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허망한 것이다.
수많은 생명이 죽어 나가는 전쟁터에서는 더더욱.
불과 몇 시간 전에 같이 밥을 먹었던 전우가 눈을 감지도 못한 채 널브러진다.
하는 일마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던 상관이 피거품 끓는 소리와 함께 숨이 멎는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남편이든, 홀로 남은 노모를 모시고 있는 효자든.
전쟁의 비정한 칼날을 피해갈 순 없었다.
’사지 멀쩡히 돌아오면 기적이요, 작은 부상을 입고 돌아왔으면 천운이며, 몸 한구석이 날아가더라도 어쨌든 살아서 돌아왔으면 행운이다.’
오죽했으면 이런 말까지 있을까.
그 어떤 비극적인 사연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알려지지 못한 채 스러지는 전쟁터에서 목숨을 붙이고 돌아왔다는 건 그만큼 운 좋은 일이었다.
‘그래. 운 좋은 일.’
남자가 생각하기에,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운이었다.
어중간한 강함은 아무 의미 없다.
당장 남자가 살아나왔던 전장에서도 남자보다 강한 전우는 많았지만, 살아남은 것은 남자와 그의 동료 몇 명뿐이었다.
그들이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그저 다른 동료들보다 좀 더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무심코 몸을 돌리지 않았더라면.
때마침 날아든 검기가 조금만 옆으로 틀어졌다면.
‘…또 허탕이네.’
그리고, 아군을 무참하게 도륙한 악마가 흥미를 잃고 돌아가지 않았다면.
그날 남자가 잃은 것은 왼팔이 아니라 목숨이었을 것이다.
고작 칼질 몇 번으로 몰살에 가까운 피해를 입힌 악마가 돌아가고, 살아남은 패잔병들은 가까스로 도망쳤다.
그렇게 도망친 패잔병들의 사기가 어땠을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달랐다.
팔 한쪽을 잃고 전쟁터에서 쫓겨나듯 빠져나와 고향에 돌아간 후. 울면서 그를 안아주는 어머니의 품속에서 남자는 생각했다.
과연 그게 사람의 몸에서, 그것도 자신의 딸보다 어려 보이는 소녀에게서 나올 수 있는 무력인가.
남자는 깨달았다.
어중간한 강함은 의미가 없지만, 압도적인 강함이라면,
불운이 닥쳐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강함이라면….
살아남는 것은 운이지만, 행운과 불운을 가르는 것은 강함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남자는 하나 남은 팔로 검을 들었다.
언젠가, 악마에게 자신의 검이 닿는 날을 고대하며.
* * *
길었던 강림제가 끝나고, 성국을 떠나 여행길에 오른 게 벌써 며칠이나 되었다.
밥 먹고 말 타고, 다시 밥 먹고 말 타고를 반복하는 일상에서, 다은과 내가 빼먹지 않고 하는 게 있었으니.
바로 검술 훈련과 언어 공부였다.
“…두 분은 항상 이렇게 훈련하시는 건가요?”
셀린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아르키쉬를 배우고 있지만 아직 서툴고, 셀린은 그라닉을 아예 모르고.
그러니 셀린과 나는 유일하게 두 언어를 알고 구사할 수 있는 다은의 통역을 통해서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혹은 셀린이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아주아주 기초적인 단어만 쓰거나.
그렇게 해봤자 제대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건 똑같겠지만.
그리고, 우리의 대화를 통역해 줄 다은은 지금….
“….”
“음….”
대답이 없다. 시체인 듯하다.
땅바닥에 얼굴을 박은 채로 죽은 듯이 엎어져 있는 다은의 옆구리를 콕콕 찔러봤지만 여전히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저런…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도….
부디 극락왕생하기를.
사락.
얼마 되지 않는 흙을 그러모아 엎어져 있는 그녀의 몸에 뿌렸다.
“…언니 아직 안 잔다….”
“아, 살아났다.”
다은이 그어어, 하는 해괴망측한 소리와 함께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언데드?’
그 모습이 꼭 언데드가 땅 밑에서 기어 나오는 모습처럼 보여서.
…퇴치해야 하나? 하고, 나도 모르게 검을 만지작거리던 중, 셀린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도 나처럼 어딘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것처럼 보였다.
“셀린, 부탁해도 될까요…?”
“어, 얼마든지요.”
셀린의 손에서 흘러나온 황금빛 마나가 다은의 몸에 스며들자, 군데군데 난 생채기가 사라지고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다.
