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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86

박살나버린 던전의 정경을 구경하던 아그라는 헛웃음을 흘렸다. 영원한 전쟁의 악마는 저리 쉽게 무너질 존재가 아니다.

대륙에 최초로 멸망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사내이며 수많은 국가를 전복시킨 악몽이고 수십의 전선을 홀로 이끌던 괴물이 자신이 이끄는 부하들에게 짓눌려 죽다니.

“참 대단한 계획이로구나. 주신의 사도를 괴롭히겠다더니 이게 무엇이냐. 혹여 내가 잘못 들은 것이냐? 사실은 아군을 괴롭히겠다 할 속셈이었던가?”

아그라는 교황을 향해 빈정거리면서 대지에 부활한 다른 악신들의 상황을 확인했다.

부활과 함께 대지를 집어삼켰어야 할 불꽃은 산에서 빠져나가지 못한 채 자신의 불꽃이 꺼져가는 광경을 보고 있다.

세상을 아무것도 아니며 무엇이건 될 수 있을 공허로 이끌어야 할 자는 점차 어둠에 집어삼켜지고 있었다.

본래 이 다음에 모습을 드러내야 할 어둠은 이미 스러진 지 오래이며 여태까지의 상황을 보아선 파괴라 하여 다를 게 없을 듯 했다.

결국 교황이 준비한 모든 것은 주신의 사도에게 그 어떤 피해도 입히지 못한 채 스러질 예정이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다 내던지는 것이 어떠냐. 네가 벌일 일이라 하여 별 다를 것도 없어 보인다만?”

상황이 이런데 교황이 본 목적이라 하여 제대로 이루어질까?

그건 너무도 희망적인 관측이었다. 이 쪽의 패를 모두 까발려가며 다가오는 주신의 사도 앞에서 어찌 승리를 거두겠는가.

“확실히 사도께선 제가 계획한 모든 걸 알고 계시는 듯 합니다. 과연 주신께서 택한 분의 지혜군요.”

“그래서 가만 당하기만 할 거냐?”

“으음. 사실 패배하기만 해도 나쁘진 않습니다만.”

주신의 기적에 의해 패배할 수 있다면 그것대로 영광스러운 일이다. 울분에 차서 슬퍼할 이유는 없다.

“저 분께 당당히 시련이 되겠노라 말씀드렸으니 무언가 다른 걸 준비해야겠죠.”

다만 사도께 약속을 드렸다.

당신의 시련이 되겠노라고.

저 분이 지금 너무도 드높은 시련이 되어 내 앞으로 오고 계신데 내가 아무것도 하질 않으면 거짓말쟁이가 되지 않나.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주신의 사도께 거짓을 고할 순 없다.

“저 분께서 벌이는 여러 일들은 대부분 던전 내부이기에 가능한 일인 듯 합니다. 바깥에서는 저런 기행을 펼치시는 일이 없었거든요.”

“그게 뭐 어쨌단 거냐.”

“던전을 끝내버리죠.”

던전의 폭주는 도저히 던전 안에 담을 수 없을만큼 막대한 양의 마물이 생겨나야 일어나는 현상이다.

헌데 이를 조금 비틀어서 던전이 그 어떤 것도 담을 수 없게 만든다면 인위적으로 폭주를 일으킬 수 있지 않겠나.

끝의 권능을 통해 던전을 끝낸다면 꽤 재밌는 일이 일어나겠지.

“세 번째 던전이 공략되는 동안에 준비를.”

“할 수 없을 듯 하구나.”

“저를 방해하실 겁니까?”

“아니.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단 이야기를 하려는 게다. 저를 보아라. 이미 세 번째 던전이 공략되기 직전이지 않나.”

옛 부하의 당혹스러운 얼굴을 보던 아그라는 히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네 끝이 다가오는구나.”

“당신의 끝도 마찬가지이지요.”

