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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89

검성 유덴은 검 위에 손을 올린 채 상대를 살폈다.

여태 꽤 강하게 밀어붙였는데도 소모된 기색이 느껴지질 않아.

아직까진 여유가 꽤 있지만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

분명해. 저 새끼도 날 가늠하고 있어.

그도 그럴 게 악신의 중심인 아그라의 권능을 품은 놈이 이 정도밖에 못할 리 없잖아.

지난 번 어둠의 악신을 상대해봤을 때 느꼈어. 신이라는 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존재인가를.

세상에 존재하는 규칙을 자신이 바라는 대로 비틀어버리는 자들은 왜 자신이 신의 이름을 지녔는가를 증빙했다.

지금도 가끔 상상한다.

만약 그 자리에 에르기누스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악신의 권능을 온몸으로 받아 내야 하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을지.

이러한 상상의 결과는 언제나 같다.

불가능하다.

홀로 어둠의 악신 앞에 선다면 그녀는 패배하리라.

신과 인간의 격차를 좁히지 못한 채 쓰러질 수밖에 없을 거다.

지금 그녀의 앞에 있는 교황이라 하여 다를까? 유덴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주신의 사도가 말하길 저 자는 악신의 권능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상태이며, 악신의 봉인을 어느 정도 풀어 힘을 거머쥔 상태라고 말했어.

그러니 지금처럼 무력하게 구경만 하고 있는 건 이상해.

“이제 끝나셨습니까?”

교황이 느슨히 꺼낸 말에 검성이 쓰게 웃었다.

“안 끝났다면? 계속 맞아 줄 거야?”

“아뇨. 이제는 슬슬 움직여야 할 때가 되어서요. 조금 더 시간을 끌다간 사도께서 오실 듯 하거든요.”

“하하하. 그 자그마한 여자애가 그렇게도 무서워?”

“예. 두렵습니다. 그 분께 저의 무능을 보여야 한단 사실이.”

과장되게 몸을 떤 교황은 이내 어깨를 으쓱이고서 자신의 손가락 위에 자그마한 구체를 만들어 냈다.

“성기사의 기억을 지닌 이여. 당신께선 알고 계실 겁니다. 끝의 권능이란 게 무엇인지를.”

“…당연히 알고 있지. 네 놈이 어떤 방식으로 끝의 권능을 다뤘는지에 대한 것도 말이야.”

“그럼 필사적으로 막아보시지요.”

끝이란 단어는 무척이나 추상적이다.

사전적인 정의는 분명 존재하지만 그 이상으로 많은 범위에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고 있지.

그렇기 때문에 끝의 권능을 다루기 위해선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끝이란 단어를 최대한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해 세상을 휘저을 수 있으니까.

“이제부터 제 신체능력은 끝에 달할 것입니다.”

“뭐?”

“이런 의미입니다.”

자신의 바로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검성은 다급히 검을 휘둘렀지만 충격을 완전히 줄이진 못했다.

자신이 베어낸 건물 바깥으로 나가떨어진 검성은 육신의 고통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검의 소리가 좋지 못해. 방금 전 일격에 부러진 건가.

하! 돌아버리겠군. 수백년도 더 산 노친네가 뭐 저리 빠릿빠릿한지!

입가의 피를 대충 뱉은 그녀는 자신의 검을 내던지고 오러만으로 검을 구성했다.

뭘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그걸 가만 보고만 있을 것 같아?

오러로 이루어진 검이 내질러짐과 동시에 경로상에 존재하는 모든 게 베어나간다.

교황이 펼치려던 흑색의 권능마저도. 그제서야 검성의 온전함을 눈치챈 교황은 아래를 바라보고서 어깨를 으쓱였다.

“당신과 저의 멈이 끝에 달했군요.”

일순에 좁혀진 거리. 이미 내질러질 준비를 마친 주먹.

그리고 이를 예상이라도 했단 것처럼 이미 휘둘러지고 있는 검.

권과 검이 맞닿으며 충격파를 일으킨다.

