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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95

눈이 돌아간 교황이 무작정 내게로 달려들었다.

어둠의 권능에 잡아먹혀 가는 게 뻔히 보이네.

이전의 교황이었다면 아무리 열이 올랐어도 저 정도로 격정적이진 않았을텐데 말야.

히죽 웃으며 방패를 치켜 들었다.

이전 두 번의 공격에서 교황의 손은 내 방패를 뚫고서 파고 들었다.

처음에는 내가 실수를 했나 생각했지만 아니었어.

그건 분명 권능이었다.

주먹이 내질러진다는 과정이 사라지고 시작과 끝만이 남아버린 거다.

상대가 무엇을 했는지 안다면 거기에 대처하는 방법도 어렵잖다.

나는 정화의 권능을 지니고 있으니까.

가라드가 건네 준 방패에 정화의 권능과 함께 포용의 권능을 담는다.

내가 지닌 포용의 권능은 단순히 상대를 끌어안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바라는 것만을 끌어안겠다는 이기적임이다.

그러니 상대의 권능을 거부하겠노라 결심한다면 능히 반발하는 것도 가능하다.

방패를 타고 흘러들어오는 충격과 묵직한 소리.

패링을 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괜찮다.

권능을 막아낼 수 있는 걸 확인했으니까.

충격이 그친 순간 즉시 치유마법을 사용하며 이를 악물었다.

또 다시 내질러지는 주먹이 보였지만 방패를 움직이지 않았다.

옆에 있던 프레이의 검격이 보였으니까.

바로 재생하는 걸 허락하지 않기 위해 내질러진 수백의 검격 앞에 교황의 권이 가루가 된다.

“허접 둘! 준비 다 끝났어?!”

“설계는 끝났습니다! 지워진 마법만 다시 만들어내면 됩니다!”

“그거면 됐어!”

버티면 된다는 이야기잖아! 그거라면 쉽지! 이기는 싸움보다 버티는 싸움이 더 쉬우니까 말야!

“빼액댄 것치고는 뭐가 없네?♡ 허~접♡”

내 도발에 반응하듯 교황이 일순 세상에서 사라졌다.

허나 그의 권능은 그대로 느껴졌다.

그를 따라 시선을 돌리자 페이비와 조이가 보였다.

이성이 날아간 상황에서도 내가 아닌 저걸 노릴 수 있다고? 최종보스는 최종보스란 거냐?

다급히 페이비와 조이가 있는 곳으로 향하던 중 옆에서 싸늘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를 느끼고서 고갤 돌린 순간 나 대신 아서가 방패를 들고 충격을 받아내줬다.

“뒤는 내가 봐주겠다! 넌 네가 할 일에 집중해!”

나도 그러고 싶지만 쉽지가 않다고! 요정의 시야에 적응한 상태에서 그게 사라지니까 주변이 안 보여!

요정 걔네들이 필요한데! 미간을 찌푸린 채 고민하던 나는 요정들이 날 불러냈던 때를 떠올렸다.

뭘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녀석들은 다시금 날 대지로 불러들였어.

그렇다면 나도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포용의 권능으로 그들을 부르겠다 결심한 순간 요정들과 나 사이에 존재하던 연결이 느껴졌다.

따로 계약을 한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선을 끌어당기자 내 주변에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루시다!

– 루시!

– 루시가 불러줬어!

환히 웃는 이들에게 내 권능을 나누어주자 요정들의 날개에 빛이 더해졌고 그와 동시에 내 주변의 시야가 3인칭으로 돌아왔다.

만족감에 히죽 웃은 나는 뒤 편에서 등장한 교황을 향해 방패를 내밀었다.

주먹이 닿음과 동시에 들려오는 청량한 소리.

내가 패링에 성공했음을 증명하는 소리.

상대에게 틈이 생겼음을 알리는 소리.

그걸 들은 나는 입꼬리를 잔뜩 끌어올리고서 교황의 머리를 메이스로 후려쳤다.

뼈가 부러지는 감촉이 이토록 유쾌한 적은 처음이었다.

그런 내 웃음을 본 교황은 자신의 머리가 조각나는 상황 속에서도 울분에 차서 소리를 내질렀다.

“안 됩니다!”

