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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02

영웅이니 뭐니하면서 칭송받는 사람들이 입을 헤 벌린 채 나랑 마마를 번갈아보는 광경은 꽤 즐거웠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인간의 감성을 지닌 사람들이란 게 느껴졌거든.

어디를 건드리면 얼굴이 벌개질지 뻔히 보이는 데 참아야 하는데 상당히 고역스러웠지만 난 어른이니까! 이 정도는 별 거 아냐!

가만 있질 못하는 손가락을 뒤로 숨겨 꼼지락거리고 있으려니 정신을 차린 할아버지가 애써 마마에게서 눈을 떼어냈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 좀 설명해 주겠느냐.”

“할아버지. 집착이 과해요. 자식 같은 아이에게도 사생활이 필요하답니다?”

“부탁 좀 하자꾸나. 내 입장에선 상황이 너무도 다급하게 진전이 되어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다.”

할아버지의 한숨을 잇듯 요정여왕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저도 부탁드릴게요. 알른 영애. 도대체 무슨 말인가요? 주신께서 당신의 어머니시라고요? 그리고 그런 분을 당신께서 혼내셨다고요? 제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알겠으니 진정하세요. 루네비아. 천천히 설명을 드릴테니까.”

“…루네비아라면 절 말씀하시는 건가요?”

“언제까지 여왕님이라고만 부를 순 없잖아요? 그래서 에르기누스님이 일기장에 적어둔 이름 목록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걸 골랐답니다.”

“그. 그걸 어떻게?!”

눈가를 떠는 에르기누스에게 내 손에 새겨진 역사의 신에 흔적을 보여줬다.

원망할 대상이 누구인지 알려주는 것과 동시에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많으니 알아서 기라고 협박하기 위해.

역사에 남을 천재인 에르기누스는 내 의도를 눈치채고 얌전히 입을 다물었지만 동정을 뗀 지 얼마 안 돼서 그런가 자기 연인의 마음은 눈치채지 못했다.

도와줘도 되겠지만 저 한심한 꼴이 더 재밌으니까 얌전히 있어야지.

“루네비아… 인가요.”

“싫으세요? 평소처럼 불러드릴까요?”

“아뇨. 정말 마음에 듭니다. 알른 영애.”

양 볼을 연분홍빛으로 물들인 요정여왕 루네비아는 내게 인사를 하면서도 그 눈은 에르기누스에게만 두고 있었다.

정말 풋풋하고 귀여워서 괴롭히고 싶네.

옆에서 쿡쿡 찌르면 붉은 풍선이 되어서 터져버릴 것 같잖아.

으아아. 진짜 근질근질거린다.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제 마마가 얼마나 한심한 지 설명하도록 할게요.”

“…흑. 정말 죄송합니다.”

*

잠시 시간을 되돌려서 성지에서 벌어진 싸움이 막 끝났을 무렵, 하도 울어댄 나머지 퉁퉁 부어버린 얼굴을 아르마디의 어깨에 숨기고 있던 중 갑작스레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하얀색으로만 가득해서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은 그 광경은 아카데미 입학시험 당시 아르마디와 계약을 맺었던 곳과 비슷한 느낌을 줬다.

기억이 흐릿하긴 하다만 아마 같은 장소겠지. 아르마디가 데려 온 곳이니까.

“마마. 왜 여기로 절 데려오신 건가요? 아직 해야 할 일이 잔뜩 있었는데요.”

전쟁이란 건 단순히 전투가 사라진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게임 속에서 ‘이겼다! 끝!’을 외칠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플레이어 한 사람을 납득시키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현실은 다르다.

각국의 병사들부터 시작해서 나를 지원해줬던 여러 종교의 사도들. 성지의 사제들. 숲의 주인들. 칭찬해달라며 달라붙는 요정들. 여기에 더해 지상에 잠시나마 머무를 수 있게 된 여러 신들까지. 이 모든 이들을 납득시켜야만 진정한 의미에서 전쟁을 끝낼 수 있다.

그리고 저들 모두와 대화하며 타협하고 납득시키기 위한 자리에는 내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저들 모두의 구심점이 되는 게 나이니까.

