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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4

나는 수녀로 보이는 여자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꼬리를 흔드는 저니를 한심하게 보았다.

싸울 땐 그렇게 겁을 집어먹으면서 정작 이럴 땐 조심성이 없다니. 뭔가 모순적이네.

눈에 보이는 직접적인 위협이 아니라면 크게 반응하지 않는 건가?

이렇게 하고 있으니 꼭 행동 심리 전문가가 된 기분이네.

현실은 전문가는커녕 배운 적도 없는 사람이지만.

근데 이 세계에도 그런 직업이 있긴 한가? 딱히 전문적으로 상담하는 사람을 본 적은 없는 거 같은데.

여기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사제에게 달려가기 바쁘니까.

‘몬스터의 공격에 당하셨다고요? 저런! 빨리 사제님께 가서 치료를 받으세요.’

‘전염병이 돈다고? 빨리 교단에 연락해!’

‘신부님, 저는 죄를 지었습니다….’

이런 느낌으로, 이 세계에서 에델 교의 사제는 만병통치약이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았다.

아무튼, 야생에서 조심해야 할 건 몬스터나 마물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모르는 걸까.

공터에 있던 선객이 에델 교의 수녀라서 망정이지, 질이 안 좋은 무리가 있었다면 험한 꼴을 볼 수도 있었는데 말이야.

근처 나무에 말을 매어놓고 야영 준비를 하는 동안 저니는 수녀와 함께 도란도란 대화를 나눴다.

“소개가 늦었네요. 제 이름은 셀린. 에델 님을 모시는 수녀랍니다. 편하게 셀린이라고 불러주세요.”


“저니예요. 저도 편하신 대로 불러주세요!”


“네, 저니 님. …저니 님은 에델 님의 인도를 받으셨죠?”


“에델 님의 인도…? 아, 네!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가끔 못 알아보는 사람도 있던데….”


“후후. 에델 님의 은총이 그리 깊게 남아 있는데 알아보지 못한다면 에델 님을 모시는 몸이라고 할 수 없겠죠. 그리고….”

수녀의 부드러운 눈길이 나에게 닿았다.

“저 소녀분도 저니 님 못지않게 많은 은총을 받고 계시네요.”


“에, 카나가요?”


“소녀분 성함이 카나인가요? 예쁜 이름이네요.”


“앗….”

드문드문 나오는 내 이름을 들은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는 사이 무언가 대화를 나눈 저니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카나. 이분은 셀린 님이야. 에델 교의 수녀님이래.”

그건 그냥 봐도 알 수 있는데.

소개를 들었는데 마냥 모른 척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셀린과 가볍게 목인사를 나누었다.

다 그런 건 아닐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만난 성직자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호인, 또는 선인의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건 저 셀린이라는 수녀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만난 지 한 시간도 채 안 지났으니 더 봐야 하긴 하겠지만, 일단 지금까지 본 바로는 딱히 악의가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네.

조금은 경계를 풀어도 되려나.

“그런데 이런 곳에서 혼자 야영하시면 무섭지 않으세요? 저라면 무서워서 잠도 제대로 못 잤을 거 같은데….”


“후후… 저니 님은 상냥하시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렇게-”


“와아…!”

“에델 님의 힘을 빌린다면 아무 문제없답니다.”

셀린의 손에서 시작된 금색 빛무리가 어둠을 환하게 밝혔다.

반딧불이처럼 반짝반짝 빛나며 주변으로 퍼져나간 빛이 우리가 있는 공터를 둥글게 감싸안았다

“결계인가요?”


“음- 결계는 아니라 성법이지만 하는 일은 비슷하니 그렇게 보셔도 되겠네요. 오늘 밤은 제가 지켜드릴 테니 여러분은 안심하고 주무세요.”


“어… 힘드시지 않으세요…?”


“과분한 사랑을 받은 몸이라 이 정도는 가뿐하답니다.”

‘으음….’

나는 주변을 둘러싼 빛을 살펴보았다.

