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원과 차원 사이의 뚫린 길을 따라 지구에 도착한 에델.
그녀 외에도 수많은 신이 있고, 그만큼 많고 다양한 세계가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구의 모습을 처음 눈에 담았을 때, 그녀는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녀가 만든 실리아와 전혀 다른 세계.
열등감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까지 다를 수 있다는 것에 놀랐을 뿐.
지구의 신에게 도움을 받은 에델은 지구의 문물을 빠르게 습득했다.
인간에겐 수백, 수천 년이 있어도 부족한 시간이었지만, 에델에게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알 만큼 알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에델은 느꼈다.
‘이건 힘들겠는데.’
지구의 무기가 강력한 것은 맞다.
그러나 차원수에게 효과가 있을까, 묻는다면 의문이 들었다.
지역 하나를 통째로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폭탄이 있다고 해도 사람들이 모여 있는 도시에 떨어뜨릴 순 없었다.
백번 양보해서, 한두 번은 그럴 수 있다 쳐도 차원수가 나타날 때마다 그런 짓을 반복한다면 차원수가 절멸하는 것보다 인류가 절멸하는 게 빠를 것이다.
세계를 지키려는 수단이 되레 세계를 망가뜨리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이 있을까.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지구의 무기는 차원수의 침공을 근본적으로 막기엔 부족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던 에델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게임.
그중에서도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 즐기는, 가상현실 게임.
그것을 본 순간 에델은 머리에 벼락이 내리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차원을 격하해서 게임으로 만들고, 지구의 인간들에게 차원수를 죽이게 만드는 거야.’
플레이어들에게 차원수를 죽이게 하여 놈들의 힘을 약화시킨다.
물론 그들이 죽일 수 있는 것은 약하기 짝이 없는, 물고기로 따지면 피라미나 송사리 정도겠지만, 조금의 시간 정도는 벌 수 있으리라.
지구의 신에게 동의를 얻어낸 에델은 곧바로 착수했다.
먼저 차원수들의 힘을 역이용해 실리아 세계와 단절된 가상의 차원들, 약칭 가차원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가차원에서 일어난 일은 원류 차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강력한 몬스터를 죽여도, 실리아 세계의 사람이 죽어도.
가차원이 없어지는 순간 없었던 일이 되었다.
실제 생물처럼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원본의 행동을 따라 할 뿐인 영혼 없는 그림자에 불과했다.
이른바 ‘인스턴스 던전’이라고 불리는 시스템이었다.
가차원은 말 그대로 가상의 차원.
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으면 플레이어들이 즐기는 의미가 없으니, 그 안에서 획득한 물건과 경험을 고스란히 남을 수 있도록 조치했다.
채널 또한 인스턴스 던전과 마찬가지로 차원 단절을 이용하여 만든 시스템 중 하나였다.
에델이 채널을 만든 것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하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접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고.
나머지 하나는 차원수에게 더 큰 타격을 주기 위함이었다.
본래 가차원에서 일어난 일은 원류 차원에 영향을 미칠 수 없었지만.
차원수란 것들은 그 이름에 걸맞게 차원에 특화된 생물인지라, 가차원에서 일어난 일이라 할지라도 본신에까지 피해를 입었다.
인스턴스 던전, 채널, 성장, 직업 등….
게임에 필요한 모든 시스템을 만들어낸 에델은 자신이 만든 것을 훑어보며 한숨을 쉬었다.
‘…과연.’
이걸로 차원수를 격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시간을 벌 수 있기를 바랄 뿐.
그녀가 점찍어둔 검이 날카롭게 벼려질 때까지.
* * *
“…그렇게 된 거야.”
긴 이야기의 끝을 알리는 에델의 말이었다.
저렇게 길게 이야기하면서 물 한 모금 마시지 않다니.
역시 신은 신이구나.
