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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92

“영애님?!”

페이비의 놀람을 무시한 채 일어나 그녀를 끌어안은 채 물러난다.

내 뒤를 교황이 따라붙는 게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난 혼자가 아니니까. 내 눈빛을 읽은 아서와 프레이와 검성이 교황을 향해 검을 휘두른다.

잘려나간 사지를 복구하며 교황이 집요하게 달려오지만 연이어지는 검격 속에서 거리를 완전히 좁히기란 불가능했다.

“끝을 고한다!”

그게 답답했던 듯 교황이 권능까지 사용했지만 그 순간 인형이 방패로 내 앞을 가로막았다.

내 방패와는 달리 육중한 무게감이 충격을 받아내며 대지가 살짝 진동한다.

“버티면 되는 겁니까?!”

“그래! 허접아!”

어차피 이제 아그라의 부활을 멈추는 건 불가능하다.

아그라가 교황에게 잡아먹힌 이상 그는 자연스레 악신의 자리를 대체하게 되겠지.

그리고 그 끝에 교황은 신화의 시대를 불러올 거점이 될 것이다.

그러니 그 순간을 노리는 거다.

교황이 악신의 자리에 도달하는 순간을.

끝의 권능이 선사하는 힘 앞에 혼란스러워 하는 그 때를.

저 정도 되는 인물마저도 자신을 제어하지 못할 타이밍을.

이 성물을 그 때를 위해 준비한 물건이다.

교황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그때만을 위하여.

“그대들이 접근할 자격을 끝내겠습니다.”

페이비의 손을 맞잡고 다시금 성물에 기운을 넣으려던 순간 교황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교황의 주변에 달려들었던 이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뒤로 밀려났다.

접근 자체를 허락받지 못한 것처럼.

프레이나 검성이 베어주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들조차도 검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 뿐 검격을 내지르진 못했다.

악신의 권능이 저들의 의지마저 방해한다는 증빙이겠지. 제기랄.

“뭐하는 거야♡ 허접들♡ 저딴 쓰레기한테 동정심이라도 느껴?♡ 푸하핳♡ 같잖네 정말♡”

페이비에게서 손을 떼고 비웃음과 함께 정화의 권능을 퍼트리자 그제서야 사람들이 하나 둘 앞으로 향했다.

내가 예상한 것보다 악신의 권능이 강해.

본래 예상했던 것보다 나와 허접주신이 더 찬양을 받은 반동인가.

이렇게 되면 나 없이는 전선이 유지될 수 없을 텐데. 어떻게 해야 하지?

곤란하단 생각에 혀를 차고 있던 중 할아버지가 다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루시야! 굳이 네가 제어할 필요 없다!>

‘자세히! 빨리!’

<지금 넌 주신에게 권능을 부여받은 게 아니다! 권능의 선택을 받은 거다! 그러니 신들이 그러는 것처럼 네가 권능을 나누어줄 수 있다!>

‘…네?’

아니 뭔 미친.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내가 진짜 신이라도 된 거 같잖아!

너무 허황된 이야기에 순간 당황한 나였지만 이제와서 망설이기엔 상황이 좋지 못했다.

신이고 나발이고 아무래도 좋아.

지금 상황에 승기를 붙잡을 수 있다면 말도 안 되는 역할이라도 기꺼이 맡아줄게!

“페도놈들♡ 나한테 잘 보이고 싶으면 친구 눈치 좀 봐야 할 걸?♡ 너네들 따위론 내 마음에 들 리가 없잖아♡ 발악해야지♡ 자!♡”

페이비를 붙잡고서 권능에 명령을 내린 순간 내가 지닌 빛 중 일부가 페이비에게로 흘러들어갔다.

“허접 페이비.”

“네! 영애님! 당신께서 하고자 하는 말씀이 무엇인지 알 것 같습니다!”

…응?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지금 뭘 해준 건지도 설명 안 했잖아.

당황해서 눈을 끔뻑이고 있으려니 페이비가 성물 안에 빛을 담았다.

그건 분명 내가 지닌 정화의 권능이었다.

권능이란 게 그렇게 쉽게 다룰 수 있는 거였나?

