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와 차원.
완전히 같은 말은 아니지만, 그 둘을 구분하기 위해선 너무 세세하게 설명해야 하니 넘어가고-
에델처럼 한 세계를 관장하는 신은 다른 차원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알고 있을 뿐이지 다른 차원과 교류를 하진 않아.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나누자고 차원의 벽을 넘기엔 리스크가 너무 크거든.”
만약 리스크를 감수하고 다른 차원과 교류를 했다면 상황이 지금과 달랐을까.
지금보다 더한 재앙이 닥쳐 더 안 좋아졌을 수도 있고, 차원수의 존재를 알고 미리 대비를 한 덕에 아무 변고도 겪지 않고 지나갔을 수도 있지만.
어떤 식으로든 다르긴 했을 것이다.
“차원수란 놈들이 어떻게 생겨난 건지는 나도 모르지만, 녀석들이 원하는 게 뭔지는 알고 있어.”
타 차원을 침략하여, 그 차원의 에너지를 흡수한다.
에너지를 흡수당한 차원은 점점 병들게 되고, 끝내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지금 실리아가 처한 상황처럼.
“처음부터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어야 했는데.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었더라.”
창고에 들어온 쥐를 잡는 건 귀찮지만 할 수는 있는 일이다.
그러나 창고에 들어온 쥐가 한 마리가 아니라 수십, 수백 마리를 넘어서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로 많다면.
심지어 잡아도 잡아도 어디선가 계속 들어오는데 구멍을 막을 수도 없다면.
하나하나 잡는 것보다, 창고를 통째로 불태우고 새로 짓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혹은 새로운 창고를 지어서 안의 내용물을 모두 옮기거나.
차원수란 것들도 그러했다.
창고와 다르게 세계는 무너뜨리고 새로 만들 수 없고, 안에 있는 내용물을 옮길 수도 없다는 점만 빼면 말이다.
차원수와의 기나긴 싸움 끝에 패배한 에델은 선택했다.
존속을 위해 다른 세계에 예속되기로.
신은 자존심이 강하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세계에 대한 자부심도 그에 못지않았다.
그런 신이 자존심을 꺾고 자신의 세계를 다른 세계에 예속시킬 결심을 했다는 건, 에델이 자신이 만든 세계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려주는 증거였다.
…라고 하는데.
나는 에델의 말을 잠자코 듣다가 불쑥 끼어들었다.
“차원수가 그만큼 위험한 놈들이란 건 알겠어.”
위험한 놈들이란 건 전부터 알고 있긴 했지만, 과연 에델이 밀릴 정도인가 하면 의문이 들었다.
몰락했다고 말하는 것치고, 에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압박감은 내가 지금까지 본 사람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했으니까.
나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는 놈들한테 그녀가 당했다는 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연하지. 강한 놈들은 나와 치고받고 싸워서 다 몸을 추스르고 있으니까. 나도 무력하게 밀리기만 한 건 아니라고?”
“결국엔 졌잖아.”
“…나 그냥 돌아간다?”
“미안.”
“…아무튼! 그런 이유도 있고, 아직 차원의 벽에 뚫린 구멍이 크지 않아서 진짜 위험한 놈들은 넘어오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강한 놈들이 넘어오기 시작할 거야. 그렇게 되면 이 세계가 황폐해지는 속도도 빨라질 거고.”
째깍째깍.
에델이 입으로 시계 소리를 흉내 냈다.
“비유하자면 시한폭탄이 달린 셈이려나?”
“지구에 예속되는 것으로 해결한 거 아니었어?”
“유감스럽게도, 아니란다? 그건 시한폭탄의 타이머를 늦추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야. 근원적인 걸 해결하지 못하면 언젠간 뻥-! 하고 터지고 말걸?”
“…그런 걸 나한테 말해주는 이유는?”
직접 강림한 것도 모자라서, 이런 것들을 설명해 주다니.
인간 하나에게 베풀기엔 너무 과분한 친절 아닌가.
조각상을 만지작거리던 에델이 나에게 사뿐사뿐 다가왔다.
