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Chapter 7

옛날 옛적에 아주 사악한 드래곤이 살았습니다.

사악한 드래곤이 나타나면 사람들은 모두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기 바빴습니다.

왜냐하면 사악한 드래곤이 지나간 곳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거든요.

밭은 망가지고 집은 무너졌으며 가축은 잡아먹혔습니다.

사악한 드래곤의 횡포는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엘프들의 숲을 불태우고 드워프들의 보물도 약탈했습니다.

아르디나 대륙은 슬픔과 분노, 절망으로 물들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종족의 원성과 곡소리가 하늘에 닿을 무렵, 레드 드래곤 그라시드가 나타났습니다.

사악한 드래곤의 횡포를 막기 위해 나타난 그라시드는 한 인간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 인간의 이름은 지그리드. 특별한 능력 하나 없는 평민 출신의 남자였습니다.

그러나 지그리드는 특별한 능력은 없었지만 가장 큰 장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누구보다 용감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과 드래곤.

고작 드래곤의 발톱 하나 크기인 인간과 성만큼 커다란 드래곤.

마법까지 자유자재로 다루는 드래곤을 한낱 인간이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라시드의 도움을 받은 지그리드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화염이 날아들고 얼음이 솟아나며 벼락이 내려치고 땅이 갈라졌지만, 지그리드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작은 인간 앞에 거대한 드래곤이 쓰러졌습니다.

위대한 업적을 이룬 지그리드는 사악한 드래곤이 쓰러진 자리에 나라를 세우고, 자신을 도와준 그라시드를 기리는 의미로 국호를 ‘그라시스’로 정했습니다.

지그리드의 정성에 감동한 그라시드는 그에게 새로운 언어와 보물을 주었으니, 위대한 그라시스의 시작이었습니다.

-라는 동화가 있다.

제목이 ‘지그리드 모험기’였지, 아마?

그라시스의 아이들에겐 바이블과 같은 책이었다.

동화라고 하기엔 전기답고, 전기라고 하기엔 동화다우니 지그리드 모험기라는 제목이 퍽 어울렸던 책으로 기억한다.

내가 알기로 지그리드 모험기의 내용은 각색이 조금 들어가긴 했지만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그라시드의 도움을 받아 사악한 드래곤을 쓰러트린 지그리드가 그라시스를 건국하고 레드 드래곤을 기리기 위해 국호를 그라시스로 지은 것과 언어와 보물을 받은 것.

그 때문에 그라시스는 아르키쉬 대신 왕국어, ‘그라닉’이라는 독자적인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로 아르카 제국이 만든 아르키쉬가 이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호사가들은 그라시드의 압박이 있었을 거라고 말하지.’

그게 아니라면 잘만 쓰던 아르키쉬를 두고 그라닉을 쓸 이유가 있었겠냐고.

진실이든 거짓이든, 이제 와선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다.

그라시스는 멸망했고.

그라닉을 아는 사람은 점점 사라져 결국 역사서 한쪽 구석에 ‘그런 언어가 있었다’라는 문장으로만 남을 테니까.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라닉?”

설마 사도가 그라닉을 구사할 줄이야.

나는 두 손으로 검을 꽉 쥔 채 놀란 얼굴을 하는 여자를 바라봤다.

파지법도 이상하고 자세도 이상해.

애초에 공격할 생각도 없어 보이지만, 저래서야 검을 휘둘러도 제대로 된 위력이 나올 리 없어.

요즘 벌레 떼… 그러니까 나를 공격하는 것들의 정체가 사도라는 것을 알아냈다.

처음에는 의심했는데, 자세히 관찰하니까 공격하는 녀석들 중 대부분이 몇 번이나 왔던 놈들이더라고.

대장장이의 말도 들었겠다, 그들의 정체가 사도라는 걸 확신했지.

내가 기이하다고 느낀 기척도 에델의 가호 때문일 테고.

부활해서 다시 오는 것을 알아채니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는 태도나 끝도 없이 몰려오는 게 납득이 되더라.

물론 사도인 걸 알았다고 해서 내 대응이 달라질 건 없었지만.

전과 똑같이 베고, 찌르고, 날려 보내고.