난 제대로 권능을 다루기 위해서 며칠을 바쳤던 걸로 기억하는데.

“영애님! 조이에게도 권능을 나누어 주세요! 조이가 있으면 한층 더 완벽하게 기적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다른 이들이 시간을 버는 동안 페이비가 시킨 대로 조이에게도 권능을 나누어줬다.

“…과연. 저 성물이 증폭기군요.”

너. 너도 바로 이해하는 거야?

왜?!

이래서 재능충놈들은!

“이래놓고 얼빵한 짓 하기만 해봐. 평생 괴롭혀 줄 거야.”

“얼빵한 짓 안 해도 평생 그러실 거잖아요?”

조이의 웃음을 본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서 다시금 앞으로 고갤 돌렸다.

나랑 안 어울리는 일이라는 건 느끼고 있었어.

내 근본은 성직자보단 기사에 가까우니까.

신성을 다루는 것도 마법진을 만들어내는 것도 내겐 어려운 일이었지.

그렇지만 페이비와 조이에겐 아냐.

에르기누스가 인정한 천재인 조이와 수백 명의 신성을 집약한 성물을 가뿐히 컨트롤 하는 성녀 페이비라면 내가 만들려던 기적보다도 더 깔끔하고 안정된 기적을 그려줄 거야.

그러니 내가 해야 할 일은 그저 시간을 끄는 거지.

모두의 앞에 서서 모든 게 완성될 때까지.

탱커 답게.

두 사람에 대한 믿음이 날 앞으로 이끌었다.

방패를 치켜 들고 신성을 두르고 정화의 권능을 주변으로 펼치며 걸음마다 어둠을 몰아낸다.

“덤벼♡ 놀아줄게♡ 허~접아♡”

“흐음. 기꺼이 그러겠습니다.”

날 노리고 달려드는 교황을 보며 방패를 치켜든다.

악신을 집어삼킨 교황은 이전보다 빠르고 강하지만 어째선지 내 눈에는 지난번이 더 까다롭게 느껴졌다.

아직 그가 악신의 힘에 적응하지 못한 탓이겠지.

웃으며 방패를 앞으로 내민 순간 청량한 소리와 함께 교황의 주먹이 뒤로 물러나는 게 보였다.

잠시나마 생긴 틈.

그 틈을 노려 다른 이들이 무기를 뽑아드는 가운데에서 교황은 즐거운 듯 콧노래를 불렀다.

“허나 사도님. 정말 그러셔도 되겠습니까? 지금 이 대지는 시작보다는 끝에 가까울 터입니다만.”

교황이 웃으며 손가락을 위로 치켜 든 순간 대지가 갑자기 꺼지더니 깊고도 깊은 어둠이 모습을 드러냈다.

던전. 악신의 수하가 지하에 존재했다고?

게임 속에서도 이런 이벤트는 존재한 적이 없었는데?

“꺼져!♡ 역겨운 새끼야!♡”

우리가 지하로 떨어지기 전 정화의 권능을 퍼트리자 한 순간에 어둠이 사라지고 다시금 대지가 돌아왔다.

그런 날 구경하던 교황은 진심 어린 감탄을 담아 박수를 쳤다.

“대단하십니다. 아직 권능에 적응하지도 못하셨을 터인데 이런 기적을 펼치시다니.”

“푸하핳♡ 아부한다고 뭐 달라질 거 같아?♡ 그래봐야 너 극혐이거든?♡”

“허나 사도님. 저 성물이 아니라면 당신의 기적이 대지 모든 곳에 닿지는 못할 테죠.”

…잠깐. 설마.

“이미 추측하신 듯 하군요. 예. 그렇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대륙 모든 곳에서 일어나고 있을 테죠. 당신이 제압했던 모든 던전이 끝을 잊고서 다시금 대지에 드러날 것입니다.”

다급한 마음에 앞으로 내달렸지만 교황은 내 메이스를 가뿐히 가로 막았다.

“자아. 사도님. 당신께서 절 가로막으실 수는 있겠지요. 그렇지만 그러는 동안 대륙의 많은 이들은 죽어 나갈 것입니다. 어찌하실 겁니까? 당신의 저 성물을 정말 필요한 순간까지 지켜내실 건가요?”

