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간한 나라보다도 나이가 많은 노친네들의 주접이 끝났을 즈음 내 생명력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아그라를 쓰러트린 뒤라서 다행이다. 만약 이 광경을 봤다면 내 정신을 죽이려 들었을텐데 말야.
안도 아닌 안도를 하며 한숨을 내쉰 나는 요정여왕의 품을 벗어나 용사의 앞에 섰다.
“이야기 다 이해하셨죠? 그럼 빨리 당신이 바라는 걸 말해주세요. 저희 주신은 공감 능력이 부족한 허접이라 말 안 해주면 모르거든요.”
“바라는 거라. 대륙의 평화라거나 모두의 웃음 같은 이야기를 하면 안 되겠지?”
“하. 그건 당신이 아니라도 이룰 사람 많거든요? 찌질한 패배자는 얌전히 뒤로 물러나세요.”
“하하하. 맞는 말이다. 그대가 나보다 훨씬 더 나은 인간이니 알아서 잘 할 테지.”
고개를 끄덕인 용사는 침음성과 함께 머리를 긁적이다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허나 개인의 바람을 이야기하라 그래도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군. 그런 걸 생각하지 않은 지가 워낙 오래되었거든. 예전에는 뭔가 꿈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아무것도 떠오르질 않아.”
“그것도 그렇네요. 폐기된 지 오래인 용사님의 정신연령은 꼬맹이보다 못 할 테니까요.”
용사는 신화의 시대 때부터 타인을 위해 지금까지 살아왔다.
악신과 싸우고 대륙의 평화를 만들어낸 뒤, 여태 어둠 속에서 홀로 악신의 봉인을 지켰지.
그런 그에게 자율성을 바래도 곤란할 거다.
“그럼 다 해보세요.”
“…음?”
“아무거나 다 해보시라고요. 평화로운 대륙의 영웅이 되어서 모두의 찬양을 받아보기도 하고. 힘 있는 귀족이 되어서 갑질을 해보기도 하고. 한적한 시골에서 평화로운 시간도 즐겨보고. 옆에 있는 여장벽 기사님마냥 여자에 미친 새끼로 살아보기도 하고.”
“자. 잠깐. 너무 마구잡이로 말하는 것 아닌가.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잖나.”
“안 될 게 뭐 있어요? 동화 속의 용사님이란 명성도 있고, 전성기만큼은 아니더라도 힘을 지닌데다가, 저랑 마마라는 뒷배까지 뒀는데 뭐든 다 할 수 있죠.”
무수한 기적이 반복된 끝에 도달한 곳이 지금의 세상이다.
이 곳에서 현실적이라는 단어만큼이나 무의미한 것도 없다.
“혼자서 못할 것 같으면 욕망에 충실한 기사님을 데리고 다니시던가요. 가운데 다리의 지배를 받는 저 사람이라면 뭘 해야 할지 잘 알려줄 걸요?”
“…이봐. 왜 내 평가만 그렇게 박한 거지?”
은근슬쩍 비방당하던 가라드가 잔뜩 굳은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내가 그대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그러나!”
“그냥 생긴 게 마음에 안 들어서요.”
“루엘! 네 제자 관리 좀 제대로 해라!”
“미안하군. 생긴 게 마음에 안 든다는 데 내가 어쩌겠는가. 그렇게 생긴 자네를 탓. 큽.”
무덤덤하게 대답을 하던 할아버지는 마지막에 이르러 웃음을 참는데 실패하고 고갤 돌렸다.
어깨가 들썩이는 것에 맞추어 흘러나오는 비웃음에 가라드가 목에 잔뜩 힘을 준다.
“싸우잔 거냐!? 어?!”
“죄송합니다. 가라드님. 제가 당신을 그리 만든 탓에.”
“주신이시여! 당신이 사과를 해버리면 제가 뭐가 됩니까! 제 얼굴은 멀쩡합니다! 예전에도 지금도 잘생겼단 소리를 들어왔단 말입니다! 잘못된 것은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의 눈입니다!”
차마 아르마디에겐 무어라 하기 힘든 듯 억울함에 가라드가 날뛰던 도중 에르기누스가 웃음을 참는 티를 팍팍 내며 짐짓 앞으로 나섰다.