“흐으응?♡ 뭐가아아?♡”

“당신이 타인에 의해 구원받아선 안 됩니다! 주신의 사도가, 모든 짐을 짊어져야 할 이가 타인에게 구원받는다뇨!”

“그야 난 너같은 찐따가 아닌 걸~♡ 외톨이의 투정에 어울려줘야 할 필요는 없잖아?♡”

“고쳐야 합니다. 아니 고치겠습니다. 제가 반드시 고치고야 말겠습니다.”

다시금 교황이 자신의 권능을 펼치지만 같은 일에 두 번 당할 정도로 내가 멍청하진 않았다.

이젠 권능을 사용하는 데에도 익숙해졌어. 이거 결국 누가누가 억지를 잘 부리나의 대결이잖아.

그리고 메스가키만큼이나 억지스러운 인간은 이 세상에 거의 존재하질 않아.

어지간한 인간 쓰레기가 아니라면 말야.

“꺼져라! 잡것들!”

“너나 꺼져♡ 등~신아♡”

친구들을 포용의 권능으로 끌어들이자 어둠이 친구들의 발목을 붙잡지 못했다.

오히려 내가 흩뿌린 빛이 두려운 듯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아무리 미친 체를 해봐야 나보다 억지를 부리진 못하나 봐?

응?

응?

허접 새꺄!

어라? 잘 생각해보면 저 녀석이 회복하는 것도 끝의 권능이잖아!

그럼 저 녀석의 몸에 정화를 부여하면 회복이 불가능해지는 거 아닌가!?

물론 단순하게 권능을 부여하는 방식이 먹히진 않겠지만 정화의 공간에 집어 넣는다면.

호흡을 바로 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뛴다.

신성을 발 끝에 담은 요정의 춤.

“푸하핳♡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네~♡ 패배자♡ 폐품♡ 쓰레기♡ 퇴물♡”

정화를 뜻하는 신성마법을 기반으로 발을 움직인다.

교황이라면 눈치챌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내 도발에 이성을 잃은 그는 신성마법조차도 눈치채지 못할만큼 머리에 열이 오른 상태였다.

“화나?♡ 그런 것치고는 하는 게 없는데?♡”

교황과 함께 춤을 춘다.

저 자가 춤을 춘단 사실조차 모를 만큼 자연스럽게.

요정의 시야로 보기에는 너무도 아름답게.

“여기야~♡ 여기~♡ 늙어서 관절이 삐걱거려?♡ 잘 안 움직이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대지에 신성과 권능으로 만들어진 마법진이 그려졌다.

요정의 춤에 의해 기반이 만들어지고 미적감각에 의해 완성된 마법진은 어둠 속에서도 계속해서 희미한 빛을 냈다.

“…잠깐.”

“늦었어♡ 등신아♡”

그 마법진을 발로 내리찍은 순간 내 주변에 신성으로 이루어진 영역이 자리했다.

주신의 것이었으나 이제는 나의 것이 된 영역이.

– 허접!

– 나쁜 허접!

– 죽엇!

그 영역의 위에서 요정들은 명확한 모양을 지녔고.

“따뜻하군.”

“행복해.”

“이게 영애님의 영역.”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친구들은 의지를 얻었으며.

주변의 어둠은 설 자리를 잃었고 나는 몸 깊은 곳부터 차오르는 힘에 절로 웃음을 지었다.

“…신이시여.”

그리고 교황의 눈에 이성이.

아. 미친.

“이 또한 나름의 올바름이란 것입니까.”

아냐. 그래도 괜찮아. 이 곳이라면 교황도 제멋대로 재생을 이어나갈 수 없어.

그러니까 우리가 밀어붙이면 이전처럼 우악스러운 일을 벌이는 게 가능하지 않을 거야.

여기서 밀어붙인다.

“바보!”

“응!”

프레이의 검이 교황의 팔을 간단히 베어가른다.

악신의 권능을 잃어버린 교황의 육신은 인간의 것.

이전같은 강인함을 찾아볼 순 없다.

없어야 했다.

괴상한 재생력도.

악신의 힘도.

불완전한 악신인 교황은 모든 걸 잃어야 정상이었다.

“좋은 곳이군요.”