성물의 용도를 눈치챘나? 그래서 날 저걸로 협박하는 거야?

“던전 뿐만이 아니라 다른 악신들마저도 끝의 권능에 영향을 받을 텐데?”

제기랄.

그래. 씨발. 이 녀석의 말대로 성물의 증폭을 이용하면 대륙 전체에 정화의 기운을 흩뿌릴 수 있겠지.

근데 그러면 이 개자식을 상대하는 데에 많은 문제가 생길 거야.

그치만.

그렇지만.

<괜찮다.>

‘…할아버지?’

<네가 도운 사람들을 믿어라. 나도 에르기누스 놈의 말을 듣고서 알게 된 것이다만,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한 모양이구나.>

‘사람들이.’

동료들이 공격을 하는 사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난 나는 요정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들이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고갤 끄덕였다.

– 맞아!

– 사람들 강해!

– 다들 강해!

*

“…악신의 부활이 시나리오에 있었나요?”

“확실합니다. 이건 계획 외의 일이군요.”

용암과 마찬가지로 굳어버렸던 불의 악신이 다시금 불을 피워올린다.

자리를 정리하고 마지막 전투로 향할 준비를 하던 이들은 당혹 속에서 헛웃음을 흘리다 다시금 짐을 풀었다.

“그래봐야 별 문제는 없지 않습니까? 했던 일을 반복할 뿐인데요.”

“그래도 신이잖아요. 긴장은 해야죠.”

“하하하. 글쎄요. 제게 있어서 저 멍청이는 알른 영애의 위업을 드높여줄 잔챙이로 보입니다만.”

프레테의 말이 다소 과장되긴 했지만 다른 사도들이나 마법사들 중에서도 크게 긴장한 이는 없었다.

이전의 압도적인 전투가 그들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었던 것이다.

제 아무리 커다란 재앙이 눈 앞에 닥친다 한들 해야 할 일만 한다면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말이다.

“갑시다! 여러분!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

– 이대로 끝날 줄 알았느냐! 아직이다! 지옥에 떨어져야 할 마법사여!

“하. 그래?”

신격 일부를 나누어 루시와 교황의 싸움을 지켜 볼 정도로 여유가 있었던 에르기누스는 귀찮다는 듯 고갤 내젓고는 다시금 마법진을 그렸다.

그의 제자인 조이 파트란이 발안했으며 에르기누스가 완성하여 어둠의 권능을 더해 발전시킨 마법.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진실을 강요하는 억지.

“열심히 발악해봐라. 그런다고 무엇이 달라질 것 같진 않지만.”

과거 인간으로서 공허를 마주했을 때와는 다르다.

동등한 신격을 지닌 이상 승패를 가르는 것은 서로의 역량일지어니.

인간일 적에도 신에 달했던 에르기누스란 존재에게 격과 상대의 공략법이 주어진 이상 패배란 존재할 수 없었다.

“여왕이시여. 각지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수없이 무너지면서도 자꾸만 달려드는 악신을 제압하며 에르기누스가 묻자 요정여왕이 살풋 웃음을 지었다.

“영애께서 해 온 일들이 헛되지 않았나 봅니다.”

루시는 각지의 던전을 단순히 공략하기만 한 게 아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최악의 경우 어찌해야 할지를 모두에게 전달해두었고 언제라도 최악이 다가올 수 있음을 사람들에게 주입했다.

그 성과가 오늘에 이르러 나타나고 있었다.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려 하는 이가 없었다.

욕심을 내며 과한 성과를 거두려는 자들도 없었다.

모두가 필요한 일을 수행하기 위해 즉각적으로 움직였다.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단합되기 힘든지를 생각해본다면 이건 분명 기적이었다.

“그 희망을 전달해주시죠. 필시 갈등하고 고민하고 있을 테니.”

“그래야겠죠.”

요정여왕은 자신의 권능을 빌어 루시에게 말을 전했다.

당신이 세상에 퍼트린 신뢰가 기적을 낳았노라고.

말을 전해 받은 루시는 자그마한 망설임마저 떨치고서 교황을 향해 메이스를 내밀었다.

