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으,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파…. 온몸이 박살 난 것 같은 느낌이야….”
“….”
“…카나. 방금 그 웃음은 뭐야? 설마 날 비웃은 건 아니지? 에이, 우리 착한 카나가 그럴 리가 없지.”
“비웃은 거 맞는데.”
“너무 당당한 거 아니야?!”
당당하지 못할 이유가 있어?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지나도 늦지 않다고 하지만, 군자가 아닌 나의 복수는 그보다 훨씬 빨리 이루어졌다.
물론 고작 이 정도로 내 마음이 완전히 풀린 건 아니지만, 죽상이 된 저니를 보니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처음 출발할 때만 해도 저니의 얼굴은 저렇지 않았다.
며칠 내내 흐리다가 출발하는 날이 되자 거짓말처럼 화창해진 날씨처럼, 그녀의 얼굴도 맑게 개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먹구름이 끼더니, 결국 저렇게 변해버렸다.
“말을 타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어….”
올라탈 때만큼이나 힘들게 말에서 내려오며 저니가 투덜거렸다.
“나도 카나처럼 강해지면 아무렇지 않게 탈 수 있겠지?”
말을 타는 데 마스터 경지씩이나 필요하다면 그건 말로 폴리모프한 드래곤이나 유니콘일 거 같은데.
그녀보다 훨씬 나이가 적은 어린애들도 잘 타는 걸 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경지의 문제는 아니었다.
“카나처럼 말이지?”
“…아니야.”
게다가 사도들은 경지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좋은 신체 능력을 갖추고 있잖아.
오크가 휘두르는 몽둥이에 맞아도 몇 대는 버틸 텐데, 승마 조금 했다고 죽어 나갈 리 없지.
결론. 저니가 저렇게 힘들어 하는 것은 허접이라서 그런 거야.
땅땅땅.
“…결론이 이상하지 않아?”
“허접은 허접이야.”
“카나가 갑자기 메스가키가 됐는데…?”
아르키쉬로 중얼거리는 저니를 무시하며 말했다.
“그렇게 긴장하고 타는데 안 아플 리 없잖아.”
몸을 긴장시켰다는 건 몸에 힘이 들어갔다는 뜻이다.
몸에 힘을 잔뜩 넣은 채로 몇 시간 동안 있었으니 근육이 고통을 호소하는 게 당연하지.
긴장감은 다음으로 이어질 상황에 매끄러운 대처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윤활유가 될 수도 있지만, 그것도 적당할 때의 이야기지 과하게 긴장하면 될 일도 안 되는 법이다.
“…그걸 알고 있었으면 진작 알려주지.”
“저니.”
“응?”
“원래 직접 겪어야 쉽게 깨닫는 거야.”
백날 충고하는 것보다 한 번 몸으로 겪는 게 더 효과적이란 말이지.
많은 단원들을 사람 구실 할 수 있게 만든 내 경험으로 미루어서 하는 말이니 믿어도 돼.
그리고 이렇게 말하면 꼭-
“…말로 해도 들었을 거야!”
“응, 안 믿어.”
저런 말이 나오더라.
셀 수도 없이 들은 말이라 이젠 새롭지도 않아.
처음에는 저 말을 믿고 다시 말로 해봤는데,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만 생겼다.
“긴장, 긴장이란 말이지? …아야야! 이, 일단 조금만 쉬고 하자. 지금은 너무 아파서 못 하겠어….”
자못 진지한 표정을 지은 저니가 말에 오르려다가 근육통을 호소하며 포기했다.
육포를 씹으며 그 모습을 보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애쓴다 정말.
* * *
말에서 내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어?”
무언가를 발견한 저니가 눈을 크게 떴다.
“물소 떼?”
“‘레인 버팔로’라고 하는 몬스터 무리야.”
“몬스터? 소처럼 생겼는데.”
“크게 다를 건 없지.”
그녀가 바라보는 방향엔 수십 마리가량 되어 보이는 레인 버팔로 무리가 지나가고 있었다.
“레인 버팔로는 맛있어.”
“…카나는 몬스터를 맛이 있냐 없냐로 나누는 거야?”
“?”
“…미안. 이건 너무 심한 말이었나?”
“그러면 맛 말고 뭐가 더 필요해?”
“아, 그쪽이 문제였구나.”
저니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카나 정도 실력이면 어떤 몬스터가 와도 위험하진 않겠네.”
“그건 아닌데.”