전투에 돌입하기 전 날 카리아에게 미리 이야기를 들었던 나는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이끌고 상황을 진정시킬 생각이었다.

메스가키 스킬의 저주도 사라졌겠다. 지난 번의 무례를 사과하면서 좋게 좋게 이야기를 끌고 가면 금방 일이 끝날 것 같았거든.

거기에 더해 옆에 위대한 주신도 있으니 분란종자들도 쉽게 떠들지 못할 게 뻔했고.

그런데 어라라?

빠르게 모든 일을 끝마치고 눈 앞의 신과 진중한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이상한 데에 끌려와 버렸네?

“저어. 그게.”

아르마디가 말을 망설이는 걸 본 나는 고갤 갸웃했다. 이제 와서 말을 아낄 이유가 있나?

아직 신앙이 굳건하니 거품처럼 사라져버릴 리는 없고.

아. 그거 때문인가.

“제 정체성에 대해 말씀하시고 싶으셨나요?”

위화감을 느낀 적은 많았다.

어느 순간 가슴 깊숙한 곳에서 차오르는 감정도.

루시의, 나의 기억을 읽을 때 들었던 미묘한 기시감도.

묘하게 여성의 몸에 적응이 빨랐던 것도.

내가 그토록 좋아하던 캐릭터들을 마주하면서도 나쁜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도.

이외에도 여러 미묘한 부분들이 존재했다.

오늘에 이르러 아르마디가 확인을 해줬기에 그 미묘함을 확신하게 되었을 뿐이다.

다만 지금도 내가 루시라는 사실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지금도 내게 선명히 다가오는 기억은 이계의 것이니까.

“궁금하긴 했어요. 제가 정확하게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 건지에 대해서.”

“…일단 루시는 루시 알른입니다. 다만, 이계에 살던 인간의 기억을 품고 있을 뿐이죠.”

“당신께서 기억을 넣으셨나요?”

“예. 다른 모든 가능성이 틀어막히고서 선택한 최후의 수단이었습니다.”

죄책감이 잔뜩 서린 얼굴로 망설이듯 말을 꺼낸 그녀는 허공에 가구를 만들어내더니 내게 앉기를 권유했다.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이라면서.

“아그라가 권능을 사용하는 걸 보셨으니 알고 계시겠지만 권능이란 건 무척 억지스럽습니다. 힘이 허락하는 내에서라면 상식에서 저만치 벗어난 일도 얼마든 일으킬 수 있죠.”

“그에 대해서라면 잘 알고 있습니다. 지겹도록 겪어보았으니까요.”

“저도 억지를 좀 피웠답니다.”

신화 시대의 전쟁이 이어지던 어느 날. 아르마디는 패배를 피할 수 없을 것임을 알게 됐다.

여태까지 많은 이들이 세상을 위해 희생했고 앞으로도 많은 이들이 대지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겠지만 그럼에도 끝을 막을 수 없으리란 걸 말이다.

그래서 아르마디는 깊은 고민 끝에 공멸을 택하기로 마음먹었다.

서로 상반되어 있지만 한편으론 상호보완적인 관계인 아르마디와 아그라다.

한 쪽이 강해지면 다른 한 쪽도 강해지듯 한 쪽이 약해지면 다른 한 쪽도 약해질 수밖에 없으니, 아르마디는 자신의 힘을 내려놓는 것으로 아그라를 무너트리려 했다.

“권능이란 것이 내려놓고 싶다고 내려놓을 수 있는 게 아닌지라 전 엄청난 억지를 부렸습니다. 인간의 시대가 끝나지 않게 해달라고 말이죠.”

앞서 아르마디가 했던 말을 듣다 미간을 찌푸렸던 나는 뒤이어진 설명에 놀라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내 시선을 받은 아르마디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영원한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시대에도 어느새 끝이 도래했죠. 아그라가 부활했고 대지의 생명들이 죽었으며 희망은 사그러졌으며 전 절망 앞에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고갤 든 순간 새로이 인간의 시대가 시작됐죠.”

