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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93

조금도 기죽지 않은 웃음과 함께 자신에게 달려드는 주신의 사도를 교황은 기이하게 바라봤다.

그가 아는 주신의 사도는 나약하기에 고결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나약함을 마주하면서도 무너지지 않고 꿋꿋이 일어나 앞으로 향하기에 아름다운 존재였다.

바꾸어 말하자면 자신의 망설임에 솔직한 사람이란 것이기도 했다.

그러니 원래라면 타인들이 피를 흘린다는 건 알았을 때 웃음기를 잃고 손에 힘이 빠졌어야한다.

헌데 루시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를 깨달은 교황은 기사들에게 권능을 부여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세상의 정경을 지켜봤다.

본래 존재하지 않아야 할 곳이며 그가 끝의 권능으로 만들어낸 지옥을.

그리고 알게 됐다. 루시가 망설이지 않는 이유를. 주신의 사도께선 인간을 믿고 계시고, 인간이 그 믿음에 보답하고 있구나.

왜지?

교황은 각지에서 무기를 치켜드는 이들을 보며 의문을 품었다.

왜 저들이 일어나는 거지?

‘막아!’

‘싸워라!’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위대하신 주신을 위하여!’

왜 저들이 의지를 지니는 거지?

‘겁 먹지마!’

‘사도께서 이미 지나오셨던 길이다!’

‘그 분이 우릴 믿고 맡겨준 일이다! 물러나선 안 된다!’

왜 두려움을 억누르며 앞으로 나아가는 거지?

‘두려워하지 마라!’

‘주신께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의 나라를 위하여!’

‘우리의 가족을 위하여!’

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거냐.

교황이 아는 인간은 이런 존재가 아니었다.

인간이란 생물이 쉬이 절망하고 무너져내리는 존재다.

몇몇 예외는 존재하지만 대개의 인간들은 간단히 포기하고 공포 속에서 모든 걸 내려놓으며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악에 투신한다.

이건 단순한 교황의 사상이 아니다.

현실이다.

악신의 사도로 지내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봐 온 인간들이 대부분 그랬기에 얻은 확신이었다.

인간들은 약하다.

그렇기에 악해진다.

현실의 무게 앞에 굴복하여 악이 되고 만다.

어떤 아이는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악의 손을 잡는다.

어떤 남자는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악의 아래에 고갤 숙인다.

어떤 부모는 자신의 자식만을 지키겠단 일념으로 악을 껴안는다.

어떤 악인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악에 투신하지만 이 또한 나약하기 때문이다.

올바른 행동을 통해 욕망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나약함의 증명이다.

또 다른 악인은 수많은 악몽 끝에 잘못된 신념을 얻어 악행이 곧 선행이라 믿고 태연히 학살을 자행한다.

이것도 나약함의 증명이다. 인간이 진정 강인했다면 어긋난 신념을 품을 일도 없었을 테니까.

이외에도 인간이란 수많은 나약함을 지닌 채 악을 마주하고 그 손을 붙잡는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교황은 주신 교회의 머리로 지내며 이 세상에 무수한 악이 존재함을 알았고 그 악을 몇 번이나 이용해오기도 했다.

그랬기에 교황은 저들의 나약함이 당연하단 듯 주신의 기대를 배신할 것이라 여겼다.

과거의 사람들이 그랬고 역사에 기록된 이들이 그랬으며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대지 모든 곳에서 재앙이 일어나면 사람들이 무너져 내리리라고 여겼다.

절망 속에서 각자의 욕심을 바라보다가 분열되고 피를 흘린 끝에 주신의 사도를 배신하리라고 확신했다.

허나 현실은 달랐다.

그들은 도망치지 않았다.

물러나지도 않았다.

무작정 앞으로 내달리지도 않았다.

주신의 사도가 계획한 대로 앞으로 나아가 침착하게 재앙을 마주하고 있었다.

어째서? 곰곰이 고민하지 않아도 답은 바로 나왔다.

저들이 절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오롯이 한 사람이 준 믿음 때문이었다.

주신의 사도.

루시 알른.

그녀가 행한 많은 기적들이, 얼핏 쉬워보이지만 그녀가 아니고서야 그 누구도 할 수 없을 일들이, 고행에 가까운 하루하루가, 대륙에 믿음을 선사했다.

악에 손을 뻗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강하다.

해야 할 일만 한다면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

선한 채로 남을 수 있다.

