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뜩 쌓인 물건들을 뒤적거리던 저니는 결국 정리하는 걸 포기했다.
허리를 쭉 편 저니가 에런에게 물었다.
“카나는요?”
최근 며칠, 저니가 실리아 온라인에 접속할 때마다 카나의 얼굴이 그녀를 반겨주었다.
실제로는 후드를 쓴 탓에 얼굴은 보이지 않고 딱히 카나가 그녀를 반긴 것도 아니었지만.
아무튼 그래서인지 저니는 간만에 혼자 맞이한 아침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일수만 따지면 혼자 지낸 시간이 훨씬 더 많은데도 불구하고.
“아직 자고 있겠지. 녀석은 잠이 많으니까.”
“네에?”
에런의 대답에 저니가 새된 소리를 질렀다.
“카나가 잠이 많다고요? 저는 카나가 자는 걸 한 번도 못 봤는데요?”
“상단과 같이 왔다고 하지 않았나? 안심하고 잘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으니 그랬겠지.”
“앗….”
그런 거였어?
저니가 카나를 알고 지낸 시간보다 에런이 카나를 알고 지낸 시간이 훨씬 더 많을 테니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닌 이상 그의 말이 옳을 것이다.
게다가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는 카나로 인해 신뢰도가 더욱 올라갔다.
시계를 들여다보던 에런이 말했다.
“슬슬 깨워야겠군. 같이 갈 텐가?”
“그, 그래도 돼요?”
“…? 같이 아침 먹을 거 아닌가? 혹시 다른 약속이 있다거나….”
“아뇨! 같이 먹을게요! 같이 먹게 해주세요!”
“….”
잔뜩 들뜬 저니의 반응에 영문 모를 표정을 짓던 에런이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이내 고풍스러운 문 앞에 멈춰 선 그가 가볍게 노크했다.
똑똑.
“카나.”
“….”
“….”
잠시 대답을 기다리던 그가 다시 노크했다.
똑똑.
그러나 여전히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역시 아직 자고 있나 보군.”
“…혹시 이미 일어나서 나간 건 아닐까요?”
“그럴 녀석처럼 보였나?”
“음….”
조금 고민하는가 싶던 저니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죠.”
방구석에 박혀 쪼그려 앉아 있으면 모를까, 카나가 혼자서 돌아다닐 아이는 아니지.
에런이 문고리를 잡았다.
“그, 그렇게 막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마음대로 들어왔다고 화내면 어떡해요?”
“어차피 카나라면 우리가 온 건 이미 알고 있을 거다.”
끼익.
“일어나기 싫어서 일어나지 않는 거지.”
저니의 걱정을 가볍게 묵살하며 에런이 문을 열었다.
저니가 어젯밤 에런에게 받은 방은 상당히 호화스러운 방이었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고급 호텔에 여러 번 묵은 경험이 있는 저니도 감탄할 정도로.
그러나 카나의 방은 그녀가 어젯밤에 묵었던 방보다 한층 더 호화스러웠다.
일단 크기부터 훨씬 더 컸고, 방 안에 딸린 가구를 포함한 인테리어는 말할 것도 없었다.
역사책에 나올 법한 왕족의 방을 호텔로 개조한 것 같은 느낌에 저니가 눈을 반짝이며 두리번거렸다.
“카나, 일어나라.”
그러거나 말거나 침대로 다가간 에런은 볼록 솟아 있는 이불로 다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에 저니도 방 구경을 멈추고 에런의 옆으로 다가갔다.
“으응….”
‘…헉!’
동그랗게 솟아있는 이불의 끝, 자그마한 머리가 이불 밖에 빼꼼 나와있었다.
카나가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낼 때마다 봉긋 솟은 이불도 덩달아 솟아올랐다가 내려앉았다.
몸을 둥글게 만 채 근심 걱정 하나 없는 평화로운 얼굴로 자는 카나를 본 저니가 저도 모르게 나오려는 탄성을 급하게 삼켰다.
에런의 팔에 기대어 잘 때도 귀여웠지만, 이렇게 소동물처럼 몸을 말고 자고 있으니 파괴력이 어마어마했다.
‘이건 찍어야 해…!’
스크린샷을 찍기에 앞서, 저니는 방송으로 송출하던 화면을 대기 화면으로 돌렸다.
-?? 뭐임???
-엄마 여긴 너무 어두워요…
-저기요, 여기 전등 나갔어요!
-뭐예요 나도 볼래요
“흠흠. 카나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잠깐만 화면을 가릴게.”
