!’
미니 사신들이 나를 찾는 의지가, 전 세계 곳곳에서 끊이지 않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 숫자는 점점 늘어만 가고 있었다.
나는 그 의지를 들으며, 조금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
서늘한 추위가 내려앉은 교단 폐허.
[계약에 따라, 제가 도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가가 따르겠지요.]
램프의 남자가 내뱉은 나지막한 말소리가 연기 사이로 천천히 흩어졌다.
램프의 남자가 가진 능력을 생각하면 꽤 매력적인 제안이었지만, 후배 2호는 이상한 점을 느끼고 있었다.
“당신은 성녀의 소원과 관련된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계약을 한 거 아니었어요?”
후배 2호는 남자의 말에 답을 하지 않고, 역으로 수상한 점을 파고들었다.
[물론 그런 계약을 맺었지요. 하지만 제가 드리려는 도움은 소원과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남자가 양손을 펼치자, 고풍스러운 램프들이 그 사이에서 떠오르기 시작했다.
[소원과는 전혀 상관없이, 대가를 받고 원하는 능력을 드리는 단순한 계약이지요.]
“….”
후배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말장난에 불과했다.
‘역시 어떤 조건을 걸어도 램프의 남자와 계약을 맺는 것은 너무 불합리해.’
[그럼, 계약을 새로 맺으시겠습니까?]
램프의 남자가 손을 내밀자, 램프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동료들의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언제나 자신만만한 탐정 선배.
점점 큰 망치를 구해서 쓰기 시작한 선배.
그리고 여전히 초등학생처럼 작은 후배까지.
연기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히 움직이는 동료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주 가벼운 대가입니다.]
[이들 중 딱 한 명만, 구원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계약을 맺으면….]
후배 2호는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그녀의 확고한 거절에 램프의 남자는 잠시 놀란 듯했다.
그러나 곧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불가능한 소원을 이루기 위해 발버둥 치고 또 발버둥 치다가, 계약이 만료되기 직전에서야 급하게 저를 찾게 되기를 기다리겠습니다.]
그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주변의 모든 것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연기로 이루어진 동료들의 모습도, 그의 형상도, 램프의 빛도 모두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해로운 오브젝트!’
황금 뿔 사신은 굉장히 화가 나서, 이빨을 마구 부딪치며 분노를 토해냈다.
물론 황금 사신의 이빨은 말랑말랑해서 딱딱한 소리가 나진 않았다.
후배 2호는 그런 황금 뿔 사신을 조용히 안아주었다.
황금 사신 특유의 따뜻한 온기가 서늘하게 식어버린 그녀의 몸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잘한 거겠지?”
후배 2호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차가운 밤공기가 그녀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깊은 산속의 밤은 생각보다 더욱 추웠다.
“이제, 슬슬 자자.”
그녀는 팔을 감싸 안으며 몸을 웅크리고, 황금 뿔 사신의 온기를 버팀목 삼아 잠들 준비를 시작했다.
산에서 내려가기에는 너무 늦었고 멀었으니까.
게다가 미니 사신 정원으로 갈 수도 없었다.
회색 사신의 행동을 조절할 수 없는 이상, 회색 사신과 만나는 것은 위험한 행동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품속의 황금 뿔 사신의 온기를 느끼며, 천천히 잠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황금 뿔 사신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후배 2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인간, 추워 보여….’
***
몸속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기분 좋게 퍼져나가는 온기.
‘인간!’
‘일어나!’
그런 기분 좋은 온기 속에서 들려오는 황금 뿔 사신의 해맑은 의지.
‘따뜻해?’
의지가 들려오는 것과 동시에, 후배 2호는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이었다.
바닥에 끝없이 깔린 푹신한 침대.
하늘을 뒤덮은 부드러운 캐노피.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황금색과 남색이 뒤섞인 거대한 나무.
일견 미니 사신 정원과 닮았지만, 확실히 달랐다.
분명하게 느껴지는 미니 사신 정원과 달리, 푹신한 침대 속에서 꾸는 꿈처럼 좀 더 몽환적이고 따뜻한 곳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후배 2호가 의문을 품자, 황금 뿔 사신이 사탕 하나를 들이밀었다.
황금색과 남색이 뒤섞인 사탕.
‘여기는 따뜻한 꿈속이야!’
황금 뿔 사신은 그렇게 의지를 보내오더니, 해맑은 표정으로 히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