다른 이들의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서.


           


Chapter 692

Chapter 692

“영애님?!” 페이비의 놀람을 무시한 채 일어나 그녀를 끌어안은 채 물러난다. 내 뒤를 교황이 따라붙는 게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난 혼자가 아니니까. 내 눈빛을 읽은 아서와 프레이와 검성이 교황을 향해 검을 휘두른다. 잘려나간 사지를 복구하며 교황이 집요하게 달려오지만 연이어지는 검격 속에서 거리를 완전히 좁히기란 불가능했다. “끝을 고한다!” 그게 답답했던 듯 교황이 권능까지 사용했지만 그 순간 인형이 방패로 내 앞을 가로막았다. 내 방패와는 달리 육중한 무게감이 충격을 받아내며 대지가 살짝 진동한다. “버티면 되는 겁니까?!” “그래! 허접아!” 어차피 이제 아그라의 부활을 멈추는 건 불가능하다. 아그라가 교황에게 잡아먹힌 이상 그는 자연스레 악신의 자리를 대체하게 되겠지. 그리고 그 끝에 교황은 신화의 시대를 불러올 거점이 될 것이다. 그러니 그 순간을 노리는 거다. 교황이 악신의 자리에 도달하는 순간을. 끝의 권능이 선사하는 힘 앞에 혼란스러워 하는 그 때를. 저 정도 되는 인물마저도 자신을 제어하지 못할 타이밍을. 이 성물을 그 때를 위해 준비한 물건이다. 교황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그때만을 위하여. “그대들이 접근할 자격을 끝내겠습니다.” 페이비의 손을 맞잡고 다시금 성물에 기운을 넣으려던 순간 교황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교황의 주변에 달려들었던 이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뒤로 밀려났다. 접근 자체를 허락받지 못한 것처럼. 프레이나 검성이 베어주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들조차도 검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 뿐 검격을 내지르진 못했다. 악신의 권능이 저들의 의지마저 방해한다는 증빙이겠지. 제기랄. “뭐하는 거야♡ 허접들♡ 저딴 쓰레기한테 동정심이라도 느껴?♡ 푸하핳♡ 같잖네 정말♡” 페이비에게서 손을 떼고 비웃음과 함께 정화의 권능을 퍼트리자 그제서야 사람들이 하나 둘 앞으로 향했다. 내가 예상한 것보다 악신의 권능이 강해. 본래 예상했던 것보다 나와 허접주신이 더 찬양을 받은 반동인가. 이렇게 되면 나 없이는 전선이 유지될 수 없을 텐데. 어떻게 해야 하지? 곤란하단 생각에 혀를 차고 있던 중 할아버지가 다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루시야! 굳이 네가 제어할 필요 없다!> ‘자세히! 빨리!’ <지금 넌 주신에게 권능을 부여받은 게 아니다! 권능의 선택을 받은 거다! 그러니 신들이 그러는 것처럼 네가 권능을 나누어줄 수 있다!> ‘...네?’ 아니 뭔 미친.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내가 진짜 신이라도 된 거 같잖아! 너무 허황된 이야기에 순간 당황한 나였지만 이제와서 망설이기엔 상황이 좋지 못했다. 신이고 나발이고 아무래도 좋아. 지금 상황에 승기를 붙잡을 수 있다면 말도 안 되는 역할이라도 기꺼이 맡아줄게! “페도놈들♡ 나한테 잘 보이고 싶으면 친구 눈치 좀 봐야 할 걸?♡ 너네들 따위론 내 마음에 들 리가 없잖아♡ 발악해야지♡ 자!♡” 페이비를 붙잡고서 권능에 명령을 내린 순간 내가 지닌 빛 중 일부가 페이비에게로 흘러들어갔다. “허접 페이비.” “네! 영애님! 당신께서 하고자 하는 말씀이 무엇인지 알 것 같습니다!” ...응?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지금 뭘 해준 건지도 설명 안 했잖아. 