맨 처음 셀린의 손에서 나왔을 때처럼 밝지는 않지만 은은한 빛이 마치 장벽처럼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시험 삼아 건드려 보니 손가락이 아무런 저항 없이 장벽을 뚫고 바깥으로 나갔다.

가끔 다른 성직자들이 이렇게 안전 구역을 만드는 걸 본 적이 있었는데, 그것들은 안과 밖을 완전히 분리해서 안에 있는 사람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밖에 있는 사람도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셀린이 만든 장벽은 적어도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무 의미 없이 만든 건 아닐 테니 밖에서 안으로 향하는 건 아마 막히지 않을까?

이건 꽤 흥미롭네.

“카나야 신기해?”

“….”

장벽을 툭툭 건드리며 시험해 보는 나를 저니가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시선이 기분 나쁘네.

* * *

“셀린이 쓴 성법이 신기했나 봐요.”

“다른 분들이 보면 신기하게 느끼실 법 하죠.”

저니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이후 카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저니는 카나가 처음 보는 장난감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장벽을 툭툭 두드리는 장면을 똑똑히 보았다.

‘역시 아이는 아이구나.’

저니는 아닌 척하는 카나가 귀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괜히 방해한 거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왜, 삼촌들이 조카를 보면 귀여워서 장난치다가 울리고 그러잖아.

그런 것처럼 나도 건드릴 수밖에 없었다고…!

속으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저니였다.

저니와 함께 흐뭇하게 웃던 셀린이 문득 저니에게 물었다.

“혹시 두 분도 성국으로 가시는 건가요?”

“맞아요. ‘두 분도’라고 하면, 설마 셀린도…?”

“네. 저도 성국으로 복귀하는 길이에요.”

“잘됐네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성국까지 같이 가시지 않을래요?”

저니는 타고난 친화력을 십분 발휘해 셀린에게 제안했지만 셀린은 난처하게 웃으며 잠시 대답을 미루었다.

“저야 감사한 제안이지만, 카나 님의 의견도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요?”

“…아, 맞다.”

그제서야 너무 흥분했단 것을 깨달은 저니가 조금 진정했다.

만화책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완벽한 수녀님을 만났더니 나도 모르게 그만….

저니가 큼큼 헛기침했다.

카나라면 별로 신경 쓰는 기색 없이 ‘마음대로 해’라고 대답할 거 같긴 하지만, 의견도 묻지 않고 멋대로 동행을 늘리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허락보다 용서가 쉽고, 사전 보고보다 사후 통보가 쉽다는 말이 있긴 해도 그런 걸 반복하면 신뢰가 깨진다는 사실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기껏 열심히 쌓은 카나와의 관계를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

“카나 카나.”


“…왜 항상 두 번씩 부르는 거야.”


“그치만 이게 더 정감 가지 않아? 이름만 부르면 뭔가 정 없게 느껴지잖아.”


“별로….”


“그래? 아무튼 카나야, 셀린도 성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시는데, 동행해도 괜찮을까? 왜, 같이 여행하는 사람이 많으면 즐겁잖아.”


“그것도 잘 모르겠는데.”

카나는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그런 카나를 설득하기 위해 저니가 재차 입을 열려고 할 때, 그보다 한발 앞서 카나가 말했다.

“마음대로 해.”

저니가 당초 예상했던 것과 완전히 똑같은 말이었다.

“수녀니까 성국으로 가는 길을 잘 알고 있겠지.”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니건만 카나가 변명하는 듯한 말을 늘어놓았다.

그렇게 시니컬한 컨셉을 지키고 싶은 걸까.

뭐, 아무렴 어때!

허락을 받은 저니가 밝게 웃었다.

“카나도 좋대요!”

“…좋다, 안 했어.”

“봤죠?”

조금이지만 아르키쉬를 알아듣게 된 카나가 저니의 날조를 저지했지만 저니는 꿋꿋했다.

“어… 그런가요?”

오죽하면 듣고 있던 셀린이 당황하면서 그리 물을 정도로.

“그럼요! 카나는 아직 아르키쉬가 익숙하지 않아서 원하는 말을 제대로 할 수 없거든요. 방금도 ‘너무 좋아! 난 반대 안 할게!’라는 뜻이었어요.”