한 발짝, 한 발짝.
에델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눈동자에 서린 감정이 선명해졌다.
“이미 말하지 않았니? 너는 나의 검이라고.”
“….”
“나의 세계를 망가뜨린 그것들을 죽이기 위해서라면, 이깟 친절은 얼마든지 베풀어 줄 수 있거든.”
장난기 어린 눈동자, 그 너머에 감춰진 감정의 편린을 본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어떤 생명보다 인간과 거리가 먼 신이, 가장 인간다운 감정을 보일 줄은 몰랐기에.
그러나 내가 그녀의 감정을 엿볼 수 있는 건 한순간에 불과했다.
빠르게 감정을 갈무리한 에델이 아까 전의 모습으로 돌아와 다시 장난스러운 미소를 입에 걸쳤다.
“자, 자. 또 궁금한 건 없어? 있으면 얼마든지 물어봐. 나의 작은 새를 위해서라면 뭔들 못 알려주겠니.”
“작은 새인지 검인지 하나만 해.”
역시 그녀가 내게 호의를 베푸는 덴 이유가 있었다.
신조차 이겨내지 못한 상대를 나보고 어떻게 이기라고 하는진 모르겠지만, 저렇게까지 말하면 사양할 필요는 없겠지.
마침 궁금한 게 많았는데, 잘됐네.
스읍-
“그래서, 사도… 플레이어들을 통해 네가 이루고 싶은 게 뭐야. 다른 사람들이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건 네 수작이야? 그렇다면 내가 이상한 걸 느낀 건 네 안배인 거야? 그리고-”
“-잠깐, 잠깐잠깐!”
에델이 황급히 손을 휘둘러 끝없이 이어지던 내 질문을 끊어냈다.
땀을 삐질 흘린 그녀가 말했다.
“…하나씩 물어볼래? 그렇게 물으면 대답해 줄 수 없잖니.”
“신이라면서 이것도 못 해?”
“아, 이거 진짜 얄미운 꼬맹이네.”
…만 아니었어도 확 쥐어박는 건데.
에델이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는 것도 잠시,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인자한 빛을 띠었다.
자애롭게까지 느껴지는 미소로 인해 분위기가 급변했다.
“그것들이 네가 정말로 묻고 싶은 거야?”
“….”
그녀의 반격에 나는 또다시 숨이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좋아.
내가 정말로 묻고 싶었던 거는-
“…가리드는, 왜 죽었어야 했던 거야?”
수많은 플레이어에게 그런 권능을 부여할 수 있다면, 사람 하나 살리는 건 일도 아니었을 텐데.
게임으로 따져도 고작 NPC 하나 살리는 시시한 일이잖아.
실리아 사람들의 목숨은, 그저 지구인들의 오락거리를 위한 소모품이었던 거야?
“일단 좀 진정하렴.“
“난 충분히 진정하고 있어.”
“그렇게 살벌한 얼굴로 그런 말 해봤자 전혀 신뢰가 안 가거든?”
얼굴?
나는 손을 들어 얼굴을 매만지자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이 손끝을 통해 전해졌다.
딱히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얼굴인 것 같은데.
“나에게 부활의 권능이 있는 건 사실이야.”
“그러면-”
“하지만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생명을 되살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내가 만든 탄생과 죽음의 굴레를 내 손으로 어길 리 없잖아. 정해진 규칙을 비트는 게 얼마나 귀찮고 힘든 일인데.”
“…역사서에도 나와 있었어.”
“그건 애초에 죽은 게 아니었거나, 정해진 규칙을 비틀 수 있을 정도로 막대한 대가를 지불해서 얻어낸 결과야. 역사서를 봤다면, 그들이 어떤 대가를 지불했는지 짐작할 수 있겠지.”
나는 그녀의 말에 발끈하여 말했다.
“그 정도는 나도-”
“어림없어.”
에델이 딱 잘라 부정했다.
“나중이라면 몰라도, 지금의 너는 규칙을 깰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 않아.”
“…그렇다면 사도들은, 플레이어들은 뭔데? 걔네들은 고작…! 고작, 몬스터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해서 쩔쩔매는데…!”