우리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

루시 알른 단 하나에 의해 생겨난 희망은 전염병처럼 사람들에게 퍼져 그들이 기꺼이 죽음을 감당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자신이 죽더라도 세상이 더 나아질 것이란 믿음이 생겨났으니 말이다.

교황은 다시금 자신에게 달려드는 자그마한 여자아이에게 경외를 느꼈다.

그녀가 자신의 시련이란 사실에 희열을 느꼈다.

그리고 아주, 아주 자그마한 분노를 품었다.

그것이 불경한단 걸 알면서도 도저히 그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여태까지와는 달랐다.

그 어떤 방해를 당해도 경외만을 품었던 과거가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푸핳♡ 잔뜩 화가 났네?♡ 맘대로 안 되니까 거슬리나 봐?♡”

루시에게 분노를 들킨 교황은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다가 찌푸려진 입가를 발견하고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끝의 권능이 실로 막강하군. 이 내가 주신의 사도를 상대로 짜증을 품게 되다니. 끝이란 개념이 이토록 강대하단 말인가.

“하하하하하!”

“뭐야아?♡ 돌아버렸어?♡ 안 그래도 병신 같았는데 더 미칠 곳이 있었구나?♡”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주신의 사도께서 품으신 계획은 내게 위협이 되어버린다.

안정된 세상에 끝의 악신이 되어 강림한다 한들 나 혼자 모든 신들을 끝낼 순 없을 것이다.

특히 사도께서 준비하신 저 물건 이 내 권능에 상처를 입힌다면 말을 할 필요도 없지.

“화도 못 참는 한심한 어른주제에 대단한 척 하다니~♡ 푸핳♡ 같잖아라♡”

더욱이 문제가 되는 것은 내 시선이 점점 사도에게 이끌리고 있단 것이다.

저 분의 아름다운 외견과 어둠을 걷어내는 밝은 빛과 얄미운 미소와 선명한 목소리가 자꾸만 내 눈길을 사로 잡아.

그리고 저 분에게 달려들고 싶게 만들어.

분노를.

분노를.

그래. 화를 이끌어내.

이대로 가다간 이성을 빼앗기고 본래의 계획조차 잊어버린 채 영애께 매달리게 되겠지.

그러니 그것만큼은 피해야 한다.

“조~루♡”

교황은 분노를 억누르며 끝의 권능을 사용했다.

저들 사이의 신뢰를 잠시나마 끝내고 확신을 끝내고 기술을 끝낸 끝에 생긴 자그마한 틈.

정화의 권능이 순식간에 끝의 권능을 밀어냈지만 그보다 먼저 교황의 손이 마법사와 성녀에게 닿았다.

닿아야만 했다.

“느려.”

허나 기이하게도 손이 닿기 전에 검이 권능과 함께 그의 손목을 잘라냈다.

검성의 검이 아니라, 아직 어린 여자아이의 검이.

“어떻게?”

진심 어린 당혹 너머로 두 사람 분의 권능을 짊어진 남자가 보였다.

어떤 수작을 부렸기에 타인에게 부여된 저주를 자신에게 옮긴거지?

저 정신 나간 방식은 수백년 전에나 볼법한 것인데!?

허나 아직이다.

첫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을 뿐 좁아진 거리는 그대로!

저들이 그리는 기적에 개입해 끝내기만 한다면 모든 계획을 수포로 돌릴 수 있다!

눈에 핏대를 세워가며 마법 사이에 끼어들려 했던 교황은 그 사이를 가로 막는 어둠에 한 번 놀라고, 그 어둠 너머에 존재하는 수많은 환상에 한 번 더 경악했다.

“…신의 권능을 인간이.”

앞서 그의 시야를 가린 어둠은 어둠의 신이 지닌 권능이었으며, 후에 그를 현혹시킨 환각은 공허의 권능이었다.

근본적으로는 다를지언정 그 현상 자체는 권능와 완벽하게 일치했다.

에르기누스의 제자라고 해봐야 아직 어린 아이일텐데.

“당신의 의지는 겨우 그 정도군요.”

동그랗게 뜬 눈 너머로 보인 성녀의 웃음에 순간 교황의 이성이 날아갔고, 그와 동시에 그의 몸이 뒤로 이끌렸다.

정상적인 현상이 아니다. 권능이다. 신의 권능이 날 사로잡았다.

“안뇨오오옹~♡ 허접아~♡”

위에서 아래로 내질러진 메이스가 무참히 교황의 얼굴을 깨부쉈고, 사라진 시야 너머로 권능을 써서 주변에 있는 이들을 쫓아냈다.