제멋대로 휘날리는 머리칼 너머로 검성은 교황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 어떤 동요도 묻어나오지 않는 평온한 얼굴을.

“열 받네.”

“왜 그러십니까? 저 나름 당신의 강함을 인정하기에 많은 걸 보여드리고 있는 것입니다만.”

“그 태도가 열이 오른단 거야.”

검성은 투덜거리면서도 교황의 강함을 인정했다.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겉모습에 반해 그가 지닌 전투논리는 진짜다. 하긴 그렇겠지.

신화의 시대에 영웅들과 함께 싸워왔던 경험들이 어디 갈 리가 없으니.

“진심을 안 내면 꼬맹이가 먼저 찾아올걸?”

이 정도로는 결코 쓰러지지 않을 테니까. 검성의 사나운 웃음에 교황이 눈을 끔뻑이다 수긍했다.

“당신의 말이 옳군요. 할 일이 많은데 여기서 시간을 길게 끌 순 없죠.”

교황의 말과 동시에 그의 주변에 수없이 많은 권능들이 다시금 떠오른다.

이전이었다면 별 어려움 없이 모든 걸 베어냈을 검성이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의 앞에는 사나운 기세로 자신을 몰아붙이는 교황이 있었다.

신화 시대부터 지금까지 쌓아온 그의 강함은 검성이란 천재에게도 틈을 허락하지 않을 지경이었으니 모든 걸 베어내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빛이여.”

낙뢰에 가까운 수준의 광량과 함께 떨어진 빛이 악신의 권능 태반을 물리치고 그 빛의 한 가운데에서 모습을 드러낸 기사가 교황을 향해 달려든다.

“지킬 사람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그들 자신을 지킬 능력이 있다!”

검성 하나만 있었을 때에도 팽팽했던 대치다.

신화의 시대를 살았던 영웅이 참전함에 따라 균형이 무너진다.

거의 처음으로 합을 맞춰보는 인형과 검성이지만 둘의 연계에 어설픔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어느 쪽이건 자신이 추구하는 무의 극한에 가까운 이들이다.

따로 말하지 않아도 그 순간에 해야 하는 최선이 무엇인지 둘은 알고 있다.

“제 권은 극에 달했습니다.”

허나 둘의 주도는 일순에 무너졌다.

교황이 작게 무어라 중얼거리고서 권을 내지른 순간 방패를 내민 인형이 하늘 위로 떠오른 것이다.

“그리고 당신들의 재능은 끝나가고 있군요.”

악신의 권능이 발현되고 있는데, 저걸 모두 다 벨 순 없어.

제기랄! 악신의 권능이 발현된 그 순간 검성은 자신의 마음에 망설임이 깃드는 걸 느꼈다.

아핫. 씹. 재능이 끝나간다는 게 이런 의미구나?

여태 감각으로 행했던 모든 일들에 의구심을 품게 되다니.

“이런 상황에서도 버틸 수 있겠습니까?”

“당연한 걸 왜 물어봐. 등신아!”

근데 그게 무슨 상관이지? 원래 검을 휘두른다는 건 수많은 망설임을 마주한 끝에 정답을 고르는 일이야.

이제와 내 재능을 의심하게 됐다 한들 여태 내가 내려 온 수많은 답들은 변치 않아.

지금 이 순간 내가 택해야 할 정답은 정해져 있다고!

“뒈져!”

흩어졌다 다시금 되돌아온 교황의 얼굴에 감탄이 서린다.

“주신의 사도께서 당신을 택한 이유가 있음을 새삼 알게 되는 군요.”

“아. 그러셔!?”

“허나 저희의 대화는 여기까지로 해야 할 듯 합니다. 주신의 사도께서 마지막 던전의 공략을 끝마치셨거든요.”

악신 아그라가 가장 아끼던 네 명의 수하.

오늘날까지도 지하 깊은 곳에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다 위대한 신을 위해 부활한 넷은 단 한 사람.

루시 알른이라는 여자아이의 힘 앞에 허무하게 스러졌다.