“진정하라니까.”
“진정…? 지금 그런 걸 할 수 있을 거 같아 보여?”
“거 봐. 충분히 진정하고 있긴 개뿔, 하나도 진정하지 못했잖아.”
내 검에 내가 찔려 죽는 일은 사양하고 싶으니 빨리 말해야겠네, 라고 에델이 운을 띄웠다.
“내 입으로 말하려니 자존심 상하지만, 그건 온전히 나의 힘으로 한 일이 아니야. 지구의 관리자와 협력하여 이룬 결과지.”
지구에 예속되었다고 해도 실리아의 관리 권한은 아직 에델에게 있다.
그리고, 지구의 인간에게 관여할 수 있는 건 지구의 관리자뿐이다.
그래서 그 둘은 협력했다.
“사람처럼 호흡하고, 사람처럼 말하고, 사람처럼 움직이지만, 사도들의 몸은 그들의 진짜 육체가 아니야. 죽음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데, 부활이라는 개념이 있을 수 있겠어?”
“….”
처음부터, 그들에게 부활의 권능을 부여하지 않았다는 말.
…도대체 나는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걸까.
대장장이에게서 사도의 이야기를 처음 전해 들었을 땐 에델에게 따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이 세계가 게임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했을 때.
그들이 죽고 부활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보일 뿐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에델이 말했던 것처럼.
“…하.”
나도 모르게 실소가 새어 나왔다.
…그렇게 생각한 주제에 이제 와서 실망하는 이유는 대체 뭐야.
어쩌면 나는, 에델이 불공평을 인정하고 가리드를 되살려 주는 걸 바란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단순히 이 끓어오르는 원망을 토해낼 대상이 필요했던 걸지도 몰라.
하지만 에델의 말을 들은 후-
“이래선, 원망도 할 수 없잖아….”
나는 에델에게 아무 원망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
그녀 또한 그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
나는 지금까지 나를 지탱하던 것들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가리드의 곁을 떠나, 이것만 바라보고 버텨 왔는데.
이제 난 어떻게 해야 하지?
…그나마 비추고 있던 전등이 꺼지고, 캄캄한 어둠이 마음에 드리웠다.
“네가 원하던 건 그런 게 아니잖니?”
“…무슨 말이야?”
그때, 에델이 여상스레 말을 걸어왔다.
내가 원하던 건 그런 게 아니라니.
내 마음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내가 원한 게 뭔데?”
“그건 네가 알아야 하지 않을까? 내가 네 마음을 어떻게 아니?”
“…뭐?”
생각을 읽을 수 있으면서, 아니, 그 이전에.
그런 말을 꺼냈으면서 저렇게 말하다니.
순간적으로 고개를 치켜든 황당함이 나를 사로잡은 허무감을 몰아냈다.
어이없는 마음을 숨기지 않고 그녀를 올려다봤지만, 그녀는 여전히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네가 저니와 같이 온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그야, 의사소통을 도울 번역기 겸, 내 의심이 맞나 확인하기 위해서….”
“정말 그런 거였으면 더 간단한 방법도 있잖아? 예를 들면-”
파직!
에델의 몸에 스파크가 일었다.
그와 동시에 선명하던 그녀의 몸이, 반대편 풍경이 비칠 정도로 흐릿해졌다.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까지인가 봐. 어휴, 애를 달래는 일은 정말 어렵구나. 갑자기 인간들이 존경스러워지는걸?”
“뭐? 잠깐 기다려…!”
“그렇게 말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는걸.”
“…물어보고 싶은 거 다 물어보라고 했잖아.”
“아니, 나도 설마 이 정도밖에 시간이 안 될 줄은 몰랐지.”
미안!
에델이 데헷, 하고 웃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꾸준히 흐릿해지던 그녀의 몸은 이제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삼 일. 그 정도면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삼 일 후에 다시 와. 그때까지 내가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고, 의지가 생겼다면 그때-”
에델은 끝내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사라졌다.