그렇게 계속 죽이다 보니 사도들 사이에서 내 악명이 퍼진 건지 공격하는 빈도가 확 줄더라.

나중에는 포기했는지 이상한 짓을 하는 녀석들도 종종 있었고.

제일 황당했던 건 갑자기 찾아와서 밥상을 펴는 놈이었다.

그땐 정말 황당했지….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 이전 생의 속담이 떠올라서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 줬다.

아무튼 지금 내 앞의 여자도 내 악명을 들은 듯했다. 그러니 저렇게 벌벌 떠는 거겠지.

그럼에도 이곳까지 찾아온 이유는 모르겠지만, 기행을 일삼는 이들 중 하나 아니겠어?

“그라닉을 알아?”

“그라닉? 그라시스? 어, 뭐였더라… 조금! 듣다!”

“흐응.”

아무래도 제대로 익힌 것 같지는 않네.

아주 간단한 듣고 말하기 정도만 할 수 있는 모양이야.

나는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검을 휙 털고 검집에 넣었다.

저번에 먹었던 코카트리스의 맛이 떠올라서 끼니도 챙기고 구제도 할 겸 왔는데, 이번엔 벌레가 아니라 사람이었네.

날아간 머리를 주워 몸통과 함께 챙기고 집으로 향했다.

키가 짧은 탓에 축 늘어진 코카트리스의 사체가 땅에 질질 끌렸다.

벌레가 아닌 사람이고, 적대적이지도 않다면 굳이 죽일 필요는 없지.

* * *

“사, 산 거 맞지…? 그치?”

-뭐야? 뭐임? 모임??

-왜 살려줌?

-방금 뭐 한 거임?

-와 목소리 엄청 좋다

-목소리가 완전 애긴데?

코카트리스의 사체를 챙긴 묘지기가 등을 돌린다.

질질 끌리던 코카트리스의 다리가 덩달아 둥근 원을 그렸다.

케이프 너머로 흘러나온 여린 목소리를 들었을 때 저니의 채팅창은 잠시 얼어붙었다.

그동안 묘지기의 정체에 대한 말은 분분했다.

이룰 것을 다 이루고 속세를 떠나 사는 검성이다, 고대 유적의 마법 병기다, 아무 말도 없는 걸 보니 언데드다 등등….

그중에는 체구가 작은 걸 봐선 어린애가 아니냐는 추측도 있었지만 씹덕 같은 소리 혹은 터무니없는 우스갯소리라는 말을 듣기 일쑤였다.

현실적인 실리아 세계에서 어린아이가 그런 무력을 가질 수 없었으니까.

실제로 플레이어가 만난 NPC 중 강자 반열에 조금이라도 발을 걸치기 시작한 이들은 거의 다 육체가 전성기를 맞이하는 20대였다.

그 후로 나이를 먹을수록 강해지다가, 노화가 본격적으로 찾아오기 전 벽을 넘은 이는 더욱 강해지고 벽을 넘지 못한 이는 세월의 풍파에 꺾여 사라지는 세계.

그것이 플레이어들이 아는 실리아였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케이프에 숨겨진 모습을 봐야 확실하겠지만 목소리와 체구를 보면 절대 성인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폴리모프한 드래곤 아냐? 근데, 실리아에 폴리모프 마법이 있나…? 아니면 드워프?’

따라서 이런 의문이 저니의 머릿속을 맴도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방금 어떻게 한 거냐고 156189번째 묻습니다

-안 따라가고 뭐 해!

-이상한 말 쓰던데 뭐임?

“아, 아! 따라가야지!”

묘지기가 검을 내린 순간부터 저니의 전투 상태는 해제되어 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녀가 땅에 그어진 끌린 자국을 따라 달리며 시청자들의 질문에 답했다.

“방금 했던 건 그라닉이라고 그라시스 왕국이 쓰던 언어야.”

-그라시스 왕국?

“1년 전에 멸망한 왕국이야. 그리고 여기… 묘지기가 있는 산은 그라시스의 영토였던 곳이고.”

고작 1년 전에 멸망한 왕국인 만큼 그라시스란 이름을 듣는 건 어렵지 않았다.

길거리의 상인들이, 지나가는 여행객이, 항간에 떠도는 소문이 말해 주었으니까.

