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데스력 744년에 발발한 2차 종족 전쟁은 무려 수십 년이나 이어졌다.
전쟁이 오래 지속되면 삶이 황폐해진다.
전쟁에 의해 터전을 잃고 떠도는 난민이 생기고, 생업에 종사해야 할 사람들이 전쟁터로 향한다.
인력이 감소하면 생산량도 감소하고, 생산량이 감소하면 세금도 덩달아 감소한다.
또한 사병과 기사단 같은, 도시를 지킬 사람이 줄어드는 것도 큰 문제였다.
‘세금을 내는 대신 안전을 보장받는다’라는, 도시를 이루는 아주 기초적인 약속이 흔들리니 백성들은 불안에 떨게 되었다.
용병이란 직업이 대두되기 시작한 건 그 때문이었다.
사실, 용병이란 직업은 예전부터 있었지만, 그다지 각광받는 직업은 아니었다.
도시에 몬스터가 쳐들어오든 인근에 마물이 나타나든 사병과 기사단 선에서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용병은 사실상 농한기처럼 일이 없는 시기에 부업 삼아 다른 사람들의 자질구레한 부탁을 들어주는 직업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영향력이 약해지자 사람들은 도시에 세금을 낼 세금으로 용병을 고용했고, 그 결과 용병을 생업으로 삼는 이들이 생겨났다.
그런 용병들 중 마음에 맞는 이들이 모인 것이 파티, 파티의 인원이 늘어나거나 여러 파티가 모여서 생겨난 것이 용병단이었다.
그리고 2차 종족 전쟁 당시, 가장 위명을 떨치는 용병단이 있었으니….
* * *
“…그게 바로, 자유 용병 도시 리베리의 전신인 ‘리베리 용병단’이래.”
리베리에 도착한 저니가 신나게 떠들었다.
용병들의 본산에 들어와서 그런지 그녀는 평소보다 더 들떠 보였다.
물어본 적도 없는 리베리의 역사를 줄줄이 읊어대는 건 아마 그런 이유겠지.
익숙하지도 않은 그라닉으로 설명한다고 고생했네.
다만….
“알고 있어.”
“아, 그, 그래?”
쓸데없는 고생이었다는 게 문제지만.
역사에 관심을 두지 않는 나라고 해도 리베리의 설립 같은 중요한 일은 알고 있었거든.
정확히 말하면, 저니 이전에 옆에서 떠들던 누구 때문에 강제로 알게 된 거지만.
저니가 설명한 대로 자유 용병 도시의 시작은 한 용병단이었다.
용병단이 성세함에 따라 세금을 내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세금을 받는 영주들 입장에선 당연히 그게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그렇게 용병단과 기존의 기득권층이 싸우게 되고, 용병단이 승리한 결과 생겨난 것이 여기… 리베리라는 자유 용병 도시였다.
즉 리베리는 옛날에 있던 용병단의 이름이자, 도시의 이름이면서, 용병들이 속한 집단의 이름이다.
‘음….’
나는 후드에 가려진 눈으로 도시를 쓱 훑었다.
말로는 많이 들었어도 리베리에 온 건 처음인데, 실제로 본 리베리의 크기는 상당했다.
그라시스의 수도 만큼은 아니지만 웬만한 도시들보다 훨씬 큰 느낌.
일단 오르도보단 확실히 큰 거 같네.
‘…하긴.’
예전엔 작은 왕국의 수도였으니까 그럴 만하지.
“리베리엔 얼마나 있을 생각이야?”
“몰라.”
나야 지금 당장 성국을 향해 떠나도 상관없지만, 나에게 묻는 저니는 그걸 원하지 않는 듯했다.
“그러면 우리 여기에 며칠만 있다가 가면 안 될까?”
서두르는 것도 좋지만 휴식도 중요하다느니, 이왕 온 거 관광하는 것도 좋지 않냐느니.
저니는 온갖 이유를 꺼내며 나를 설득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4일, 아니, 3일만 쉬자! 응?”
“응.”
“3일도 싫어? 그러면…. …어? 방금 응이라고 했어?”
“응.”
에델에게 묻고 싶은 게 있지만 그렇게 급한 건 아니니 서두를 필요는 없겠지.
무엇보다, 나는 며칠 동안 마차나 말을 타고 밖에서 잠을 청하는 생활이 익숙한 거지 그런 생활을 즐기는 게 아니야.
내 대답을 들은 저니의 얼굴이 환해졌다.
“정말이지? 무르기 없기다? 이래놓고 갑자기 내일 출발하자거나 그러면 안 돼?”
“그냥 오늘 출발하자.”
“아이, 또 왜 그래~”
장난스럽게 애교를 부린 저니가 내 손을 덥석 잡고 나를 이끌었다.