대지를 지옥으로 만들고, 이름만으로 사람들에게 공포를 선사하고, 그 누구보다 끝을 향해 빠르게 내달려야 할 이들이 그 무엇도 남기지 못한 채 세상에서 지워져버렸다.

다른 악신들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밀리며 등장한 불의 악신은 마법사들의 연계 아래에 식어가고 있으며, 공허의 악신은 어둠의 신과 요정들의 여왕이 지닌 권능에 잡아먹혀가는 도중이고, 파괴의 악신 또한 그 어떤 것도 부수지 못한 채 자기 자신이 파괴되어가는 것만을 보고 있다.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다. 신화의 시대가 끝나갈 무렵에도 이토록 절망적인 순간은 없었다.

그리고 이토록 주신의 권위가 드높은 때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만큼이나.

교황이 꿈꾸던 순간이 찾아온 일은 대륙의 역사를 죽어라 뒤져봐도 나오지 않으리라.

“앞서 말씀을 드렸지요. 제가 이 세상에 많은 것들을 준비해 두었다고.”

“…그게 뭐.”

“제가 언제부터 이 날을 기다렸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상함을 눈치챈 검성이 앞으로 내달리려는 순간 교황이 저 먼 곳으로 향한다.

아니다. 다르다.

둘이 서 있는 위치는 같다. 그저 둘 사이에 존재해야 할 끝이 사라졌을 뿐.

“대지 아래에 머물던 것들의 끝이 멀어지는 게 보입니다.”

이를 악물고서 권능을 베어낸 검성이 교황의 목을 날렸지만 허공으로 날아가는 와중에도 교황의 입가에 새겨진 웃음은 지워지지 않았다.

“악신 아그라를 봉인해두었던 족쇄들이 점차 삭아가는 것이 제 눈에 보입니다.”

“씨발! 진짜 좀!”

“인간의 시대가 종말을 맞이 하는 것이 보입니다.”

검성이 내지른 검에 의해 가루가 되었던 교황이 성지의 교회 옆에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서 그가 교회에 손을 가져다댄 순간 영원토록 무너지지 않을 듯 했던 건물이 휘청하고 기울더니 가파르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신화의 시대가 이 곳에 자리할 것입니다.”

푸르렀던 하늘이 검은 빛으로 물들고, 상쾌하던 바람이 일순에 그치고, 사람들의 간절한 기도 소리가 세상에서 지워지고, 그 모든 공백을 대신하듯 무거운 공기가 세상을 가득 채운다.

“자아. 위대하신 주신이시여. 대지에 내려오소서. 간절히 당신을 찾아 헤매는 어린양들을 구원하기 위해 대지에 발을 디디소서. 당신께 모든 걸 내어주기 위해 준비한 것들을 손에 쥐고서 진정 이 세상을 위한 신이 되소서.”

교황은 하늘의 어둠이 걷히는 걸 보고서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위대한 주신이시여! 이 어린양의 부름에 답하시나이까!

“푸하핳!♡ 눈 초롱초롱한 것 좀 봐!♡ 완전 등신 같아!♡”

뒤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다급히 고갤 돌린 교황은 루시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입술을 떨었다.

“어찌 벌써 이 곳에.”

“야♡ 허접주신이 너한테 대답해줄 거라고 생각해?♡ 말했잖아♡ 걔 얼빠라니까?♡ 너처럼 추한 노친네한테는 아무 관심도 없다고~♡ 주제 파악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럴 리 없다 생각합니다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괜찮습니다. 그렇다면 그 분이 대지에 내려올 수밖에 없도록 하면 되니까요.”

교황이 품 안에 있던 구슬들을 바닥에 떨어트리자 유리구슬이 산산조각나며 그 안에 담겨 있던 불온한 기운들이 세상에 퍼진다.

“이미 신화의 시대는 시작되었습니다. 사도시여.”

“그래서?”

“당신이 이를 막으실 수 있겠습니까?”