“여왕님. 크흠. 아니. 루네비아님의 눈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인가?”
“아니란 거 알면서도 일부러 그딴 식으로 이야기할래!?”
왁왁대는 가라드 덕분에 심각한 분위기에서 벗어난 우리들은 웃음소리와 함께 앞으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일단 용사와 가라드는 당분간 대륙에서 카리아와 함께 활동하기로 결정했다.
내가 했던 말처럼 평화 속에서 칭송받는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아보려 한단 것 같다.
“겸사겸사 지금의 평화가 더 오래 이어질 수 있도록 명성을 떨쳐두도록 하겠네.”
“꼬맹이! 너에 대한 비방도 잔뜩 퍼트릴 테니까 그런 줄 알아!”
“제발 그래주세요.”
“…응?”
“부디 제 평판을 낮출 수 있다면 제발 낮춰주세요. 믿고 있을게요. 가라드님이라면 분명 할 수 있을 거에요!”
“어? 믿는다니? 뭘?”
“약속한 거에요!? 못 지키면 가라드님의 흑역사를 세상에 퍼트릴 테니 그런 줄 아세요!”
“나만 이 상황을 이해 못 한 거야? 얘 갑자기 왜 이래?!”
가라드 정도의 입지를 지닌 사람이 안 좋은 말을 하고 다니면 내 평판이 조금은 떨어지겠지!
제기랄! 일도 다 끝났는데 더 이상 현인신 취급받고 싶지 않아!
다른 사람들이 둥가둥가해주는 거 진짜 질색이란 말야!
일방적으로 계약을 체결한 후 에르기누스와 루네비아 쪽으로 고갤 돌렸더니 두 사람이 손을 맞잡은 채 웃었다.
“우리 둘은 계속 이 숲에 머물 생각이다.”
“수백년 간 기다려 온 사랑이니까요. 즐길 시간도 수백년은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마지막으로 내 옆으로 시선을 옮겼더니 할아버지 가볍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네가 혼자서 잘할 수 있을 때까지는 옆을 지켜야지. 이대로는 불안해서 아무것도 못 할 거다.”
“할아버지. 여자애한테 집착하는 게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아요.”
“…나도 저 놈들 따라가랴?”
“그런 말은 아니고요! 옆에 있어 주시면 고맙죠!”
과거 이 세상을 구원했던 영웅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새로운 세상에서 한을 풀기로 결정했다.
수백년에 걸쳐 다시금 만나게 된 이들이지만 헤어진단 사실에 아쉬워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전에 헤어졌던 때와는 달리 모두 편히 웃으며 살 수 있을 걸 알고 있으니까. 굳이 다른 이를 막아 설 이유도 없지.”
항상 하던 생각이지만 어째 마마 아래에 있던 사람들이 마마보다 더 성숙한 것 같단 말야.
신이란 건 도대체 뭘까.
으으음. 이거 깊게 파고 들면 철학적인 질문이 될 것 같은데.
스스로의 머리가 과부화 되는 걸 느끼던 중 루네비아가 우리 둘의 앞에 섰다.
“죄송합니다만 두 분. 인도를 드려도 괜찮을까요?”
“지난 번에 했던 그거? 마마가 시켜서 한 거 아니었어?”
“그렇다고 생각했었습니다만 아르마디님께서 아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전 예지의 힘이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여왕께 미래를 알려드릴 수도 없죠. 그건 당신께서 지닌 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 과분하게도 제가 여러분께 앞으로를 인도해드릴 수도 있죠.”
한 번 헛기침을 하고서 목을 가다듬은 루네비아는 나와 마마의 손을 끌어모으더니 자신의 손을 그 위에 포갰다.
“여러분께서는 서로가 아끼는 사람들을 찾아가봐야합니다. 알른 영애께선 말하지 않아도 아실 거라 믿습니다. 못 다한 말들을 전해야 하시잖아요.”
“당연하지.”
메스가키 스킬의 저주 때문에 전하지 못한 말들이 많다.
허접이란 단어를 붙이지 않고 이름을 부르고 싶었던 적이 한 가득이었어!
근데 이젠 제대로 불러줄 수 있잖아!
당연히 당장에라도 달려가고 싶지!