잔뜩 더러워진 옷과 지쳐 쓰러질 것 같은 표정은 여전했지만, 적어도 이젠 언데드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검을 지팡이 삼아 짚고 일어난 다은이 한숨을 푹 쉬었다.
“정말, 셀린에겐 늘 신세만 지네요. 셀린이 아니었으면 전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카나 님이 그 정도… 까지는….:”
“…솔직히 셀린도 장담 못 하겠죠?”
“아, 아니에요.”
“에이, 그러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보세요. 어차피 카나는 못 알아들을 테니 괜찮아요.”
“수녀 된 몸으로 어찌 뒤에서 험담할 수 있겠어요.”
“어허! 험담이라뇨, 큰일 날 소리를…! 저도 당연히 카나를 험담하고 싶지 않죠. 이건 그러니까… 그래, 그냥 셀린의 진솔한 의견을 듣고 싶은 거예요.”
“진솔한… 의견이요?”
“네.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 없이, 훈련의 난이도가 어떤지만 말해주셔도 돼요.”
“으음… 솔직히….”
“솔직히…?”
“많이 힘든 것 같긴 해요.”
“그렇죠?!”
셀린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더니 다은이 순식간에 생기를 되찾았다.
방금까지 죽어가던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극적인 변화였다.
“가끔은 성기사분들보다 더 힘들게 훈련하시는 것 같기도…. 아, 이건 훈련 강도가 방향성의 이야기예요.”
“어쨌든 힘들다는 얘기잖아요? 하이고, 카나가 사람 잡는다, 사람 잡아….”
“….”
드문드문 내 이름이 나오는 걸 보면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역시 답답하네.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게 답답해서, 말을 번역해 주는 마도구를 살까 고민도 해봤지만.
‘…가격이.’
가격을 알고 나서 빠르게 마음을 접었다.
아니, 접혔다고 하는 편이 맞을 수도.
아무리 쌓아 둔 돈이 많다고 해도 그렇게 큰돈을 쓰는 건 좀 그래.
이럴 줄 알았으면 에델한테 좋은 방법 없냐고 물어보기라도 할걸.
지구인들이 아르키쉬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걸 보면 에델이 수를 쓴 걸 텐데 말이야.
처음 에델과 대화했을 때는 감정적으로 몰려있는 상태였고, 두 번째 대화 때는 나눌 얘기가 너무 많았던 탓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지구니, 차원수니, 마대륙이니….
그런 스케일 큰 얘기를 하고 있는데, 번역기에 생각이 미칠 리가.
마족에 관한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에델이 사라져서 그럴 시간도 없었고.
일단 최대한 공부해 보고,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마도구를 사는 걸 고려해 봐야겠어.
돈이야 다시 벌면 되는 거니까.
“멀쩡한 것 같은데 조금만 더 할까?”
“…제발 살려주라.”
“…살려줬잖아?”
“그게, 정말 목숨만 붙여달라는 뜻이 아니라요….”
다은이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다… 으음….”
다은에게 말하던 나는 순간 그녀의 눈을 보고 멈칫했다.
본명은 알려줬지만, 가능하면 저니라고 불러달라고 했지.
그게 더 익숙하다고.
그러면서, 본명으로 불리고 싶은 마음이 들면 말할 테니까 그때는 본명으로 불러달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렇게 말하려니 좀 그렇지만.
‘너무 티 나는 거 아니야?’
물론 다은은 내가 알고 있다는 걸 꿈에도 모르고 있어서 그런 거겠지만.
나는 다은이 댄 핑계가 허접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의 장단에 맞춰주었다.
“저니가 가르쳐 달라고 했잖아.”
이렇게 가르치는 게 효과가 없었다면 나도 할 말이 없었겠지만.
“많이 나아졌어.”
이건 절대 다은의 기분이 좋아지라고 하는 빈말이 아니었다.
검을 잡는 자세 같은 기초적인 것은 물론이고, 전투 실력도 전보다 월등히 좋아졌다.
자기가 휘두르는 검에 자기가 겁을 집어먹던 버릇도 많이 고쳐졌고, 날아드는 공격에도 더 침착하게 반응할 수 있게 되었다.
“에, 에헤헤. 그, 그래?”
카나가 웬일로 칭찬을?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던 다은이었지만, 칭찬을 듣자 기분이 좋았는지 배시시 웃었다.