리베리가 상당히 익숙한 모양인지 거리를 거니는 그녀의 발걸음엔 망설임이 없었다.
“어디 가는 거야?”
“리베리 본부! 오랜만에 왔으니 실적도 보고할 겸 카나한테 본부를 보여주고 싶어서.”
“…내가 가도 되는 거야?”
“주요 시설 아니면 상관없어. 어차피 가봤자 어… 뭐였더라? 맞아, 접수처! 접수처 정도고, 거기는 의뢰의 접수와 수주를 담당하는 곳이라 일반 사람들도 자주 들락날락하는걸.”
그렇다면야.
인파 사이를 요리조리 헤치며 길거리를 걷다 보니 멀리서 보이던 커다란 성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왕국의 수도를 탈취해서 쓰는 것도 모자라서 왕성까지 그대로 남겨 본부로 쓰고 있다니.
멸망한 왕국의 왕족이 봤다면 피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르겠네.
성이고 뭐고 잔해만 겨우 남은 어떤 나라보단 낫지만.
리베리 본부는 이름 높은 리베리의 본부답게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
사도야 늘 그렇듯이 많이 보이지만, 사도가 아닌 일반 용병들도 많이 보였다.
주변 사람들을 빤히 보고 있으려니 내 시선을 눈치챈 저니가 무릎을 굽혀 나와 시선을 맞췄다.
“용병에 관심, 생겼어? 혹시, 용병이 되고 싶어졌다거나…?”
“아니.”
“왜? 카나라면 엄청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싫어.”
대우야 좋게 받겠지. 하지만 그런 걸 원하지 않는데 무슨 소용이야.
돈이 부족하다면 고려해 봤을 텐데, 예전부터 나는 돈을 벌기만 했지 딱히 쓰지는 않았다.
오죽했으면 가리드가 돈 좀 쓰라고 타박했겠어.
가끔 쓴다고 해도 먹을 걸 사 먹는 정도인데, 그 정도로는 단장 자리에 앉아 받는 돈에 비하면 새 발의 피지.
왕족 놈들은 사사건건 짜증 나게 하는, 모기 같은 놈들이었지만 돈은 나름대로 잘 챙겨줬거든.
아마 놈의 입김이 들어간 탓이겠지.
“….”
애써 잊었던 얼굴을 떠올린 탓에 기분이 삽시간에 더러워졌다.
무슨 말을 들어도 유야무야 넘기던 가리드조차 그놈에겐 왠지 모르게 떨떠름하게 대했었지.
내가 싫어하는 건 싫어하는 거고, 객관적으로 봤을 땐 왕족 중에선 거의 유일하게 제정신 박힌 놈이라고 생각하는데.
가리드에게 왜 놈을 싫어하는지 이유를 물었지만 끝까지 알려주지 않은 탓에 나는 그가 놈을 싫어한 이유를 아직도 알지 못했다.
‘정 알고 싶다면 애교라도 부려보든가. 그러면 알려줄게.’
‘….’
그런 말을 하긴 했는데 그렇게까지 알고 싶진 않아서 무시했다.
아무튼, 명성을 원하는 것도 아니고, 돈은 충분하니 굳이 용병 노릇을 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제국 놈들만큼은 아니지만 리베리에 대해 그리 좋은 감정을 가진 것도 아니고.
저니도 별생각 없이 권했던 건지 내 거절에 그다지 미련을 보이지 않았다.
접수처에 늘어선 줄을 본 저니가 난감한 듯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거 같네…. 카나, 혼자 구경이라도 하고 있을래? 일, 끝나면 찾아갈게.”
“찾아 와?”
약속 장소를 정한 것도 아니고 어디 있는지도 모를 텐데 어떻게?
내 의문에 저니가 주위를 가리켰다.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주위를 봤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모를 수가 없겠네.
내가 무슨 우리 속 원숭이도 아니고, 왜 저렇게 보는 거야.
하도 많은 사도들이 나를 보고 수군거리고 있는 탓에 별 관심 없던 다른 용병들도 무슨 일 있나 싶어서 이쪽을 살폈다.
사람이 사람을 불러오고,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불러오는 악순환의 완성이었다.
“알았어.”
어딜 가든 따라올 거 같긴 하지만 가만히 서서 구경거리가 되는 것보단 낫겠지.
나는 저니를 남겨두고 리베리 본부 탐험을 시작했다.
고풍스러운 인테리어와 투박한 용병들.
이만큼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또 있을까.
용병들을 피해 발길이 닿는 대로 걷고 있으니 때때로 사람이 나와 나를 막아서곤 했다.
“여기는 관계자만 입장 가능한 곳입니다. 관계자라면 증명할 수단을 보여 주십시오.”