그 때부터 아르마디는 하늘 위에서 무수한 멸망을 바라봐야만 했다.

이번에 자신이 한 일이 옳기를. 기적이 일어나 멸망을 막을 수 있기를.

부디 대지의 모든 이들이 웃을 수 있는 미래에 도달하기를. 바라고 바라고 또 바라면서.

“무수히 반복된 시작의 영향일까요? 어느 날 세계에 자그마한 균열이 생겼고 전 다른 세계를 인지하게 됐습니다. 당신이 알고 계시는 과학의 세상을 말이죠.”

경이로운 상상력을 지닌 세계를 확인한 아르마디는 도박을 걸어보기로 결정했다.

아르마디가 여태 겪어 온 무수한 시작을 자그마한 세상으로 만들어 퍼트림으로써 누군가 자신이 생각해내지 못한 방법을 찾아내주기를 기원한 것이다.

“반쯤은 자포자기한 상태였어요. 얼마 남지 않은 힘 대부분을 희미한 가능성에 내던진 거니까요.”

놀랍게도 그녀의 도박은 성공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만들어낸 작은 세계에 흥미를 가졌고 거기에 집요할 정도로 파고 들어가며 아르마디의 상식을 부쉈던 것이다.

“그 때부터 마지막 한 번을 위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최상의 환경이 도래하기만을 기다렸죠.”

기다림은 길었지만 아르마디는 조금의 절망도 느끼지 않았다.

빛 하나 존재하지 않는 어둠 속에서 바닥을 짚어가며 나아가던 때에 비하면, 희망이란 빛줄기가 나타난 길 위를 걷는 건 행복한 일이었으니까.

“제가 대지에 내려와 직접 당신을 낳은 건 평범한 인간이 이세계의 기억을 감당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끝에 도달한 가능성이 바로 나였다.

“죄송합니다. 루시. 당신이 저를 어찌 생각하더라도 전 할 말이 없습니다. 어떤 처벌을 내리시더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다만, 다만 이것만큼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시작은 불순했을지라도 전 진심으로 루시 당신을 사랑했고 베네딕 그를 소중하게 여겼다는 걸.”

말을 끝마친 아르마디는 눈을 꾹 감은 채로 고갤 숙였다.

앞으로 일어날 일이 너무도 두렵다는 것처럼.

하고 싶은 말도 많았고 따져 묻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잔뜩 겁을 먹은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실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믿어요.”

“…네?”

“믿는다구요. 마마. 당신이 절 사랑했단 걸.”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웃어보였더니 두 눈을 크게 떴던 아르마디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눈가가 파들파들 떨리고 그를 따라 서서히 맺히는 물방울도 함께 떨린다.

“근데 그거랑 별개로 마마가 허접멘탈이란 건 잘 알겠네요. 진짜 한심해.”

“에. 예?”

당장에라도 오열할 것 같았던 아르마디는 갑작스런 비난에 놀라 눈을 깜빡였다.

“참 슬퍼요. 제가 알던 마마는 이런 멘헤라가 아니었는데.”

“죄. 죄송합니다?”

“사과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죠. 마마. 당신께서 제게 알려주셨던 내용이잖아요? 자기가 가르쳐준 것도 못 지키는 거에요?”

“아. 그. 에. 어. 어어어. 어떻게 할까요?”

“무릎부터 꿇어요. 개허접에 변태에 무능하고 바보같은 마마.”

“그치만.”

“무릎 꿇으라고. 당장.”

웃음기를 싹 빼고 말했더니 아르마디가 슬그머니 일어나선 내 앞에 정좌했다.

“마마가 날 사랑하는 걸 아니까 진지하게 말하는 거야. 원래 소중한 사람일수록 엄하게 다그치는 거잖아. 그치?”

“네. 네에에.”

“새겨 들어.자기가 한 말을 기억도 못 하는 한심한 사람이 내 마마면 창피하단 말야.”

다시금 히죽 웃음을 지은 난 품 안에서 수첩이란 이름의 원한의 서를 꺼냈다.

그리고는 펜을 꺼내어 뒤 편에 몇 줄을 더 추가했다.