허나 현실은 달랐다.

교황은 자신의 망가진 팔을 별 것 아니란 듯 되돌리더니 신성마법을.

신성마법?

“무얼 그리 놀라십니까. 제 지위가 무엇이었는지 아시잖습니까.”

이 상황이 되어서도 신성마법을 펼치는 게 가능하다고?

단순하게 악신의 권능을 품은 것뿐만이 아니라 악신 그 자체나 다름없는 교황인데?

허접 주신! 너 씹 신성 관리 제대로 안 해!?

대체 나한테 얼마나 욕을 쳐 듣고 싶으면 이 지랄을 떠는 거야?!

빌어먹을 신에게 욕지거리를 내뱉은 나는 정화의 영역에 개입하려는 교황에게 필사적으로 달려들었다.

허나 그의 주변에 자리한 빛의 벽이 우리를 밀어냈다.

“이해했습니다. 당신께서 제게 하려는 일을. 그를 막기 위해서 전 어떻게든 이 세상에 재앙을 일으켜야 할 테죠.”

“당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겁니다!”

점차 제어권을 빼앗겨가는 영역에 페이비와 조이가 개입했다. 마법실력이라면 그 누구와도 비할 데가 없는 두 사람은 교황을 상대로도 손쉽게 주도권 싸움을 벌였다.

“그거 아십니까?”

그 상황에서 교황은 태연한 체하며 우리 세 사람의 공격을 받아냈다.

죽음마저 극복할 수는 없는 듯 절명할 부위만을 막아내며 이루어지는 대전.

“이 대지에 존재해선 안 될 수많은 던전들이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오롯이 제 권능 때문이란 것을.”

쓰잘데기 없는 말 존나 많네!

속으로도 겉으로도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달려들던 나는 문득 교황의 말을 되새겼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근본적인 문제를 깨달았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미친!”

다급하게 정화의 권능을 물리려던 나였지만 영역은 내 의도대로 사라지지 않았다.

조이와 페이비가 교황에 대항해 억지로 유지하던 영역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다급히 두 사람에게 소리를 치려던 나였지만 그 땐 이미 늦었다. 바닥의 어둠이 갈라지더니 그 곳에서 마물이 튀어나온 것이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것들이.

내가 기억하는 소울 아카데미의 마물들이 어둠으로부터 튀어나오고 있다.

교황의 권능이 무너짐에 따라 생겨난 던전의 폭주. 이것만큼은 예상하지 못했다.

당장 던전이 나타나는 것도 당혹스러웠는데 던전의 폭주까지 어떻게 예상하란 말인가.

“영애님! 기적을!”

“아직이야!”

아직. 아직. 성물을 발동해선 안 된다.

특히나 교황이 이성을 부여잡은 지금이라면 더더욱.

기적을 펼친다면 불사의 군단을 물릴 수 있겠지만 그래서야 미래가 없어!

“그럴 때가 아니다! 이러면 우리가 죽는다!”

“그래도!”

“루시 말 들어! 최선을 다해! 허접 왕자님!”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해요!”

그것만큼은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둬야 해.

일단은!

“루시 알른.”

불사의 군단에 당혹을 느끼던 중 내 뒤에서 어떤 남자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앞만 봐라.”

에르기누스의 어둠에 주변에 넘실거리더니 우리를 향해 달려들던 마물들을 모두 다 집어 삼켰다.

그를 본 교황이 자신의 권능을 펼쳐 어둠을 막아냈지만 그와 거의 동시에 마물의 파도를 가르며 나타난 기사가 교황의 육신을 짓이기려 들었다.

“루시! 도와주러 왔다!”

베네딕의 갑옷은 격전의 여파로 너덜너덜했지만 그의 눈동자에 담긴 힘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선명했다.

“이러신다 한들 당신 혼자 이 모든 군세를 감당할 순 없을 텐데요?”

“내가 혼자로 보이나?!”

그가 소리치기 무섭게 뒤 편에서 인간의 군세가 등장했다.

알른의 기사들이. 왕국의 병사들이. 성지의 사제와 성기사들이. 마탑의 마법사들이. 제국의 투사들이. 숲에 있어야 할 요정들이. 숲을 지켜야할 이들이.