단호한 목소리와 함께 몸으로 문을 막는 걸 보면 알아듣지 못해도 뜻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다른 곳을 향했다.
들어가지 말라고 하면 들어가지 말아야지.
꼭 들어가야 할 이유가 없다면 고집부릴 필요도 없으니까.
그렇게 나를 구경하는 구경꾼들과 성안 곳곳을 구경하고 다닐 때였다.
쫑긋.
“…?”
“…합!”
“…르게! 더 빠르게 휘둘러!”
어렴풋이 들리는 고함 소리와 둔탁한 쇳소리.
그것에 이끌린 나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리의 근원을 향해 다가갈수록 어렴풋이 들리던 소리가 뚜렷하게 들려왔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성에 딸린 뜰이었다.
리베리에게 빼앗기기 전엔 아마 화초 같은 걸 심어 본래 목적대로 쓰였을 테지만, 이제는 용병들이 수련하는 연무장으로 쓰이고 있었다.
목각 인형이나 짚 인형 등을 열심히 때리는 사람, 서로에게 무기를 겨누며 실력을 겨루는 사람….
열심히 수련하는 사람들 사이사이에 사도들이 끼어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수련 같은 건 죽었다 깨어나도 안 할 줄 알았는데.
‘의외네.’
실력은 역시 아쉽지만, 열심히 수련하는 건 칭찬할 만하지.
보아하니 혼자 연습하는 사람들은 이제 막 용병 생활을 시작한 초심자인 것 같고, 대련하는 사람들은 그보다 조금 더 위 단계인 것 같다.
그리고 그것보다도 더 실력 있는 이들은 교관인 듯한 용병에게 지도를 받고 있었다.
교관까지 있다니.
조금 싸울 줄 아는 어중이떠중이들을 모은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직접 육성까지 할 줄이야.
생각보다 더 체계적이네.
“음? …잠시 휴식!”
엄격한 얼굴로 용병들을 가르치던 교관이 나를 발견했다.
교관이 손을 들자 땀을 뻘뻘 흘리며 무기를 휘두르던 용병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조금 전까지 외치던 것과 대비되는 상냥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니? 혹시 아는 언니나 오빠 따라서 온 거니?”
“나, 아르키쉬 몰라.”
저니에게 가장 먼저 배운 말을 읊자 교관이 머리를 긁적였다.
“음, 미아인가? 곤란하네….”
“….”
“자칫하다 눈먼 칼이라도 맞으면 위험할 텐데.”
까칠하게 자란 턱수염을 쓸며 고민하던 교관이 나에게 손짓했다.
용병들 사이에서 통하는 특별한 손짓이 아니라 통상적인 의미라면 따라오라는 뜻이겠지.
어딜 가는진 모르겠지만 나는 얌전히 그를 따라갔다.
연무장 근처에 있는 문 앞에 도착한 교관이 문을 두드렸다.
똑똑.
“대장님, 들어가도 됩니까?”
“어, 들어와.”
나는 교관을 따라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누군가의 집무실로 보이는 방.
한 남자가 큼직한 책상에 앉아 서류와 씨름하고 있었다.
“무슨 일 있나?”
“미아를 찾았습니다. 아무래도 보호자를 잃어버린 것 같은데, 연무장에 내버려두자니 너무 위험해서 일단 여기로 데려왔습니다.”
“그래?”
서류와 씨름하던 남자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나이가 들어 조금 퇴색되긴 했지만, 그의 얼굴에 담긴 잘생김은 세월조차 완전히 앗아가지 못했다.
젊었을 적엔 여자들 마음을 꽤나 사로잡았을 게 분명한 훤칠한 외모.
그리고 나는 그의 이름을 알고 있다.
“에런.”
푸른빛이 살짝 도는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의문, 놀람, 불신.
순식간에 세 번의 변화를 거친 에런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설마, 아니, 그럴 리가…. …정말로?”
“…대장님 딸입니까?”
“…딸이라.”
조심스러운 교관의 물음에 에런이 경악하던 것을 멈추고 씁쓸하게 웃었다.
어느새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있었다.
“이 일은 내가 맡도록 하지. 다시 돌아가도록.”
“넵…!”
교관이 문을 닫고 나가자 우리 둘 사이에선 잠시 침묵이 흘렀다.
거의 확신한 것 같지만 에런의 얼굴에는 아직 불신의 빛이 남아있었다.
나는 그런 그를 돕고자 눌러쓰고 있던 후드를 끌어내렸다.
후드에 갇혀 있던 분홍색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오랜만이네, 부단장.”
“…아니, 허…!”
나와 눈이 마주친 에런이 헛웃음을 흘렸다.
후드를 벗고 제대로 마주한 그의 얼굴엔 불신의 빛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말을 이었다.
“…단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