오늘 내로 이게 끝날까 몰라.


           


Chapter 702

Chapter 702

영웅이니 뭐니하면서 칭송받는 사람들이 입을 헤 벌린 채 나랑 마마를 번갈아보는 광경은 꽤 즐거웠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인간의 감성을 지닌 사람들이란 게 느껴졌거든. 어디를 건드리면 얼굴이 벌개질지 뻔히 보이는 데 참아야 하는데 상당히 고역스러웠지만 난 어른이니까! 이 정도는 별 거 아냐! 가만 있질 못하는 손가락을 뒤로 숨겨 꼼지락거리고 있으려니 정신을 차린 할아버지가 애써 마마에게서 눈을 떼어냈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 좀 설명해 주겠느냐.” “할아버지. 집착이 과해요. 자식 같은 아이에게도 사생활이 필요하답니다?” “부탁 좀 하자꾸나. 내 입장에선 상황이 너무도 다급하게 진전이 되어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다.” 할아버지의 한숨을 잇듯 요정여왕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저도 부탁드릴게요. 알른 영애. 도대체 무슨 말인가요? 주신께서 당신의 어머니시라고요? 그리고 그런 분을 당신께서 혼내셨다고요? 제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알겠으니 진정하세요. 루네비아. 천천히 설명을 드릴테니까.” “...루네비아라면 절 말씀하시는 건가요?” “언제까지 여왕님이라고만 부를 순 없잖아요? 그래서 에르기누스님이 일기장에 적어둔 이름 목록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걸 골랐답니다.” “그. 그걸 어떻게?!” 눈가를 떠는 에르기누스에게 내 손에 새겨진 역사의 신에 흔적을 보여줬다. 원망할 대상이 누구인지 알려주는 것과 동시에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많으니 알아서 기라고 협박하기 위해. 역사에 남을 천재인 에르기누스는 내 의도를 눈치채고 얌전히 입을 다물었지만 동정을 뗀 지 얼마 안 돼서 그런가 자기 연인의 마음은 눈치채지 못했다. 도와줘도 되겠지만 저 한심한 꼴이 더 재밌으니까 얌전히 있어야지. “루네비아... 인가요.” “싫으세요? 평소처럼 불러드릴까요?” “아뇨. 정말 마음에 듭니다. 알른 영애.” 양 볼을 연분홍빛으로 물들인 요정여왕 루네비아는 내게 인사를 하면서도 그 눈은 에르기누스에게만 두고 있었다. 정말 풋풋하고 귀여워서 괴롭히고 싶네. 옆에서 쿡쿡 찌르면 붉은 풍선이 되어서 터져버릴 것 같잖아. 으아아. 진짜 근질근질거린다.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제 마마가 얼마나 한심한 지 설명하도록 할게요.” “...흑. 정말 죄송합니다.” * 잠시 시간을 되돌려서 성지에서 벌어진 싸움이 막 끝났을 무렵, 하도 울어댄 나머지 퉁퉁 부어버린 얼굴을 아르마디의 어깨에 숨기고 있던 중 갑작스레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하얀색으로만 가득해서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은 그 광경은 아카데미 입학시험 당시 아르마디와 계약을 맺었던 곳과 비슷한 느낌을 줬다. 기억이 흐릿하긴 하다만 아마 같은 장소겠지. 아르마디가 데려 온 곳이니까. “마마. 왜 여기로 절 데려오신 건가요? 아직 해야 할 일이 잔뜩 있었는데요.” 전쟁이란 건 단순히 전투가 사라진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게임 속에서 ‘이겼다! 끝!’을 외칠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플레이어 한 사람을 납득시키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현실은 다르다. 각국의 병사들부터 시작해서 나를 지원해줬던 여러 종교의 사도들. 성지의 사제들. 숲의 주인들. 칭찬해달라며 달라붙는 요정들. 여기에 더해 지상에 잠시나마 머무를 수 있게 된 여러 신들까지. 이 모든 이들을 납득시켜야만 진정한 의미에서 전쟁을 끝낼 수 있다. 