세상에서 가장 치사한 짓은 줬다가 뺏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그게 얼마나 치사하고 기분 나쁜 일인 것을 알기에,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준 것이 아무리 아까워도 함부로 다시 빼앗을 생각은 하지 않는다.
사이가 나빠진 연인이 헤어지는 것처럼, 그 사람과의 인간관계를 끝내고 싶은 게 아니라면.
방송을 보던 시청자들이 느끼는 감정이 딱 그러했다.
저니의 시야를 공유하며 카나의 귀여움에 훈훈한 미소를 짓고 있던 시청자들의 눈에 드리워진 어둠.
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채팅창에서 격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당연히 저니가 화면을 가린 건 그녀의 말처럼 카나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준다는 아름다운 이유가 아니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그녀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한 빛 좋은 명분일 뿐, 진짜 이유는 그녀의 추태를 드러내지 않기 위함이었다.
-개소리하지 말고 좋은 말로 할 때 화면 켜세요^^
-선생님 저희 집 고양이가 많이 아파요…
-🔥🔥🔥🔥🔥🔥🔥🔥🔥
-나쁜 말 마렵네ㅋㅋㅋㅋ
-가상의 캐릭터 인권까지 챙기는 착한 분이네요
-무ㅝㅓ머머머뭣?!
-WTF?!?!?!?!
저니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순진한 사람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화재가 난 채팅창을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자신의 욕망을 채우던 저니는 분홍색 눈동자가 반쯤 열린 눈꺼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후에야 곳간에 양식을 채우는 것을 멈췄다.
삽시간에 불어난 스크린샷 폴더를 본 그녀가 한껏 배부른 미소를 지으며 다시 화면을 켰다.
“어서 일어나렴. 아침 먹으러 가야지.”
에런이 저니를 대할 때와 전혀 다른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ㅗㅜㅑ;;
-나 남자인데 왜 여자들이 목소리에 반하는지 알 것 같다ㅇㅇ;
-🔥🔥🔥🔥🔥
아이를 대하듯….
아니, 실제로 아이를 대하는 다정한 목소리에 채팅창이 잠시 술렁였다.
에런을 올려다보던 몽롱한 눈이 다시 스르르 감겼다.
“으응… 안 먹을래.”
“헉… 귀여워….”
애교에 가까운 잠투정에 저니가 심장을 부여잡았다.
“아침을 먹어야 키가 크지.”
“…내가 키 얘기하지 말랬지.”
감겼던 눈이 다시 떠지고, 카나가 불만스럽게 에런을 노려봤다.
“네가 좋아하는 고기 요리를 먹여줄 테니까 어서 일어나.”
“응….”
계속되는 닦달에 못 이긴 카나가 결국 부스스하게 몸을 일으켰다.
몰려드는 잠기운을 이기려는 듯 침대에 앉은 채 연신 눈을 깜박이는 카나.
이따금씩 눈이 감길 때면 자그마한 머리도 꾸벅꾸벅 바닥을 향했다가 돌아왔다.
“카나 안녕! 잘 잤어?”
“…응. 안녕.”
‘카나….’
정말 잠이 많구나….
생전 처음 듣는 카나의 아침 인사에 잠깐 놀랐던 저니가 이내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 * *
뚜웅-
나는 접시에 있는 불경한 무언가를 포크로 쿡쿡 찔렀다.
“먹을 거로 장난치지 마.”
“…고기라며.”
“고기 맞잖니.”
에런이 초록색 풀떼기를 집어 먹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가 먹은 풀떼기는 내 접시 위에도 똑같이 올라와 있었다.
“야채를 넣고 요리한 고기는 고기 요리가 아니야.”
어떻게 이런 중요한 걸 모를 수가 있는 거지.
스테이크에 있는 가니쉬는 괜찮아.
그건 그냥 걷어내고 먹으면 되니까.
하지만 이렇게, 완전히 버무려져서 걷어내고 먹을 수 없다면 그건 고기 요리라고 하면 안 된다고.
“이제 편식은 그만할 나이도 되지 않았냐?”
나는 코웃음을 쳤다.
“싫어하는 걸 안 먹는 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자랑이다.”
“그러는 에런도 아직도 날 애라고 생각하잖아.”
그런 말을 할 거였으면 적어도 애 취급은 하지 말았어야지.
“원래 자식이 몇 살이든, 부모의 눈엔 아이로 보이는 법이야. 내가 네 부모는 아니지만, 네가 새파랗게 어렸을 때부터 봐왔으니 그에 준할 정도는 된다고 생각한다.”