“그, 그렇군요…? 아르키쉬가 익숙하시지 않은 건 맞는 거 같은데….”

그런 말을 할 것 같은 아이로 보이진 않는걸요.

셀린이 뒷말을 꿀꺽 삼켰다.

그녀가 본 저니와 카나의 조합은 상당히 독특했다.

활발한 저니와 무뚝뚝한 카나.

일단 성격부터가 정반대다.

나이와 성격을 보면 저니가 카나를 이끌 것 같았지만, 정작 주도권을 쥐고 있는 사람은 카나로 보인다.

그렇다고 카나가 독단적으로 모든 일을 결정하냐, 하면 그것도 아닌 것 같고.

‘에델 님이 지켜보시는 이유가 있네요.’

흥미를 느낀 셀린의 눈동자가 금빛으로 반짝였다.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셀린은 불만이 가득 찬 카나의 눈동자를 외면하며 말했다.

그렇게 일행이 된 세 사람은 셀린의 성법 덕분에 편안하게 하룻밤을 보냈다.

전날 잡은 레인 버팔로의 고기로 간단한 스튜를 끓여 아침을 해결한 뒤 공터를 정리하고 길을 떠날 채비를 했다.

저니는 꾹꾹 밟아서 불을 끄고, 그 위에 물을 뿌리며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자나 깨나 불조심. 어려서부터 받은 교육이 이런 곳에서 빛을 발하는구나.”

“맞는 말이에요. 불은 항상 조심해야 하죠.”

“아, 아하하… 들으셨어요…?”

“네에, 좋은 가르침이네요. 신전의 아이들에게도 가르쳐야겠어요.”

졸지에 실리아 온라인 명예 소방관이 된 저니가 머쓱하게 웃었다.

혼잣말이었는데 설마 듣고 있었을 줄이야.

화재 예방도 철저히 했겠다, 야영을 위해 풀어놓았던 짐도 다시 꾸린 일행이 다시 여행길에 오르…려고 했다가 난관에 봉착했다.

“어라. 셀린, 말은 어디 있어요?”

“말이요?”

“네. 타고 온 말이요.”

“그런 건 없습니다만….”

“네에?”

충격적인 셀린의 발언에 저니가 경악했다.

“그럼 여기까진 어떻게 왔어요?”

“걸어서요.”

“걸어서, 요? ”

“네에. 에델 님 덕분에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답니다.”

“…에델 님이 왕년에 운동 좀 하셨나 봐요.”

“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혹시 말을 타면 안 된다거나, 그런 교리가 있는 건가요?”

“그럴 리가요. 그저 여비가 다 떨어졌을 뿐이에요. 부끄럽게도 계산에 실수해서….”

아하하, 하고 셀린이 웃자 저니도 어색하게 마주 웃었다.

그나저나 큰일이네. 여분의 말이 있다면 모를까 두 필밖에 없는데.

난처하게 중얼거리는 저니의 말을 들은 셀린이 볼을 긁적였다.

“저어, 그냥 절 두고 두 분이서 가셔도 괜찮아요.”

“…아뇨! 동료를 버릴 순 없어요!”

“도, 동료…?”

저니가 눈을 부릅떴다.

그녀의 기세에 밀린 셀린이 저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홱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고개를 돌린 저니의 눈이 카나를 향했다.

“카나! 미안한데, 말을 같이 타고 가도 될까?”


“…뭐?”


“셀린이 말을 안 타고 오셨대. 우리 둘만 타고 가긴 좀 그러니까 카나랑 나랑 한 마리에 타고, 나머지 한 마리에 셀린을 태우는 게 어떨까?”


“너희 둘이 타면 되잖아.”


“말이 너무 불쌍하잖아. 가벼운 카나랑 같이 타는 게 낫지.”


“그러면 나는 뛰어갈 테니까 둘이 한 마리씩 타고 가.”


“아잉, 카나! 정말 정 없게 계속 이럴 거야?”

저니와 카나가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설전을 벌였다.