마물의 군세를 마주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Chapter 695

Chapter 695

눈이 돌아간 교황이 무작정 내게로 달려들었다. 어둠의 권능에 잡아먹혀 가는 게 뻔히 보이네. 이전의 교황이었다면 아무리 열이 올랐어도 저 정도로 격정적이진 않았을텐데 말야. 히죽 웃으며 방패를 치켜 들었다. 이전 두 번의 공격에서 교황의 손은 내 방패를 뚫고서 파고 들었다. 처음에는 내가 실수를 했나 생각했지만 아니었어. 그건 분명 권능이었다. 주먹이 내질러진다는 과정이 사라지고 시작과 끝만이 남아버린 거다. 상대가 무엇을 했는지 안다면 거기에 대처하는 방법도 어렵잖다. 나는 정화의 권능을 지니고 있으니까. 가라드가 건네 준 방패에 정화의 권능과 함께 포용의 권능을 담는다. 내가 지닌 포용의 권능은 단순히 상대를 끌어안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바라는 것만을 끌어안겠다는 이기적임이다. 그러니 상대의 권능을 거부하겠노라 결심한다면 능히 반발하는 것도 가능하다. 방패를 타고 흘러들어오는 충격과 묵직한 소리. 패링을 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괜찮다. 권능을 막아낼 수 있는 걸 확인했으니까. 충격이 그친 순간 즉시 치유마법을 사용하며 이를 악물었다. 또 다시 내질러지는 주먹이 보였지만 방패를 움직이지 않았다. 옆에 있던 프레이의 검격이 보였으니까. 바로 재생하는 걸 허락하지 않기 위해 내질러진 수백의 검격 앞에 교황의 권이 가루가 된다. “허접 둘! 준비 다 끝났어?!” “설계는 끝났습니다! 지워진 마법만 다시 만들어내면 됩니다!” “그거면 됐어!” 버티면 된다는 이야기잖아! 그거라면 쉽지! 이기는 싸움보다 버티는 싸움이 더 쉬우니까 말야! “빼액댄 것치고는 뭐가 없네?♡ 허~접♡” 내 도발에 반응하듯 교황이 일순 세상에서 사라졌다. 허나 그의 권능은 그대로 느껴졌다. 그를 따라 시선을 돌리자 페이비와 조이가 보였다. 이성이 날아간 상황에서도 내가 아닌 저걸 노릴 수 있다고? 최종보스는 최종보스란 거냐? 다급히 페이비와 조이가 있는 곳으로 향하던 중 옆에서 싸늘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를 느끼고서 고갤 돌린 순간 나 대신 아서가 방패를 들고 충격을 받아내줬다. “뒤는 내가 봐주겠다! 넌 네가 할 일에 집중해!” 나도 그러고 싶지만 쉽지가 않다고! 요정의 시야에 적응한 상태에서 그게 사라지니까 주변이 안 보여! 요정 걔네들이 필요한데! 미간을 찌푸린 채 고민하던 나는 요정들이 날 불러냈던 때를 떠올렸다. 뭘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녀석들은 다시금 날 대지로 불러들였어. 그렇다면 나도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포용의 권능으로 그들을 부르겠다 결심한 순간 요정들과 나 사이에 존재하던 연결이 느껴졌다. 따로 계약을 한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선을 끌어당기자 내 주변에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루시다! - 루시! - 루시가 불러줬어! 환히 웃는 이들에게 내 권능을 나누어주자 요정들의 날개에 빛이 더해졌고 그와 동시에 내 주변의 시야가 3인칭으로 돌아왔다. 만족감에 히죽 웃은 나는 뒤 편에서 등장한 교황을 향해 방패를 내밀었다. 주먹이 닿음과 동시에 들려오는 청량한 소리. 내가 패링에 성공했음을 증명하는 소리. 상대에게 틈이 생겼음을 알리는 소리. 그걸 들은 나는 입꼬리를 잔뜩 끌어올리고서 교황의 머리를 메이스로 후려쳤다. 뼈가 부러지는 감촉이 이토록 유쾌한 적은 처음이었다. 그런 내 웃음을 본 교황은 자신의 머리가 조각나는 상황 속에서도 울분에 차서 소리를 내질렀다. “안 됩니다!” “흐으응?♡ 뭐가아아?