“…인정해 준 건 고마운데, 포인트가 좀 미묘하지 않니?”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보던 에델이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라고 내 아이들의 목숨이 아깝지 않은 건 아니야. 내가 빚은 아이들인데 그럴 리가 없잖니. 그래서 안전장치를 여럿 마련해 두긴 했지만… 완전히 막을 수는 없더라.”
“어쨌든 그들에게는 게임이니까.”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았으면 더 많은 생명이 죽었을 거야.”
지구인들이 일으키는 사고에 의해 죽는 생명보다 훨씬 더 많은 생명이.
“다른 방법은 없었어? 사도들처럼 임시 육체를 부여한다든가, 플레이어들을 원류 차원이 아니라 가차원에만 넣는다든가 하는.”
“나라고 생각 안 해봤겠니.”
이미 갉아 먹힐 대로 갉아 먹힌 상태로는 이게 최선이었다고 에델이 변명하듯이 말했다.
“아무튼… 그렇게 가차원을 만들었지만, 내가 유일하게 가차원에 복사하지 못한 영혼이 있어. 차원의 벽을 넘고, 소용돌이를 버틴 탓에 웬만한 차원적 압박엔 내성이 생겨서 복사할 수 없었거든.”
그 영혼이 누구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그녀의 물음 아닌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조차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으니까.
“그 말은, 내가 있는 이 차원이 원류 차원이라는 거네.”
“응. 정답이야.”
“…그건 알겠어.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랑 다르게 내가 사도들이 이상하다고 느끼는 것도 내 영혼 때문이야?”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물론 네가 가진 경지도 한몫하지만, 그 경지도 결국 네 영혼의 특이성이 아니면 달성하지 못했을 테니까. 그렇다 해도 설마 필터링이 먹히지 않을 정도로 강해졌을 줄은 상상도 못 해서 깜짝 놀랐지 뭐야.”
“필터링이라….”
역시 그랬구나.
다은의 혼잣말에 아무도 반응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도 반응하지 않은 게 아니라 반응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들리기는커녕 말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데 반응할 수 있을 리 없지.
“경지를 높이면 필터링을 없앨 수 있어?”
“완전히 없애는 건 불가능해도 영향을 덜 받을 순 있지. 실제로 너와 비슷한 경지인 아이들은 위화감을 느끼고 있을 거야.”
나와 비슷한 경지.
그 말에 머릿속에 여러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빠른 속도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얼굴 중, 유독 오래 남는 얼굴이 있었다.
‘….’
나는 얼굴을 와락 구겼다.
순간적으로 확 기분이 나빠진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얼굴을 지우기 위해 말을 돌렸다.
“그래서, 차원수를 막지 않으면 지구까지 위험하단 말이지?”
“왜? 네가 좋아하는 사람까지 위험하단 말을 들으니 의욕이 좀 생겼어?”
“…그런 거 아니야.”
막지 않으면 죽는다는 거니까 선택권이 없잖아.
그래서 그런 것뿐이야.
아까 에델이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는 내가 변명하듯이 중얼거렸다.
“죽어도 상관없다는 사람처럼 굴은 건 언제고?”
“…시끄러워.”
얼굴을 찌푸리자 에델이 푸흐흐 웃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
“…?!”
와락!
나는 에델에게 달려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의 입을 가린 작은 손바닥 너머로 채 가려지지 않은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어, 어, 어, 어떻게…?”
“어떻게라니?”
“그걸 네가 어떻게 알고 있냐고…!”
“아, 그거?”
에델이 어깨를 으쓱였다.
타들어 가는 나의 속과는 다르게 태연자약한 모습이었다.
“힘이 약해져서 모든 걸 다 볼 순 없지만, 그래도 성국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볼 수 있거든. 나름대로 내 홈그라운드인데 그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어?”
“….”
“오, 부끄러워하는 거야? 푸흐흐…! 괜찮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감동적인 장면이었으니까!”
“…잊어.”
“응? 뭐라고?”
