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컥벌컥-
쾅!
“크어어…!”
드워프, 브론딘은 탁자가 부숴질 듯한 기세로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아직 잔에 남은 맥주가 허공에 비산했다.
고된 일을 마치고 마시는 맥주 한 잔의 상쾌함이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하물며 땀을 뻘뻘 흘릴 정도로 뜨거운 곳에서 일한 그에게는 서늘한 맥주 한 잔이 그 귀하다는 영약, 엘릭서와 다를 바 없게 느껴졌다.
엘릭서를 마셔본 적은 없지만서도.
수염에 묻은 맥주 거품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털어내며 그는 고된 일상의 지침을 한숨과 함께 흘려보냈다.
이윽고 브론딘은 잔을 들어 남은 맥주를 모조리 입에 털어 넣었다.
“후우, 못 참겠구만…!”
그러고도 만족하지 못했던 그는, 결국 그의 보물 3호인 냉장 마도구에서 맥주 한 통을 더 꺼내서 마신 후에야 비로소 만족스러운 숨을 토해냈다.
참고로, 보물 1호는 용광로이고 보물 2호는 망치였다.
“술은 역시 이래야지. 과일이니 풀 쪼가리니, 별 잡다한 것들을 넣은 술이 뭐가 맛있다고….”
에잉, 쯧쯧.
브론딘은 혀를 차며 역시 귀쟁이 놈들 취향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끼이익.
“오, 스승님! 나오셨군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입안에 남은 맥주의 여운을 느끼며 그가 여느 때처럼 엘프들을 욕하고 있을 때, 누군가 공방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땀이 번들거리는 윗몸을 그대로 드러낸 청년은 브론딘을 스승이라고 부르며 반갑게 인사했다.
짤막한 브론딘의 몸과는 다르게, 청년의 팔과 다리는 길쭉길쭉하게 뻗어 있었다.
“스승은 무슨…. 망치를 그따위로 다루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조금 가르쳐 준 것뿐이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브론딘의 얼굴엔 딱히 싫은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하하하! 지당한 말씀입니다! 겨우 이 정도 실력으로 스승님의 제자라고 자칭하면 안 되겠죠!”
“흥. 알긴 아는구만. 그래도 너는 인간치고 꽤나 근성 있는 녀석이니 지금처럼 꾸준히 노력하면 한 드워프 몫은 할 수 있을 게다.”
퉁명스러우면서도 은근한 온기가 담긴 말이었다.
드워프들은 드워프 외의 다른 종족을 제자로 들이는 걸 그다지 내키지 않는다.
특유의 강인한 근육과 열기를 버틸 튼튼한 피부가 있는 드워프였기에 뜨겁고 힘든 대장간에서도 오래 버틸 수 있는 거지, 다른 종족들에겐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인간들은 나은 편이지만.
브론딘을 보며 호탕하게 웃던 청년이 옆구리에 낀 상자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스승님, 이게 뭡니까?”
“어엉? 내가 저번에 말하지 않았나?”
“잘 모르겠습니다.”
“드래곤 오브다.”
브론딘이 조심스럽게 상자 뚜껑을 열었다.
투박하고 거칠던 그의 평소 모습답지 않게 신중한 손길이었다.
상자 안에는 금색의 보석이 놓여 있었다.
고운 천 너머로 새어 나오는 금색 광채를 목도한 브로딘과 청년이 동시에 감탄했다.
“오오…!”
“드래곤 오브…!”
브론딘은 떨리는 손으로 드래곤 오브를 만지려다가, 행여나 깨지기라도 할세라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그는 감격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내가 이걸 만지는 날이 올 줄이야….”
“스승님도 처음입니까?”
“예끼! 이게 구하고 싶다고 해서 구할 수 있는 물건인 줄 알아?”
브론딘이 버럭 소리쳤다.
드래곤 오브.
그것은 드래곤 레어 인근에서 발견되는 매우 희귀한 보석의 이름이었다.
어지간한 충격에는 깨지지 않고, 수십… 어쩌면 수백 년 동안 드래곤의 마나에 노출된 덕분에 마나 감응력과 수용력도 어마어마하게 높다.
게다가, 드래곤 오브만이 가진 또 다른 특성이 있었으니.
어떤 드래곤에게 영향을 받았는지에 따라 오브마다 색이 다르다는 점이었다.