기도실을 가득 채웠던 신성력이 사라지고, 이제는 에델이 흘리던 신성력의 잔흔만이 남아 기도실 안을 맴돌고 있었다.
갑작스레 고요에 잠긴 기도실 안.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홀로 남겨진 나는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그래서 내가 원한 게 뭔데?”
어쩐지, 에델이 웃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 * *
오늘 저니의 기분은 무척 좋았다.
“으응…!”
그야말로 단잠이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아주 기분 좋은 잠을 잔 후 개운하게 일어나서.
“앗, 쌍란이다!”
계란프라이를 만들려고 계란을 깠더니 쌍란이 나오질 않나.
“에? 정말? 정말로 됐다고?!”
심심풀이로 신청한 경품이 당첨됐다는 소식을 듣기도 했다.
그 외에도 자잘한 행운이 따라주는 것을 본 저니는 생각했다.
“오늘은 분명, 완벽한 하루가 될 거야…!”
일 년에 며칠 없는, 완벽한 하루가 바로 오늘이라고.
그러나 그녀가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카, 카나야?”
바로 출발이 좋다고 해서 끝이 좋으리란 법은 없다는 것이었다.
첫 끗발이 개 끗발이라든가, 설렁탕을 사와도 먹질 못한다든가….
이미 그것을 증명하는 수많은 말과 사례가 있지 않은가.
방에서 시청자들과 대화를 나누던 저니는,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반색하며 카나를 맞으려다가 카나의 표정을 보고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엉거주춤 멈춰 섰다.
“…너.”
그녀의 꼴을 본 카나가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풀썩!
그러고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눌러썼다.
저니는 볼록 솟은 이불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
-사춘기 아님?
-흥 카나 삐져써
-하는 짓이 내 동생이랑 똑같네;
“사춘기… 사춘기?”
…카나가 그럴 나이였나?
만약 사춘기가 맞다고 해도 바로 오늘 아침까지 멀쩡하던 아이가 저런 행동을 보이나?
-그러니까 사춘기지
-원래 사춘기는 때는 아무 일 없어도 혼자 기분 나빠 하고 그럼ㅇㅇ
“아니 내 말은, 사춘기가 이렇게 갑자기 시작되냐 이거지. 카나가 삐딱하긴 했어도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애는 아니었잖아.”
-그건…
-네 알려드렸습니다
-몰?루
“…에휴, 됐다. 너희들한테 말한 내가 바보다, 바보.”
저니는 기다란 한숨을 쉬며 채팅창에서 눈을 돌렸다.
저러는 걸 보면 원하는 걸 이루지 못해서 상심한 걸까.
하지만 상심과는 좀 거리가 멀어 보이는데.
카나가 보인 모습을 열심히 분석하던 저니가 결국 백기를 들었다.
하나 확실한 건, 아침에 봤던 카나와 지금 봤던 카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차이가 난다는 것이었다.
“강림제, 같이 구경하고 싶었는데….”
늘 카나에게 매달려 칭얼대고 생떼를 부리던 저니였지만, 지금의 카나에겐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넘어선 안 되는 선이 존재한다.
평소에는 온화한 사람도, 누군가 그 선을 넘는 순간 야차가 될 수도 있는 게 선이다.
저니가 본 카나의 마음속 선은 상당히 높은 곳에 있었다.
몇몇 구간에서 낮아지긴 하지만, 대체로는 일부러 긁으려고 하는 게 아닌 이상 넘기가 힘들 정도로.
그러나 오늘 카나의 선은 지면에 딱 붙다 못해 지하까지 파고든 것처럼 보였다.
지금 건드리면 절대 좋은 꼴은 못 볼 것이다.
-라고 직감한 저니가 침을 꿀꺽 삼켰다.
피닉스 볶음밥 때와는 차원이 다른 위기감이 경종을 울렸다.
“…하루 정도는 흘려보내도 되니까! 응!”
며칠 동안 고생했잖아?
오늘 하루는 쉰다고 생각하면 되지!
설마 내일도 저 상태겠어?
저니는 불쑥 머리를 들이미는 불안감을 무시하며 애써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