“글쎄다. 네가 실패한다면 내 끝은 멀고도 먼 곳으로 향할 터다만?”

교황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아그라를 향해 웃어준 후 아그라가 봉인된 구슬들을 챙겨 방 바깥으로 나왔다.

“성하. 무슨 일이 생기셨습니까?”

“악신이 부활할 위치를 바꿀 생각입니다.”

“갑자기 말입니까?”

“대륙에 혼란이 너무도 부족합니다. 주신의 사도께서 너무도 유능하신 탓에 본래 세상에 만연했어야 할 슬픔도 눈물도 고통도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질 않게 되었잖습니까.”

지금 대지에 가득 차 있는 것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다.

사람들은 주신의 사도라는 등불을 바라보고서 묵묵히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서로 싸우고 피를 흘리고 재물을 탐하고 질투하고 절망할 시간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려 하는 중이다.

분명 이는 옳은 일이지만 먼 미래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의 희망을 무너트려야한다.

위대하신 주신께서 오롯이 홀로 세상을 통치하게 하기 위해선 자잘한 희망을 짓밟고 혼돈을 불러들여야 했다.

“기각되었던 계획을 실행하겠습니다. 모든 이들을 불러오십시오.”

“성하. 그건.”

“지옥에 떨어질 각오라면 오래 전에 마치지 않았습니까. 벌이 두려워 어설프게 굴 바에야 지옥의 밑바닥에 떨어지는 편이 낫지요.”

“…알겠습니다.”

교황은 콧노래를 부르며 닫힌 문에 권능을 사용했다.

*

“노친네. 그 미친 짓을 진짜로 하게? 아니. 말릴 생각은 없어. 어찌 되었건 내가 할 일은 그대로잖아. 어디 한 번 제대로 해 봐. 여기 있는 놈들이 최선을 다해 발악하도록.”

연락을 끊은 라샤는 수정구를 대충 집어던지고는 기지개를 켰다.

“라샤님.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습니까?”

“너희 개새끼들이 알 필요 없는 일이야.”

그녀의 근처에 있던 이들은 포악스러워 보이는 행동에도 정중히 고갤 숙였다.

파괴의 신을 모시는 신도들에게 있어 라샤라는 존재는 또 하나의 신이나 다름 없었다.

“쯧. 엿 같은 놈들.”

라샤는 이들의 정중함을 싫어했다.

나름대로 힘을 지녔으면서 위를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고 굴복하는 놈들에게 무슨 가치가 있냐고.

타인에게 자신의 목표를 맡긴 쓰레기들에겐 살 가치 따위 없어.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쳐 죽이고 혼자 적을 마주하러 가고 싶지만 저들은 건드리면 우리 개같은 신님이 좆같은 짓을 하겠지. 빌어먹을.

“일어나. 병신들. 싸울 시간이다. 고기방패 노릇 할 준비는 됐겠지?”

“세상의 파괴와 회귀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파괴의 신을 모시는 자들은 하나 같이 정신의 어디가 이상한 놈들이다.

악신을 신앙하는 이들 중에 정상이 어디 있겠냐만은 이들은 더 심하다.

지금의 세계는 뒤틀렸으며 파괴해서 원시의 시대로 되돌리는 것만이 세상을 지키는 유일한 수라고 믿는 이들은 현실을 거쳐가는 과정일 뿐이라 여기기에 자신의 목숨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강자가 되려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라샤는 파괴의 사도가 되고 나서도 파괴의 신도들과 거리를 뒀고 가끔 만날 때에도 노골적으로 혐오감을 드러냈다.

“그럼 빨리 꺼져.”

“알겠습니다.”

꼴도 보기 싫은 개자식들이 떠나간 후, 라샤는 저 멀리서 내달려오는 군사를 흐뭇한 눈으로 지켜 봤다.

왔구나. 베네딕 알른.

네가 이 곳에 올 거라고 생각했어.

