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난 지인과 대화하는 건 즐거운 일이다.
단순히 알고 지내던 사람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같은 추억을 공유해온 사람이라면 더더욱.
“너는 예전부터 그랬어. 다른 녀석들한테 뭐가 힘드냐고 물어보면 가장 많이 하는 답변이 뭐였는지 알아? 네가 너무 많이 굴려서 힘들댄다. 내가 살다 살다, 교육 담당도 아닌 녀석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건 처음 봤다.”
“…귀족 놈들의 음해-”
“귀족 출신 놈들만 그런 거라면 내가 말을 안 했지. 그런 의미에서 넌 참 대단한 녀석이야. 그 가리드도 못 해낸 귀족 평민 대통합을 해냈으니까.”
“다 엄살 부리는….”
“엄살은 무슨. 다른 놈들이 다 너 같은 줄 알아? 세상 사람들은 다 너 같지도 않고, 너처럼 천재도 아니라고 내가 누누이 말했지.”
“으, 으으으… 잔소리 멈춰….”
…그래도 이건 좀 빡세네.
나이가 들면 잔소리가 많아진다고 하던데, 그래서 그런 걸까.
어렸을 때 듣던 것보다 한층 업그레이드된 잔소리를 듣고 있으니 정신이 혼미해졌다.
지금 나에게 쏟아지는 이 모든 잔소리가, 고작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는 말 한마디에서 시작됐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영혼이 빠져나가는 듯한 길고 긴 잔소리는 에런이 마른기침을 뱉으며 컵을 집어 드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 어떤 공격보다 무서운 정신 공격에 혼이 나간 내가 멍하니 있으니 목을 가다듬은 에런이 물었다.
“…그래서.”
“…응.”
“네가 가르친다는 그 사람, 남자냐?”
“…응? 일단은 여자인데, 왜?”
긴 잔소리를 끝내는 말 치고 다소 생뚱맞은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물으니까 대답은 했지만, 그런 걸 왜 묻는 거지?
“다행이네. …아니, 아니지. 여자라고 해서 마냥 방심하면 안 돼. 세상에 이상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암, 그렇고말고.”
“…?”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뭔가 진지한 고민을 하는 거 같으면서도 왠지 알아봤자 좋을 게 없는 고민을 하고 있는 느낌인데.
“뭐 하는 사람이니?”
“…뭐 하는 사람이냐는 게 무슨 뜻이야?”
“왜, 여러 개 있잖니. 직업이라든가, 취향이라든가.”
“취향?”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작업이라도 걸 셈?”
사람 마음이라는 게 어떻게 자기 뜻대로 되냐마는, 아무리 그래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한테 흑심을 품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심지어 에런과 저니의 나이 차이를 생각해 보면… 음….
물론 저니의 나이를 정확히 아는 건 아니지만, 언행을 보면 얼추 짐작은 할 수 있잖아.
나만큼은 아니어도 어린 축에 속할 게 분명해.
반면 에런의 나이는 오십이 넘었다.
물론 에런이 나이에 비해 젊게 보이는 편이고, 웬만한 남자들보다 훨씬 잘생기긴 했지만 그래도 좀 그렇지 않아?
“으, 으음….”
…그래도, 둘이 좋다면야 내가 어떻게 말리겠어.
중년미 있는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도 있다고 하잖아.
어쩌면 저니도 그런 여자 중 하나일지도 모르는 일이고.
“응. 응원할게.”
“…또 이상한 생각하고 있지?”
안타깝게도 저니와 서로의 취향에 대해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어서 도와줄 순 없지만 응원 정도라면…!
큰맘 먹고 주먹을 꼭 쥔 채 응원해 줬건만 정작 에런은 그다지 기쁜 내색이 아니었다.
“카나. 너는 은근히 어벙한 면이 있으니까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보려는 거다. 혹시 나쁜 마음을 먹고 접근했을 수도 있잖아.”
“…어벙한 면?”
…내가? 어벙하다고?
만약 에릭이 방금 말을 들었다면 ‘부단장님, 노망났습니까?’ 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대가로 에런의 발에 차이며 연병장을 데굴데굴 굴러다녔겠지.
“좋아, 시험 삼아 물어보마. 그 사람과 어울려 다니게 된 계기가 어떻게 되니.”
“먹을 걸 줬어.”
“…먹을 거를 줬다고?”
“응. 코카트리스한테서 구해줬더니 보답이라고 매일 가져다줬어. 내가 있는 산으로”
“흠….”