♡” “당신이 타인에 의해 구원받아선 안 됩니다! 주신의 사도가, 모든 짐을 짊어져야 할 이가 타인에게 구원받는다뇨!” “그야 난 너같은 찐따가 아닌 걸~♡ 외톨이의 투정에 어울려줘야 할 필요는 없잖아?♡” “고쳐야 합니다. 아니 고치겠습니다. 제가 반드시 고치고야 말겠습니다.” 다시금 교황이 자신의 권능을 펼치지만 같은 일에 두 번 당할 정도로 내가 멍청하진 않았다. 이젠 권능을 사용하는 데에도 익숙해졌어. 이거 결국 누가누가 억지를 잘 부리나의 대결이잖아. 그리고 메스가키만큼이나 억지스러운 인간은 이 세상에 거의 존재하질 않아. 어지간한 인간 쓰레기가 아니라면 말야. “꺼져라! 잡것들!” “너나 꺼져♡ 등~신아♡” 친구들을 포용의 권능으로 끌어들이자 어둠이 친구들의 발목을 붙잡지 못했다. 오히려 내가 흩뿌린 빛이 두려운 듯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아무리 미친 체를 해봐야 나보다 억지를 부리진 못하나 봐? 응? 응? 허접 새꺄! 어라? 잘 생각해보면 저 녀석이 회복하는 것도 끝의 권능이잖아! 그럼 저 녀석의 몸에 정화를 부여하면 회복이 불가능해지는 거 아닌가!? 물론 단순하게 권능을 부여하는 방식이 먹히진 않겠지만 정화의 공간에 집어 넣는다면. 호흡을 바로 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뛴다. 신성을 발 끝에 담은 요정의 춤. “푸하핳♡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네~♡ 패배자♡ 폐품♡ 쓰레기♡ 퇴물♡” 정화를 뜻하는 신성마법을 기반으로 발을 움직인다. 교황이라면 눈치챌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내 도발에 이성을 잃은 그는 신성마법조차도 눈치채지 못할만큼 머리에 열이 오른 상태였다. “화나?♡ 그런 것치고는 하는 게 없는데?♡” 교황과 함께 춤을 춘다. 저 자가 춤을 춘단 사실조차 모를 만큼 자연스럽게. 요정의 시야로 보기에는 너무도 아름답게. “여기야~♡ 여기~♡ 늙어서 관절이 삐걱거려?♡ 잘 안 움직이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대지에 신성과 권능으로 만들어진 마법진이 그려졌다. 요정의 춤에 의해 기반이 만들어지고 미적감각에 의해 완성된 마법진은 어둠 속에서도 계속해서 희미한 빛을 냈다. “...잠깐.” “늦었어♡ 등신아♡” 그 마법진을 발로 내리찍은 순간 내 주변에 신성으로 이루어진 영역이 자리했다. 주신의 것이었으나 이제는 나의 것이 된 영역이. - 허접! - 나쁜 허접! - 죽엇! 그 영역의 위에서 요정들은 명확한 모양을 지녔고. “따뜻하군.” “행복해.” “이게 영애님의 영역.”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친구들은 의지를 얻었으며. 주변의 어둠은 설 자리를 잃었고 나는 몸 깊은 곳부터 차오르는 힘에 절로 웃음을 지었다. “...신이시여.” 그리고 교황의 눈에 이성이. 아. 미친. “이 또한 나름의 올바름이란 것입니까.” 아냐. 그래도 괜찮아. 이 곳이라면 교황도 제멋대로 재생을 이어나갈 수 없어. 그러니까 우리가 밀어붙이면 이전처럼 우악스러운 일을 벌이는 게 가능하지 않을 거야. 여기서 밀어붙인다. “바보!” “응!” 프레이의 검이 교황의 팔을 간단히 베어가른다. 악신의 권능을 잃어버린 교황의 육신은 인간의 것. 이전같은 강인함을 찾아볼 순 없다. 없어야 했다. 괴상한 재생력도. 악신의 힘도. 불완전한 악신인 교황은 모든 걸 잃어야 정상이었다. “좋은 곳이군요.” 허나 현실은 달랐다. 교황은 자신의 망가진 팔을 별 것 아니란 듯 되돌리더니 신성마법을. 신성마법? “무얼 그리 놀라십니까. 제 지위가 무엇이었는지 아시잖습니까.” 이 상황이 되어서도 신성마법을 펼치는 게 가능하다고? 단순하게 악신의 권능을 품은 것뿐만이 아니라 악신 그 자체나 다름없는 교황인데? 허접 주신! 너 씹 신성 관리 제대로 안 해!? 대체 나한테 얼마나 욕을 쳐 듣고 싶으면 이 지랄을 떠는 거야?! 