“허접♡ 허접♡ 허저어어어업~♡ 존나 약해~♡”

그리고 머리가 다시 되돌아온 순간에 들려온 목소리가 교황이 이성을 앗아갔다.

본능에 따라 무작정 루시를 향해 내달린 교황은 루시의 웃음을 마주하고 나서야 자신이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허나 그 때는 이미 늦었다.

이미 주먹을 내질러진 뒤였고, 루시의 방패가 앞으로 나와 그의 주먹을 막아냈다.

본래라면 교황의 권능이 담긴 주먹을 루시가 막아낼 순 없었으리라.

여태 그랬던 것처럼 충격을 버티지 못한 채 저 멀리로 날아가야 했겠지. 그렇지만 루시의 방패에서 난 소리는 교회의 종소리처럼 청명했다.

“푸흐흐흫♡ 겨우 이 정도구나?♡” 하하하.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예. 겨우 이 정도인 모양입니다.”

교황이 재차 손을 뻗자 루시가 방패를 치켜 들었지만 기이하게도 그의 손은 방패를 비켜 루시의 팔을 붙잡았다.

“어라?”

그녀가 결코 하지 않을 실수에 당혹을 느꼈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끝이 권능이 인과를 뛰어넘고서 루시에게 닿아버렸으니까.

“그래도 최선을 다해야지요.”

이젠 더 이상 뒤를 생각할 틈은 없다.

조금이나마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눈 앞의 시련을 넘어서야만 한다.

얼마나 오만했는가.

얼마나 바보 같았는가.

주신의 사도께서 나의 시련이 되었거늘 뒤를 생각하며 승리할 수 있을 리가 없잖은가.

기적이란 항상 최선을 다할 때 생겨난다.

포기하지 않고 눈 앞의 상황에 모든 걸 다할 때에서야 기적은 일어날 수 있다. 분명 나에게도 그렇겠지.

“억지를 좀 부리겠습니다.”

커다란 남자의 손이 여자아이의 팔을 꺾어 비튼다. 비명소리와 함께 달려드는 이들을 모두 저 아래로 보냈다.

저들은 주신의 권능을 품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던전에서 빠져나오리라.

허나 상관 없다.

그 땐 이미 주신의 사도께서 무력화되어 있으실 테니.

“시련이시여.”

부디 무너져 주소서.


           