당황해서 눈을 끔뻑이고 있으려니 페이비가 성물 안에 빛을 담았다. 그건 분명 내가 지닌 정화의 권능이었다. 권능이란 게 그렇게 쉽게 다룰 수 있는 거였나? 난 제대로 권능을 다루기 위해서 며칠을 바쳤던 걸로 기억하는데. “영애님! 조이에게도 권능을 나누어 주세요! 조이가 있으면 한층 더 완벽하게 기적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다른 이들이 시간을 버는 동안 페이비가 시킨 대로 조이에게도 권능을 나누어줬다. “...과연. 저 성물이 증폭기군요.” 너. 너도 바로 이해하는 거야? 왜?! 이래서 재능충놈들은! “이래놓고 얼빵한 짓 하기만 해봐. 평생 괴롭혀 줄 거야.” “얼빵한 짓 안 해도 평생 그러실 거잖아요?” 조이의 웃음을 본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서 다시금 앞으로 고갤 돌렸다. 나랑 안 어울리는 일이라는 건 느끼고 있었어. 내 근본은 성직자보단 기사에 가까우니까. 신성을 다루는 것도 마법진을 만들어내는 것도 내겐 어려운 일이었지. 그렇지만 페이비와 조이에겐 아냐. 에르기누스가 인정한 천재인 조이와 수백 명의 신성을 집약한 성물을 가뿐히 컨트롤 하는 성녀 페이비라면 내가 만들려던 기적보다도 더 깔끔하고 안정된 기적을 그려줄 거야. 그러니 내가 해야 할 일은 그저 시간을 끄는 거지. 모두의 앞에 서서 모든 게 완성될 때까지. 탱커 답게. 두 사람에 대한 믿음이 날 앞으로 이끌었다. 방패를 치켜 들고 신성을 두르고 정화의 권능을 주변으로 펼치며 걸음마다 어둠을 몰아낸다. “덤벼♡ 놀아줄게♡ 허~접아♡” “흐음. 기꺼이 그러겠습니다.” 날 노리고 달려드는 교황을 보며 방패를 치켜든다. 악신을 집어삼킨 교황은 이전보다 빠르고 강하지만 어째선지 내 눈에는 지난번이 더 까다롭게 느껴졌다. 아직 그가 악신의 힘에 적응하지 못한 탓이겠지. 웃으며 방패를 앞으로 내민 순간 청량한 소리와 함께 교황의 주먹이 뒤로 물러나는 게 보였다. 잠시나마 생긴 틈. 그 틈을 노려 다른 이들이 무기를 뽑아드는 가운데에서 교황은 즐거운 듯 콧노래를 불렀다. “허나 사도님. 정말 그러셔도 되겠습니까? 지금 이 대지는 시작보다는 끝에 가까울 터입니다만.” 교황이 웃으며 손가락을 위로 치켜 든 순간 대지가 갑자기 꺼지더니 깊고도 깊은 어둠이 모습을 드러냈다. 던전. 악신의 수하가 지하에 존재했다고? 게임 속에서도 이런 이벤트는 존재한 적이 없었는데? “꺼져!♡ 역겨운 새끼야!♡” 우리가 지하로 떨어지기 전 정화의 권능을 퍼트리자 한 순간에 어둠이 사라지고 다시금 대지가 돌아왔다. 그런 날 구경하던 교황은 진심 어린 감탄을 담아 박수를 쳤다. “대단하십니다. 아직 권능에 적응하지도 못하셨을 터인데 이런 기적을 펼치시다니.” “푸하핳♡ 아부한다고 뭐 달라질 거 같아?♡ 그래봐야 너 극혐이거든?♡” “허나 사도님. 저 성물이 아니라면 당신의 기적이 대지 모든 곳에 닿지는 못할 테죠.” ...잠깐. 설마. “이미 추측하신 듯 하군요. 예. 그렇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대륙 모든 곳에서 일어나고 있을 테죠. 당신이 제압했던 모든 던전이 끝을 잊고서 다시금 대지에 드러날 것입니다.” 다급한 마음에 앞으로 내달렸지만 교황은 내 메이스를 가뿐히 가로 막았다. “자아. 사도님. 당신께서 절 가로막으실 수는 있겠지요. 그렇지만 그러는 동안 대륙의 많은 이들은 죽어 나갈 것입니다. 어찌하실 겁니까? 당신의 저 성물을 정말 필요한 순간까지 지켜내실 건가요?” 성물의 용도를 눈치챘나? 그래서 날 저걸로 협박하는 거야? “던전 뿐만이 아니라 다른 악신들마저도 끝의 권능에 영향을 받을 텐데?” 제기랄. 그래. 씨발. 이 녀석의 말대로 성물의 증폭을 이용하면 대륙 전체에 정화의 기운을 흩뿌릴 수 있겠지. 근데 그러면 이 개자식을 상대하는 데에 많은 문제가 생길 거야. 그치만. 그렇지만. <괜찮다.> ‘...할아버지?’ <네가 도운 사람들을 믿어라. 