결국 날 막으려면 네가 올 수밖에 없으니까.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녹아내리는 눈꼬리로 흑색 갑옷의 기사를 지켜보던 라샤는 뒤 편의 던전을 잠시 살피다 건물 아래로 뛰어내렸다.

최초의 대결로부터 꽤 긴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때는 선명해.

참 만족스러운 싸움이었지.

이 정도면 충분하다 생각하면서 죽여달란 말을 꺼냈을 만큼.

근데 저 녀석은 내게 죽음을 허락하지 않았어.

자신의 아내가 그를 바라지 않을 것이란 개소리를 지껄이면서 말야.

그 때에 난 파괴의 신을 마주했고 그와 거래를 했어. 단 한 번의 만족스러운 전투를 위한 계약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 계약이 이루어질 순간이다.

대지의 진동.

뒤 편에서 들려오는 붕괴의 전조.

바람을 타고 몰려오는 회색 빛의 먼지.

그 너머에서 가만 서 있던 라샤는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걸어오는 소리를 들으며 콧노래를 불렀다.

“라샤.”

“오. 베네딕. 전혀 놀란 기색이 없네? 이미 내가 여기에 올 걸 알고 있었나봐?”

“우리 딸아이가 알려줬지.”

“나를 공략할 방법에 대해서도?”

“아니.”

“아냐? 왜?”

“굳이 그런 걸 알려주지 않아도 내가 이기니까.”

베네딕 알른은 흑색의 대검을 뽑아든 채 투구 너머로 라샤를 노려봤다.

“과거의 패배를 잊진 않았겠지?”

“당연하지! 그걸 어떻게 잊겠어! 그 시절의 네가 얼마나 멋졌는데!”

전선을 짓밟던 베네딕 알른은 그야말로 라샤가 그리는 무인의 이상향이었다.

“그치만 지금은 아냐.”

지금의 베네딕은 날카로움을 잃어버렸다.

안타까운 현실에 좌절하고, 갑작스레 돌아온 현실의 행복에 잠식되어, 평범한 강자로 변하고 말았다. 왕국의 늑대가 아닌 번견이 되었다.

“지금의 너라면 얼마든 이길 수 있어.”

그러니 라샤는 베네딕을 과거로 되돌릴 것이다. 파괴의 신이 부활한 지금 과거로 돌아오지 않고서는 안 된다는 걸 알려줘서 그날의 정경을 반복할테다.

그리고.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쓰레기들.”

라샤가 목소리를 높이자 각자의 위치에서 대기하던 파괴신의 신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건물 이곳저곳에서 석궁을 든 그들은 완벽하게 기사단을 포위하고 있었다.

“단순한 석궁이라고 생각하진 마. 저기엔 파괴의 권능이 깃들어있으니까. 어설프게 오러로 막으려 들었다간 오러채로 박살이 날 걸?”

파괴의 신이 부활하기 직전이기에 가능한 매복.

악신의 권능으로 가득 찬 도시에서 악신의 권능을 탐지하는 게 불가능하단 것을 노린 기습.

“얼마의 기사가 죽어야 베네딕 네가 미쳐 날뛸까. 참 궁금하네.”

라샤는 고갤 까딱이는 것으로 발사를 명령했지만 악신의 신도들은 기사를 공격하는 대신 라샤 쪽으로 화살촉을 돌렸다.

“…어라?”

“와. 진짜 몰랐어? 너 정말 돌대가리구나?”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세상의 파멸을 입에 담던 남자의 입에서 여성의 가벼운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제서야 라샤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를 이해했다.

“귀찮게 됐네.”

자신을 향해 화살이 쏟아졌지만 라샤는 당황하지도 않았고 화살을 피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위 쪽으로 손을 들더니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그녀에게 쏘아지던 모든 화살이 부러져선 바닥에 널부러졌다.

“아니지. 재밌게 된 건가?”