레드 드래곤 레어 인근에서 발견된 오브는 붉은색, 블루 드래곤 레어 근처에서 발견되었다면 푸른색… 이런 식으로.
즉, 지금 그들이 보고 있는 금색의 드래곤 오브는 골드 드래곤의 영향을 받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 특성 때문에 보는 사람들의 심미안도 만족시키니.
드래곤 오브를 원하는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다.
단지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기엔 턱없이 부족할 뿐.
드래곤 레어 인근에서 발견된다는 말은 곧, 드래곤의 영역 안에 들어가야 한다는 뜻이다.
제 것을 끔찍이 아끼는 드래곤이 제 영역에 발을 들이는 놈을 반길 리 없으니, 드래곤의 영역에 들어간다는 것은 사실상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심지어 어찌어찌 영역에 발을 들이는 데 성공했다고 해도 드래곤 오브를 무조건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공급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고, 공급이 수요에 전혀 따라가질 못하니 가격이 천정부지로 솟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살 돈도 없었고, 산다 해도 예전의 내 실력으로는 드래곤 오브를 만져봤자 망칠 게 뻔해서 포기했지.”
그가 특히 아쉬웠던 때는 붉은색 드래곤 오브를 놓쳤을 때였다.
그때는 오브 중에서도 상당히 순도 높은 것이라서 장인 기질이 있는 모든 드워프가 탐을 냈더랬다.
아직도 기억에 선연한 붉은빛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시던 브론딘이 문득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데… 네 녀석은 뭔가 익숙해 보인다?”
움찔.
“하, 하하, 하하하! 그, 그럴 리가요.”
브론딘의 지적에 청년이 몸을 움찔거렸다.
“크, 크흠! 그 ‘드래곤 오브’가 제 앞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흠… 하긴. 그럴 수 있지.”
청년의 말에 브론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년이 몰래 한숨을 내쉬었지만, 다시 오브에 시선이 돌아간 브론딘은 청년의 행동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스승님. 이걸로 뭘 만드실 생각입니까?”
“글쎄. 모르겠다.”
“예? 계획이 있어서 사신 거 아니었습니까?”
“아니….”
브론딘이 덥수룩한 수염을 매만졌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또 몇 년을 기다려야 할지 모르니 일단 사뒀지. 덕분에 한동안은 빈털터리다.”
그의 말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충동구매였다.
장인에겐 꿈의 보석이나 다름없는 물건인 만큼 그에게 후회는 없었지만, 한동안은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가 상자 뚜껑을 다시 닫았다.
“너, 내일 산에 갔다 와라.”
“예? 산이요?”
“그래. 가서 도구 좀 가져와라.”
드래곤 오브를 가공하는 건 평범한 도구로는 불가능하다.
당장의 계획은 없지만, 언젠가 가공을 하긴 해야 할 테니 미리 준비해 둘 심산이었다.
갑자기 등산 계획이 잡힌 청년이 울상을 지었다.
그러나 스승의 말은 절대적인 법.
“…알겠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곱상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스승의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 * *
대산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산어귀에 있는 도시.
발토라.
우리는 그곳에 도착했다.
“오오….”
정교함과 견고함이 엿보이는 성벽 안으로 들어온 다은은 주변을 둘러보며 나지막한 감탄사를 흘렸다.
“여기를 봐도 드워프, 저기를 봐도 드워프. 그리고 저쪽을 봐도 인간. …응? 인간?”
그러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 드워프들의 도시 아니었어?”
“응. 발토라.”
“그런데 왜 이렇게 인간이 많아? 물론 드워프가 더 많긴 하지만….”
“인간이 있으면 안 되는 거야?”
“그, 그런 뜻이 아니란 거 알잖아!”
다은이 종족차별자가 될 위기를 부드럽게 흘려넘겼다.
“발토라는 드워프들의 도시지만, 그들의 본거지는 아니야. 드워프들의 본거지이자 고토는 저기 있는 대산맥이야.”
발토라는 어디까지나 교류를 위해 지어진 도시이니 다른 종족이 있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아, 드워프와 사이가 몹시 나쁜 엘프를 제외하면.
드워프들은 뛰어난 장인이다.
같은 검이어도 ‘드워프가 만든’이라는 접두사가 붙으면 가격이 두세 배가 뛸 정도로 그들의 실력은 모든 종족이 알아준다.