날 너무 과대평가하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어떤 몬스터든 스테이크 썰듯 쉽게 죽일 수 있는 건 아닌데 말이지.
레비아탄, 크라켄, 페리디스 등등… 얼마나 많은데.
드래곤도 분류상으로는 몬스터고.
“드래곤이 몬스터였어? 아니, 그건 됐고. 레비아탄이나 크라켄, 페리, 뭐?”
“페리디스.”
“그래, 페리디스. 그놈들이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그 정도는 와야 한다는 거잖아. 이름만 봐도 흔한 몬스터들은 아닐 거 같은데.”
“그렇긴 하지.”
그런 것들이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니는 세계면 이미 이 아르디나 대륙은 몬스터 천국이 됐을 테니까.
나도 이야기나 책을 통해서 본 거라 실제로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지만, 묘사한 것만 보면 절대 약하다는 느낌이 들진 않았다.
“근데 진짜 맛있어.”
레인 버팔로는 오크와 다르게 호불호도 갈리지 않는 고급 식재료인걸.
오죽했으면 한 번만 먹은 사람은 있어도, 두 번만 먹은 사람은 없다는 말까지 있을까.
“…응? ‘한 번도 안 먹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은 사람은 없다’ 아니야?”
“레인 버팔로 고기는 비싸.”
어쩌다 한 번 먹어볼 수는 있어도, 또 사서 먹기엔 비싸서 두 번 먹진 못한다.
그저 아련한 기억 속의 맛을 떠올리며 손가락만 빨 뿐.
뭐, 실제로는 한 번도 안 먹어본 사람이 더 많을 테니 그냥 그만큼 맛있다는 의미로 하는 관용어라고 생각하면 되겠네.
이래도 감이 안 온다면, 왕족들의 밥상에 올라오는 고기라고 하면 더 알아듣기 쉬우려나.
“그리고 우유도 맛있어.”
“응응. 우유는 중요하지.”
“….”
“…난 아무 말 안 했다?”
“했잖아.”
“카나를 놀리진 않았어. 그냥 중요하다고 말한 거야!”
퍽이나 그런 뜻으로 말했겠다.
아무튼, 이미 언급한 고기와 우유, 그리고 가죽과 뿔까지.
레인 버팔로의 사체는 버리는 것 하나 없이 알뜰하게 사용됐다.
가축화할 수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그럴 수 없으니 아쉬울 따름이지.
“응? 왜 못해? 그렇게 난폭해 보이지는 않는데…?”
“몬스터잖아.”
저니처럼 생각하고 시도한 사람의 말로는 보통 둘 중 하나였다.
레인 버팔로의 뿔에 찔려 에델의 곁으로 떠났거나, 사활을 건 사업에 실패하여 에델의 곁으로 떠났거나.
레인 버팔로를 괜히 몬스터로 분류하는 게 아니다.
평소에는 저렇게 순해 보여도 비만 오면 매우 강해지고 난폭해진다.
보이는 모든 걸 때려 부수려고 날뛰니 가둬둘 수도 없고, 너무 강해서 섣불리 막을 수도 없다.
“그러면 비가 잘 안 오는 지역에서 기르면 되는 거 아니야?”
“잘 안 오는 거지 아예 안 오는 건 아니잖아.”
그리고 그런 곳에서 기르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레인 버팔로는 비를 맞지 않으면 죽어.”
비가 오면 난폭해지는데 비가 안 오면 죽는다니, 이 무슨 결함투성이 생물이 다 있나.
“그냥 물로는 안 되는 거야?”
“안 돼.”
저 녀석들은 오직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만 반응한다.
원리는 모르지만, 언제는 몬스터들한테 그런 게 필요했나?
“쓰읍… 그렇게 말하니까 좀 궁금하긴 하네. 대체 어떤 맛일까?”
“궁금하면 먹어보면 되겠네.”
“…응?”
“뭐 해?”
빨리 안 가고.
빤히 바라보자 저니가 식은땀을 흘렸다.
“…나한테 쟤네를 잡으라고 하는 거 아니지?”
“궁금하다며.”
“궁금하다고 해서 꼭 궁금증을 해결해야 하는 건 아니잖꺄아아악!”
“말이 많아.”
말하다 말고 나에게 등을 떠밀린 저니가 초원을 데굴데굴 굴렀다.
평화롭게 풀을 뜯던 레인 버팔로 무리가 저니를 인지하고 귀를 쫑긋거렸다.
“그, 혹시… 한 마리를 공격하면 다른 놈들도 달려들까?”
