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택으로 돌아온 조이는 공작 가문의 사람들에게 잔뜩 축하를 받았다.
대마법사 에르기누스의 공식적인 제자이며 신들과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마법사인 그녀다.
장남을 뒤로 물리고 조이를 차기 여공작으로 선언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그녀가 거둔 업적은 거대했다.
만약 조이가 바란다면 제프는 기꺼이 자기 작위를 내다 버릴 것이라는 점과는 별개로 조이는 권력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주변 사람들의 축하를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허나 왁자지껄한 파티가 끝나고 방에 홀로 남게 된 순간 조이는 자신이 겪은 모든 일들이 백일몽같다고 생각했다.
돌이켜 보면 볼수록 그녀의 2년은 비현실적인 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여러 악신과 싸운 것. 대마법사 에르기누스의 제자가 된 것. 신들의 전쟁에서 선두에 선 것. 그리고 그 끝에 승리한 것.
바보 같은 자신이 이뤄냈다기엔 너무도 과분한 것들 뿐이어서 조이는 자는 게 두려워졌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는 순간 자신이 겪은 모든 일이 거품이 되어 사라지고 삭막한 현실 속에서 가식적인 웃음을 지어야 했던 공작영애만이 남게 될 것 같아서 도저히 눈을 붙일 수 없었다.
이럴 때 옆에 루시가 있었다면 뭐라고 했을까. 또 얼빵이 같은 생각을 한다며 비웃었으려나.
후후후. 빨리 돌아오셨으면 좋겠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어머니가 사실 살아있었단 걸 알게 되셨으니 당분간은 만나기 어렵겠지만 그래도 만나서 함께하고 싶은걸.
루시와 함께하면 다른 잡다한 걸 고민할 틈이 없을 만큼 즐거우니까.
가만히 있어봐야 잠도 안 올 것 같으니 나중에 루시랑 뭐 할지 고민이나 해야겠다.
루시한테 주어진 임무는 다 끝난 거잖아.
그러니까 이젠 아카데미의 여학생답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거야!
참고를 위해 전 아카데미 출신의 여작가가 출판한 청춘소설을 꺼낸 조이는 그 곳의 인물들에 자신과 친구들을 투영하며 바보 같은 웃음을 지었다.
“조이. 라고 했는데?”
이런 상황이었기에 조이는 갑작스레 등장한 루시를 보고 당혹을 느꼈다.
처음에는 어느새 잠든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서.
현실임을 알게 된 뒤에는 자신의 망상이 들킬까 봐.
그리고 루시가 웃으며 입을 연 뒤에는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 믿기지가 않았기에.
루시가… 아무 별칭 없이 날 불러줬어!?
말도 안 돼!
이거 꿈이구나!
나 진짜 답없다!
루시랑 못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루시 꿈을 꾸는 거야!?
그것도 루시가 밤중에 갑자기 찾아와서 날 제대로 된 이름으로 불러준단 꿈이라니!
“페이비한테 진지하게 상담을 받아봐야 하는 걸까요.”
“걔한테 고민을 이야기해봐야 엉뚱한 이야기나 하지 않을까.”
“그것도 그렇네요. 페이비라면 복된 꿈이라면서 부러워할 게 분명해요.”
“아직도 내가 꿈처럼 보이냐. 이 바보야.”
볼을 부풀린 채 불쑥 앞으로 파고든 루시는 조이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의 양볼을 붙잡았다.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이 행동이 무엇인지 학습한 조이는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아뇨! 절대 그렇지 않아요! 루시는 루시에요! 이건 절대 꿈이 아니에요!”
“진짜?”
“진짜 진짜 진짜로요! 그러니까 당기지 마세요! 많이 아프단 말이에요!”
루시가 장난스런 눈빛으로 가늠하는 걸 본 조이는 모든 걸 포기하고 눈을 꾹 감았지만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평소와 달리 루시는 장난스러운 웃음과 함께 뒤로 물러났다.