“당연한 걸 왜 물어보는 지 모르겠네♡ 하여간 생긴 것처럼 멍청하다니까♡”


           


Chapter 689

Chapter 689

검성 유덴은 검 위에 손을 올린 채 상대를 살폈다. 여태 꽤 강하게 밀어붙였는데도 소모된 기색이 느껴지질 않아. 아직까진 여유가 꽤 있지만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 분명해. 저 새끼도 날 가늠하고 있어. 그도 그럴 게 악신의 중심인 아그라의 권능을 품은 놈이 이 정도밖에 못할 리 없잖아. 지난 번 어둠의 악신을 상대해봤을 때 느꼈어. 신이라는 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존재인가를. 세상에 존재하는 규칙을 자신이 바라는 대로 비틀어버리는 자들은 왜 자신이 신의 이름을 지녔는가를 증빙했다. 지금도 가끔 상상한다. 만약 그 자리에 에르기누스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악신의 권능을 온몸으로 받아 내야 하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을지. 이러한 상상의 결과는 언제나 같다. 불가능하다. 홀로 어둠의 악신 앞에 선다면 그녀는 패배하리라. 신과 인간의 격차를 좁히지 못한 채 쓰러질 수밖에 없을 거다. 지금 그녀의 앞에 있는 교황이라 하여 다를까? 유덴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주신의 사도가 말하길 저 자는 악신의 권능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상태이며, 악신의 봉인을 어느 정도 풀어 힘을 거머쥔 상태라고 말했어. 그러니 지금처럼 무력하게 구경만 하고 있는 건 이상해. “이제 끝나셨습니까?” 교황이 느슨히 꺼낸 말에 검성이 쓰게 웃었다. “안 끝났다면? 계속 맞아 줄 거야?” “아뇨. 이제는 슬슬 움직여야 할 때가 되어서요. 조금 더 시간을 끌다간 사도께서 오실 듯 하거든요.” “하하하. 그 자그마한 여자애가 그렇게도 무서워?” “예. 두렵습니다. 그 분께 저의 무능을 보여야 한단 사실이.” 과장되게 몸을 떤 교황은 이내 어깨를 으쓱이고서 자신의 손가락 위에 자그마한 구체를 만들어 냈다. “성기사의 기억을 지닌 이여. 당신께선 알고 계실 겁니다. 끝의 권능이란 게 무엇인지를.” “...당연히 알고 있지. 네 놈이 어떤 방식으로 끝의 권능을 다뤘는지에 대한 것도 말이야.” “그럼 필사적으로 막아보시지요.” 끝이란 단어는 무척이나 추상적이다. 사전적인 정의는 분명 존재하지만 그 이상으로 많은 범위에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고 있지. 그렇기 때문에 끝의 권능을 다루기 위해선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끝이란 단어를 최대한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해 세상을 휘저을 수 있으니까. “이제부터 제 신체능력은 끝에 달할 것입니다.” “뭐?” “이런 의미입니다.” 자신의 바로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검성은 다급히 검을 휘둘렀지만 충격을 완전히 줄이진 못했다. 자신이 베어낸 건물 바깥으로 나가떨어진 검성은 육신의 고통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검의 소리가 좋지 못해. 방금 전 일격에 부러진 건가. 하! 돌아버리겠군. 수백년도 더 산 노친네가 뭐 저리 빠릿빠릿한지! 입가의 피를 대충 뱉은 그녀는 자신의 검을 내던지고 오러만으로 검을 구성했다. 뭘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그걸 가만 보고만 있을 것 같아? 오러로 이루어진 검이 내질러짐과 동시에 경로상에 존재하는 모든 게 베어나간다. 교황이 펼치려던 흑색의 권능마저도. 그제서야 검성의 온전함을 눈치챈 교황은 아래를 바라보고서 어깨를 으쓱였다. “당신과 저의 멈이 끝에 달했군요.” 