“아르마디님께선 겁을 먹으셔선 안 됩니다. 여기서 물러섰다간 여태까지의 후회를 반복할 뿐이에요. 그러니 아무리 무서워도 찾아가셔서 당신의 생각을 전하세요.”
“…역시 그래야겠죠?”
“제 말이 위안이 될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분명 당신께선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어라? 잠깐만.
“마마가 겁을 먹었다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싶어 따지듯 물었더니 루네비아가 고갤 끄덕였다.
“제가 보기엔 그렇습니다.”
“…설마 파파를 만나는 걸 무서워하는 거야?”
“잘 알고 계시네요.”
“마마. 진짜 허접한 여자구나. 실망이야.”
“그. 그치만!”
“그럼 날 무작정 하얀 공간으로 데려간 것도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가 아니라 파파랑 마주보는 게 무서워서야?”
“그럴리가요! 전 그저 루시에게 하고픈 말이 많아서…!”
“정말? 자그마한 의도도 없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
“…조. 조금은.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손을 꼼지락대는 마마를 보고 있자니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 꼴을 조금 더 보고있다간 주신과 사도의 관계 때 그랬던 것처럼 폭언이 튀어나올 것 같아.
그냥 빨리 보내버리자.
“에르기누스님.”
“뭐. 뭔가.”
“왜 당황을 하세요?”
“크흠. 자네가 정상적으로 내 이름을 부르는 걸 들으니 절로 소름이 돋아서 말이다.”
“예전처럼 불러줘?”
“미안하다. 그러지 말아다오.”
기겁하면서 고갤 젓는 에르기누스를 보고 있자니 장난을 치고 싶단 마음이 절로 샘솟았지만 마마를 옆에 두고서 동정이니 비린내니 하는 단어를 꺼내기 싫어서 꾹 참았다.
“그래서 뭔가. 내게 부탁할 것이 있나?”
“마마 데리고 파파 곁으로 가주세요. 어딜 가도 눈에 띄는 사람이니까 쉽게 찾으실 수 있을 거에요.”
“베네딕 알른의 위치라면 이미 알고 있다. 바로 앞에 배달해 줄 수도 있어.”
“그럼 그렇게 부탁을 드릴 게요.”“네? 자. 잠시만요. 에르기누스님. 저 마음의 준비가.”
“데리고 가세요. 안 그러면 저 노트에 적어두셨던 거 다 뿌려버릴 거에요.”
“죄송합니다. 아르마디님! 이번 한 번만큼은 제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마마가 변명할 틈도 주지 않고서 어둠과 함께 둘이 사라진 후 날 안고 데려가란 의미에서 루네비아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루네비아는 가볍게 웃으면서도 내 바람을 따라주신 대신 고갤 저었다.
“죄송합니다만 당신의 곁엔 절 대신할 분들이 있잖습니까.”
– 맞아!
– 우리들이 있어!
– 우리도 루시 데려다 줄 수 있어!
기적이 끝났음에도 여전히 반짝이는 빛을 유지한 요정들은 불만을 잔뜩 담아서 목소리를 높였다.
“푸하하핳!”
– 왜 웃어!?
– 우리 진지해!
– 맞아! 엄청 진지해!
그게 어찌나 귀여운지 아무리 불평과 불만을 토해내도 무섭단 생각이 전혀 들질 않았다.
“알았어. 알았어. 자. 내가 어디 가고 싶어 하는지는 알지?”
– 응!
– 알고 있어!
– 인도해줄게!
요정들의 힘에 몸을 맡긴 채 눈을 감았다가 뜬 순간 새된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루. 루시?! 꿈인가요!? 저 꿈을 꾸고 있는 건가요?! 왜 갑자기 눈 앞에 루시가!”
잠옷을 입고 있던 조이는 내 모습에 놀라 평소처럼 얼빵한 소리를 지껄였다.
그렇게 많은 일을 겪어도 얼빵이는 달라지지 않는구나.
“그런 의심부터 들다니. 내가 평소에도 자주 꿈에 나오나 봐?”
“그으으.”
“하핳. 정말 날 너~무 좋아하는 거 아냐? 조이?”
“부정할 순 없… 자. 잠시만요! 루시! 방금 전에 뭐라고!”
“조이. 라고 했어.”
왜? 난 친구 이름 제대로 부르면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