에런이 제법 진중한 모습을 보였다.
“납득이 불가능하진 않은데…. 그러면, 이상한 낌새를 보인 적은 없니?”
“이상한 낌새…?”
“너에게 손을 댄다거나, 음흉하게 본다거나.”
손을 대거나 음흉하게 본 적….
“….”
너무 많은데?
툭하면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고, 손을 잡고.
음흉하게 본 적은 없어도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질 않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을 하나하나 말하고 있으려니, 잠자코 듣고 있던 에런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내가 말을 마칠 때쯤엔 마치 흉신악살의 그것처럼 일그러졌다.
“…그 사람.”
“아, 이름은 저니야.”
“그래, 저니. 그 저니라는 사람은 지금 여기 와 있니?”
“응. 저니도 리베리 소속이거든.”
“…그렇단 말이지?”
에런이 몸을 일으켰다.
나는 갑작스럽게 나갈 채비를 하는 에런에게 말했다.
“어디 가?”
“그 저니라는 사람에게 가보려고.”
“그런데 검은 왜 챙겨?”
“아아. 쓸 일이 있거든. 너도 알잖니. 해충 구제에 이만큼 쓸모 있는 도구가 또 없다는걸.”
“….”
쓸 일이 있기는 무슨.
나는 한숨을 쉬었다.
“과보호야, 에런. 난 애가 아니야.”
“….”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였으면 내가 가만히 내버려뒀을 리 없잖아.”
장난 조금 쳤다고 눈이 뒤집혀서는, 가만히 놔뒀다간 아주 사람 하나 잡게 생겼네.
외모가 이럴 뿐, 내 실제 나이는 에런도 잘 알 텐데 그가 나를 대하는 취급을 보면 꼭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했다.
내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흉흉하게 일렁거리던 에런의 기세가 살짝 가라앉았다.
다시 의자에 털썩 앉은 그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예전이었다면 붙잡고 엉덩이를 때려줬을 텐데.”
“엑, 그런 취향?”
“그런 점을 말하는 거다. 걱정되게 장난이나 치기는….”
“아, 들켰다.”
“애초부터 숨길 생각도 없었잖니.”
검을 본격적으로 배우고 몇 년이 지났을 때, 나는 에런의 강함을 뛰어넘었다.
하지만 내가 그보다 강해졌다는 걸 알면서도 에런의 과보호는 멈추지 않았다.
내가 단장 자리에 앉은 후로는 그런 모습을 잘 보이지 않았지만.
에런은 가리드와 더불어 나를 걱정하던 유이한 사람이었다.
아, 이젠 셋이지.
“그래, 뭐… 이렇게 장난치는 걸 보니 마음이 좀 놓이는군요.”
이젠 완전히 진정한 에런의 말투가 다시 존대로 돌아왔다.
“검 한 자루 쥐고 제국에 쳐들어가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입니다.”
“날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때 당시의 단장님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흥.”
과보호 다음은 과장이야?
…뭐, 조금 날카로웠던 건 맞지만.
“거슬린다고 사람을 죽사발로 만드는 걸 ‘조금’ 날카롭다고 하진 않을 겁니다.”
“그건 그럴 만했어.”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단순히 심기를 건드렸다고 그 정도로 패진 않는다고.
그놈은 선을 넘었으니까 그런 거지.
내게 물러설 생각이 없다는 걸 느낀 에런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튼 나쁜 사람한테 걸린 건 아닌 것 같으니 다행입니다만, 혹시 모르니까 조심하시죠. 갑자기 끌어안거나 손을 대려고 할 수도 있으니까.”
“…응?”
“왜 그러십니까?”
“그건 농담이 아니었는데?”
손잡고, 끌어안고, 쓰다듬고.
“당장 오늘 아침에도 그랬는데.”
나야 천생 여자가 아니었을뿐더러, 여자라곤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땀내 나는 기사단에서 자란 터라 잘 모르지만….
여자들은 원래 그런 스킨쉽을 즐기지 않나?
전생에서는 그랬던 거 같은데, 설마 이 세계에선 다른 걸까.
내 말을 들은 에런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에런?”
“….”
“저기, 에러어언?”
“….”
“응.”
이건 글렀네.
나는 아까와 달리 대화가 통할 여지가 보이지 않는 에런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 저니. 지켜주지 못했어.
그래도 부활하니까 괜찮지?