그리고 저들 모두와 대화하며 타협하고 납득시키기 위한 자리에는 내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저들 모두의 구심점이 되는 게 나이니까. 전투에 돌입하기 전 날 카리아에게 미리 이야기를 들었던 나는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이끌고 상황을 진정시킬 생각이었다. 메스가키 스킬의 저주도 사라졌겠다. 지난 번의 무례를 사과하면서 좋게 좋게 이야기를 끌고 가면 금방 일이 끝날 것 같았거든. 거기에 더해 옆에 위대한 주신도 있으니 분란종자들도 쉽게 떠들지 못할 게 뻔했고. 그런데 어라라? 빠르게 모든 일을 끝마치고 눈 앞의 신과 진중한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이상한 데에 끌려와 버렸네? “저어. 그게.” 아르마디가 말을 망설이는 걸 본 나는 고갤 갸웃했다. 이제 와서 말을 아낄 이유가 있나? 아직 신앙이 굳건하니 거품처럼 사라져버릴 리는 없고. 아. 그거 때문인가. “제 정체성에 대해 말씀하시고 싶으셨나요?” 위화감을 느낀 적은 많았다. 어느 순간 가슴 깊숙한 곳에서 차오르는 감정도. 루시의, 나의 기억을 읽을 때 들었던 미묘한 기시감도. 묘하게 여성의 몸에 적응이 빨랐던 것도. 내가 그토록 좋아하던 캐릭터들을 마주하면서도 나쁜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도. 이외에도 여러 미묘한 부분들이 존재했다. 오늘에 이르러 아르마디가 확인을 해줬기에 그 미묘함을 확신하게 되었을 뿐이다. 다만 지금도 내가 루시라는 사실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지금도 내게 선명히 다가오는 기억은 이계의 것이니까. “궁금하긴 했어요. 제가 정확하게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 건지에 대해서.” “...일단 루시는 루시 알른입니다. 다만, 이계에 살던 인간의 기억을 품고 있을 뿐이죠.” “당신께서 기억을 넣으셨나요?” “예. 다른 모든 가능성이 틀어막히고서 선택한 최후의 수단이었습니다.” 죄책감이 잔뜩 서린 얼굴로 망설이듯 말을 꺼낸 그녀는 허공에 가구를 만들어내더니 내게 앉기를 권유했다.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이라면서. “아그라가 권능을 사용하는 걸 보셨으니 알고 계시겠지만 권능이란 건 무척 억지스럽습니다. 힘이 허락하는 내에서라면 상식에서 저만치 벗어난 일도 얼마든 일으킬 수 있죠.” “그에 대해서라면 잘 알고 있습니다. 지겹도록 겪어보았으니까요.” “저도 억지를 좀 피웠답니다.” 신화 시대의 전쟁이 이어지던 어느 날. 아르마디는 패배를 피할 수 없을 것임을 알게 됐다. 여태까지 많은 이들이 세상을 위해 희생했고 앞으로도 많은 이들이 대지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겠지만 그럼에도 끝을 막을 수 없으리란 걸 말이다. 그래서 아르마디는 깊은 고민 끝에 공멸을 택하기로 마음먹었다. 서로 상반되어 있지만 한편으론 상호보완적인 관계인 아르마디와 아그라다. 한 쪽이 강해지면 다른 한 쪽도 강해지듯 한 쪽이 약해지면 다른 한 쪽도 약해질 수밖에 없으니, 아르마디는 자신의 힘을 내려놓는 것으로 아그라를 무너트리려 했다. “권능이란 것이 내려놓고 싶다고 내려놓을 수 있는 게 아닌지라 전 엄청난 억지를 부렸습니다. 인간의 시대가 끝나지 않게 해달라고 말이죠.” 앞서 아르마디가 했던 말을 듣다 미간을 찌푸렸던 나는 뒤이어진 설명에 놀라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내 시선을 받은 아르마디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영원한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시대에도 어느새 끝이 도래했죠. 아그라가 부활했고 대지의 생명들이 죽었으며 희망은 사그러졌으며 전 절망 앞에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고갤 든 순간 새로이 인간의 시대가 시작됐죠.” 그 때부터 아르마디는 하늘 위에서 무수한 멸망을 바라봐야만 했다. 