“? 당연하지.”
“그니까, 저 수십 마리가 한꺼번에 달려든다고?”
“응.”
“…할 수 있겠냐! 나한테 대체 왜 그래?!”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네.
“진짜 맛있는데.”
“안 먹어! 아니, 못 먹어!”
꽥 소리를 지른 저니가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레인 버팔로들도 관심을 끊고 다시 풀을 뜯는 데 집중했다.
“흠.”
이게 어렵나?
나는 저니를 뒤로 한 채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아까 저니가 굴러갔던 거리 정도가 됐을 때 녀석들이 고개를 들었지만, 내 모습을 확인하더니 다시 고개를 박았다.
…뭔가 기분이 나쁜데.
몬스터나 짐승들은 감이 좋다고 하던데, 루머일 뿐이었는지 아니면 이놈들이 유독 감이 안 좋은 건지.
저니를 대할 때와 차이가 있는 모습에 심기가 불편해졌다.
조금 더 다가가자 비로소 녀석들이 경계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만약 도망갔다고 해도 쫓아갔을 테지만, 이렇게 가까이 다가가도 도망가지 않고 있다니.
내가 위협을 가해도 대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잖아.
“건방지네.”
우득!
손을 들어 제일 앞에 있던 녀석의 머리를 내리쳤다.
손짓은 한없이 가벼웠지만 그에 따른 결과는 가볍지 않았으니.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두개골이 함몰된 버팔로 한 마리가 무너져 내렸다.
“우워어어어-!”
친구의 변고를 본 버팔로들의 기세가 돌변했다.
한가로이 풀을 뜯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앞발을 땅에 긁으며 거친 콧김을 뿜는 놈들.
누가 봐도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모습이었다.
“싸우려고?”
나는 바닥에 쓰러진 버팔로의 뿔을 잡고 들어 올렸다.
축 늘어진 몸이 내 손을 따라 공중으로 떠올랐다.
“워어어어-!”
“정말로?”
“…워어어.”
녀석들의 울음소리는 명백하게 한풀 꺾여 있었다.
아무리 지능이 낮은 몬스터라고 해도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거겠지.
깨닫는 게 늦은 바람에 동료 하나를 잃긴 했지만, 무리가 몰살당하는 것보단 낫지 않겠어?
이내 녀석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만약 인간이었다면 ‘네가 먼저 가.’, ‘네가 나보다 앞에 있잖아.’ 같은 대화가 오가지 않았을까.
쉴 새 없이 오가던 눈빛 교환이 끝나고, 흔들리던 버팔로들의 눈이 선명해졌다.
마침내 결단을 내린 녀석들.
…음머어.
녀석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축 늘어진 동료의 사체를 외면한 채 풀을 뜯었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나는 전리품을 질질 끌고 저니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머어어어-”
“머어어-!”
한 놈의 울음을 시작으로 다른 놈들도 울부짖기 시작했다.
이윽고 수십이나 되는 레인 버팔로들의 합창이 초원을 가득 메웠다.
어쩔 수 없이 동료의 원한을 갚지 못한 게 원통한 걸까.
어쩐지 비통하게 들리는 놈들의 울음소리였다.
“조용히 해.”
비통한 건 내 알 바 아니고, 시끄럽잖아.
“아니면 지금이라도 덤비든가.”
“….”
울음소리로 가득 찼던 초원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복수할 용기도 없으면서 시끄럽게 울어대기는.
“카나야….”
레인 버팔로의 사체를 질질 끌고 저니의 앞에 도착하니 그녀가 복잡미묘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봤다.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
“…너, 음, 아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저니가 말을 삼키고 얼버무렸다.
사람을 궁금하게 만들어 놓고, 이렇게 얼버무린다고?
“뭐야.”
“카나가 들으면 상처받을지도 몰라.”
“상관없어.”
“에, 진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에게 험한 말을 한 게 한두 명도 아니고, 웬만한 말에는 이제 익숙해서 아무렇지도 않거든.
무엇보다.
“상처를 받으면 똑같이 상처를 내주면 되니까.”
다만, 난 언변이 좋지 않아서 내게 상처를 준 놈들에게 육체적인 상처로 되갚아 주었다.
서로 자신 있는 분야로 겨룬 거니 놈들도 불만은 없었을 것이다.
내 말을 들은 저니가 부들부들 떨더니 꽥 소리를 질렀다.
“…무서워!”
결국 저니는 끝까지 그녀가 삼킨 말을 털어놓지 않았다.
…그래서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