그러고 보면 그녀를 가르치면서 딱히 칭찬한 적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물론 칭찬할 만한 거리가 없어서 그런 거긴 하지만,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면 가끔은 칭찬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효과적인 교육을 위해서.
…응, 어디까지나 효율 때문에 그런 거야.
배시시 웃는 다은을 보니 불편했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할까?”
“그렇게 말하면 넘어갈 거 같아? 절대 안 해!”
행여나 붙잡을까 후다닥 도망가는 다은의 뒷모습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에이, 안 통하네.
* * *
타닥타닥.
나는 타오르는 모닥불을 반쯤 정신을 놓고 바라봤다.
인류의 발전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게 불이라는 말을 언뜻 들은 거 같은데.
그래서일까?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불이 타오르는 걸 보고 있으면 묘하게 마음이 차분해진다.
‘이렇게 마음을 놓은 게 얼마 만일까.’
쭉 생각해 보면….
적어도 단장 자리에 오른 이후로는 마음 놓고 쉰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아빠가 돌아가신 후로는.
왕족과 귀족 놈들은 시종일관 짜증 나게 하지, 제국과는 전쟁 중이지, 마물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지….
그라시스가 멸망하고, 거추장스럽던 홍염 기사단의 단장 자리를 벗은 후도 별다를 건 없었다.
언제 어디서 위협이 닥칠지 모르니 항상 어느 정도의 긴장 상태는 유지했어야 했으니까.
그러니, 내가 지금 이렇게 마음을 놓고 있는 건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다.
셀린의 성법 때문에 물리적인 위협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마음을 괴롭히는 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왠지 모르게 잘될 거란 생각이 들어서 큰 걱정은 안 되네.
도대체 언제부터 이런 낙관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내가 생각하기에도 우스운 일이라서, 피식 웃음이 나오려고 할 때였다.
“…다 됐다!”
별안간 다은이 환호성을 질렀다.
며칠 동안 밤마다 모닥불 앞에서 쪼그려 앉아서 하던 게 드디어 끝난 모양이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건지, 궁금해서 보려고 하면.
‘깜짝선물이니까 안 돼.’
-라고 하는 통에, 나는 그녀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알려고 마음먹으면 알지 못할 것도 없었지만, 그렇게 말하는데 억지로 알려고 하고 싶진 않고.
근데, 깜짝선물이라고 말하면 깜짝선물이 아니라 그냥 선물이 되는 거 아닌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부지런히 움직여 자리를 정리한 다은이 나에게 다가왔다.
“짜잔! 깜짝선물이야.”
“으, 으응… 깜짝 놀랐어. 설마 이런 걸 준비했을 줄이야.”
“푸흐흐, 뭐야 그게? 연기한 거야? 하나도 안 어울려!”
“….”
기껏 어울려 줬더니만.
볼을 불퉁하게 부풀리자 다은이 내 뺨을 붙잡았다.
“아우, 귀여워~”
“…흐즈 므.”
내 뺨을 장난감처럼 갖고 놀던 그녀가 손을 놓은 것은 내 눈이 세모꼴이 된 걸 본 후였다.
나는 은은한 열감이 느껴지는 뺨을 문지르며 말했다.
“그래서 이게 뭔데?”
다은이 종이 뭉치를 파라락 넘겼다.
한 데 묶인 종이들 사이사이로 언뜻언뜻 글자들이 내비쳤다.
“단어 카드야. 이게 있으면 공부하기도 쉽고, 셀린과 대화를 나누기도 편할 거 같아서.”
“?”
제 이름이 호명되자 멀리서 있던 셀린이 귀를 쫑긋거렸다.
슬쩍 엉덩이를 떼고 다가온 그녀가 내 손에 들린 것을 보고 작게 감탄했다.
“어머, 완성하셨네요.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흠. 제가 힘 좀 썼죠!”
종이 한 장 한 장에 적힌 그라닉과 아르키쉬.
그리고 이해를 돕기 위함인지 단어에 맞는 그림도 간략하게 그려져 있었다.
다은이 우쭐거리는 사이 셀린과 나는 그녀가 만든 단어 카드를 구경했다.
“물…고… 기?”
“네에. 물고기라는 단어네요.”
“…이건?”
“그건 ‘인형’이라는 단어예요.”
“아하.”
…그라닉으로 쓰여 있긴 했지만, 그림 때문에 당연히 괴물인 줄 알았는데 인형이었어?
다은의 그림 실력은 객관적으로 썩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마음은 전해져서.
“…고마워.”
나도 빙긋 웃으며 그녀에게 마음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