알아듣진 못해도 무언가 팽팽한 대화가 오가고 있음을 눈치챈 셀린이 슬쩍 눈치를 살폈다.

“좋아. 그러면 내가 저 셀린이라는 수녀랑 같이 탈게.”


“…그건 안 돼!”


“왜.”


“아무튼 안 돼!”


“솔직히 말하면 생각해 볼게.”


“…카나랑 꼭 붙어있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잖아!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지!”


“그냥 죽어.”


“꺄아아아악! 새, 생각해 본다며! 카나는 거짓말쟁이!”

카나가 무표정하게 나뭇가지를 집어 들더니 저니를 쫓기 시작했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는 저니와 그녀를 쫓는 카나.

난데없이 시작된 추격전에 그 사이에 낀 셀린은 멀뚱하게 눈만 껌벅였다.

격렬하게 이어진 추격전은 나뭇가지에 흠씬 얻어맞은 저니가 땅바닥에 엎어지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대책 없이 같이 가자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


“카나도 동의했잖아아아….”


“싫다고 하면 귀찮게 매달릴 게 뻔하니까.”


“음, 그건 그렇지. 아야! 또, 또 왜 때려?!”


“짜증 나서.”

카나는 저니의 등짝을 내려친 나뭇가지를 또각 부러뜨렸다.

그러고는 두 동강 난 나뭇가지를 미련 없이 휙 던진 뒤 셀린에게 손짓했다.

“타.”

“저, 저요?”

“응. 동의를 한 건 맞으니까 책임은 져야지.

의욕 없이 중얼거린 카나가 빨리 타라며 안장을 두드렸다.

셀린이 얼떨결에 올라탄 것을 확인한 소녀는 이번엔 발로 저니의 옆구리를 툭툭 찼다.

“빨리 일어나.”


“으으, 온몸이 아파…. 카나가 호~ 해주면 나을지도…?”

“그냥 평생 누워 있어.”


“이, 일어났어!”

‘…정말 재미있는 조합이네요.’

둘이 투덕거리는 것을 지켜보던 셀린은 문득 자신이 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에델 님의 뜻이 아니었어도 이 둘과 함께 했을지도 모르겠네요.’


           