일순에 좁혀진 거리. 이미 내질러질 준비를 마친 주먹. 그리고 이를 예상이라도 했단 것처럼 이미 휘둘러지고 있는 검. 권과 검이 맞닿으며 충격파를 일으킨다. 제멋대로 휘날리는 머리칼 너머로 검성은 교황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 어떤 동요도 묻어나오지 않는 평온한 얼굴을. “열 받네.” “왜 그러십니까? 저 나름 당신의 강함을 인정하기에 많은 걸 보여드리고 있는 것입니다만.” “그 태도가 열이 오른단 거야.” 검성은 투덜거리면서도 교황의 강함을 인정했다.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겉모습에 반해 그가 지닌 전투논리는 진짜다. 하긴 그렇겠지. 신화의 시대에 영웅들과 함께 싸워왔던 경험들이 어디 갈 리가 없으니. “진심을 안 내면 꼬맹이가 먼저 찾아올걸?” 이 정도로는 결코 쓰러지지 않을 테니까. 검성의 사나운 웃음에 교황이 눈을 끔뻑이다 수긍했다. “당신의 말이 옳군요. 할 일이 많은데 여기서 시간을 길게 끌 순 없죠.” 교황의 말과 동시에 그의 주변에 수없이 많은 권능들이 다시금 떠오른다. 이전이었다면 별 어려움 없이 모든 걸 베어냈을 검성이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의 앞에는 사나운 기세로 자신을 몰아붙이는 교황이 있었다. 신화 시대부터 지금까지 쌓아온 그의 강함은 검성이란 천재에게도 틈을 허락하지 않을 지경이었으니 모든 걸 베어내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빛이여.” 낙뢰에 가까운 수준의 광량과 함께 떨어진 빛이 악신의 권능 태반을 물리치고 그 빛의 한 가운데에서 모습을 드러낸 기사가 교황을 향해 달려든다. “지킬 사람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그들 자신을 지킬 능력이 있다!” 검성 하나만 있었을 때에도 팽팽했던 대치다. 신화의 시대를 살았던 영웅이 참전함에 따라 균형이 무너진다. 거의 처음으로 합을 맞춰보는 인형과 검성이지만 둘의 연계에 어설픔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어느 쪽이건 자신이 추구하는 무의 극한에 가까운 이들이다. 따로 말하지 않아도 그 순간에 해야 하는 최선이 무엇인지 둘은 알고 있다. “제 권은 극에 달했습니다.” 허나 둘의 주도는 일순에 무너졌다. 교황이 작게 무어라 중얼거리고서 권을 내지른 순간 방패를 내민 인형이 하늘 위로 떠오른 것이다. “그리고 당신들의 재능은 끝나가고 있군요.” 악신의 권능이 발현되고 있는데, 저걸 모두 다 벨 순 없어. 제기랄! 악신의 권능이 발현된 그 순간 검성은 자신의 마음에 망설임이 깃드는 걸 느꼈다. 아핫. 씹. 재능이 끝나간다는 게 이런 의미구나? 여태 감각으로 행했던 모든 일들에 의구심을 품게 되다니. “이런 상황에서도 버틸 수 있겠습니까?” “당연한 걸 왜 물어봐. 등신아!” 근데 그게 무슨 상관이지? 원래 검을 휘두른다는 건 수많은 망설임을 마주한 끝에 정답을 고르는 일이야. 이제와 내 재능을 의심하게 됐다 한들 여태 내가 내려 온 수많은 답들은 변치 않아. 지금 이 순간 내가 택해야 할 정답은 정해져 있다고! “뒈져!” 흩어졌다 다시금 되돌아온 교황의 얼굴에 감탄이 서린다. “주신의 사도께서 당신을 택한 이유가 있음을 새삼 알게 되는 군요.” “아. 그러셔!?” “허나 저희의 대화는 여기까지로 해야 할 듯 합니다. 주신의 사도께서 마지막 던전의 공략을 끝마치셨거든요.” 악신 아그라가 가장 아끼던 네 명의 수하. 오늘날까지도 지하 깊은 곳에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다 위대한 신을 위해 부활한 넷은 단 한 사람. 루시 알른이라는 여자아이의 힘 앞에 허무하게 스러졌다. 대지를 지옥으로 만들고, 이름만으로 사람들에게 공포를 선사하고, 그 누구보다 끝을 향해 빠르게 내달려야 할 이들이 그 무엇도 남기지 못한 채 세상에서 지워져버렸다. 