심지어 서로 못 죽여서 안달인 엘프도 드워프들이 만든 물건의 품질은 인정할 정도니 말 다했지.
사소한 장신구부터 시작해서 무기와 방어구, 더 나아가서 건축까지.
무언가를 만드는 데 있어, 드워프들은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다.
다만, 그런 그들에게도 결점은 있었다.
“드워프들은, 마법을 잘 못 다뤄.”
그래서 물건을 뚱땅뚱땅 만들어 내고 튼튼한 건물을 만들 수 있지만, 그것들에 마법을 새기는 일은 할 수 없다.
만약 그들이 마법도 다룰 줄 알았으면 1차 종족 전쟁 이후로 엘프라는 종족을 이 아르디나 대륙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유일하게 대지 속성 마법은 다룰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특출난 실력이라고 부르기 애매했다.
그런 그들이 마도구를 만들 수 있을까?
당연히 답은 아니오 였다.
마도구를 만드는 덴 손재주만 필요한 게 아니라, 뛰어난 마법 실력도 필요하니까.
거기까지 설명을 들은 다은이 손바닥을 짝 쳤다.
“아하! 마법을 담을 틀은 드워프들이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틀에 인간들이 마법을 부여하는 거구나.”
“응. 정답이야.”
그런 이유로 발토라에 거주하는 인간은 꽤 있는 편이다.
그게 아니어도 쓸만한 물건을 구매할 목적으로 온 사람들도 있을 테고, 무역을 목적으로 온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카나는 아는 게 많구나…. 열심히 공부했겠네. 기특해!”
“으응… 그건 아니야.”
“응?”
나는 딱히 공부한 적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거든.
내가 이런 것들을 알게 된 건 순전히 가리드 덕분이었다.
‘카나야. 언젠가, 그라시스가 좀 안정되고 나면 같이 여행을 떠나지 않을래?’
‘여행?’
‘그래.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는 거야. 성국도 가보고, 대삼림 나디론에도 들리고, 발토라에도 가보고…. 그때쯤이면 제국에도 갈 수 있을 테니 제국 수도에도 가보는 거다. 어때, 상상만 해도 신나지 않냐?’
‘…굳이 그래야 해? 난 집에 있는 게 더 신나는데.’
‘…신난다고 말할 거면 적어도 표정이라도 바꾸고 말해라.’
…뭐 이런 식으로.
옆에서 주절주절 말하는 통에 내가 알고 싶지 않았던 것과 별개로, 알고 있는 것들이 꽤 많았다.
특히 발토라는 가리드가 직접 와본 적도 있어서 더 실감 나게 말해 줬었지.
그건 됐고, 이제 괜찮은 물건을 찾아야 하는데….
죽 늘어진 건물들에서 뜨거운 열기가 새어 나왔다.
나는 얼굴에 후끈 불어오는 열기를 느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당연히 나에게 아는 장인이 있을 리 없어서 하나하나 살펴보며 찾는 수밖에 없었다.
딱 한 명, 찾고 싶은 장인이 있긴 했지만, 이름도 모르고 생김새도 몰라서 일찌감치 맘을 접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잠시 따로 행동해도 될까요?”
“안 되는 건 아닌데… 무슨 일 있으세요?”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이곳의 신전에 들르고 싶어서요. 일행이 묵을 만한 방이 있는지 알아볼 겸 신전에 가 있을 테니 천천히 일 보고 오세요.”
“헉… 이번에도 신전에서 묵으면 너무 민폐 아닐까요?”
“후후. 아니에요. 오히려 좋아하실걸요?”
셀린이 먼저 가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다은을 통해 그녀의 뜻을 전해 들은 나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고를 치러 간 것도 아니고, 신전에서 기다리겠다는데 막을 이유는 없지.
“그러면 우리도 일단 구경부터 좀 할까?”
“구경은 무슨.”
눈을 반짝이며 흥미를 드러내는 다은을 잡아챘다.
“우리는 일 해야지.”
“이, 일? 무슨 일?”
“실력 좋은 장인을 찾는 일.”
그러고는 그녀를 질질 끌고 가장 앞에 있는 대장간으로 향했다.
“안 돼애애애애!”
길게 늘어지는 다은의 절규를 무시하며.