나도 에르기누스 놈의 말을 듣고서 알게 된 것이다만,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한 모양이구나.> ‘사람들이.’ 동료들이 공격을 하는 사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난 나는 요정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들이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고갤 끄덕였다. - 맞아! - 사람들 강해! - 다들 강해! * “...악신의 부활이 시나리오에 있었나요?” “확실합니다. 이건 계획 외의 일이군요.” 용암과 마찬가지로 굳어버렸던 불의 악신이 다시금 불을 피워올린다. 자리를 정리하고 마지막 전투로 향할 준비를 하던 이들은 당혹 속에서 헛웃음을 흘리다 다시금 짐을 풀었다. “그래봐야 별 문제는 없지 않습니까? 했던 일을 반복할 뿐인데요.” “그래도 신이잖아요. 긴장은 해야죠.” “하하하. 글쎄요. 제게 있어서 저 멍청이는 알른 영애의 위업을 드높여줄 잔챙이로 보입니다만.” 프레테의 말이 다소 과장되긴 했지만 다른 사도들이나 마법사들 중에서도 크게 긴장한 이는 없었다. 이전의 압도적인 전투가 그들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었던 것이다. 제 아무리 커다란 재앙이 눈 앞에 닥친다 한들 해야 할 일만 한다면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말이다. “갑시다! 여러분!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 - 이대로 끝날 줄 알았느냐! 아직이다! 지옥에 떨어져야 할 마법사여! “하. 그래?” 신격 일부를 나누어 루시와 교황의 싸움을 지켜 볼 정도로 여유가 있었던 에르기누스는 귀찮다는 듯 고갤 내젓고는 다시금 마법진을 그렸다. 그의 제자인 조이 파트란이 발안했으며 에르기누스가 완성하여 어둠의 권능을 더해 발전시킨 마법.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진실을 강요하는 억지. “열심히 발악해봐라. 그런다고 무엇이 달라질 것 같진 않지만.” 과거 인간으로서 공허를 마주했을 때와는 다르다. 동등한 신격을 지닌 이상 승패를 가르는 것은 서로의 역량일지어니. 인간일 적에도 신에 달했던 에르기누스란 존재에게 격과 상대의 공략법이 주어진 이상 패배란 존재할 수 없었다. “여왕이시여. 각지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수없이 무너지면서도 자꾸만 달려드는 악신을 제압하며 에르기누스가 묻자 요정여왕이 살풋 웃음을 지었다. “영애께서 해 온 일들이 헛되지 않았나 봅니다.” 루시는 각지의 던전을 단순히 공략하기만 한 게 아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최악의 경우 어찌해야 할지를 모두에게 전달해두었고 언제라도 최악이 다가올 수 있음을 사람들에게 주입했다. 그 성과가 오늘에 이르러 나타나고 있었다.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려 하는 이가 없었다. 욕심을 내며 과한 성과를 거두려는 자들도 없었다. 모두가 필요한 일을 수행하기 위해 즉각적으로 움직였다.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단합되기 힘든지를 생각해본다면 이건 분명 기적이었다. “그 희망을 전달해주시죠. 필시 갈등하고 고민하고 있을 테니.” “그래야겠죠.” 요정여왕은 자신의 권능을 빌어 루시에게 말을 전했다. 당신이 세상에 퍼트린 신뢰가 기적을 낳았노라고. 말을 전해 받은 루시는 자그마한 망설임마저 떨치고서 교황을 향해 메이스를 내밀었다. 다른 이들의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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