이번에 자신이 한 일이 옳기를. 기적이 일어나 멸망을 막을 수 있기를. 부디 대지의 모든 이들이 웃을 수 있는 미래에 도달하기를. 바라고 바라고 또 바라면서. “무수히 반복된 시작의 영향일까요? 어느 날 세계에 자그마한 균열이 생겼고 전 다른 세계를 인지하게 됐습니다. 당신이 알고 계시는 과학의 세상을 말이죠.” 경이로운 상상력을 지닌 세계를 확인한 아르마디는 도박을 걸어보기로 결정했다. 아르마디가 여태 겪어 온 무수한 시작을 자그마한 세상으로 만들어 퍼트림으로써 누군가 자신이 생각해내지 못한 방법을 찾아내주기를 기원한 것이다. “반쯤은 자포자기한 상태였어요. 얼마 남지 않은 힘 대부분을 희미한 가능성에 내던진 거니까요.” 놀랍게도 그녀의 도박은 성공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만들어낸 작은 세계에 흥미를 가졌고 거기에 집요할 정도로 파고 들어가며 아르마디의 상식을 부쉈던 것이다. “그 때부터 마지막 한 번을 위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최상의 환경이 도래하기만을 기다렸죠.” 기다림은 길었지만 아르마디는 조금의 절망도 느끼지 않았다. 빛 하나 존재하지 않는 어둠 속에서 바닥을 짚어가며 나아가던 때에 비하면, 희망이란 빛줄기가 나타난 길 위를 걷는 건 행복한 일이었으니까. “제가 대지에 내려와 직접 당신을 낳은 건 평범한 인간이 이세계의 기억을 감당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끝에 도달한 가능성이 바로 나였다. “죄송합니다. 루시. 당신이 저를 어찌 생각하더라도 전 할 말이 없습니다. 어떤 처벌을 내리시더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다만, 다만 이것만큼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시작은 불순했을지라도 전 진심으로 루시 당신을 사랑했고 베네딕 그를 소중하게 여겼다는 걸.” 말을 끝마친 아르마디는 눈을 꾹 감은 채로 고갤 숙였다. 앞으로 일어날 일이 너무도 두렵다는 것처럼. 하고 싶은 말도 많았고 따져 묻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잔뜩 겁을 먹은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실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믿어요.” “...네?” “믿는다구요. 마마. 당신이 절 사랑했단 걸.”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웃어보였더니 두 눈을 크게 떴던 아르마디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눈가가 파들파들 떨리고 그를 따라 서서히 맺히는 물방울도 함께 떨린다. “근데 그거랑 별개로 마마가 허접멘탈이란 건 잘 알겠네요. 진짜 한심해.” “에. 예?” 당장에라도 오열할 것 같았던 아르마디는 갑작스런 비난에 놀라 눈을 깜빡였다. “참 슬퍼요. 제가 알던 마마는 이런 멘헤라가 아니었는데.” “죄. 죄송합니다?” “사과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죠. 마마. 당신께서 제게 알려주셨던 내용이잖아요? 자기가 가르쳐준 것도 못 지키는 거에요?” “아. 그. 에. 어. 어어어. 어떻게 할까요?” “무릎부터 꿇어요. 개허접에 변태에 무능하고 바보같은 마마.” “그치만.” “무릎 꿇으라고. 당장.” 웃음기를 싹 빼고 말했더니 아르마디가 슬그머니 일어나선 내 앞에 정좌했다. “마마가 날 사랑하는 걸 아니까 진지하게 말하는 거야. 원래 소중한 사람일수록 엄하게 다그치는 거잖아. 그치?” “네. 네에에.” “새겨 들어.자기가 한 말을 기억도 못 하는 한심한 사람이 내 마마면 창피하단 말야.” 다시금 히죽 웃음을 지은 난 품 안에서 수첩이란 이름의 원한의 서를 꺼냈다. 그리고는 펜을 꺼내어 뒤 편에 몇 줄을 더 추가했다. 오늘 내로 이게 끝날까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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