Chapter 54

Chapter 54

나는 수녀로 보이는 여자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꼬리를 흔드는 저니를 한심하게 보았다. 싸울 땐 그렇게 겁을 집어먹으면서 정작 이럴 땐 조심성이 없다니. 뭔가 모순적이네. 눈에 보이는 직접적인 위협이 아니라면 크게 반응하지 않는 건가? 이렇게 하고 있으니 꼭 행동 심리 전문가가 된 기분이네. 현실은 전문가는커녕 배운 적도 없는 사람이지만. 근데 이 세계에도 그런 직업이 있긴 한가? 딱히 전문적으로 상담하는 사람을 본 적은 없는 거 같은데. 여기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사제에게 달려가기 바쁘니까. ‘몬스터의 공격에 당하셨다고요? 저런! 빨리 사제님께 가서 치료를 받으세요.’ ‘전염병이 돈다고? 빨리 교단에 연락해!’ ‘신부님, 저는 죄를 지었습니다….’ 이런 느낌으로, 이 세계에서 에델 교의 사제는 만병통치약이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았다. 아무튼, 야생에서 조심해야 할 건 몬스터나 마물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모르는 걸까. 공터에 있던 선객이 에델 교의 수녀라서 망정이지, 질이 안 좋은 무리가 있었다면 험한 꼴을 볼 수도 있었는데 말이야. 근처 나무에 말을 매어놓고 야영 준비를 하는 동안 저니는 수녀와 함께 도란도란 대화를 나눴다. “소개가 늦었네요. 제 이름은 셀린. 에델 님을 모시는 수녀랍니다. 편하게 셀린이라고 불러주세요.” “저니예요. 저도 편하신 대로 불러주세요!” “네, 저니 님. …저니 님은 에델 님의 인도를 받으셨죠?” “에델 님의 인도…? 아, 네!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가끔 못 알아보는 사람도 있던데….” “후후. 에델 님의 은총이 그리 깊게 남아 있는데 알아보지 못한다면 에델 님을 모시는 몸이라고 할 수 없겠죠. 그리고….” 수녀의 부드러운 눈길이 나에게 닿았다. “저 소녀분도 저니 님 못지않게 많은 은총을 받고 계시네요.” “에, 카나가요?” “소녀분 성함이 카나인가요? 예쁜 이름이네요.” “앗….” 드문드문 나오는 내 이름을 들은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는 사이 무언가 대화를 나눈 저니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카나. 이분은 셀린 님이야. 에델 교의 수녀님이래.” 그건 그냥 봐도 알 수 있는데. 소개를 들었는데 마냥 모른 척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셀린과 가볍게 목인사를 나누었다. 다 그런 건 아닐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만난 성직자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호인, 또는 선인의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건 저 셀린이라는 수녀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만난 지 한 시간도 채 안 지났으니 더 봐야 하긴 하겠지만, 일단 지금까지 본 바로는 딱히 악의가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네. 조금은 경계를 풀어도 되려나. “그런데 이런 곳에서 혼자 야영하시면 무섭지 않으세요? 저라면 무서워서 잠도 제대로 못 잤을 거 같은데….” “후후… 저니 님은 상냥하시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렇게-” “와아…!” “에델 님의 힘을 빌린다면 아무 문제없답니다.” 셀린의 손에서 시작된 금색 빛무리가 어둠을 환하게 밝혔다. 반딧불이처럼 반짝반짝 빛나며 주변으로 퍼져나간 빛이 우리가 있는 공터를 둥글게 감싸안았다 “결계인가요?” “음- 결계는 아니라 성법이지만 하는 일은 비슷하니 그렇게 보셔도 되겠네요. 오늘 밤은 제가 지켜드릴 테니 여러분은 안심하고 주무세요.” “어… 힘드시지 않으세요…?” “과분한 사랑을 받은 몸이라 이 정도는 가뿐하답니다.” ‘으음….’ 나는 주변을 둘러싼 빛을 살펴보았다. 맨 처음 셀린의 손에서 나왔을 때처럼 밝지는 않지만 은은한 빛이 마치 장벽처럼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시험 삼아 건드려 보니 손가락이 아무런 저항 없이 장벽을 뚫고 바깥으로 나갔다. 가끔 다른 성직자들이 이렇게 안전 구역을 만드는 걸 본 적이 있었는데, 그것들은 안과 밖을 완전히 분리해서 안에 있는 사람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밖에 있는 사람도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셀린이 만든 장벽은 적어도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무 의미 없이 만든 건 아닐 테니 밖에서 안으로 향하는 건 아마 막히지 않을까? 