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 참 좋다~ 그렇지?”
몇 주 전이었다면 ‘태양, 좋다’ 정도로 말했을 저니는 이젠 제법 자연스러운 문장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저런 걸 보면 사람은 저마다 잘하는 게 있다는 말이 맞는 거 같기도 해.
그런데… 날씨가 좋나?
나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하늘을 잔뜩 메운 구름이 나를 반겨주었다.
쨍쨍하게 지상을 내리쬐었을 햇빛은 그를 가로막은 구름 때문에 제 본분을 다하지 못했다.
나쁜 날씨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냥 좋다고 하기에도 뭐한, 그런 애매한 날씨.
“비 안 오고 공기 좋고. 햇볕도 뜨겁지 않으니 소풍 가기 딱 좋은 날씨네!”
이 시대의 긍정왕 저니 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런 거겠지.
날씨 좋다는 말에 굳이 찬물을 끼얹고 싶지도 않고.
부정적인 말만 하는 사람보다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훨씬 낫잖아?
“어때, 맛있지?”
“응.”
저니가 그토록 자랑한 초콜릿도 먹어 보고.
“이거랑 이거. 둘 중에 어느 걸 살까?”
“…둘 다 구려.”
무기를 고르는 것을 도와주고.
“카나야! 이거 입어 봐, 응?”
“…싫어.”
“아앙, 그러지 말고~!”
“….”
“…아, 알았어.”
신난 얼굴로 옷을 집어 들었던 저니가 다시 시무룩하게 내려놓는 것도 구경하고.
저니는 나를 이끌고 리베리의 구석구석을 쏘다녔다.
이리 갔다가 저리 가고, 저리 가나 싶었더니 이번엔 또 요리 가고. 심지어는 같은 골목을 세 번 넘게 지나칠 때도 있었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효율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동선으로 보아하건대, 저니도 계획이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이것도 예쁘고, 저것도 예쁘고…. 어떤 게 더 잘 어울릴까? 그냥 둘 다 사면 되는 거 아니냐고? 너희들 돈 아니라고 대충 말하지? 그러니까 너희들이 여친이 없는 거야. …라고 하면 안 되겠지?”
나는 장신구 매대 앞에 서서 자못 진지한 얼굴로 고민하는 저니를 바라봤다.
그러다, 때마침 고개를 들던 저니와 눈이 마주쳤는데.
“….”
“….”
“으음….”
“…?”
나를 뚫어져라 보던 저니가 유심히 보고 있던 목걸이 대신 옆에 있는 팔찌에 시선을 돌렸다.
…뭐지?
알 수 없는 그녀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날아온 냄새가 내 코를 찔렀다.
“에츄…!”
코끝이 간질거리는 느낌에 재채기를 참지 못했다.
‘이 냄새는….’
낯설면서도 익숙한 냄새.
나는 본능적으로 냄새의 근원지를 찾아 두리번거렸고, 이내 시뻘건 색의 간판이 달린 한 음식점을 발견했다.
“‘불타는 피닉스’야. 저번에 먹은 매운 볶음밥 기억나? 그걸 파는 곳이야.”
어느새 옆에 다가온 저니가 말했다.
“그때는 분점에서 사 온 거였고, 여기가 본점이야. 마침 배도 좀 꺼졌겠다, 점심은 저기서 먹을까?”
도리도리.
나는 고개를 저었다.
혀가 불타는 경험을 두 번씩이나 하고 싶진 않아.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전혀.”
“힝… 오랜만에 먹을까 했는-”
“…켁, 케헥! 뭐야 이거! 이걸 음식이라고 내온 거야?! 쿨럭!”
갑자기 날아드는 거친 고함이 저니의 말을 끊었다.
소란이 일어난 곳은 불타는 피닉스라는 가게였다.
간판 색만큼이나 시뻘게진 얼굴로 연신 기침을 하는 남자와, 그 옆에서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하며 발을 구르는 종업원, 그리고 그 꼴을 구경하는 다른 손님들과 행인들.
목을 붙잡고 기침하던 남자가 종업원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유명하다고 해서 와 봤는데 이런 쓰레기를 내놓다니. 기분만 잡쳤어!”
“손님, 계산은 하고 가셔야…!”
“감히 나한테 이딴 걸 먹고 돈을 내라고? 못 내! 아니, 안 내!”
“아, 안 돼요! 드셨으면 계산은 하고 가셔야죠!”
“오히려 돈은 내가 받아야 할 판인데 참았더니만, 이렇게 나오면 나도 못 참아! 사제한테 가 봐야 할 거 같으니까 치료비 내놔!”
용병들의 본거지인 리베리에도 저런 진상이 있구나.
용기가 있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만용이 넘친다고 해야 할지.