그러나 정보의 수집 난이도에 비해 그라시스에 대해 아는 플레이어는 생각보다 많이 없었고,대부분은 ‘왕국이 있었는데 멸망했다더라’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 이유는 실리아 온라인의 특성 때문이었다.

실리아 온라인을 처음 시작한 플레이어는 리베리 지부가 있는 마을에 덩그러니 떨어진다.

플레이어에게 주어진 것은 리베리 소속 용병이라는 신분과 에델의 가호 뿐, 다른 MMORPG처럼 메인 스토리나 메인 퀘스트 같은 건 전혀 없다.

마치 ‘너도 이제 이 세계의 주민이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게임사가 지정해 주는 목표 같은 것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거창한 목표를 세우고 가슴 뛰는 모험을 만들어야 했다.

저니는 그 점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아무래도 세세한 요소까지 찾아보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으니까 모를 만도 해.”

특히 퍼스트 클리어를 위해 숨 가쁘게 달리는 사람은 시간을 내기 쉽지 않을 것이다.

누구보다 빠른 클리어를 위해 패턴 분석팀까지 따로 있을 정도니까 이런 곳에 할애할 시간은 없겠지.

물론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진 플레이어가 정보를 얻어 공유할 테니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을 테고.

지금은 열심히 달리는 사람들도 시간이 나면 관심을 갖고 다른 유저가 올린 글을 찾아보거나 직접 실리아의 역사에 대해 알아볼 수도 있겠지만, 실리아 온라인은 출시한 지 고작 반년밖에 되지 않은 게임이다.

할 수 있는 게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으니 원래부터 그런 것을 좋아하던 플레이어가 아니라면 뒷전으로 미루는 것이다.

“플레이어가 쓰는 언어는 아르키쉬, 로 아르카 제국이 만든 제국어야. 그리고 그라시스는 멸망할 때까지도 제국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고.”

-제국이 멸망시킨 거임??

“그건 아니지만 원인 중 하나이긴 했겠지. 아무튼… 나는 묘지기가 그라시스 사람이 아닐까? 라고 추측했어.”

멸망한 그라시스 영토에 위치한 산. 모습을 꼭꼭 숨기고 틀어박혀 사는 묘지기. 사연 있어 보이는 무덤.

딱 봐도 무언가 있다는 느낌이 팍팍 들지 않나.

“만약 그라시스의 멸망으로 인해 산속에 칩거하는 거면 제국에 좋은 감정이 있진 않을 테고, 아르키쉬를 쓰는 것도 좋게 보이진 않았겠지.”

어디까지나 만약의 경우다.

그런 이유가 아닐 수도 있고, 제국을 싫어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낮은 확률을 믿고 저니는 주사위를 굴렸고, 주사위의 눈금이 6을 가리키고 있었을 뿐인 그런 이야기다.

“운이 좋았지 뭐.”

NPC들에게 물어가며 그라닉을 배운 보람이 헛되지 않았음에 저니는 감사했다.

-근데 웬만한 NPC들은 말 통하던데. 옛 왕국 영토 안 도시 사람들도 다 알아듣고

-가끔 말 어눌한 NPC 있긴 하던데 걔네도 왕국 사람인가?

“그라시스는 몇십 년 전부터 망조가 들었다고 하더라고. 아마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나도 거기까지는 모르겠어.”

직접 겪은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저니의 눈이 저 멀리 보이는 묘지기의 뒷모습으로 향했다.

-보통 언어를 배울 생각까지 하나;

-이건 집념의 승리다

-우리 방장이 맞습니다

-대 저 니

“칭찬 고마워.”

채팅창의 호의적인 반응에 저니가 헤헤 웃었다.

“…근데 설마 따라갔다고 죽이진 않겠지?”

-우리 방장이 맞습니다..

-어라, 아까까진 분명 멋있었는데..?

-소저니

“후… 그래!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순 없지!

볼을 찹찹 두드리며 기합을 잔뜩 넣은 그녀는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I Became a Raid Boss

I Became a Raid Boss

레이드 보스가 되었다
Score 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One day, when I came to my senses, I found myself reincarnated in another world. After enduring a rough life post-reincarnation, I thought I could finally settle down, quietly tending to a flower garden in the mountains… …But something feels off.”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