“나도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래서 고칠 수 없는 거야.”
“아주 한마디도 안 지지?”
“지면 안 되는 환경에서 자라서.”
“…!”
나나 에런은 별로 신경도 안 쓰건만, 정작 저니가 뜨악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고, 못할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저러는 거람.
열심히 뒤적거린 끝에 결국 모든 풀떼기를 걸러내는 데 성공한 나는 식사를 재개했다.
“리베리엔 얼마나 있을 생각이냐.”
“몰라. 앞으로 2일에서 3일 정도?”
“흠.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돈이 부족하거나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라. 얼마든지 도와줄 테니.”
“…너 누구야.”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이를 갈던 짠돌이 에런이 이런 말을 한다고?
경계심 어린 얼굴을 한 채 포크를 겨누자 에런이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그때는 기사단 예산이니까 그랬던 거 아니냐. 마구 낭비하다가 예산이 부족해지기라도 하면 재무부에 가서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텐데, 네가 잘도 그러겠다.”
“….”
나는 얌전히 고기를 집어 먹었다.
지은 죄가 있는 터라 차마 그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돈 내놔.’
‘아니, 돈이 무슨 나와라 뚝딱하면 나오는 줄 아십니까? 달라고 떼쓰면 아무렇지 않게 줄 수 있게? 없어요! 없습니다!’
‘있잖아.’
‘아, 글쎄 없다니까요! 보세요, 없지 않습니까!’
‘여기 있네. 아무것도 안 하고 밥만 축내는 밥버러지들이 쓰는 돈.’
‘…미치셨습니까?! 방금 말씀은 못 들은 거로 할 테니 오늘은 그만 돌아가세요!’
기겁하며 소리치던 재무관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깐깐해서 그렇지 나름 괜찮은 녀석이었는데, 아마 그 녀석도 그날 죽었겠지.
“깐깐한 게 아니라 네가 막 나가는 거다.”
마지막까지 한심하다는 시선을 거두지 않은 에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접시는 풀떼기 하나 없이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아무튼, 알아들었다고 알고 난 이만 가보마.”
“어디 가?”
“어디긴, 일하러 가야지. 난 너처럼 백수가 아니니까.”
돈 많은 백수가 얼마나 좋은 건데. 뭘 모르네.
단장 자리엔 앉지 못했지만 나보다 훨씬 오래 홍염 기사단에서 일했으니 돈은 충분할 텐데, 아무래도 에런은 일하지 않는 삶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모양이다.
가엾고 딱한 에런이 식사 자리를 떠난 뒤, 남은 고기가 있나 풀떼기를 이리저리 헤치던 내게 저니가 말을 걸어왔다.
“카나, 카나. 오늘은 뭐 할 거야?”
“잘 거야.”
여기 침대가 정말 좋더라.
침대는 푹신하고, 이불은 부드럽고….
마음 같아서는 몇 시간이고 누워 있고 싶었지만, 에런이 깨운 탓에 이루지 못했으니 못다 한 꿈을 이뤄볼 생각이었다.
“에에….”
내 대답을 들은 저니가 실망한 눈치를 보였다.
“밖에 안 나가?”
“…굳이?”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방에만 있으면 심심하잖아.”
“자면 안 심심해.”
“그러지 말고, 같이 놀러 가자~ 응?”
“…떨어져.”
나는 귀찮게 엉겨 붙는 저니를 떼어내며 얼굴을 찌푸렸다.
가만히 있으면 온몸에 가시가 돋기라도 하는지, 그녀는 좀처럼 가만히 있질 못했다.
“맛있는 것도 사줄게. 그래, 카나가 좋아하는 초콜릿! 엄청 맛있는 초콜릿 파는 가게가 있대. 거기 가자. 어때?”
“알았으니까 좀 떨어져.”
무시했다간 방까지 쫓아와 칭얼댈 기세에 결국 백기를 들었다.
…그래 앞으로 이틀은 더 있을 거 같으니 하루 정도는 양보해도 되겠지.
딱 오늘 하루만 어울려 주고, 남은 날들은 얌전히 방에 박혀 있을 거야.
그러기 위한 일 보 후퇴이지, 절대 저니가 말한 초콜릿에 홀린 건 아니야.
“만약 맛없으면….”
쿡!
나는 풀떼기를 향해 포크를 강하게 찔러넣었다.
“으, 응…!”
저니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내 뜻이 제대로 전해진 모양이야.
만족스럽게 끄덕이며 포크를 들어 입에 댔다.
“…웩.”
…역시 이건 맛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