이건 꽤 흥미롭네. “카나야 신기해?” “….” 장벽을 툭툭 건드리며 시험해 보는 나를 저니가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시선이 기분 나쁘네. * * * “셀린이 쓴 성법이 신기했나 봐요.” “다른 분들이 보면 신기하게 느끼실 법 하죠.” 저니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이후 카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저니는 카나가 처음 보는 장난감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장벽을 툭툭 두드리는 장면을 똑똑히 보았다. ‘역시 아이는 아이구나.’ 저니는 아닌 척하는 카나가 귀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괜히 방해한 거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왜, 삼촌들이 조카를 보면 귀여워서 장난치다가 울리고 그러잖아. 그런 것처럼 나도 건드릴 수밖에 없었다고…! 속으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저니였다. 저니와 함께 흐뭇하게 웃던 셀린이 문득 저니에게 물었다. “혹시 두 분도 성국으로 가시는 건가요?” “맞아요. ‘두 분도’라고 하면, 설마 셀린도…?” “네. 저도 성국으로 복귀하는 길이에요.” “잘됐네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성국까지 같이 가시지 않을래요?” 저니는 타고난 친화력을 십분 발휘해 셀린에게 제안했지만 셀린은 난처하게 웃으며 잠시 대답을 미루었다. “저야 감사한 제안이지만, 카나 님의 의견도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요?” “…아, 맞다.” 그제서야 너무 흥분했단 것을 깨달은 저니가 조금 진정했다. 만화책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완벽한 수녀님을 만났더니 나도 모르게 그만…. 저니가 큼큼 헛기침했다. 카나라면 별로 신경 쓰는 기색 없이 ‘마음대로 해’라고 대답할 거 같긴 하지만, 의견도 묻지 않고 멋대로 동행을 늘리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허락보다 용서가 쉽고, 사전 보고보다 사후 통보가 쉽다는 말이 있긴 해도 그런 걸 반복하면 신뢰가 깨진다는 사실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기껏 열심히 쌓은 카나와의 관계를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 “카나 카나.” “…왜 항상 두 번씩 부르는 거야.” “그치만 이게 더 정감 가지 않아? 이름만 부르면 뭔가 정 없게 느껴지잖아.” “별로….” “그래? 아무튼 카나야, 셀린도 성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시는데, 동행해도 괜찮을까? 왜, 같이 여행하는 사람이 많으면 즐겁잖아.” “그것도 잘 모르겠는데.” 카나는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그런 카나를 설득하기 위해 저니가 재차 입을 열려고 할 때, 그보다 한발 앞서 카나가 말했다. “마음대로 해.” 저니가 당초 예상했던 것과 완전히 똑같은 말이었다. “수녀니까 성국으로 가는 길을 잘 알고 있겠지.”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니건만 카나가 변명하는 듯한 말을 늘어놓았다. 그렇게 시니컬한 컨셉을 지키고 싶은 걸까. 뭐, 아무렴 어때! 허락을 받은 저니가 밝게 웃었다. “카나도 좋대요!” “…좋다, 안 했어.” “봤죠?” 조금이지만 아르키쉬를 알아듣게 된 카나가 저니의 날조를 저지했지만 저니는 꿋꿋했다. “어… 그런가요?” 오죽하면 듣고 있던 셀린이 당황하면서 그리 물을 정도로. “그럼요! 카나는 아직 아르키쉬가 익숙하지 않아서 원하는 말을 제대로 할 수 없거든요. 방금도 ‘너무 좋아! 난 반대 안 할게!’라는 뜻이었어요.” “그, 그렇군요…? 아르키쉬가 익숙하시지 않은 건 맞는 거 같은데….” 그런 말을 할 것 같은 아이로 보이진 않는걸요. 셀린이 뒷말을 꿀꺽 삼켰다. 그녀가 본 저니와 카나의 조합은 상당히 독특했다. 활발한 저니와 무뚝뚝한 카나. 일단 성격부터가 정반대다. 나이와 성격을 보면 저니가 카나를 이끌 것 같았지만, 정작 주도권을 쥐고 있는 사람은 카나로 보인다. 그렇다고 카나가 독단적으로 모든 일을 결정하냐, 하면 그것도 아닌 것 같고. ‘에델 님이 지켜보시는 이유가 있네요.’ 흥미를 느낀 셀린의 눈동자가 금빛으로 반짝였다.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셀린은 불만이 가득 찬 카나의 눈동자를 외면하며 말했다. 