빌어먹을 신에게 욕지거리를 내뱉은 나는 정화의 영역에 개입하려는 교황에게 필사적으로 달려들었다. 허나 그의 주변에 자리한 빛의 벽이 우리를 밀어냈다. “이해했습니다. 당신께서 제게 하려는 일을. 그를 막기 위해서 전 어떻게든 이 세상에 재앙을 일으켜야 할 테죠.” “당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겁니다!” 점차 제어권을 빼앗겨가는 영역에 페이비와 조이가 개입했다. 마법실력이라면 그 누구와도 비할 데가 없는 두 사람은 교황을 상대로도 손쉽게 주도권 싸움을 벌였다. “그거 아십니까?” 그 상황에서 교황은 태연한 체하며 우리 세 사람의 공격을 받아냈다. 죽음마저 극복할 수는 없는 듯 절명할 부위만을 막아내며 이루어지는 대전. “이 대지에 존재해선 안 될 수많은 던전들이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오롯이 제 권능 때문이란 것을.” 쓰잘데기 없는 말 존나 많네! 속으로도 겉으로도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달려들던 나는 문득 교황의 말을 되새겼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근본적인 문제를 깨달았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미친!” 다급하게 정화의 권능을 물리려던 나였지만 영역은 내 의도대로 사라지지 않았다. 조이와 페이비가 교황에 대항해 억지로 유지하던 영역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다급히 두 사람에게 소리를 치려던 나였지만 그 땐 이미 늦었다. 바닥의 어둠이 갈라지더니 그 곳에서 마물이 튀어나온 것이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것들이. 내가 기억하는 소울 아카데미의 마물들이 어둠으로부터 튀어나오고 있다. 교황의 권능이 무너짐에 따라 생겨난 던전의 폭주. 이것만큼은 예상하지 못했다. 당장 던전이 나타나는 것도 당혹스러웠는데 던전의 폭주까지 어떻게 예상하란 말인가. “영애님! 기적을!” “아직이야!” 아직. 아직. 성물을 발동해선 안 된다. 특히나 교황이 이성을 부여잡은 지금이라면 더더욱. 기적을 펼친다면 불사의 군단을 물릴 수 있겠지만 그래서야 미래가 없어! “그럴 때가 아니다! 이러면 우리가 죽는다!” “그래도!” “루시 말 들어! 최선을 다해! 허접 왕자님!”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해요!” 그것만큼은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둬야 해. 일단은! “루시 알른.” 불사의 군단에 당혹을 느끼던 중 내 뒤에서 어떤 남자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앞만 봐라.” 에르기누스의 어둠에 주변에 넘실거리더니 우리를 향해 달려들던 마물들을 모두 다 집어 삼켰다. 그를 본 교황이 자신의 권능을 펼쳐 어둠을 막아냈지만 그와 거의 동시에 마물의 파도를 가르며 나타난 기사가 교황의 육신을 짓이기려 들었다. “루시! 도와주러 왔다!” 베네딕의 갑옷은 격전의 여파로 너덜너덜했지만 그의 눈동자에 담긴 힘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선명했다. “이러신다 한들 당신 혼자 이 모든 군세를 감당할 순 없을 텐데요?” “내가 혼자로 보이나?!” 그가 소리치기 무섭게 뒤 편에서 인간의 군세가 등장했다. 알른의 기사들이. 왕국의 병사들이. 성지의 사제와 성기사들이. 마탑의 마법사들이. 제국의 투사들이. 숲에 있어야 할 요정들이. 숲을 지켜야할 이들이. 마물의 군세를 마주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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