다른 악신들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밀리며 등장한 불의 악신은 마법사들의 연계 아래에 식어가고 있으며, 공허의 악신은 어둠의 신과 요정들의 여왕이 지닌 권능에 잡아먹혀가는 도중이고, 파괴의 악신 또한 그 어떤 것도 부수지 못한 채 자기 자신이 파괴되어가는 것만을 보고 있다.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다. 신화의 시대가 끝나갈 무렵에도 이토록 절망적인 순간은 없었다. 그리고 이토록 주신의 권위가 드높은 때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만큼이나. 교황이 꿈꾸던 순간이 찾아온 일은 대륙의 역사를 죽어라 뒤져봐도 나오지 않으리라. “앞서 말씀을 드렸지요. 제가 이 세상에 많은 것들을 준비해 두었다고.” “...그게 뭐.” “제가 언제부터 이 날을 기다렸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상함을 눈치챈 검성이 앞으로 내달리려는 순간 교황이 저 먼 곳으로 향한다. 아니다. 다르다. 둘이 서 있는 위치는 같다. 그저 둘 사이에 존재해야 할 끝이 사라졌을 뿐. “대지 아래에 머물던 것들의 끝이 멀어지는 게 보입니다.” 이를 악물고서 권능을 베어낸 검성이 교황의 목을 날렸지만 허공으로 날아가는 와중에도 교황의 입가에 새겨진 웃음은 지워지지 않았다. “악신 아그라를 봉인해두었던 족쇄들이 점차 삭아가는 것이 제 눈에 보입니다.” “씨발! 진짜 좀!” “인간의 시대가 종말을 맞이 하는 것이 보입니다.” 검성이 내지른 검에 의해 가루가 되었던 교황이 성지의 교회 옆에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서 그가 교회에 손을 가져다댄 순간 영원토록 무너지지 않을 듯 했던 건물이 휘청하고 기울더니 가파르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신화의 시대가 이 곳에 자리할 것입니다.” 푸르렀던 하늘이 검은 빛으로 물들고, 상쾌하던 바람이 일순에 그치고, 사람들의 간절한 기도 소리가 세상에서 지워지고, 그 모든 공백을 대신하듯 무거운 공기가 세상을 가득 채운다. “자아. 위대하신 주신이시여. 대지에 내려오소서. 간절히 당신을 찾아 헤매는 어린양들을 구원하기 위해 대지에 발을 디디소서. 당신께 모든 걸 내어주기 위해 준비한 것들을 손에 쥐고서 진정 이 세상을 위한 신이 되소서.” 교황은 하늘의 어둠이 걷히는 걸 보고서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위대한 주신이시여! 이 어린양의 부름에 답하시나이까! “푸하핳!♡ 눈 초롱초롱한 것 좀 봐!♡ 완전 등신 같아!♡” 뒤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다급히 고갤 돌린 교황은 루시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입술을 떨었다. “어찌 벌써 이 곳에.” “야♡ 허접주신이 너한테 대답해줄 거라고 생각해?♡ 말했잖아♡ 걔 얼빠라니까?♡ 너처럼 추한 노친네한테는 아무 관심도 없다고~♡ 주제 파악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럴 리 없다 생각합니다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괜찮습니다. 그렇다면 그 분이 대지에 내려올 수밖에 없도록 하면 되니까요.” 교황이 품 안에 있던 구슬들을 바닥에 떨어트리자 유리구슬이 산산조각나며 그 안에 담겨 있던 불온한 기운들이 세상에 퍼진다. “이미 신화의 시대는 시작되었습니다. 사도시여.” “그래서?” “당신이 이를 막으실 수 있겠습니까?” “당연한 걸 왜 물어보는 지 모르겠네♡ 하여간 생긴 것처럼 멍청하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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