가게를 나서려는 남자와, 그를 막아서는 종업원이 실랑이를 벌였다.
연약한 종업원쯤은 손쉽게 떨쳐낼 수 있어 보이는 남자였지만, 진상이라 해도 저 이상의 무력 행위는 눈치가 보이는지 계속 달라붙는 종업원을 짜증 내며 떼어내기에 바빴다.
홱!
“꺄악!”
“내가 누군지 알아? 무려 엑스퍼트 상급의, 금급 용병이야!”
별안간 종업원을 강하게 뿌리친 남자가 품에서 패를 꺼내 들었다.
남자의 품에서 나온 패가 흐릿한 금빛을 흩뿌렸다.
“금급 용병…!”
“엑스퍼트 상급이라고?!”
“좋게 좋게 가자고. 나도 책임을 묻지 않을 테니까 더 이상 나를 귀찮게 하지 마라.”
패를 보고 웅성거리는 주변의 반응에 남자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금급….’
…그 정도인가?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금급이라 하면 고작 엑스퍼트일 텐데, 뭐라도 되는 것처럼 떠벌리거나 치켜세워줄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당장 내 옆에 있는 저니도 금급이잖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아, 하고 작은 탄성을 냈다.
‘사도랑 기준이 다르긴 하지.’
사도가 아닌 일반 용병들에겐 엑스퍼트도 상당히 높은 경지라는 걸 잊고 있었네.
남자가 만든 소동에 결국 가게 안에서 사장으로 보이는 사도가 나왔다.
“무슨 일이에요?”
“아, 사장님….”
“네가 사장이야? 답답해서 죽을 뻔했는데 잘됐군! 네가 만든 음식을 먹고 내 혀가 마비됐다고! 이거 어떻게 책임질 거야!”
“아하 이렇게 된 거구나. …수잔 씨, 제가 이런 일 있으면 바로 저를 부르라고 했잖아요.”
“아, 그, 그게…. …죄송해요.”
“죄송해하라고 한 얘기 아니니까 고개 드세요. 그보다 손님, 피해 보상을 원하신다고요? 분명 주문하실 때 설명해 드리지 않았나요?”
“…그래서 원래라면 치료비까지 받아야 하는 거, 음식값만 안 내고 가겠다는 거 아니야!”
“흐음…. 알았습니다. 그냥 가세요.”
사장의 말에 희비가 갈렸다.
“진작 그럴 것이지!”
“사장님…!”
득의만면한 웃음을 짓는 남자와 불만스러운 종업원의 얼굴.
사장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기엔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역시 제일 재밌는 구경은 싸움 구경이지.
“아, 이제 알았다.”
흥미로운 눈으로 싸움을 지켜보던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카나?”
“기다리고 있어.”
목소리며 얼굴이며, 묘하게 낯이 익다 했더니 그런 거였구나.
계속 걸음을 옮겨 남자 앞에 서자 막 떠날 채비를 하던 남자가 음? 하고 의아한 소리를 냈다.
“이 꼬맹이는 또 뭐야?”
“꼬맹이….”
“…어? 이 목소리는….”
남자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오랜만에 봐도 네 말버릇은 변함이 없네.”
“다, 다, 다, 단장…?!”
“응. 다, 다, 다, 단장이야.”
남자는 나를 알아봤는지 본능적으로 그라닉으로 말했다.
그 와중에도 단장’님’이 아니라 단장으로 말하는 걸 보면 그가 나를 평소에 어떻게 생각했는지 잘 알겠네.
뭐, 모르던 것도 아니었지만.
“알아봤는데 경례도 안 하는 거야?”
“하! 네가 예전에나 단장이지, 지금도 단장인 줄 알아? 과거의 망령 따위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으음… 맞는 말이긴 하지. 근데, 먼저 단장이라고 한 건 너잖아. 난 장단을 맞춘 것뿐인데?”
“…시끄러워!”
하여튼 요즘 애들은. 정곡을 찔렸다 싶으면 화부터 내고 말이야.
나는 혀를 쯧쯧 찼다.
남자의 이름은….
…뭐였지?
나와 같은 기사단에 있었던… 그러니까 홍염 기사단에 있었던 놈이라 뭐 하는 놈이었는진 기억이 나는데 이름은 기억 안 나네.
평민이면서 귀족파에 붙어서 온갖 알랑방귀를 뀌어 대던 놈이었다.
평민이 귀족파에 붙는 거야 그럴 수 있지만, 귀족파의 위세를 등에 업고 하는 짓들이 좀스럽다 못해 유치해서 마음에 드는 놈은 아니었다.
“너, 이름이 뭐였더라?”
“…그런 식으로 나를 조롱하다니!”
“응… 미안해…?”