그렇게 일행이 된 세 사람은 셀린의 성법 덕분에 편안하게 하룻밤을 보냈다. 전날 잡은 레인 버팔로의 고기로 간단한 스튜를 끓여 아침을 해결한 뒤 공터를 정리하고 길을 떠날 채비를 했다. 저니는 꾹꾹 밟아서 불을 끄고, 그 위에 물을 뿌리며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자나 깨나 불조심. 어려서부터 받은 교육이 이런 곳에서 빛을 발하는구나." “맞는 말이에요. 불은 항상 조심해야 하죠.” “아, 아하하… 들으셨어요…?” “네에, 좋은 가르침이네요. 신전의 아이들에게도 가르쳐야겠어요.” 졸지에 실리아 온라인 명예 소방관이 된 저니가 머쓱하게 웃었다. 혼잣말이었는데 설마 듣고 있었을 줄이야. 화재 예방도 철저히 했겠다, 야영을 위해 풀어놓았던 짐도 다시 꾸린 일행이 다시 여행길에 오르…려고 했다가 난관에 봉착했다. “어라. 셀린, 말은 어디 있어요?” “말이요?” “네. 타고 온 말이요.” “그런 건 없습니다만….” “네에?” 충격적인 셀린의 발언에 저니가 경악했다. “그럼 여기까진 어떻게 왔어요?” “걸어서요.” “걸어서, 요? ” “네에. 에델 님 덕분에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답니다.” “…에델 님이 왕년에 운동 좀 하셨나 봐요.” “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혹시 말을 타면 안 된다거나, 그런 교리가 있는 건가요?” “그럴 리가요. 그저 여비가 다 떨어졌을 뿐이에요. 부끄럽게도 계산에 실수해서….” 아하하, 하고 셀린이 웃자 저니도 어색하게 마주 웃었다. 그나저나 큰일이네. 여분의 말이 있다면 모를까 두 필밖에 없는데. 난처하게 중얼거리는 저니의 말을 들은 셀린이 볼을 긁적였다. “저어, 그냥 절 두고 두 분이서 가셔도 괜찮아요.” “…아뇨! 동료를 버릴 순 없어요!” “도, 동료…?” 저니가 눈을 부릅떴다. 그녀의 기세에 밀린 셀린이 저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홱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고개를 돌린 저니의 눈이 카나를 향했다. “카나! 미안한데, 말을 같이 타고 가도 될까?” “…뭐?” “셀린이 말을 안 타고 오셨대. 우리 둘만 타고 가긴 좀 그러니까 카나랑 나랑 한 마리에 타고, 나머지 한 마리에 셀린을 태우는 게 어떨까?” “너희 둘이 타면 되잖아.” “말이 너무 불쌍하잖아. 가벼운 카나랑 같이 타는 게 낫지.” “그러면 나는 뛰어갈 테니까 둘이 한 마리씩 타고 가.” “아잉, 카나! 정말 정 없게 계속 이럴 거야?” 저니와 카나가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설전을 벌였다. 알아듣진 못해도 무언가 팽팽한 대화가 오가고 있음을 눈치챈 셀린이 슬쩍 눈치를 살폈다. “좋아. 그러면 내가 저 셀린이라는 수녀랑 같이 탈게.” “…그건 안 돼!” “왜.” “아무튼 안 돼!” “솔직히 말하면 생각해 볼게.” “…카나랑 꼭 붙어있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잖아!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지!” “그냥 죽어.” “꺄아아아악! 새, 생각해 본다며! 카나는 거짓말쟁이!” 카나가 무표정하게 나뭇가지를 집어 들더니 저니를 쫓기 시작했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는 저니와 그녀를 쫓는 카나. 난데없이 시작된 추격전에 그 사이에 낀 셀린은 멀뚱하게 눈만 껌벅였다. 격렬하게 이어진 추격전은 나뭇가지에 흠씬 얻어맞은 저니가 땅바닥에 엎어지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대책 없이 같이 가자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 “카나도 동의했잖아아아….” “싫다고 하면 귀찮게 매달릴 게 뻔하니까.” “음, 그건 그렇지. 아야! 또, 또 왜 때려?!” “짜증 나서.” 카나는 저니의 등짝을 내려친 나뭇가지를 또각 부러뜨렸다. 그러고는 두 동강 난 나뭇가지를 미련 없이 휙 던진 뒤 셀린에게 손짓했다. “타.” “저, 저요?” “응. 동의를 한 건 맞으니까 책임은 져야지.” 의욕 없이 중얼거린 카나가 빨리 타라며 안장을 두드렸다. 셀린이 얼떨결에 올라탄 것을 확인한 소녀는 이번엔 발로 저니의 옆구리를 툭툭 찼다. “빨리 일어나.” “으으, 온몸이 아파…. 카나가 호~ 해주면 나을지도…?” “그냥 평생 누워 있어.” “이, 일어났어!” ‘…정말 재미있는 조합이네요.’ 둘이 투덕거리는 것을 지켜보던 셀린은 문득 자신이 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에델 님의 뜻이 아니었어도 이 둘과 함께 했을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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