* * *
“….”
“….”
호록.
냠냠.
북부의 차가운 공기보다 더 싸늘하게 가라앉은 응접실의 공기.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응접실 안, 유일하게 나는 소리는 카나가 작은 입으로 간식거리를 오물거리는 소리뿐이었다.
“맛있네.”
‘…지금 그게 입으로 넘어가니?!’
마음 같아선 카나에게 버럭 소리치고 싶은 저니였지만 그럴 수 없는 게 천추의 한이었다.
그런 짓을 했다간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그녀를 무시무시한 눈으로 쏘아보는 남자가 가만히 있을 것 같지 않았으므로.
‘도대체, 갑자기 왜 이렇게 된 거지?’
자신은 분명, 긴 기다림 끝에 실적 정산을 마치고 카나를 찾아 나서려고 했을 뿐인데….
갑자기 카나와 함께 등장한 남자에게 안내되어 응접실에 앉게 되었다.
말이 안내지, 따라오지 않으면 죽일 것 같은 기세여서 끌려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름이 저니라고?”
“네, 넵!”
흔히 동굴 목소리라고들 하는,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
평소 저니가 좋아하던 목소리였지만 지금은 호랑이의 으르렁 소리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에 그녀는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저니를 보며 에런이 툭 던졌다.
“왜 그랬나?”
“네, 넵?”
맥락 없는 물음에 저니가 저도 모르게 반문했으나 남자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남자의 옆에서 열심히 간식을 주워 먹는 카나도 그녀의 궁금증을 해결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카나의 지인인가…?’
카나의 지인이라면, 같은 기사단 사람이겠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추측한 저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카나와 같은 기사단에 계셨던 분인가요?”
“…카나가 기사단에 있던 것도 말해 줬나? 맞다. 나는 전 홍염 기사단의 부단장, 에런이다.”
“히에에엑…!”
저니의 입에서 하찮은 비명이 새어 나왔다.
생각보다 더 높은 사람이었잖아…!
…응? 잠깐만.
‘기겁할 이유가 있나?’
눈앞에 있는 남자는 부단장.
카나는 단장.
그녀가 카나와 같이 지낸 시간이 얼만데, 부단장이 등장했다고 해서 새삼스럽게 놀랄 이유가 없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고 당당하게 고개를 들었던 저니는.
“….”
‘…끼야아악!’
에런의 형형한 눈빛을 마주하고 다시 눈을 깔았다.
에런이 카나의 부하였던 건 알겠는데, 대체 그녀는 왜 여기에 끌려와서 저런 시선을 맞아야 하는가.
그러고 있으니 문득, 저니는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 떠올랐다.
여자 친구의 아버지에게 처음 인사를 하러 간 남자가 따님을 달라고 하는 장면.
성별만 다르지 딱 그 꼴 아닌가.
저니는 무언가 기시감을 느꼈다.
“저, 카나와 어떤 관계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카나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녀석을 딸이나 다름없는 조카라고 생각한다. 이 녀석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봐왔지.”
“아, 아하.”
저니는 에런에게서 처음으로 명쾌한 답변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렇다 해도 딱히 기쁘진 않았지만.
그러니까, 에런이란 남자는 카나와 무척 친밀한 사이라는 말이구나.
카나가 항상 그리워하는 아빠보다는 못해도, 어지간한 사람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말을 끝으로 또다시 대화가 단절되었다.
이대로 있다간 숨 막혀 죽을 것 같다는 생각에 그녀가 용기를 냈다.
“그래서 제겐 어쩐 일로….”
“카나에게 손을 댔다던데.”
“…넵?”
“손잡고, 끌어안고, 쓰다듬었다고. 맞나?”
“그, 맞긴 한데… 뭔가 오해가 있으신 거 같은….”
여기서 말 한마디 잘못하면 죽는다…!
직감적으로 죽음이 목전까지 온 것을 느낀 저니는 자신이 살 수 있는 동아줄을 찾아 눈동자를 굴렸다.
흘깃.
“….”
스윽.
그러나 그녀가 찾은 건 썩은 동아줄이었다.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 카나가 저니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려고 노력했지만, 그녀는 카나의 행동에서 미묘한 어색함을 느낄 수 있었다.
‘카나아아아아…!’
충분히 잘 대해줬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나한테 섭섭한 게 있었으면 말을 하지! 이렇게 죽이려고 하는 건 너무하잖아…!
그토록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사람의 배신에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는 저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