Chapter 693

Chapter 693

조금도 기죽지 않은 웃음과 함께 자신에게 달려드는 주신의 사도를 교황은 기이하게 바라봤다. 그가 아는 주신의 사도는 나약하기에 고결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나약함을 마주하면서도 무너지지 않고 꿋꿋이 일어나 앞으로 향하기에 아름다운 존재였다. 바꾸어 말하자면 자신의 망설임에 솔직한 사람이란 것이기도 했다. 그러니 원래라면 타인들이 피를 흘린다는 건 알았을 때 웃음기를 잃고 손에 힘이 빠졌어야한다. 헌데 루시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를 깨달은 교황은 기사들에게 권능을 부여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세상의 정경을 지켜봤다. 본래 존재하지 않아야 할 곳이며 그가 끝의 권능으로 만들어낸 지옥을. 그리고 알게 됐다. 루시가 망설이지 않는 이유를. 주신의 사도께선 인간을 믿고 계시고, 인간이 그 믿음에 보답하고 있구나. 왜지? 교황은 각지에서 무기를 치켜드는 이들을 보며 의문을 품었다. 왜 저들이 일어나는 거지? ‘막아!’ ‘싸워라!’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위대하신 주신을 위하여!’ 왜 저들이 의지를 지니는 거지? ‘겁 먹지마!’ ‘사도께서 이미 지나오셨던 길이다!’ ‘그 분이 우릴 믿고 맡겨준 일이다! 물러나선 안 된다!’ 왜 두려움을 억누르며 앞으로 나아가는 거지? ‘두려워하지 마라!’ ‘주신께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의 나라를 위하여!’ ‘우리의 가족을 위하여!’ 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거냐. 교황이 아는 인간은 이런 존재가 아니었다. 인간이란 생물이 쉬이 절망하고 무너져내리는 존재다. 몇몇 예외는 존재하지만 대개의 인간들은 간단히 포기하고 공포 속에서 모든 걸 내려놓으며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악에 투신한다. 이건 단순한 교황의 사상이 아니다. 현실이다. 악신의 사도로 지내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봐 온 인간들이 대부분 그랬기에 얻은 확신이었다. 인간들은 약하다. 그렇기에 악해진다. 현실의 무게 앞에 굴복하여 악이 되고 만다. 어떤 아이는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악의 손을 잡는다. 어떤 남자는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악의 아래에 고갤 숙인다. 어떤 부모는 자신의 자식만을 지키겠단 일념으로 악을 껴안는다. 어떤 악인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악에 투신하지만 이 또한 나약하기 때문이다. 올바른 행동을 통해 욕망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나약함의 증명이다. 또 다른 악인은 수많은 악몽 끝에 잘못된 신념을 얻어 악행이 곧 선행이라 믿고 태연히 학살을 자행한다. 이것도 나약함의 증명이다. 인간이 진정 강인했다면 어긋난 신념을 품을 일도 없었을 테니까. 이외에도 인간이란 수많은 나약함을 지닌 채 악을 마주하고 그 손을 붙잡는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교황은 주신 교회의 머리로 지내며 이 세상에 무수한 악이 존재함을 알았고 그 악을 몇 번이나 이용해오기도 했다. 그랬기에 교황은 저들의 나약함이 당연하단 듯 주신의 기대를 배신할 것이라 여겼다. 과거의 사람들이 그랬고 역사에 기록된 이들이 그랬으며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대지 모든 곳에서 재앙이 일어나면 사람들이 무너져 내리리라고 여겼다. 절망 속에서 각자의 욕심을 바라보다가 분열되고 피를 흘린 끝에 주신의 사도를 배신하리라고 확신했다. 허나 현실은 달랐다. 그들은 도망치지 않았다. 물러나지도 않았다. 무작정 앞으로 내달리지도 않았다. 주신의 사도가 계획한 대로 앞으로 나아가 침착하게 재앙을 마주하고 있었다. 어째서? 곰곰이 고민하지 않아도 답은 바로 나왔다. 저들이 절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오롯이 한 사람이 준 믿음 때문이었다. 주신의 사도. 루시 알른. 그녀가 행한 많은 기적들이, 얼핏 쉬워보이지만 그녀가 아니고서야 그 누구도 할 수 없을 일들이, 고행에 가까운 하루하루가, 대륙에 믿음을 선사했다. 악에 손을 뻗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강하다. 해야 할 일만 한다면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 선한 채로 남을 수 있다. 우리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 루시 알른 단 하나에 의해 생겨난 희망은 전염병처럼 사람들에게 퍼져 그들이 기꺼이 죽음을 감당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자신이 죽더라도 세상이 더 나아질 것이란 믿음이 생겨났으니 말이다. 교황은 다시금 자신에게 달려드는 자그마한 여자아이에게 경외를 느꼈다. 그녀가 자신의 시련이란 사실에 희열을 느꼈다. 그리고 아주, 아주 자그마한 분노를 품었다. 그것이 불경한단 걸 알면서도 도저히 그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여태까지와는 달랐다. 