조롱이 아니라 진짜 몰라서 물어본 건데.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 실례가 맞으니까 솔직하게 사과했건만 남자의 얼굴이 더욱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됐고, 할 일이 많아서 가봐야겠으니 비키기나 해!”
터벅.
탁.
조급한 마음을 숨기지 않고 움직이는 남자.
나는 남자의 움직임을 따라 옆으로 한 발짝 움직였다.
남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야? 빨리 비켜-”
“오지랖을 부리고 싶진 않아.”
이제 와서 정의의 사도 행세를 하기엔 내 죄가 꽤 깊거든.
“그러니까 이건 그냥 화풀이야.”
예전에 너 때문에 꽤 짜증 났거든.
케이프에 가려진 팔을 들어 올렸다.
“미쳤어?! 여기서 싸울 생각이야?!”
“아니.”
이건 싸움이 아니지.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때 상관이었던 사람으로서 교훈을 주려는 것뿐이야.”
뼈가 좀 시릴 수도 있지만, 원래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쓴 법 아니겠는가.
분명 이 녀석한테도 좋은 경험이 될 거라고 자부한다.
아님 말고.
“여, 여기서 소란을 피우면 무사하지 못할 거다!”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아?”
“…그래! 제국, 제국에게 네 행방을 알리겠어! 과연 네가 무사할 수 있을까?”
“사도들과 다르게 소식이 느리구나.”
제국 놈들이 내 행방을 알게 된 게 언젠데.
어떤 말을 해도 나에게 먹혀들지 않자, 결국 놈은 괴성을 지르며 검을 뽑아 들고 나에게 달려들었다.
“으아아아아! 죽어!”
“꺄아악!”
“겨, 경비병을 불러!”
순식간에 주변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썩어도 준치라고, 눈이 반쯤 뒤집힌 채로도 놈이 그리는 검로는 어지간한 용병보다 훨씬 깔끔했지만-
“얍.”
이성을 반쯤 놓은 놈의 검 따위, 전혀 무섭지 않거든.
빛살처럼 뻗은 손이 놈의 멱살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들어서-
콰아앙!
우직!
“…!”
땅에 강하게 메쳤다.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와 길이 부서지는 소리가 함께 울려 퍼지고, 바닥에 처박힌 남자가 몸을 부르르 떨다가 눈을 까뒤집었다.
놈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손을 털던 나는 불현듯 떠오른 기억에 손가락을 튕겼다.
“맞아, 제임스.”
그런 이름이었지.
이제 기억났네.
어쩐지 정신을 잃은 남자의 표정이 무척 억울해 보였지만, 아마 기분탓이겠지.
* * *
“…대체 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사고를 치고 돌아오는 거냐.”
“음… 세 시간 정도?”
“정말로 묻는 게 아니잖냐.”
에런이 한숨을 쉬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난 잘못 없어.”
굳이 잘못이 있다면 제임스를 용병으로 받아준 리베리가 문제지.
나는 떳떳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네 잘못이 없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었냐?”
“이 정도면 상냥하게 대한 거 아니야?”
“…하기야 예전보다는 낫구나. 그때는 아주 피떡으로 만들어 버렸으니까.”
“응.”
“그렇다고 칭찬하는 건 아니니까 우쭐해하지 마라.”
에런이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에런은 몰랐어?”
“녀석이 리베리에 들어온 거 말이냐? 당연히 몰랐지. 나는 인사 담당이 아니라 교육 담당이니까.”
“언질 정도는 줬을 수도 있지 않아?”
“몰라. 적어도 내가 기억하기론 그런 걸 들은 적은 없다.”
“흐응.”
에런이 나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사실 용병 중에 질 나쁜 놈들이 섞이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괜히 ‘돈만 주면 뭐든지 할 놈들’이란 말이 있는 게 아니라고.
물론 정말 뭐든지 했다간 절대 무사하지 못할 테지만, 그 정도로 질 나쁜 놈들이 있다는 말이다.
제임스는 그중 하나였을 뿐이고.
“귀족 놈들이 없어지고 나서 여기저기 헤매다 리베리까지 흘러들어온 모양이군. 그렇게 큰 잘못을 저지른 건 아니니 원래라면 경고 정도로 끝나겠지만….”
“끝나겠지만?”
“있어봤자 리베리에 좋은 영향을 끼칠 녀석도 아니니까 내쫓아야겠지. 직접적인 권한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내가 말하면 진지하게 검토할 거다.”
“옛날에도 이랬으면 얼마나 좋아.”
“그러게 말이다.”
이번엔 에런과 내가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에런이나 나나, 제임스 때문에 골머리를 썩인 처지인 건 매한가지였기 때문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데, 윗물이 맑다고 해서 아랫물까지 맑은 건 아닌가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