강자사냥은 자신을 찾아온 오롯이 즐거움만을 느꼈다.


           


Chapter 686

Chapter 686

박살나버린 던전의 정경을 구경하던 아그라는 헛웃음을 흘렸다. 영원한 전쟁의 악마는 저리 쉽게 무너질 존재가 아니다. 대륙에 최초로 멸망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사내이며 수많은 국가를 전복시킨 악몽이고 수십의 전선을 홀로 이끌던 괴물이 자신이 이끄는 부하들에게 짓눌려 죽다니. “참 대단한 계획이로구나. 주신의 사도를 괴롭히겠다더니 이게 무엇이냐. 혹여 내가 잘못 들은 것이냐? 사실은 아군을 괴롭히겠다 할 속셈이었던가?” 아그라는 교황을 향해 빈정거리면서 대지에 부활한 다른 악신들의 상황을 확인했다. 부활과 함께 대지를 집어삼켰어야 할 불꽃은 산에서 빠져나가지 못한 채 자신의 불꽃이 꺼져가는 광경을 보고 있다. 세상을 아무것도 아니며 무엇이건 될 수 있을 공허로 이끌어야 할 자는 점차 어둠에 집어삼켜지고 있었다. 본래 이 다음에 모습을 드러내야 할 어둠은 이미 스러진 지 오래이며 여태까지의 상황을 보아선 파괴라 하여 다를 게 없을 듯 했다. 결국 교황이 준비한 모든 것은 주신의 사도에게 그 어떤 피해도 입히지 못한 채 스러질 예정이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다 내던지는 것이 어떠냐. 네가 벌일 일이라 하여 별 다를 것도 없어 보인다만?” 상황이 이런데 교황이 본 목적이라 하여 제대로 이루어질까? 그건 너무도 희망적인 관측이었다. 이 쪽의 패를 모두 까발려가며 다가오는 주신의 사도 앞에서 어찌 승리를 거두겠는가. “확실히 사도께선 제가 계획한 모든 걸 알고 계시는 듯 합니다. 과연 주신께서 택한 분의 지혜군요.” “그래서 가만 당하기만 할 거냐?” “으음. 사실 패배하기만 해도 나쁘진 않습니다만.” 주신의 기적에 의해 패배할 수 있다면 그것대로 영광스러운 일이다. 울분에 차서 슬퍼할 이유는 없다. “저 분께 당당히 시련이 되겠노라 말씀드렸으니 무언가 다른 걸 준비해야겠죠.” 다만 사도께 약속을 드렸다. 당신의 시련이 되겠노라고. 저 분이 지금 너무도 드높은 시련이 되어 내 앞으로 오고 계신데 내가 아무것도 하질 않으면 거짓말쟁이가 되지 않나.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주신의 사도께 거짓을 고할 순 없다. “저 분께서 벌이는 여러 일들은 대부분 던전 내부이기에 가능한 일인 듯 합니다. 바깥에서는 저런 기행을 펼치시는 일이 없었거든요.” “그게 뭐 어쨌단 거냐.” “던전을 끝내버리죠.” 던전의 폭주는 도저히 던전 안에 담을 수 없을만큼 막대한 양의 마물이 생겨나야 일어나는 현상이다. 헌데 이를 조금 비틀어서 던전이 그 어떤 것도 담을 수 없게 만든다면 인위적으로 폭주를 일으킬 수 있지 않겠나. 끝의 권능을 통해 던전을 끝낸다면 꽤 재밌는 일이 일어나겠지. “세 번째 던전이 공략되는 동안에 준비를.” “할 수 없을 듯 하구나.” “저를 방해하실 겁니까?” “아니.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단 이야기를 하려는 게다. 저를 보아라. 이미 세 번째 던전이 공략되기 직전이지 않나.” 옛 부하의 당혹스러운 얼굴을 보던 아그라는 히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네 끝이 다가오는구나.” “당신의 끝도 마찬가지이지요.” “글쎄다. 네가 실패한다면 내 끝은 멀고도 먼 곳으로 향할 터다만?” 교황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아그라를 향해 웃어준 후 아그라가 봉인된 구슬들을 챙겨 방 바깥으로 나왔다. “성하. 무슨 일이 생기셨습니까?” “악신이 부활할 위치를 바꿀 생각입니다.” “갑자기 말입니까?” “대륙에 혼란이 너무도 부족합니다. 