“잊으라고!!”
…그런 걸 왜 보고 있는 거야!
나는 에델의 어깨를 붙잡고 마구 흔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격한 흔들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흔들림에 몸을 맡긴 채 허허로이 웃을 뿐이었다.
* * *
은은하게 내리는 달빛과 소녀.
평소의 다은이었다면 몽환적인 광경에 넋을 잃고 쳐다봤겠지만, 지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이 그녀와 카나의 인연을 결정짓는 중요한 순간이란 걸 느꼈기 때문에.
다은은 카나를 마주 보았다.
카나도 다은을 마주 보았다.
억겁과도 같은 시간 속, 소녀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아빠는 내 인생의 전부였어.”
어려진 몸, 달라진 성별, 처음 보는 세계. 어린 시절의 카나에게는 모든 게 낯설었다.
그러나 카나에게 느긋하게 적응할 시간 같은 건 주어지지 않았다.
카나의 부모는 카나를 사람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보았으니, 당연히 아이라면 으레 받아야 할 사랑이나 보살핌은 전혀 받지 못했다.
그렇다고 부모가 죽은 후에 카나가 처한 상황이 좋아졌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부려 먹는 사람이 없어졌다 뿐이지 당장 오늘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주먹과 발차기에 맞아서 기분 나쁜 티를 내면 더 많은 폭력이 날아든다..
기쁜 일이 있어도 티를 내면 승냥이들이 달려들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카나의 성격이 딱딱해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카나는 살아남기 위해서 감정을 죽이는 법을 배웠다.
어려진 몸, 달라진 성별, 처음 보는 세계로 인한 혼란은 마음 속 깊은 곳에 묻어둔 채로.
그런 카나에게, 처음으로 손을 내민 사람이 있었다.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따뜻한 말과, 한 번도 느낀 적 없는 온기.
그것들이 작은 소녀에게 얼마나 위안이 됐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아빠가 건강이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기대했다.
기적처럼 건강을 회복하고 자신과 함께 오래오래 살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카나의 기대는 무참하게 꺾였다.
날이 갈수록 건강이 나빠지던 가리드는 결국 카나의 곁을 떠났고.
작은 새는 보금자리를 잃은 채 홀로 남겨졌다.
“…내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어.”
어차피 자신은 불순물일 뿐이다.
주변 어디를 둘러봐도 자신과 같은 존재가 없다는 걸 확인할 때마다, 카나는 자신이 이 세계에 오롯이 속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그럴 거라면 차라리 미련이라도 남기지 않겠어.
누구와도 엮이지 않고, 이대로 가리드의 곁에서 마지막을 맞이하리라.
“…그렇게 생각했는데.”
왜 자꾸 다가오는 거야?
소녀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미동조차 없는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렇기에 더 애처롭게 보이는 얼굴이었다.
카나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다은이 품에 손을 넣었다.
이내 품에서 빠져나온 그녀의 손에는 한 송이의 꽃이 들려 있었다.
“…?”
카나에게 다가간 다은은, 카나의 머리카락에 조심스럽게 꽃을 꽂아 주었다.
그러고는 눈물을 뚝뚝 흘리는 얼굴 그대로 의아하게 올려다보는 카나에게 살며시 웃었다.
“응. 역시 잘 어울려.”
이렇게 예쁜 아이가 꾸미지를 않다니. 전 세계적인 손해라니까.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말했다.
“왜 다가가냐고 물었지?”
그에 대한 답은 간단했다.
카나가 좋아서, 친해지고 싶었다.
여동생처럼 돌봐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카나가 그걸 원했으니까.”
“…내가, 원했다고?”
“응.”
지금 다은의 앞에 있는 것은 제국의 숙적도, 한 번의 칼질로 수십의 기사를 베어버리는 검사도, 최악의 레이드 보스도 아닌.
제 감정조차 알지 못하는 불쌍한 어린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