“…저 진짜 꿈꾸는 거죠?”
“아픈 게 좋으면 말을 해. 그 정도는 얼마든 들어줄게.”
“그런 건 아니고요!”
다급히 조이가 고갤 내젓자 루시가 상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가볍고 활기찬 그녀의 웃음은 평소와는 전혀 달랐다.
남들을 비웃는 것 밖에 못 하는 못된 어린아이가 아니라 평범한 여자아이의 웃음.
그제서야 조이는 이 상황을 이해했다.
“저주가 풀린 건가요?”
“아그라가 날 괴롭히려고 풀어줬잖아. 기억 안 나?”
“최근에 일어난 모든 일이 꿈 같아서요.”
“풉. 진짜 바보네.”
“그렇군요. 루시의 저주가 풀린 거군요. 평범하게 말할 수 있는 여자아이가 된 거네요.”
어깨를 으쓱인 루시는 이내 차렷 자세로 서더니 한 치 어긋남 없이 귀족의 예법에 따라 고개를 숙였다.
“그렇답니다. 파트란 가문의 공녀시여. 이젠 더 이상 당신께 무례를 끼칠 일이 없을 겁니다.”
“정말 대단하네요. 더 이상 사람을 만나는 걸 무서워하지 않으셔도 되겠어요.”
그 인사를 본 조이는 기쁨과 함께 일말의 아쉬움도 같이 느꼈다.
이 편이 루시에게 좋은 일이라는 건 알아.
더 이상 그녀가 고통받지 않아도 된단 사실에 얼마나 기뻐하고 있을지도 알고 있어.
이제부터 루시는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살 수 있겠지.
끔찍한 저주에 걸린 상태에서도 사람들을 끌어들이던 루시인걸.
평범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그녀라면 굳이 찾지 않아도 알아서 친해지고 싶어 할 사람들이 생겨날 거야.
그래서 살짝 아쉬워.
더 이상 루시가 우리들만의 친구가 아니게 될 거란 사실이.
우리들만이 루시의 좋은 점을 알 수 없다는 게.
우리 둘의 관계가 다른 사람들의 관계가 별 다를 것 없는 친구로 바뀔 거라는 것이.
이기적인 욕심이란 걸 알아.
여태까지 고통받은 루시가 보상받아 마땅하단 것도 잘 알고 있어.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싫기도 해. 그렇지만.
“난 여전히 무서운데.”
“…네?”
“지금 내 지위를 생각해봐! 가루라도 먹고 싶어서 달려들 승냥이가 얼마나 많겠냐고!”
“그거야 그렇겠지만 루시의 눈치를 봐서 쉽게 다가오지도 못할 텐데요.”
“그것도 문제야! 다른 애들이 날 반쯤 신 취급 하게 될 텐데 부담스러워서 어떻게 사냐! 사교계에 나가는 상상만 해도 끔찍해! 변태사도같은 인간들이 잔뜩 모여서 날 찬양한단 거잖아! 난 절대 그런 거 못 버텨!”
“푸흫. 푸하하핳.”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면서 몸서리치는 루시의 모습에 조이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나 진지하거든?!”
“푸흫. 그래서. 흐흐흫. 웃긴 거. 흐핳! 라고요!”
무슨 변화가 생겨도 루시는 루시야.
귀엽고 소중한 내 친구.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루시에게 다가가려 해도 나만큼 절친한 사이가 될 순 없어.
애초에 그런 사람들을 루시가 좋아할 리도 없고.
“얼빵이 네가 내 자리에 서 봐! 변태들이 달라붙는 게 얼마나 징그러운 일인데! 나니까 버틴거지 너라면 그대로 혼절해버릴 걸?!”
“흐힣. 후우. 흫. 아뇨? 그렇지는 않을 거랍니다. 루시는 잘 모르겠지만 사교계에도 사람 같지 않은 것들이 꽤 많거든요. 익숙하답니다.”