그 어떤 방해를 당해도 경외만을 품었던 과거가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푸핳♡ 잔뜩 화가 났네?♡ 맘대로 안 되니까 거슬리나 봐?♡” 루시에게 분노를 들킨 교황은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다가 찌푸려진 입가를 발견하고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끝의 권능이 실로 막강하군. 이 내가 주신의 사도를 상대로 짜증을 품게 되다니. 끝이란 개념이 이토록 강대하단 말인가. “하하하하하!” “뭐야아?♡ 돌아버렸어?♡ 안 그래도 병신 같았는데 더 미칠 곳이 있었구나?♡”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주신의 사도께서 품으신 계획은 내게 위협이 되어버린다. 안정된 세상에 끝의 악신이 되어 강림한다 한들 나 혼자 모든 신들을 끝낼 순 없을 것이다. 특히 사도께서 준비하신 저 물건 이 내 권능에 상처를 입힌다면 말을 할 필요도 없지. “화도 못 참는 한심한 어른주제에 대단한 척 하다니~♡ 푸핳♡ 같잖아라♡” 더욱이 문제가 되는 것은 내 시선이 점점 사도에게 이끌리고 있단 것이다. 저 분의 아름다운 외견과 어둠을 걷어내는 밝은 빛과 얄미운 미소와 선명한 목소리가 자꾸만 내 눈길을 사로 잡아. 그리고 저 분에게 달려들고 싶게 만들어. 분노를. 분노를. 그래. 화를 이끌어내. 이대로 가다간 이성을 빼앗기고 본래의 계획조차 잊어버린 채 영애께 매달리게 되겠지. 그러니 그것만큼은 피해야 한다. “조~루♡” 교황은 분노를 억누르며 끝의 권능을 사용했다. 저들 사이의 신뢰를 잠시나마 끝내고 확신을 끝내고 기술을 끝낸 끝에 생긴 자그마한 틈. 정화의 권능이 순식간에 끝의 권능을 밀어냈지만 그보다 먼저 교황의 손이 마법사와 성녀에게 닿았다. 닿아야만 했다. “느려.” 허나 기이하게도 손이 닿기 전에 검이 권능과 함께 그의 손목을 잘라냈다. 검성의 검이 아니라, 아직 어린 여자아이의 검이. “어떻게?” 진심 어린 당혹 너머로 두 사람 분의 권능을 짊어진 남자가 보였다. 어떤 수작을 부렸기에 타인에게 부여된 저주를 자신에게 옮긴거지? 저 정신 나간 방식은 수백년 전에나 볼법한 것인데!? 허나 아직이다. 첫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을 뿐 좁아진 거리는 그대로! 저들이 그리는 기적에 개입해 끝내기만 한다면 모든 계획을 수포로 돌릴 수 있다! 눈에 핏대를 세워가며 마법 사이에 끼어들려 했던 교황은 그 사이를 가로 막는 어둠에 한 번 놀라고, 그 어둠 너머에 존재하는 수많은 환상에 한 번 더 경악했다. “...신의 권능을 인간이.” 앞서 그의 시야를 가린 어둠은 어둠의 신이 지닌 권능이었으며, 후에 그를 현혹시킨 환각은 공허의 권능이었다. 근본적으로는 다를지언정 그 현상 자체는 권능와 완벽하게 일치했다. 에르기누스의 제자라고 해봐야 아직 어린 아이일텐데. “당신의 의지는 겨우 그 정도군요.” 동그랗게 뜬 눈 너머로 보인 성녀의 웃음에 순간 교황의 이성이 날아갔고, 그와 동시에 그의 몸이 뒤로 이끌렸다. 정상적인 현상이 아니다. 권능이다. 신의 권능이 날 사로잡았다. “안뇨오오옹~♡ 허접아~♡” 위에서 아래로 내질러진 메이스가 무참히 교황의 얼굴을 깨부쉈고, 사라진 시야 너머로 권능을 써서 주변에 있는 이들을 쫓아냈다. “허접♡ 허접♡ 허저어어어업~♡ 존나 약해~♡” 그리고 머리가 다시 되돌아온 순간에 들려온 목소리가 교황이 이성을 앗아갔다. 본능에 따라 무작정 루시를 향해 내달린 교황은 루시의 웃음을 마주하고 나서야 자신이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허나 그 때는 이미 늦었다. 이미 주먹을 내질러진 뒤였고, 루시의 방패가 앞으로 나와 그의 주먹을 막아냈다. 본래라면 교황의 권능이 담긴 주먹을 루시가 막아낼 순 없었으리라. 여태 그랬던 것처럼 충격을 버티지 못한 채 저 멀리로 날아가야 했겠지. 그렇지만 루시의 방패에서 난 소리는 교회의 종소리처럼 청명했다. “푸흐흐흫♡ 겨우 이 정도구나?♡” 하하하.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예. 겨우 이 정도인 모양입니다.” 교황이 재차 손을 뻗자 루시가 방패를 치켜 들었지만 기이하게도 그의 손은 방패를 비켜 루시의 팔을 붙잡았다. “어라?” 그녀가 결코 하지 않을 실수에 당혹을 느꼈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끝이 권능이 인과를 뛰어넘고서 루시에게 닿아버렸으니까. “그래도 최선을 다해야지요.” 이젠 더 이상 뒤를 생각할 틈은 없다. 조금이나마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눈 앞의 시련을 넘어서야만 한다. 얼마나 오만했는가. 얼마나 바보 같았는가. 주신의 사도께서 나의 시련이 되었거늘 뒤를 생각하며 승리할 수 있을 리가 없잖은가. 기적이란 항상 최선을 다할 때 생겨난다. 포기하지 않고 눈 앞의 상황에 모든 걸 다할 때에서야 기적은 일어날 수 있다. 분명 나에게도 그렇겠지. “억지를 좀 부리겠습니다.” 커다란 남자의 손이 여자아이의 팔을 꺾어 비튼다. 비명소리와 함께 달려드는 이들을 모두 저 아래로 보냈다. 저들은 주신의 권능을 품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던전에서 빠져나오리라. 허나 상관 없다. 그 땐 이미 주신의 사도께서 무력화되어 있으실 테니. “시련이시여.” 부디 무너져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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