주신의 사도께서 너무도 유능하신 탓에 본래 세상에 만연했어야 할 슬픔도 눈물도 고통도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질 않게 되었잖습니까.” 지금 대지에 가득 차 있는 것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다. 사람들은 주신의 사도라는 등불을 바라보고서 묵묵히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서로 싸우고 피를 흘리고 재물을 탐하고 질투하고 절망할 시간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려 하는 중이다. 분명 이는 옳은 일이지만 먼 미래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의 희망을 무너트려야한다. 위대하신 주신께서 오롯이 홀로 세상을 통치하게 하기 위해선 자잘한 희망을 짓밟고 혼돈을 불러들여야 했다. “기각되었던 계획을 실행하겠습니다. 모든 이들을 불러오십시오.” “성하. 그건.” “지옥에 떨어질 각오라면 오래 전에 마치지 않았습니까. 벌이 두려워 어설프게 굴 바에야 지옥의 밑바닥에 떨어지는 편이 낫지요.” “...알겠습니다.” 교황은 콧노래를 부르며 닫힌 문에 권능을 사용했다. * “노친네. 그 미친 짓을 진짜로 하게? 아니. 말릴 생각은 없어. 어찌 되었건 내가 할 일은 그대로잖아. 어디 한 번 제대로 해 봐. 여기 있는 놈들이 최선을 다해 발악하도록.” 연락을 끊은 라샤는 수정구를 대충 집어던지고는 기지개를 켰다. “라샤님.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습니까?” “너희 개새끼들이 알 필요 없는 일이야.” 그녀의 근처에 있던 이들은 포악스러워 보이는 행동에도 정중히 고갤 숙였다. 파괴의 신을 모시는 신도들에게 있어 라샤라는 존재는 또 하나의 신이나 다름 없었다. “쯧. 엿 같은 놈들.” 라샤는 이들의 정중함을 싫어했다. 나름대로 힘을 지녔으면서 위를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고 굴복하는 놈들에게 무슨 가치가 있냐고. 타인에게 자신의 목표를 맡긴 쓰레기들에겐 살 가치 따위 없어.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쳐 죽이고 혼자 적을 마주하러 가고 싶지만 저들은 건드리면 우리 개같은 신님이 좆같은 짓을 하겠지. 빌어먹을. “일어나. 병신들. 싸울 시간이다. 고기방패 노릇 할 준비는 됐겠지?” “세상의 파괴와 회귀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파괴의 신을 모시는 자들은 하나 같이 정신의 어디가 이상한 놈들이다. 악신을 신앙하는 이들 중에 정상이 어디 있겠냐만은 이들은 더 심하다. 지금의 세계는 뒤틀렸으며 파괴해서 원시의 시대로 되돌리는 것만이 세상을 지키는 유일한 수라고 믿는 이들은 현실을 거쳐가는 과정일 뿐이라 여기기에 자신의 목숨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강자가 되려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라샤는 파괴의 사도가 되고 나서도 파괴의 신도들과 거리를 뒀고 가끔 만날 때에도 노골적으로 혐오감을 드러냈다. “그럼 빨리 꺼져.” “알겠습니다.” 꼴도 보기 싫은 개자식들이 떠나간 후, 라샤는 저 멀리서 내달려오는 군사를 흐뭇한 눈으로 지켜 봤다. 왔구나. 베네딕 알른. 네가 이 곳에 올 거라고 생각했어. 결국 날 막으려면 네가 올 수밖에 없으니까.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녹아내리는 눈꼬리로 흑색 갑옷의 기사를 지켜보던 라샤는 뒤 편의 던전을 잠시 살피다 건물 아래로 뛰어내렸다. 