“…누군데. 그 변태새끼. 이름 말해봐. 당장 고자로 만들어줄게.”
“이미 없어요.”
“없어?”
“네. 어느 순간부터 안 보이더라고요.”
눈을 끔뻑이다가 애써 그렇구나라고 말하며 웃은 루시는 당연하다는 듯 조이의 옆에 앉았다.
“아무튼 내가 여기에 온 이유는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서야.”
“루시가 저한테요?”
“그래. 조이는 처음으로 내 친구가 되어 준 소중한 사람인데다 여태까지 나 때문에 잔뜩 고생하면서도 불평불만 한 번 안 해 준 착한 사람인 걸. 어떻게 고맙다는 말을 안 하겠어.”
루시의 솔직한 고백에 조이는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난 여태 루시에게 다른 걸 받기만 했다고 여겼는데, 루시는 내가 자기한테 주기만 했다고 여겼구나.
…참 바보같네.
“사실 평소에도 잔뜩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 조이가 도와줄 때마다 감사를 전하고 싶었어. 아카데미에서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칭찬을 해주고 싶었어.”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루시의 귀엔 살짝 열이 올라 있었다.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 게 부끄러운 거겠지.
그래도 말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아마 저게 반드시 전해야만 하는 말이기 때문일 거야.
“저도 마찬가지랍니다. 루시.”
“응?”
“평소에도 고맙다고 계속 말하고 싶었어요. 루시가 착하다고. 귀엽다고. 루시 때문에 즐거웠다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그치만 부끄러워서 못했어요.”
“어. 어어어?”
“그러니까 거기에 루시가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어요. 서로 똑같은 사람인 거니까요.”
“그. 그래?”
“아아! 그러고 보면 이제부터 루시가 저한테 잔뜩 말을 해준다는 거네요? 고맙다고. 즐겁다고. 예쁘다고. 좋아한다고.”
“아…마도?”
“그거면 충분해요. 루시. 기대하고 있을게요.”
식은땀을 삐질 흘리는 루시에게선 곤란하단 기색이 역력하게 느껴졌지만 그런다고 못 한다는 말을 꺼내진 않았다.
저주가 사라져도 루시는 루시.
거만하고 건방진 체 하지만 속은 여린 여자애.
아니지. 저주가 사라져서 더 놀리기 편해졌어.
이젠 강한 체 하려고 할 때 티가 잔뜩 나는 걸.
흐흐흐. 이런 루시한테 귀여운 옷을 입히면 어떤 반응을 보이려나.
예전에도 질색했었는데 지금이라면 엄청 귀여운 소리를 내줄 게 분명해.
“…조이. 눈빛이 변태 같아.”
“너무하시네요. 제 순수한 눈의 어디가 그렇게 보인단 거죠?”
“눈빛 뿐만이 아냐! 손동작부터 말하는 거까지 다 그래!”
“기분 탓이겠죠. 전 위엄 넘치는 공작영애랍니다?”
“얼빵이 주제에!”
솔직해진 반응이 너무 재밌어서 나도 모르게 툭툭 건드리게 되네.
그치만 슬슬 그만해야지.
루시가 인사해야 할 사람은 나 하나 뿐이 아닐 테니까.
“하아암. 루시. 저 이제 슬슬 졸려요.”
“아. 그러셔? 나보다 잠이 더 중요하다 그거지?”
“그건 아니지만요. 저 혼자 루시를 독점하는 건 치사하니까요.”
“…하! 쓸데없이 배려하긴. 그러다 네가 뒤로 밀려버릴지도 모른다?”
“부디 그렇게 안 되길 기도해야겠네요.”
조이가 어색하게 웃자 루시가 히죽 미소를 지으면서 몸을 돌렸다.
“잘 자.”
“루시도요. 좋은 밤 보내세요.”
그렇게 루시가 부드러운 빛과 함께 사라진 후 홀로 남은 조이는 베개에 머리를 가져다 댔다.
오늘은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