최초의 대결로부터 꽤 긴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때는 선명해. 참 만족스러운 싸움이었지. 이 정도면 충분하다 생각하면서 죽여달란 말을 꺼냈을 만큼. 근데 저 녀석은 내게 죽음을 허락하지 않았어. 자신의 아내가 그를 바라지 않을 것이란 개소리를 지껄이면서 말야. 그 때에 난 파괴의 신을 마주했고 그와 거래를 했어. 단 한 번의 만족스러운 전투를 위한 계약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 계약이 이루어질 순간이다. 대지의 진동. 뒤 편에서 들려오는 붕괴의 전조. 바람을 타고 몰려오는 회색 빛의 먼지. 그 너머에서 가만 서 있던 라샤는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걸어오는 소리를 들으며 콧노래를 불렀다. “라샤.” “오. 베네딕. 전혀 놀란 기색이 없네? 이미 내가 여기에 올 걸 알고 있었나봐?” “우리 딸아이가 알려줬지.” “나를 공략할 방법에 대해서도?” “아니.” “아냐? 왜?” “굳이 그런 걸 알려주지 않아도 내가 이기니까.” 베네딕 알른은 흑색의 대검을 뽑아든 채 투구 너머로 라샤를 노려봤다. “과거의 패배를 잊진 않았겠지?” “당연하지! 그걸 어떻게 잊겠어! 그 시절의 네가 얼마나 멋졌는데!” 전선을 짓밟던 베네딕 알른은 그야말로 라샤가 그리는 무인의 이상향이었다. “그치만 지금은 아냐.” 지금의 베네딕은 날카로움을 잃어버렸다. 안타까운 현실에 좌절하고, 갑작스레 돌아온 현실의 행복에 잠식되어, 평범한 강자로 변하고 말았다. 왕국의 늑대가 아닌 번견이 되었다. “지금의 너라면 얼마든 이길 수 있어.” 그러니 라샤는 베네딕을 과거로 되돌릴 것이다. 파괴의 신이 부활한 지금 과거로 돌아오지 않고서는 안 된다는 걸 알려줘서 그날의 정경을 반복할테다. 그리고.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쓰레기들.” 라샤가 목소리를 높이자 각자의 위치에서 대기하던 파괴신의 신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건물 이곳저곳에서 석궁을 든 그들은 완벽하게 기사단을 포위하고 있었다. “단순한 석궁이라고 생각하진 마. 저기엔 파괴의 권능이 깃들어있으니까. 어설프게 오러로 막으려 들었다간 오러채로 박살이 날 걸?” 파괴의 신이 부활하기 직전이기에 가능한 매복. 악신의 권능으로 가득 찬 도시에서 악신의 권능을 탐지하는 게 불가능하단 것을 노린 기습. “얼마의 기사가 죽어야 베네딕 네가 미쳐 날뛸까. 참 궁금하네.” 라샤는 고갤 까딱이는 것으로 발사를 명령했지만 악신의 신도들은 기사를 공격하는 대신 라샤 쪽으로 화살촉을 돌렸다. “...어라?” “와. 진짜 몰랐어? 너 정말 돌대가리구나?”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세상의 파멸을 입에 담던 남자의 입에서 여성의 가벼운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제서야 라샤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를 이해했다. “귀찮게 됐네.” 자신을 향해 화살이 쏟아졌지만 라샤는 당황하지도 않았고 화살을 피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위 쪽으로 손을 들더니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그녀에게 쏘아지던 모든 화살이 부러져선 바닥에 널부러졌다. “아니지. 재밌게 된 건가?” 강자사냥은 자신을 찾아온 오롯이 즐거움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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